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오리엔트 신화 여행
고대 오리엔트의 신화와 전설 혹은 그 역사나 문화 같은 아시아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우리와는 아주 친근하지 못하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문화가 처음에는 중국 대륙에 이어서 자본주의의 수입과 함께 서구 일변도에 이르렀던 데도 관계가 있는데, 비록 거기에서 역사적 필연성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석연치 않은 바가 있다.
이제까지 우리들은 고대 오리엔트에 관하여 겨우 서양의 자의(恣意)의 빛에 비춰져서 울타리 사이로만 본 것에 지나지 않지만, 얼마 전부터 고대 인류 문화 발생에 대한 직접 탐사가 시도되어, 고대 오리엔트의 세계도 새로 각광을 받게 되었다. 여기에 수록한 것은 그 중 아주 근소한 부분에 지나지 않지만, 앞으로는 아시아적 상식의 발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신 이슈탈은 바빌로니아.앗시리아의 최고 여신으로서 생명과 사랑과 전쟁을 다스린다. 이 여신은 배우자 탄무즈(젊은 곡물신)의 죽음을 탄식하여 지옥에 내려가는데, 일곱 개의 문을 지날 때마다 머리 장식, 목걸이, 옷을 벗기어 끝내는 벌거숭이가 되어 붙들리고 만다.
지상에서는 사랑의 신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어린이가 태어나지 않고 동물도 번식되지 않으며 식물도 번성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런 사정을 염려한 신들이 회의를 열어 지옥의 왕에게 이슈탈과 탄무즈를 지상으로 돌려 주도록 명령한다.
그리하여 이슈탈과 탄무즈는 지상으로 돌아와 결혼하여 지상에는 다시 사랑이 되살아난다.
이 이야기는 이집트에서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이야기로서, 그리이스에서는 비너스와 아로니스의 이야기로서 전해지는데, 모두 대지의 생산력을 상징한 신석기 시대 말기 이래으 대모신(大母神) 숭배에 기원을 둔 것이다.
이것은 초겨울에 말라죽은 식물의 생명이 봄과 더불어 싹 트는 것을 상징한 농경 민족 특유의 곡물 의례로서, 세계에 널리 부포되어 있는 신화 가운데 가장 오래된 전형이다.
그리고 이슈탈도 비너스도 금성으로 상징되고 있다. 마르둑은 그리이스의 제우스, 로마의 주피터에 해당하는 최고신으로서 목성으로 상징되고 있다.
바빌로니아에는 이밖에 6백 정도의 신들이 있으나 오늘날에는 상세한 것을 알 수가 없다.
바빌론의 도시이며 후에 바빌로니아의 주신(主神)이다. <창조 신화>에 따르면 원시의 혼돈의 여마(女魔) 티아마토(바다) 정벌에 즈음하여 <운명을 결정하는 힘> <신들의 지배권>이 주어진다. 큰 바람을 그녀의 입에 불어넣어 그 자유를 빼앗고, 그를 죽여 시체의 반으로 하늘을, 나머지 반으로 대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마군(魔軍)의 대장 킹쿠의 피를 흙과 섞어서 인간과 동식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바빌론의 융성과 함께 신들의 왕좌에 앉고, 수메르멜의 최고신 엔리르(베르 엔리르)를 대신하였다. 엔리르는 <바람의 주인>으로서 <왕권>의 상징이며 소를 그 거룩한 짐승으로 치는데, 마르둑은 그 속성의 대부분을 이어받아 이와 합체한 형태로 베를 마르둑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바벨탑>은 그의 신전의 사기라의 한 귀퉁이에 세워진 거룩한 탑이며, 수확을 축하하는 <신년제>는 그에게 바쳐지는 제사이다.
수메르인의 가장 오래된 성시(聖市) 에리두의 신, 대지의 신, 또 하천의 신, 호수 . 샘 등 담수의 신이다.
안(하늘) . 엔리르(대기) . 엔키(대지)가 삼체일좌(三體一座)를 이룬다. 지혜 . 기술 . 문화 일반을 다스리며, 또 신탁 . 주문의 신이기도 하다. 그는 또 인간의 친구로서 남풍의 날개를 꺾어 천국으로 소환된 아다파에게 여러 가지 지혜를 불어넣어 주고, 또 바빌로니아의 노아 . 우토 . 나피슈팀에게도 비밀히 대홍수의 도래를 가르쳤다.
에리두의 엔키 신전지(神殿趾)에서는 1미터나 되는 어골층(魚骨層)이 발견되었다.
베로수스가 전하는 오안네스 신화에 따르면 사람 머리에 물고기 몸을 가진 신이 바다에서 나타나서 사람들에게 문화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엔키의 변신일 것이다.
태양신, 정의와 율법의 신, 신(월신) 이슈탈(금성신)과 삼체일좌를 이룬다. 새벽에 동쪽 산에 나타나서 이륜마차에 올라타 어깨에서 두 줄기 광선을 내쏘아 하늘을 달리고, 저녁에 서쪽 산에 들어가 지하를 통하여 다시 동쪽 산에 출현한다. 그는 암흑(사악)을 구출하는 정의의 신이며, 신앙의 중심은 오랜 법적 전통을 자랑하는 시파르시(市)였다. 함무라비 법전 상부의 조각에서는 옥좌에 앉아서 왕에게 법전을 내리는 샤마슈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그는 또 엔키와 함께 예언 . 신탁의 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점은 그리이스의 태양신 아폴로와 유사하다.
봄에 태어나서 가을에 죽는 곡물의 정령, 수확의 신, 수목신, 죽음과 부활의 신이다. 이슈탈이 젊은 애인 탄무즈를 찾아서 <명부(冥府)로 내려가는> 신화는 유명하다.
그를 둘러싸고 그 죽음을 술퍼하는 제사와, 부활을 기뻐하는 제사를 올렸다. 바빌로니아력(曆)의 4월은 <탄무즈의 달>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집트 신화의 오시리스와 마찬가지로 신석기시대의 곡물신 . 수확신이라고 생각된다.
구약성서에는 페키니아(시리아)의 거리들에서 올려진 탄무즈를 조위하는 제사(여신은 아스타르테=이슈탈)에 관한 일이 적히어 있다. 그는 <신생(新生)>의 신이기 때문에 양치기들 사이에서는 <어린 양의 신>이라고 숭배되고 있다.
바르라는 신이 있는데, 이는 주(主)라는 의미이다. 가나안 민족의 최고신으로서 각시(各市)는 각기의 바르를 받아 숭배하였다. 이스라엘의 가나안 침입 당시 인민이 여호와를 버리고 바르를 신앙하여 여호와를 분노하게 하였다는 것이 구약성서의 여호수아기 . 열왕기 등에 보인다.
카르타고의 영웅에 하니발이 있는데, 이는 바르의 사랑을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다곤은 물고기 머리를 가진 펠리시테인의 신으로서, 삼손이 가자에서 눈알을 빼이고 다곤의 신전에 동여매어졌을 때 그 기둥을 꺾어 수천의 펠리시테인과 함께 죽었다고 한다.
오시리스는 제수(弟嫂)인 이시스와 둘이서 지상에 내려와 인간에게 문명을 가르치고 지상의 왕이 되지만, 동생인 세트가 형을 죽여 왕국을 빼앗고, 형의 시체를 갈기갈기 찢어 전국에 뿌렸다. 이시스는 이것을 일일이 주워 모아서 삼베에 싸서 숨을 불어넣어 부활시켰다. 이것이 미이라 제조의 기원이라고 한다. 오시리스는 부활 후에 명계의 왕이 되는데, 그와 이시스 사이에 태어난 아들 호루스는 성장하여 세트를 죽이고 부모의 뒤를 이어 지상의 왕이 되었다. 이 오시리스와 이시스의 신화는 바빌로니아의 이슈탈과 탄무즈의 신화와 마찬가지로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는 농경의례의 하나라고 생각된다. 호루스는 이집트 대대의 왕이 수호신이 되었다.
라아는 옛날 태양신으로, 이집트 왕은 반드시 라아의 아들(해의 아드님)이라고 칭했다.
세크메르는 암사자의 머리를 가진 흉포한 여신으로서 악한 인간을 벌하기 위하여 천상으로부터 보내진다. 라아는 지상에 피의 강이 흐르는 것을 보고 후회하여 여신을 살육을 그치지 않는다. 그래서 라아는 맥주의 비를 내려 여신을 취하게 하여 천상으로 데려갔다고 한다.
이집트에는 원래 2천의 신들이 있었는데 차차 정리되어 3백쯤으로 줄었으나, 서로 성격이 뒤섞이어 무엇을 다스리고 무엇을 다스리고 있었는지 분간할 수 없게 된 것이 많다. 주된 것은 42주로서, 이것은 이집트 전토 42주의 수호신이었다. 이집트 사람은 죽으면 오시리스의 <심판의 방>에 불리어 나가 각자의 죄를 다스리는 42인의 신들의 조사를 받는다. 낙제한 자는 괴수에게 먹히어 영생을 얻지 못한다. 신왕국 시대(BC16-12세기)에 이 심판의 경과를 세세하게 묘사한 <사자의 책>이 만들어져서 미이라와 함께 부장되어 신화학 . 종교학의 귀중한 사료가 되어 있다.
이집트에서는 토테미즘의 유존(遺存)이 강하여 소, 고양이, 악어, 매 등의 동물이 신성시되어 미이라로 만들어졌다.
특히 유명한 것이 <아피스의 황소>라고 불리는 무네비스신(가축신)의 거룩한 짐승으로 지정된 황소로서 전국민이 예배했다. 이것이 죽으면 미이라로 만들어 정중하게 장사하고 새로이 전국에 일정한 특징(검은 황소로서 이마에 흰 삼각형의 무늬가 있고 다리 옆구리에 초생달 반점이 있는 것)을 가진 송아지를 찾아서 다음 대의 아피스의 황소로 삼았는데, 발견되면 수도 멤피스에 모시었다.
파라오(이집트의 왕의 총칭)는 가끔 황소로 상징되고, 유명한 나르메르(메네스)왕의 팔레트(화장판)에도 황소의 모습을 한 적을 겨파하고 있는 장면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황소의 힘과 번식력은 오리엔트 각지의 농경 민족 사이에서 널리 숭배되었고, 이집트에서의 신앙의 중심은 멤피스, 헤리오포리스, 테에베 등이었다.
아피스의 성우(聖牛)의 장례에 관해서는 파피루스의 단편에 적히어 있고, 미이라를 넣어 둔 지하분묘는 사카라를 비롯해 상당히 많다.
이집트 제1 왕조(BC3000년) 때 마스터바(걸상 모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아라비아어로 이렇게 부른다)라고 불리는 세계 최고(最古)의 석조 분묘가 만들어졌다. 제3 왕조(BC2800년)의 조제르왕은 거대한 마스터바를 겹쳐 쌓아서 이른바 계단식 피라밋을 만들었다. 마찬가지로 스네풀랑은 그 측면을 메워서 상반부와 하반부의 경사가 다른 소위 굴절 피라밋을 만들었다. 제4 왕조(BC2700년)은 이것을 이어받아 현재 기제(카이로 서쪽)에 남아 있는 최대 최고(最古)의 피라밋이란 기제의 쿠프, 카프라, 멘카우라 3대에 걸쳐서 조영된 것이다.
피라밋이 조영된 것은 제3, 제4, 제5 왕조가 중심으로서 이른바 피라밋 왕조라고 불리지만, 후에 나일강 상류 메로에 부근에 이디오피아인 왕조가 햇볕에 구운 벽돌로 조영한 것을 포함하여 60개 이상을 헤아린다. 피라밋은 파라오의 분묘로서 그들의 재위 때부터 조영되었으며, 나일강의 범람기(농한기)에 전국민을 동원하여 건설하였다.
쿠프의 최대의 피라밋은 현재에도 세계 최대의 석조 건물로서, 그 네 변은 정확하게 동서남북을 향했고, 5천 년 후인 오늘까지도 거의 이상이 없다. 헤레도투스(그리이스인, 역사의 아버지라고 불림)는 10만의 사람이 20년 간(그러나 일년 중 3개월씩) 일해서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현대의 공학적 계산으로도 이것은 옳다고 하고 있다. 이것은 단독이 아니며, 부속의 장제전(葬祭殿), 나일강 안에 통하는 통로, 왕비, 왕자의 작은 피라밋, 정신(廷臣)들의 마스타바 등이 한 구획(피리밋 콤플렉스)을 이루고 있으며 주위는 벽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다. 유명한 대스핑크스는 제2 피라밋에 부속되어 있는데, 그 건설자 카프라의 소상이다.
고래로 세계의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쳐 왔으나 19세기 이집트 고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영국인 페트리가 그 최초의 과학적 연구를 하였다. 그것에 따르면 바닥 면적 약 5백 피이트, 평균 2톤의 반의 큰 석재 2백 30만 개가 들었다고 계산되어 있다. 내부에 왕과 왕비의 묘실이 있지만, 모두 약탈당하고 대석관만 남아 있을 뿐이다. 왕의 묘실에서 위쪽 정북쪽을 향하여 통로가 있고, 그 방향의 끝으로 북극성이 보이는 점에서, 이것이 천문대의 구실을 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 표면은 현재는 헐었으나 카프라의 둘째 피라밋의 정상 부근에는 채색 벽돌이 남아 있어 일찍이는 전표면이 화장 벽돌로 덮이어 있었다고 추정된다. 수도가 델타 지대의 멤피스에 있는 시대에는 피라밋은 주위를 위압하는 왕장의 분묘로서 어울리었으나, 서울이 북부 계곡의 테에베에 옮김과 동시에 피라밋을 대신하여 암굴 분묘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집트는 극도로 건조해 있기 때문에 매장된 시체는 자연히 미이라로 화한다. 그 때문에 이집트 사람들은 죽은 이의 부활, 또는 영생을 믿고 오랜 옛날부터 미이라를 제조하였고, 그로 인해 화학 지식이 아주 발달하였다. 미이라의 제조법은 뇌와 내장을 꺼내어 각각 단지에 담아 둔다. 시체는 수십 일간 약물에 담가 두었다가 그것을 건조시켜 방부제를 바르고 삼베로 엄중하게 말아 둔다. 그 다음에 소정의 의식을 치르고 관에 거둔다.
고대 말기부터 중세에 걸쳐서 미이라가 양품으로서 비싸게 매매되게 되어 많은 귀중한 미이라가 분실되었다. 그러나 현재 보존되어 있는 것 중에는 제18 왕조의 아멘 호테프 4세, 츠탄카멘 제19 왕조의 세치 1세, 라메스 2세, 등 BC 14세기부터 13세기에 걸친 유명한 파라오의 것이 있으며 카이로 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특히 테에베의 <왕릉의 계곡>에서 도이치인 보르구시는 단 하나의 분묘에서 23개의 왕이 미이라를 발견했다. 이것은 도굴을 피하기 위해 가끔 미이라가 이전했기 때문이다.
가장 보존이 잘 된 미이라로서는 세치 1세의 것이 유명한데, 왕후의 미이라는 특히 황금 삼나무, 석재 등으로 만든 이중, 삼중의 관에 넣어 두는 경우가 많았다.
테에베는 카이로 상류 약 5백 마일 지점에 있고, 제11 왕조(BC2000년 경) 이래의 이집트 제국의 서울이 있었던 곳으로서, 유적군(群)은 왼쪽 기슭의 <왕릉의 계곡> 델 엘 바프리의 대암굴 신전 및 바른쪽 기슭의 카르낙과 룩소르로 나누어진다.
왕릉의 계곡은 제18, 19조의 제왕이 암굴을 파내어 장려한 분묘를 만든 곳이며, 유명한 츠탄카멘의 분묘도 여기에 있다. 도구을 면하기 위하여 입구를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게 숨겨 두었으나, 그래도 묘도둑들이 마구 털어 가고 망쳐 놓았다.
델 엘 바프리는 하트 셰브 수트 대여왕이 조영한 테에베 서방의 대암벽을 파내어 만든 대신전으로서, 지금도 그 장려함은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카르낙은 테에베의 수호신이며 이집트 제국의 주신이었던 아멘에 봉헌된 대신전 지구로서, 고대 이집트의 나폴레옹이라고 일컬어진 토토메스 3세(대왕)가 건립한 것이다. 그 벽면에는 대황의 업적을 나타낸 조각과 역사적 비문이 있고, 그 열주(列柱)의 굵기는 직경 5미터에 이르고 있다.
룩소르는 제19 왕조의 라메스 2세가 조영하였고, 그 후 대대의 라메스가 이것을 확충했다. 거기에 그려져 있는 카데슈의 싸움(BC13세기의 이집트군과 히타이트 시리아군과의 전쟁)에서의 라메스의 분전(奮戰)을 나타낸 조각과 역사 비문이 유명하다. 이 이집트의 테에베는 그리이스의 그것과 구별하여 특히 <백문(百門)의 테에베(문이 백 개 있는 큰 도시)>라고 불린다.
현재 이집트 유수의 관광지로서 카이로에서 공로, 철도, 수로가 발달하고 관광시설도 완비하였으며, 암굴 분묘 안에는 일루미네이션도 장치되어 있다.
츠탄카멘이란 기원전 1350년 경 이집트 제18 왕조 말기의 왕으로, 1922년에 카나본경과 카터가 이 도굴되지 아니한 완전한 분묘를 발견하여 수많은 재보가 나타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그는 유명한 배교자 이크나톤의 사위로서 5년 간 통치 후에 18세란 젊은 나이로 죽었다. 이런 이름 없는 소년왕마저 이토록 장려한 분묘를 만들었으니, 토토메스 3세, 라메스 2세 등의 대왕의 분묘는 얼마만한 것이었겠는가 하고 사람들은 새삼스러이 이집트 왕의 부(富)의 힘에 놀랐다.
이 발견 후 유럽에서는 얼마 동안 이집트식 복식이 유행하며, 이집트학(學)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분묘는 미이라를 넣은 황금의 관을 놓은 묘실, 보물실, 대기실, 부속실의 네 방으로 된 비교적 소규모의 것이었으나 그래도 그 유품의 정리에는 10년이 걸렸을 정도이다. 그의 미이라는 다섯 겹의 큰 관에 넣어졌는데, 마지막 관은 235킬로그램의 순금으로 되어 있다. 미이라 자체는 아주 유감스럽게도 잘못 보존되었으나, 거기에 부장된 황금 제품과 보석 따위는 꽤 많아서 11개의 팔지, 15개의 반지, 여섯 벌의 귀고리, 왕의 지팡이, 왕관 등은 모두 황금이고, 진주와 유리 옥수(玉髓) 기타 보석이 그 싼 턴 사이에서 발견되었다.
보물실에서는 왕의 수렵용 이륜차, 청동의 소형 조상 413개, 갖가지 농구의 모형, 그리고 두 영아의 시체를 넣은 네 겹으로 된 두 개의 관과 작은 나무상자에 넣어진 세계 최고(最古)의 철제품인 끌 등이 별견되어 유품은 모두 3500점에 달했다.
<왕릉의 계곡>에 묻혀 있던 왕의 묘도 긴긴 세월 사이에 거의 모두 도굴되어 있었다.
그런데 1922년 영국의 고고학자 카터와 카나본경 등이 토우토 안크 아톤 왕(아톤은 후에 아멘이라고 개명하고, 츠탄카멘이라고 불린다)의 거의 완전에 가까운 묘를 발견하였다.
그런데 카나본경이 이듬해 4월에 독충에 찔려 3주일 동안 고생하다가 죽었다. 그러자 연달아 발굴에 관계했던 사람들이 변사(變死)했다고 소문이 났는데, 그것은 <파라오의 저주>때문이며, 토우토 안크 아멘의 묘에는 <파라오의 휴식을 방해하는 자에게는갑자기 죽음이 닥치리라>는 저주의 명문(銘文)이 있었다고 한다.
앗시리아를 멸하여 신바빌로니아를 건국하고, 수도 바빌론을 세계의 중심으로 번영시킨 영주이다.
그는 또 유대를 멸망시키고 그 주된 사람 수만 명을 바빌론에 붙들어가서 <바빌론 유수(幽囚)>를 행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이름은 구약성서 <에레미아서> <다니엘서> 등에 기록되어 있어서 현재도 문학 세계와 친밀하다. 바빌론의 조정(弔庭)은 왕이 산간 지방 출신의 왕비 아미치스를 위로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하며, 또 왕이 야훼의 말에 따라서 <사람들을 떠나 소처럼 풀을 먹고, 머리털이 독수리같이, 손톱은 말과 같이 되어> 비로소 신을 인정하였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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