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봄 / 박흥순
낙산아파트 창가에 달빛이 휘청거리며 찾아오는 날이면, 설음에 젖은, 탁 사발에 젖은, 술 취한 사내들의 늘어진 육자배기 한가락이 고샅길을 더듬고, 목 줄기를 타고 터져 나온 타향살이가 비틀 비틀거리며 성곽을 걷는다, 배부른 가난이 광 땡을 잡고 창신동의 야윈 꿈들이 치통을 앓는 그런 날이었다.
시린 발목으로 먼동이 달려오는 공사판으로 나가는 엄마는 오! 아바지 삼남매를 굽어 살피소서! 공사판의 벽돌 숫자만큼 기도를 했다. 누이들은 조막손에 껌 몇 통씩을 들고 미쳐 날뛰는 네온불빛 속으로 빨려 들어가면서 오빠하고 깨꽃처럼 웃었다.
어둠을 가르기 위해 허물어진 낙산성터에서 칼을 갈던 나는, 귀신 잡는 해병대와 맞붙기로 했다. 이겨야 끗발이 오를 것 같았다. 그 봄 밤, 달빛은 그녀의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처럼 내 마음을 휘어 감고 흔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달빛에 젖어 눈자위가 젖어 동녘의 시뻘건 눈빛이 노려보기 시작할 때 까지 그 봄 칼만 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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