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모습은 많이 변해버렸지만, 이곳이 내가 태어나 유년의 시절을 보냈던 고향 마을이다.
타향살이의 고된 나날들을 지탱 할 수 있었던 것은, 유년시절의 아픔을 승화시켜야 한다는 절대절명의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다.
해서, 견딜 수 없이 힘이든 때면 나는 고향을 찾았었다.
그리고 유년시절 아파야만 했던 기억의 장소들을 찾아가 나약해지거나 흐트러진 자신을 뒤돌아보며 세로운 각오를 다짐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 또 다녀왔다.
그렇지만 그 전처럼 어려워서만 갔던 것은 아니다.
무엇인가 정리를 해야 하겠다는 마음으로,생각하며 생각하며 다녀왔다.
아래 사진들은 내가 잊을 수 없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장소들이다.
이곳은 마을에서 멀리 산 넘어(모래섬) 있는 바닷가의 밭이 있던 곳이다.
내가 다섯 여섯살 무렵 어머니가 밭일을 나가셔 해가 져도 돌아오지 않으실 때면
나는 멀리 어두워지는 산 등성이를 망연히 바라보며 동생들을 달래며 하늘의 별들을 바라보며 엄마를 생각했던 곳이다.
이곳(벼락바위)에서 어머니는 어린 나를 무릎에 눕히고 귓속을 파주었던 곳이다.
그 때의 내 나이는 알 수가 없지만, 어머님께서 아들을 무릎에 눕혔던 나이였으니...
지금은 바로 옆으로 아스팔트 도로가 났지만 그때는 산길 밭길을 지나서 무섭다는 느낌이 들던 곳이었다.
열 두어 살의 내가 볏단과 두엄을 지고 머리가 땅에 닿을 듯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을 기어오르던 곳이 저곳이다(뒷골). 저 산 넘어 한참을 가야 내가 사는 마을이 있었다. 어머니를 도와야 한다는 생각에 무슨 일이든 어머니가 시키기 전에 열심히 했었다. 그때가 초등학교 4,5학년 때의 일들이다.
내가 고향을 찾을 때는 빼놓을 수 없는 곳이 있다. 그 곳은 신안군 자은면 구영리에서 출발하여 암태면 그리고 팔금면을 거쳐 안좌면 산두리 까지의 행보다.
초등하교 5학년의 늦가을 어느 날 어머님의 심부름으로 외갓집이 있는 자은면 구영리를 갔었다. 토요일 오후에 출발하여 일요일에 집에 오는 것으로 하고 갔었는데, 밤사이 태풍이 불어 여객선이 출항하지 않는다 했다. 꼼짝없이 학교를 가지 못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해서,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외삼촌에게 부탁을 하였다. 태풍이 멈출 때까지 마을에 있는 초등학교에 갈 수 있도록 해달고, 외삼촌께서는 며칠이나 된다고 하시면서 묵살하였다. 그 때 나는 이미 결정했었다. 결코 월요일 학교에 결석하지 않겠다고. 외할머니께 말씀드리고 붙잡는 외할머니를 뿌리치고 외갓집을 나섰다. 그리고 선창으로 향했다(약한 태풍 때는 이 섬에서 저 섬으로 건너는 나룻배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출발한 나는 결국 묻고 물어서 4개의 섬을 통과해 월요일 결석하지 않았다.
학교에 결석해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걷고 또 걸었던 기억과 안좌가 보이는 팔금에 도착 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졌었던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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