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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 인생독본

톨스토이 인생독본 / 11월10일(기독교 사람들과의 분리)

by 바닷가소나무 2015. 11. 10.

기독교 사람들과의 분리

 

표돌 헤리쯔스키가 그리스도 교도의 신앙을 공경한 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이다.

, 스스로가 그리스도 교도라고 자인하고 있는 황제와 법왕이 참된 그리스도교를 그르치게 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황제와 법왕에게 의해서 참된 그리스도교가 그르쳐진 것을 헤리츠쓰키는 큰 물고기 때문에 짖어진 그물에 비유하였다.

큰 물고기가 뚫은 그물의 찢어진 구멍으로부터 한번 잡혔던 고기들이 모조리 도망쳐 버리듯이, 그리스도의 그물 속에 잡혔던 모든 사람들이 황제와 법왕 때문에 그르쳐진 결과 참된 신앙을 잃어버린 것이다.

(다음은 헤리치쓰키 자신이 한 말이다.)

 

사도들에게 의해서 잡힌 물고기는, 오랫동안 완전한 뚫린 곳 없는 그물 속에 유지되어 왔으나, 그 후인이 경과됨에 따라서, 사람들은 이제 아무런 염려 없다고 여기기 시작하고 잠이 들어버렸던 것이다. 그때 적이 나타나서 벼 사이에 피를 뿌렸다. 그리고 피는 번식해 가고, 벼는 그 때문에 말라 죽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는 교도들이 깊은 잠에 잠겨 있을 때, 황제는 승정들에게 재보와 권력을 주었다. 곤한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승료들은 그때 까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아오던 빈곤을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 빈곤에 대신해서 황제와 같은 권력과 영화를 지녔다. 혹은 황제 이상의 것을 가졌던 것이다.

처음 승료들은 동국이나 수풀에서 살았었다. 그러나 보라. 나중에는 황제가 몸소 승료를 로마로 데려 오고, 백마를 태웠던 것이다. 이리하여 사도들이 설교한 청렴의 가르침은 파괴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사도들의 그물은, 그 안에 두 마리의 큰 고래가 들어 왔을 때, 갈기갈기 찢기었던 것이다. 그 고래의 하나는 황제도 부러워할 만한 권력과 영화를 누리게 된 법왕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한 마리는, 신앙의 탈을 쓴 이교도적인 권력과 의의를 뒤섞어 가지고 있는 황제라는 존재였다.

이 두 마리가 그물 안으로 들어올 때, 갈기갈기 찢어 놓았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는 그물은 거의 본래의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 두 고래로부터, 많은 부정한 단체가 생겼다. 그리고 그 단체들이 제각기 신아의 그물을 찢어버렸다.

첫째로 그것은 각양각색의 승료들이었다. 그리고 대학이나 그 외 학교 학자나, 교회관계자들 가문을 자랑하는 귀족들의 무리, 그리고 서민들 사이에 있는 여러 가지의 단체들이었다.

이들 단체는 각기 자기네의 지배 영역을 얻고자 노력했다. 그리하여 교할과, 폭력과, 뇌물과 상속 등의 방법으로 토지를 사유하려고 들었다. 이들 단체내의 사람들은 정신적인 영역의 사람들과 사회적인 영역에 속한 사람으로 나누어져 있다. 로마교회는 세계의 층으로 나누어져 있으니, 첫째는 사회적인 영역에 속한 사람들, 왕후나 귀족들이요, 둘째는 정신적인 영역에 속한 사람들, 기도를 올리는 직능을 가겼다는 사라들이다. 셋째 서민계급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셋째 층은 첫째와 둘째 층의 물질적 요구를 보장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분리에서 어떠한 불공평한 일이 생겼을까 첫째와 둘째 층은 편안했다.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배불리 먹고, 쓸데없는데 돈을 낭비하고, 셋째 층의 사람들을 자기들의 수하에 거느리고, 그들에게 기생하고 있다. 셋째 층의 사람들은 승료귀족의 사회와 그들의 사치를 위해서, 노역을 해야 한다.

이러한 분리는 모든 사회가 평등하게 한 마음으로 동일하게 조직되어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어긋나는 것이다.

점점 이 두 힘센 고래는 신앙의 그물을 계속해서 뚫어 가고 있었다. 정신적 영역과, 사회적 영역의 권력인 두 마리의 고래다.

정신적 영역의 권력가 법왕은 그리스도의 계율을 다음과 같은 점에서 파괴하고 있다. 즉 청빈, 노역, 전도, 그 외의 승료로서의 의무를 망각하고, 사회적 권력과 영화를 누리고 사람들이 자기 앞에서도 마치 하나님의 앞에서와 같이 머리가 땅에 닿도록 머리를 숙으리라고 요구하고 있는 점에서, 또 그는 하느님의 계율과 신앙을 배반하고, 대신 자기 자신의 계율을 많이 만들었다. 사람들도 이 계율 때문에 , 하느님의 계율과 신앙을 잊어버리고 신앙이란 곧 대승정의 계율이라고 믿게 되었다.

승료들의 하는 일은 모두 이들 대승정의 계율에 의거해서 정신계를 지도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 계율에 의해서 규정된 헛소리를 떠들어 대고, 두꺼운 책을 읽기 위해서 함부로 시간만 오래 끈다는 것 이 외에는 기도하는 것조차 모르는 것이다.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듣고 있는 앞에서 한 사람의 승료가 다른 승료의 말이나 주문을 받아 옮기는 형식이 곧 기도라고 믿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식한 사람들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이라고 생각하고 태연히 있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는 교회에만 나타나는 것이며 경축일에는 밭에 나가서 일하면 못쓴다는 등의 말을 듣고 그것을 그저 맹목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의 고래는 신앙을 뚫고 들어가 그것을 찢어버리고 있는 황제인 것이다. 이교도적인 지배제도 권리 법칙을 보유한 황제이다. 콘스탄친데제 이전에는 그리스도 교도는 법왕적인 또는 황제적인 무엇에 물들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의 참된 가르침에 의해서만 인도되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콘스탄친 재제가 나와서 신앙을 이교도적인 지배와 법칙으로 받아들인 뒤로 그리스도교의 깨끗함과 순수함은 파괴된 것이었다.

참된 신앙이나 제사를 부정한 것으로 돌려 버린 이교도적인 점을 전부 일일이 손꼽을 수는 없다. 다만 황제와 관계 깊은 것만을 들어 보자. 그리스도 교도들을 지배하고자 원한 콘스탄친 대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최고의 제사라는 것의 규법을 정한다. 그리고 그들 자신은 그리스도 틈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가장 비신아적인 일을 행하고 참된 신앙에서의 거리가 먼 곳에 머물러 있었던 것이며, 그들의 추종자들도 가장 비열한 생활을 해 왔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에게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썩은 살덩어리로서 충현한 것이다. 그리고 전신적 영역의 마술쟁이들은 그들이 옳다고 변명해 준다.

이것이 귀족의 존엄성이라는 것이다. 귀족들은 즐겁고 자유롭고 활발해야 한다.

라고 말한다.

이리하여 교회라는 곳은 셋째 층의 사람들에 있어서는 악마와 같은 존재인 것이다.

황제는 오만한 만족과 만용으로 이교도적인 권력을 마음대로 이용한다. 그리고 자기도 그리스도 교도이면서 그리스도교를 지배하고 있다는 모순에 대해서는 조금도 생각을 돌리지 않는다. 그리고 황제가 과중한 세금을 부과해서 서민들의 육체상의 압박을 가하며, 그 재산을 줄어들게 하고 게다가 서민들에게 심한 노역을 시킨다는 것 등은 아무렇지도 않는 일이다. 왜 그러냐 하면, 그때그때에 무거운 짐을 참을성 있게 견디기만 하면 양심의 가책이라는 것을 전연 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중대한 것은 사회적 권력을 가진 자가 사람을 죽이는 죄를 용서하고, 모든 폭력을 용서해서 그리스도교도로 하여금 서로 전쟁을 하도록 강요하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무서운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와는 무엇 하나 공통된 점도 없다. 그리고 초기의 교회의 상태는 그리스도 교도에게 있어서는 가장 고귀한 것이었다. 그러한 상태는 만약에 악마의 벌과 콘스탄친들의 맹목으로 인한 그리스도교 속에 침투한 법왕적인 권력과 황제의 권력이란 독이 퍼지는 일만 없었더라면 오늘날까지 계속되어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최초의 유태인은 약속된 땅 위에 살고 그 외의 어떠한 지상적인 권력도 인정함이 없이 다만 하느님과 하느님의 계율만을 지켜가며, 400년 이상이나 계속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드디어 그들은 하나님을 버리고 사무엘에게 왕이 되어 달라고 권유했으며,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이 죄를 저질렀다는 것을 지시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천둥과 비를 주시었던 것이다.

같은 일이 그리스도교도 들에게도 발생했다.

다만 그 차이점은 다음과 같은 것뿐이다.

유태인은 하늘의 임금님보다도 땅 위의 왕에 의해서 그들의 땅 위의 일이 잘 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토지에 대한 애착에서 왕을 갖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스도 교도들은 하나님을 버리지는 않았으며, 이교도적인 지배권을 장악한 임금을 갖기를 바라지는 않았으나, 그것은 황제의 손을 빌어 그리스도의 신앙을 얻고자 기다리고 있던 교회가 자기네의 행복을 좀 더 확고하게 하려는 데서, 그러했던 서이 결과는 반대로 되어 버렸던 것이다.

황제는 처음에 그리스도 교도들을 고뇌 속에 내버려 두었다면 그들의 사이로 끼어들어가지는 못했을 것이다. 황제는 그들과 친해지려는 듯이 끼어든 것이며, 그들은 이교도적인 비 신앙으로 끌어갔던 것이다.

이런 죄악을 마드는 것이 콘스탄친 등이었다. 그러나 신앙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가장 완성된 그리고 가장 지혜로운 존재라고 생각하고 그 위에 교회의 행복을 위해서는 사회적인 권력이 없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게 된 후대의 그리스도 교도들도 그 죄를 벗어나지 못한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사도들에 의해서 잡혀 있던 고기, 신앙심, 두터운 사람들 속으로 신안의 그물을 찢는 많은 고기, 사람들의 무리가 점점 많이 들어왔다. 이들의 무리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나 혹은 신앙에 복종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신앙에 배반해 가면서도 신앙이 잇는 듯이 인정받으려 여러 가지 독자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가문을 자랑하는 무리들과 시대에 관해서 말해 보기로 하자.

그 가문을 자랑하는 많은 무리들은 하느님의 가르침에 배반한 생활을 보냈으며, 하느님의 아들을 비평하고 비난하는데 있어서는 누구보다도 누각을 나타냈다. 이들의 무리들은 자기네의 태생은 고귀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죄악적인 의식에 있어서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고귀한 사람들로부터 자기네들을 구별하려고 노력했다. 성명, 의복, 식사, 여러 가지 제도, 가옥, 권리, 교제 등에 의해서 구별 되려고 애썼다. 그들의 모든 생활양식, 습관 회화 속에는 허영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육체와 사회의 모든 혜택을 입고자 노력한다. 그것은 영화와 행복을 돕고, 자기네의 죄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입어야할 모든 불쾌함을 피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의 노역, 인내, 순종, 단순, 겸손, 봉사 등은필요한 서응자유롭고, 게으르고, 천박한 생활이며, 땅 위에서의 행복에 가득 참이며, 독자적인 호화로운 모양을 한 의복이며, 아름다움이며, 청결함이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을 놀랍게 하는 사치스러운 시가와, 아름답고 포근한 잠자리와, 원활하고 세련된, 그리고 매혹적인 회화가 필요했다.

그들의 고귀함은

, 마음에 있으시거든, 시작해 보지 않으시렵니까.

따위의 문구나, 하인을 시켜 말끝마다 그리고 때대로, 아주 새하얗게 될 때까지 몸을 씻어 달라고 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나중에는 그들 고귀함을 이교도적인 지배를 요구한다.

사실상 그 가문을 자랑하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이 무리들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 대한 권리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하인이나완고하고 어리석은 자들의 고뇌에 의해서 그들의 고귀함은 유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만일 하인들이 일하지 않게 되면 그들의 고귀함이란 존재 불가능하게 되고 양을 지키는 목자와 같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자기네의 태생이 고귀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그들이 황제나 황후들로부터 가문을 받는 다는 이교도적인 관습 위에 그 기초가 있는 것이다. 어떤 자는 무슨 영웅적인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받고, 다른 어떤 자는 여러 가지의 진귀한 물품을 바치고 그 대가로서 받는 것이다. 이들 가문 안 에 그들의 모든 고귀함은 유지되어 있는 것이다.

가문, 작위에 의해서 모든 것의 가치가 규정된다. 만약에 가문을 유지할 돈이 없을 때는 굶주림이 가문을 버티고 호미를 들도록 강요한다. 결국 가문 자체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돈의 힘에 의해서 그들의 고귀함에 힘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돈이 없는 때는 그들도 양먹이(목자)와 다름이 없게 되는 것이다.

일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고 그들은 한술의 밥이 입에 안 들어와도 체면만을 유지하려고 드는 것이다.

가문으로 자신의 고귀함을 의식하는 것은 그 결과로서, 새로운 그리고 많은 죄악을 낳는다. 자신의 고귀함의 대한 의식은 허영, 공손과 인내의 결핍을 가져온다. 만일 그들 중의 어느 한사람에게라도 (당신은 천민이요) 하고 말할 것 같으면, 그는 곧 당신을 법정으로 끌고 가서 자기가 천민이 아님을 증명하려고 들것이다.

이들과 같은 근원에서 파생될 다른 죄로는 사치, 게으름, 이교도 교도적인 지배, 참혹, 폭력 등이다. 그리고 정신적인 영역의 권력가들도 함께[ 이 죄악에 가입해서 그들을 향해 이것은 결코 사회나 인류에게 해독을 끼치는 것이 아니라 당신네들의 당연한 존엄성을 표시 하는 것이요, 하고 말할 것이며, 이들 죄악을 신속히 성장 시키려고 할 것이며, 이런 것들을 도덕의 범주 속에 끌어들이려고 할 것이다.

이러한 죄악은 양친으로부터 그 어린 아이들에게 전해진다. 아이들은 양친이 갖고 있는 , 착오에 의해서 교육 밭는다. 이리하여 하느님의 손으로부터 그 창조물은 떼어져 나가는 것이다.

자신의 태생의 고귀함을 계승시키려고, 그들은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교육을 베푼다. 이런 것은 모두 허영에서 시작 되는 것이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있어서의 위대함을 너무나 아끼고 사랑한다. 그리고 자기 집에서만은 충분히 그 위대함을 얻기 어려움으로, 아이들을 이른바 위대한 사람들에게 보내서 무엇인지 좀 더 높은 영광과 명예를 얻게 하려고 한다.

이들은 왕후에게 딸은 왕비의 곁으로 보내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들 가문을 자랑하는 무리들은 점점 그 수가 늘어가고, 토지는 자꾸 좁아진다. 그들의 전부는 부를 지배하고 탐낸다.

가난한 사람들을 심히 압박하며 자기들은 일하기를 싫어하며 수치로까지 생각하고 있다.

혹은 그럴듯한 매혹적인 말이나, 많은 거짓 약속으로 금전을 빼앗는다. 그리고 스스로 나서서 일하는 것은 고귀한 태생을 더럽히는 짓이라 하면서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가장 큰 그리고 기름진 토지는 그들에 의해서 점령되어 있다. 그 토지를 황무지가 되게 내버려 두어, 이리떼가 다니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은 정원에 앉아서 혹은 서서 쓸데없는 잡담이나 헛된 소문에 귀를 기울여 세월을 보낸다.

성서의 어느 구절에도 일부의 사람이 다른 사람들 더 나은 태생이라는 말이 적혀 있지 않다.

솔로몬 자신도, 자기를 보잘 것 없는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서에 있어서의 고귀라는 말은 덕성과 성지 위에 기초를 둔 고귀함을 말하는 것이다.

소위 귀족이니 무어니 하는 가문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생활은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이 죄 많고 거리낌 받듯이 그 생활역시도 죄 많고 거리낌 받아 마땅한 것이다.

어떠한 이교도들도 유태인도, 그 가문을 구실 삼아서 참된 신앙을 혼란시키고 있는 이 귀족들의 무리 보다는, 그리스도의 신앙을 더럽히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에게 배반하고, 사람들에게 해독과 무거운 짐을 지게하고 있다. 노동자들은 그들의 고귀함을 위해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이 땅위의 온갖 좋은 것을 움켜잡아, 삼켜버리려고 애쓰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모든 사람에게 끼치는 해독은 그들이 모든 것을 자기네들 속에 집어넣고, 그 냄새를 시체의 썩은 살덩이처럼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염시키고 있는 점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그들은 자기네들의 자녀와 하인들을 자기네들 틈에 넣어서 모든 귀족적인 방법으로 허영을 가르친다. 그리고 도시의 사람들은 그들의 생활양식을 배우는 것이다.

나는 이런 가문을 자랑하는 사라들 중에

계율을 배반하는 자, 그리고 파멸의 아들

이라고 한, 사도 바울에 의해서 이름 지어진바 그리스도 교도들이 존재해 있다는 점을 밝히고 져 쓴 것이다. <표돌 헤리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