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8일
인간이 쫒아야 할, 그 때문에 인간에게 자유를 주는 법칙을 알기 위해서는 육체적인 생활에서 정신적인 생활로 향상함이 필요하다.
나를 이 지상으로 보내준 것은 ⌜진실⌟이다.
나는 ⌜그⌟에게서 들은 것을 ⌜진상⌟에 전하려하는 자다. ⌜그⌟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대하여 말한 것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인자(人子)가 칭찬을 받을 때에는, 그대들이 나의 생각하는 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자기에게 가르쳐 주실 것을 말하고 있다고 깨달을 때일 것이다.⌟
2
이 세상의 짧은 기간을 영원한 인생의 법칙에 쫒아서 살아나감이 필요한 것이다.
< 토로오 >
*
⌜그⌟
인간이 만든 법칙에 따르기를 의식하는 것이란 노예가 되는 것이다. 신의 법칙에 따르기를 의식함은 자유로이 되는 것이다.
⃟ 법 칙
인간의 생활이란 오로지 지적인 의식이 작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지적인 의식은 인간에게 대하여 현재 및 과거에 있어서의 지혜 그 자체 생활과 다른 개인적인 생활요소를 동시에 보여준다. 그리고 이것들과 다른 개인적인 생활요소 사이의 관계로부터 불가피적으로 생겨나는 모든 것,고뇌나 죽음ㅇ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적인 의식은 인간 속에 다른 개인적 생활 요소에 대한 부정을 낳으며, 그리고 그로인하여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연의 생활이 끊어지고 말듯이 모순조차 낳는 것이다
지적인 의식에 눈 뜬,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기의 생활이 다만 개인적인 생활이라고만 생각하게 된 인간은, 매우 고통스러운 상태에 빠진다. 그 상태는 동물의 상태이다. 동물의 생활은 자기의 생활을 물질의 운동이라고만 생각하고 자기의 개성의 법칙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또한 자기의 생활을 그저 자기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완성 되어 가는바 물질의 법칙에 굴종하는 그 속에만 보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동물의 생활은 괴로운 내면적인 모순과 파괴를 경험할 것이다.
자기 스스로 자기를 키우는 것, 종족을 존속시키는 문제에 부딪치면, 동물의 생활은 파괴와 모순을 경험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인생은 중력(重力)의 법칙에 따르는데 있다. 즉 운동을 하지 않고 누워 있으면서 육체 속에 일어나는 과학적인 변화에 따르고 있다고 그것은 생각할 것이다.
이 경우에 있어서 동물은 고민하고 모순과 파괴를 볼 것이다. 자시 생활의 법칙으로서 생활의 낮은 법칙 — 동물적인 생활 요소 ―을 깨닫도록 교육 받은 사람에게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높은 생활의 법칙, 그 사람의 지적인 의식의 법칙은 그에게 다른 것을 요구한다. 그래서 인생의 주위에 있는 모든 것, 또한 허위의 가르침이 기만적인 의식 속에 그 사람을 사로잡고 있어서, 그는 모순과 파괴를 느끼는 것이다.
도물에게는 개성의 안정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그리고 그러한 안정과는 전연 반대의 것을 목적으로 하는 행동이 생활을 부정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는 전연 반대로 되어 있다. 다만 개인의 안정에만 달하기 위하여 애쓰는 인간의 행동은, 인간적인 생활의 완전한 부정이다.
인간의 생활은 두 개의 양상과 떨어질 수 없는 결합 속에 나타난다. 이들 두 개의 양상은 인간의 생활 속에 삽입되어 있는 것이다. 그곳은 동물적인 그리고 식물적인 존재와 물질적인 존재이다.
인간은 진실한 생활을 자기 스스로 행한다. 스스로 생활하며 나간다. 그러나 이들 두 개의, 인간의 생활과 결합되어 있는 존재의 양상 속에 있어서는 인간이 스스로 참가할 수는 없다. 인간을 조성하고 있는 육체와 물질은 각각 그 자체로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존재의 양상은 인간에게 있어서 지나간 과거의 생활인 것이며, 그의 생활 속의 삽입적인 것이며, 예전의 추억인 것처럼 생각되는 것이다.
인간의 진실한 생활에 있어선 이들 두 개의 존재가 인간의 일의 도구와 재료로서 다루어지는 것이기는 하나, 결코 인간의 일 그것은 아니다.
동물적인 요소는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자기의 평안의 목적을 이룩하기 위한 수단이다. 동물적인 요소란 인간에게 있어서 일하는 도구이다 . 동물적인 요소란 인간에게는 삽이다. 이 삽은 지적인 본성에 대하여 땅을 파던지 파면서 둥글게 하던지 뾰족하게 하던지 쉴 새 없이 쓰면서, 그러나 속에 넣어 두지 않도록 주어진 것이다. 그것은 더욱더 심고 불어나게 하기 위하여 부여된 능력인 것이며 광속에 넣어 두기위하여 부여된 것은 아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자기의 일을 재료와 도구를 아는 것은 이익이 있는 일이다. 그것을 잘 알면 ㅇ알수록 더욱더 그는 일을 함에 있어서 보다 나은 상대를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의 일의 재료와 도구를 일 그것과 혼돈 시키는 것은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또 하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인간의 생활도 동물적인 요소를 지혜의 법칙에 따르게 하는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인간의 생활은 시간과 동간 속에 그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시간적인 그리고 공간적인 조건에 의하여서는 한정되지 않는 것이다. 다만 동물적인 요소를 지혜의 법칙에 따르게 하는 정도에 의하여서만 한정되는 것이다.
생활을 시간적인 그리고 공간적인 조건에 의하여 한정하는 물건은 물건의 높이를 그 길이나 늪ㄹ이로써 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평면에 있어서 움직이고 있는 동시에 높이 향하여서도 움직이고 있는 물체의 운동은 인간의 진실한 생활이 동물적인 요소에 대한 관계 혹은 진실한 생활이 시간과 공간의 생활에 대한 관계와 흡사하다. 높이에 향하여서의 물체의 운동은 그 평면에 있어서의 운동과는 독립하여 있는 것으로 그것 때문에 붙는다던지 준다던지 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높이에 대한 운동이며, 이것은 더욱더 지혜에 따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시간적인 힘과의 두개의 힘과 지혜의 힘과 사이에 관계가 성립되며 생활의 영역에 있어서의 인간의 존재를 합성하여 향상시키는 정도의 다소에 따라서 행위가 완성되는 것이다.
인간은 진실한 생활을 시작한다. 즉 동물적인 생활 보다는 어느 정도 높은 곳으로 올라 그 높은 곳에서 불가피적으로 죽음에 의하여 끝나고 마는 존재의 환영을 본다. 평면에만 있어서의 인간의 존재가 모든 방면으로부터 산산조각이 되는 것을 보고, 그리고 이 높은 곳으로 오르는 일이 생활 그 것임을 안다.
그리하여 그 높은 곳에서 본 것 앞에서 그저 놀랄 따름이다. 그리고 자기를 높은 곳으로 끌어 올리는 힘을 깨닫고 자기 앞에 열려진 길을 나아가는 대신 그 높은 곳에서 자기 앞에 열려진 것에 대하여 놀라고 일부러 아래로 내려가려 한다. 자기 앞에 열려진 것을 보지 않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데로 낮은 곳에서 누워버리고 만다.
그러나 지적인 의식의 힘이 또다시 언덕위로 끌어 올린다. 그는 또다시 본다. 그리고 또다시 무서워하며, 보지 않기 위하여 땅위에 떨어지는 것이다. 이러한 일이 그를 끌어들이고 있는 인생의 파멸적인 운동 앞에 열리는 공포로부터 자기를 구하기 위해서는 그 평면에 있어서 만의 행동 ― 공간적이며 시간적인 존재 ― 은 그의 생활이 아니며, 생활은 다만 높이에 향한 운동 속에만 있으며 그리고 다만 자기의 개인적인 요소를 지의 법칙에 따르게 하는 길속에만 있으며 인생의 행복의 가능성은 그 속에 포함되어 있음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그가 깨닫지 못하는 동안 언제까지라도 계속 되어 가는 것이다.
그는 자기에게 심연(深淵)위 높이 끌어 올리는 날개가 있다는 것, 그리고 만약 그러한 날개가 없었다면, 그는 절대로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일없고 따라서 심연을 보는 일도 없다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는 자기의 날개를 믿고 그리하여 날개가 데리고 가는 방향으로 날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 레프 • 톨스토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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