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살아가는 이유
- 체 케비라 -
그것은,
때때로 당신이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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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Che Guevara
출생 | 1928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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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67년 |
본명 |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 |
국적 | 쿠바 |
의대를 졸업했으나 의사의 길을 걷는 대신 사회의 병을 고치는 혁명가가 되었다. 피델·라울 카스트로 형제와 만나 쿠바에서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혁명을 성공시켰다.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라틴아메리카를 하나로 통합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볼리비아 혁명 당시 볼리비아 정부군에 사로잡혀 총살당했다.
짙은 눈썹에 먼 곳을 바라보는 눈, 덥수룩한 머리에 시가 하나를 물고 있는 젊은 남자의 책이 한때 서점가를 뒤덮은 적이 있다. 바로 《체 게바라 평전》이다. 멀리 남미에서 혁명을 주도하다가 젊은 나이에 세상을 뜬 이 젊은이가 어째서 전 세계적으로 혁명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된 것일까?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라고 말한 체 게바라. 그의 본명은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Guevara de la serna)로 좌익 성향이 있는 스페인-아일랜드 혈통의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1952년, 8개월간의 남아메리카 모터사이클 횡단여행은 순진한 의대생을 가난에 시달리고 착취당하는 남미 사람들의 문제를 고뇌하는 혁명가로 바꾸어 놓았다.
의대에서 나병을 전공했던 게바라는 한동안 나환자들을 위해 헌신할 것을 진지하게 고민했지만, 결국에는 인간의 병보다 사회를 좀먹는 병을 고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빈곤에 대한 해결책은 폭력혁명밖에 없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각각의 소국 집합체로 여기지 않고 해방시켜야 하는 하나의 커다란 집단으로 여겼다. 그는 '라틴' 혈통을 갖고 있는 사람들 전체가 모인 '히스패닉 아메리카'라는 국경이 없는 개념을 생각했다.
1953년 6월 그는 정식 의사가 되었지만, 의사생활 대신 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 살바도르를 떠돌아다니다 과테말라에 들어갔다. 과테말라는 당시 하코보 아르벤스 구즈만 대통령이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를 이끌고 개혁을 시도하고 있었다. 정부의 개혁방향이 마음에 들었던 게바라는 그곳에서 진정한 혁명가의 길을 모색한다.
그는 페루 경제학자 힐다 가데아 아코스타를 통해 아르벤스 정부의 고위 관료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53년, 쿠바의 산티아고 공격으로 피델 카스트로와 연결되어 있는 쿠바 망명자들과도 친해지게 되었다. 1954년 5월 15일 공산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아르벤스 정부에게 보내는 화기가 푸에르토 바리오스에 도착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은 이에 대해 우익 정권인 카를로스 카스티요 아르마스를 후원하여 쿠데타를 일으키게 했다. 아르벤스는 멕시코 대사관으로 도망쳤고, 게바라는 저항을 주장하다가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아르헨티나 영사관에 몸을 피했다가 몇 주 후 멕시코로 넘어갔다. 아르벤스 정권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그는 미국이 라틴아메리카와 다른 개도국의 사회 경제적 불평등 상태를 개혁하려는 어떤 정부도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멕시코로 간 게바라는 니코 로페즈를 비롯하여 과테말라에서 만난 다른 쿠바 망명자들과 다시금 친분을 다지면서 카스트로 형제를 알게 된다. 풀헨시오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무너뜨리려는 혁명군을 이끌고 있던 피델 카스트로는 체 게바라와의 만남을 '내 생애 가장 위대한 만남'이라고 훗날 표현했다.
1956년 11월 게바라는 겨우 80명의 인원을 데리고 쿠바의 오리엔테 주에 상륙했다. 얼마 후 바티스타의 공격을 받은 부대는 거의 전멸해 겨우 22명이 살아남았고, 살아남은 부대원들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서 프랑크 파이스가 이끄는 도심 게릴라 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으며 본부를 세웠다. 게바라는 훗날 자신은 이때 진정한 혁명전사로 거듭났다고 회상했다. 전쟁은 계속되었고, 게바라는 반란군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타임〉은 피델 카스트로의 보좌관이던 그를 '카스트로의 두뇌'라고 지칭했다.
1958년 7월, 게바라는 특유의 게릴라전으로 라스 메르케데스 전투에서 1,500명의 바티스타군을 물리쳤다. 그해 말, 바티스타는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망쳤고, 1959년 1월 게바라가 이끄는 카스트로 군대가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다. 2월에 들어선 혁명정부는 게바라를 '쿠바 인'으로 선언했다. 새 정부의 수뇌가 된 게바라는 개혁을 시작했다. 그는 새 쿠바 정부의 가장 큰 문제가 '토지 재분배가 가져올 사회적 정의'라고 말하면서 토지개혁을 단행했다. 농장 소유 면적을 제한하고, 설탕 플랜테이션은 외국인이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1959년부터 그는 국가 농업개혁연구소의 산업부장, 쿠바 국립은행 총재, 공업장관 등을 역임하며, 서방 세계에 혁명가이자 정치가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그러나 전 라틴아메리카의 연합을 추구했던 게바라와 쿠바 혁명의 성과를 지켜내는 일에 매달리던 카스트로의 노선은 점차 갈리기 시작했다. 마르크스적 이상을 이야기하는 게바라는 카스트로에게 귀찮은 존재가 되어갔다. 게바라는 흐루시초프 체제하에 변해가는 소련의 모습과 점차 1인 절대권력체제를 추구하는 카스트로의 모습에 실망하고 1965년 10월 자취를 감추었다. 2년간 행적이 묘연했던 그는 당시 콩고 내전에 참전하여 파트리스 루뭄바 부대의 조직을 도왔다고 한다.
다시 라틴아메리카로 돌아온 게바라가 향한 곳은 볼리비아였다. 브라질, 칠레, 페루, 아르헨티나 등 여러 국가들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볼리비아에서 혁명이 성공한다면 라틴아메리카 전체에 혁명의 바람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것이라는 전략적인 판단에서였다.
하지만 미국의 목전에 있는 쿠바에서 혁명을 일으킴으로써 그는 이미 미국 정부의 눈 밖에 난 상태였다. 위험한 반란분자라고 말할 수 있는 게바라가 볼리비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미국 중앙정보부CIA는 당장 볼리비아에 현대적인 무기와 장비, 군사를 지원했다.
1966년 말부터 일 년 가까이 볼리비아에서 게릴라 운동을 했던 게바라 일행은 산악 지역에 사는 볼리비아 농민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 볼리비아 농민들은 당시 게바라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게릴라들을 '쿠바 인들'이라고 빈정대며 부르기도 했다. 또한 볼리비아 공산당 역시 비협조적이었다.
볼리비아군에 쫓겨 산악 지역을 방황하다 지친 몸으로 라이게라에 도착한 17명의 게릴라들은 마을 사람들에게도 배신을 당했다. 게릴라들이 들어오자 마을 사람들은 사전에 이들이 올 것을 예상하고 인근에 포진하고 있던 볼리비아 군대로 쿠바 인들이 왔음을 알렸다. 혁명을 지원하리라 믿었던 가난한 농민들이 혁명가를 죽음으로 내몬 것이다. 2주 정도 라이게라 부근에 머물던 게바라의 게릴라 그룹은 그곳을 둘러싼 볼리비아군과 전투를 벌였다. 몇 명은 전사했으며, 부상당한 게바라와 동료들은 생포되어 처형당했다. 처형 당시 게바라는 서른아홉 살에 불과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제국주의의 착취에 맞서 투쟁했던 혁명가의 꿈은 결국 라이게라에서 좌절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내려와 젊은 청년들의 가슴속에서 불타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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