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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시60

오카리나 부는 그 사람 오카리나 부는 그 사람 그 사람 옥탑방 밖에는 벽 잡고 오르는 푸른 담쟁이넝쿨이 있고 그 담쟁이넝쿨 붙잡아주는 옥상 난간이 있다 달빛이 옷을 벗는 밤이면 그 사람은 그 난간에 기대어 달빛이 벗어놓은 옷을 걸치고 오카리나를 분다 오카리나 열두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들은 동굴 속에서도 담쟁이넝쿨 푸르기 바라는 그 사람의 꿈이라고 했다 거칠고 마른 숨소리들이 동굴 속 빠져나오듯 그 사람이 입술을 모으고 오카리나를 불면 나는 그럴 때마다 나무하나 없는 산악지대가 떠오르고 내 마음은 동굴 속처럼 어두워진다. 멀고도 가까운 그 사람의 나라 아프가니스탄이 생각나는 것이다 총소리와 피 냄새를 등에 지고 언덕 오르는 낙타들 거꾸로 총을 메고 낙타 뒤를 따르는 남자들 온몸에 달빛을 휘감고 오카리나 불던 어느 날 그 사람.. 2012. 4. 2.
1971년 봄 1971년 봄 / 박흥순 낙산아파트 창가에 달빛이 휘청거리며 찾아오는 날이면, 설음에 젖은, 탁 사발에 젖은, 술 취한 사내들의 늘어진 육자배기 한가락이 고샅길을 더듬고, 목 줄기를 타고 터져 나온 타향살이가 비틀 비틀거리며 성곽을 걷는다, 배부른 가난이 광 땡을 잡고 창신동의 야윈 꿈들이 치통을 앓는 그런 날이었다. 시린 발목으로 먼동이 달려오는 공사판으로 나가는 엄마는 오! 아바지 삼남매를 굽어 살피소서! 공사판의 벽돌 숫자만큼 기도를 했다. 누이들은 조막손에 껌 몇 통씩을 들고 미쳐 날뛰는 네온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오빠하고 깨꽃처럼 웃었다. 어둠을 가르기 위해 허물어진 낙산성터에서 칼을 갈던 나는, 귀신 잡는 해병대와 맞붙기로 했다. 이겨야 끗발이 오를 것 같았다. 그 봄 밤, 달빛은 그녀의.. 2012. 4. 1.
고천암호에서 흔드는 깃발 고천암호 깃발.hwp 고천암호에서 흔드는 깃발 노을내리는 고천암호 오리들 물을 박차고 솟구쳐 오르기 시작한다. 깃발을 만들지 않았는데도 하늘 한쪽이 검은 깃발로 펄럭이기 시작 한다 작은 날갯짓으로 스크럼 짜고 가며 목청 돋우며 큰 깃발을 만들어 흔들고 있는 것이다 고천암호에 와서 알았다 혼자의 작은 생각들이 모이고 또 모이면 하늘도 뒤덮는 큰 깃발이 될 수 있다는 것 작고 약할수록 함께 가야 한다는 것 깃발은 투우사처럼 흔들어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고천암호 가창오리들,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오르며 검은 깃발이 되어 노을 속에서 펄럭이고 있다. 2012. 3. 8.
상처 난 피라미들 상처 난 피라미들 출근시간, 사무실 문이 열리자 피라미들이 모여들었다. 명함을 들고 순서를 기다리는 피라미들의 지느러미가 쳐져있다. 뺑소니차에 치인 남편 병원비 때문에 청소일 다녔다는 수빈이 엄마 14년 동안 폐수처리장에서 근무했다는 경상도 사투리의 홍씨 아저씨 이제는 돈 많은 놈한테 시집이나 가야겠다며 얼굴 붉어진 가영이 인력시장, 직업소개소, 구직사이트를 친구 집 드나들 듯 했었지만 빈 배에 파도소리만 가득 싣고 포구에 닻 내린 어부심정 이거나 삼태백이동네 먼 나라이야기로 생각했던 이태백이동네 사람들이다. 움츠러들고 작아진 그들을 실업자라 부르지만 찬바람 속에서 어두운 하늘의 별빛도 바라보고 여울물에서 물비늘처럼 반짝이던 한때를 자랑스러워하던 그들 흙탕물 말라가는 지금의 웅덩이에서‘결코’입만 뻐끔거리.. 2012. 3.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