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2728 홍시를 두고 / 유재영 첫서리 내린 마당 누구의 발작처럼 어디서 날아왔나 등 붉은 감잎 한 장 고향집 노을이 되어 사뿐히 누워있네 지우고 고쳐 쓰다 확 불 지른 종장(終章)같이 와와와 소리치면 금방 뚝 떨어질 듯 우주 속 소행성 하나 발그라니 물이 든다 굽 높은 그릇 위에 향기 높은 전신 공양 가만히 귀 기울면 실핏줄 삭는 소리 말갛게 고인 저 투명 문득 훔쳐 갖고 싶다 <해설> 운율이 살아있는 시조다. 감나무에 달려 있던 딱딱한 감이 부드럽고 붉은 홍시가 된다. 그 홍시를 시조로 쓰는 시인은 "지우고 고쳐 쓰다 확 불 지른 종장"같다고 표현한다. 고민 속에 몇 번이고 지우고 다시 쓰기를 반복하다 섬광처럼 다가온 마지막 언어를 찾아내 시를 완성하는 기분을 홍시에 비유한 것이다. 시인에게 홍시는 '향기 높은 전신공양'이다. 자신.. 2023. 10. 20. 길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호저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낳은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 2023. 10. 14. 가을의 노래 / 김대규 가을의 노래 / 김대규(1942~2018)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떠나지는 않아도 황혼마다 돌아오면 가을이다 사람이 보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편지를 부치러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 보니 주머니에 그대로 있으면 가을이다 가을에는 마음이 거울처럼 맑아지고 그 맑은 마음결에 오직 한 사람의 이름을 떠보낸다 “주여”라고 하지 않아도 가을에는 생각이 깊어진다 한 마리의 벌레 울음소리에 세상의 모든 귀가 열리고 잊혀진 일들은 한 잎 낙엽에 더 깊이 잊혀진다 누구나 지혜의 걸인이 되어 경험의 문을 두드리면 외로움이 얼굴을 내밀고 삶은 그렇게 아픈 거라 말한다 그래서 가을이다 산자의 눈에 이윽고 들어서는 죽음 死者들의 말은 모두 시가 되고 멀리 있는 것들도 시간 속에 다시 제자리를 잡는다 가을이다 가을은 가을이란.. 2023. 10. 14. 코스모스 / 이형기 자꾸만 트이고 싶은 마음에 하야니 꽃 피는 코스모스였다. 돌아서며 돌아서며 연신 부딪치는 물결 같은 그리움이었다. 송두리째 희망(希望)도 절망(絶望)도 불타지 못하는 육신(肉身) 머리를 박고 쓸어진 코스모스는 귀뚜리 우는 섬돌 가에 몸부림쳐 새겨진 어둠이었다. 그러기에 더욱 흐느끼지 않는 설움 호올로 달래며 목이 가늘도록 찾아내련다. 까마득한 하늘가에 나의 가슴이 파랗게 부서지는 날 코스모스는 지리라. 2023. 10. 6. 이전 1 ··· 3 4 5 6 7 8 9 ··· 68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