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고향과 다시 생각하는 삶의 의미
―박흥순 시세계 조명, 신작시 5편
윤정구
1. 잃어버린 고향을 찾아서
시를 찾아가는 길은 결국 자신의 본향을 찾아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시성(詩聖)으로 불리는 두보(杜甫)나 시선(詩仙)으로 불리는 이백(李白), 시불(詩佛)로 불리는 왕유(王維) 등 빼어난 시인들의 작품들이 즐비한 중에서도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가 아직도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한시의 정상을 지키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귀거래사」는 약 1,600년 전 동진(東晉) 팽택현의 지사(知事)로 있던 41세 도연명이 “내 어찌 쌀 다섯 말의 봉급을 위하여, 그들에게 허리를 굽힐소냐?” 하고 자리를 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오며 지은 노래로서, 가족을 생각하여 참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수많은 봉급쟁이 장삼이사(張三李四)들이 꿈꾸는 탈현실을 이루어 자연 속 고향을 찾아가는 한시이다.
시를 쓴다는 것은 잃어버린 자아를 찾아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면, 내가 무엇으로 이루어진 것일까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이 결국 7살 이전의 유년기에 형성된다는 것이 현대 정신과학의 결론이라니,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의 의미는 지대하다 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귀향은 문학작품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영원한 주제의 하나라 하겠다.
박흥순의 작품 「산두, 그 고샅길」, 「그제, 그리고 내일」, 「별 볼 일 없는 생각」, 「괴로움이 꿈틀거릴 때」, 그리고 「그대와 함께 갯뻘로 가고 싶다」는 일별하여, 고향의 추억과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현재의 삶의 풍경과 그에 대한 상념과 괴로운 현실, 그리고 순수한 자연 상태로 다시 돌아가고 싶은 열망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샅길, 하면 성문이네 집 굴뚝에서 저녁연기가 스몰스몰 오를 것만 같다/ 금방이라도 성두네집 누렁이가 꼬리를/ 스르렁스르렁 흔들며 달려 나올 것만 같다 // 망아지처럼 뛰어다니다 태일네 돛단배에서 감자서리를 하던,/ 귀뚜라미 신바람나게 기타를 켜는 달밤/ 그, 흐드러진 달빛 아래 청무우 사각사각 깎아 먹으며/ 킥킥거리던 그 길 // 송희네집 흙담 너머/ 그 아이 얼굴 닮은 단감을 따 먹자고/ 도둑고양이처럼 흙담을 기어오르다/ 마당으로 떨어져,/ 달빛을 걷어차며 달아나던 발자국 소리로 출렁이던 길 // 고샅길은, 눈 내리면 친구들이 몰려나와/ 자박자박 코스모스꽃 수놓던 꿈길/ 아니, 깔깔대며 호호 불며/ 눈꽃으로 피어나던 그 길이다.
― 박흥순 「산두, 그 고샅길」 전문
고샅길은 집들이 연이은 마을의 좁은 골목길이 흑백사진처럼 친근하게 연상되는 데다가, 성문이네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저녁연기와 성두네 누렁이가 꼬리를 흔들며 나와 평화로운 유년기의 한때를 회상하게 한다. 연기가 오르는 모양을 “스몰스몰”로 그리고, 누렁이가 꼬리 흔드는 모양을 “스르렁스르렁”으로 표현한 것은 마치 굵은 크레용으로 연기와 누렁이를 그린 듯 고샅길의 정경을 인상적으로 만든다.
화자는 지금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를 기대하고, 반갑게 좇아나올 누렁이를 상상하며 고향 고샅길을 걸어가고 있다. 그러면서 망아지처럼 자유로웠던 시절의―지금은 금지된, 그러나 전에는 너그러이 넘어갔던―감자서리를 떠올리고, 귀뚜라미 울던 달밤에 무를 깎아 먹었던 추억을 떠올린다. 거기에 의성어인 사각사각이나 킥킥 웃음소리를 넣어 현장감을 살려낸다. 다만 감자서리를 한 장소가 “태일네 돛단배”라는 것은 그 마을이 바닷가 마을로서 주민들의 대부분은 농사를 짓던 전국에 흔히 볼 수 있던 농어촌임을 짐작하게 한다.
고샅길은 송희네집 흙담에 이르고, 단감을 따먹다 들켜 도망치던 추억과 함께 단감처럼 둥그레한 송희의 얼굴도 떠오른다. “마당으로 떨어져,/ 달빛을 걷어차며 달아나던 발자국 소리로 출렁이던 길”이란 묘사는 평면에 머무르기 쉬운 추억의 서사를 입체영상처럼 살려 놓았다. 마지막 연의 “눈 내리면 친구들이 몰려나와/ 자박자박 코스모스 꽃 수놓던 꿈길” 역시 눈 위에 발자국으로 수놓던 눈꽃들이 뚜렷이 그려질 정도로 묘사에 성공하고 있다.
박흥순 시인은 「산두, 그 고샅길」을 통하여 우리가 잊고 있는 농경사회의 천진난만했던 시절의 추억을 선명하게 되살렸다. 그것은 산업화를 통하여 잃게 된 소박한 행복의 원형일지도 모른다.
2. 고향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삶의 풍경
특별시 사당동 남성시장/ 시장 입구 양쪽에 약국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줄줄이/ 옷가게, 잡곡가게, 화장품집, 비뇨기과, 미장원, 신발가게, 모자점,/ 한의원, 건어물집, 모두가 골목처럼 어깨동무를 하고 서 있습니다 // 그제는 파도횟집이 신장개업을 했고/ 어제부터는 청정야채가게가 문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직업소개소 간판을 다느라 골목길이 어수선하군요 // 골목길을 끌고 가는/ 각설이 아저씨의 쨍 하면 볕들 날이,/ 고래아저씨의 저 높은 곳을 향해서가/ 국수집, 나물집, 두부집, 곱창집, 짜장집/ 영양탕집, 통닭집, 피자집, 순대국집, 찐빵집,/ 떡집, 집 집 집들에 시리고 아프게 스며듭니다 // 특별시 사당동 남성시장 하늘에는/ 낮달이 전깃줄에 걸려 흔들리고 있습니다.
― 박흥순 「그제 그리고 내일」 전문
두 번째 시로 시인은 서울특별시 사당동의 남성시장을 그림으로서 고향을 떠난 화자가 살고 있는 도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고향을 떠나온 사람들이 여러 가지 종류의 가게를 열어 서로 의지하고 살아가지만, 부침의 영고성쇠를 어쩔 수 없는 “특별시 살아내기”는 만만치 않다. 그제는 파도횟집이 신장개업을 했는가 하면, 어제는 청정야채가게가 문을 닫았고, 오늘은 직업소개소가 간판을 달고 있다. 쨍하고 볕들 날의 세속적인 번영을 꿈꾸는 사람도,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영혼의 영광을 꿈꾸는 사람도, 다같이 스쳐 지나가는 “특별시 사당동 남성시장 하늘”의 전깃줄에 걸려 흔들리는 낮달은 두고 온 고향을 그리는 마음이자 잃어버린 동심의 상징이 아닌가.
3. 버림받은 물상을 사랑하는 까닭
세 번째 시는 조금 엉뚱한 제목이어서 눈길을 끈다. 「별 볼 일 없는 생각」이란 무엇일까? 시를 읽어보자.
“너는 내 다락방으로 가야겠다” // 들녘이나/ 동네 골목길이나/ 갈짓자를 걷다가도/ 눈에 밟히는 그 무엇이 있으면 나는 그렇게 말한다. //…// 형형색색의 양초, 버림받은 괘종시계, 노란 손풍금/ 혼자서는 들 수 없었던 박혁거세 돌덩이/ 대나무 바구니, 상처투성이 교자상/ 쓰레기 통 속 인형이 서재를 가면/ 어둠을 밀치고 나를 반긴다// 내가 내가 그들을 모셔다 두며 눈빛을 주는 것은/ 별 볼 일 없는 나의 모습이 저런 모습이 아닐까 하는,/ 그래서 언젠가, 그들을 시詩의 옷으로 바꾸어주고 싶은/ 내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생각 때문이다
― 박흥순 「별 볼 일 없는 생각」 부분
화자는 길을 걷다가도 예컨대 공중전화기를 만나면 그들이 동전을 밀어 넣고 나누었을 대화를 상상하면서 짜릿한 쾌감을 느낀다. 그래서 사람 냄새가 나는 그 무엇들을 다락방에 모셔 둔다. 형형색색의 양초나 누가 버린 괘종시계, 손풍금에 대나무 바구니, 상처가 난 교자상까지 “별 볼 일 없는 나의 모습”으로 생각되어 다락방에 모셔 두고, “언젠가는 시(詩)의 옷으로 바꾸어주고 싶은” 생각을 한다. 효용이 사라진, 지난 시대의 물건들에 시의 옷을 입혀, 잊혀진 그 뜻을 새기는 것이 시인의 따뜻한 소망임을 말한다. 그것을 “별 볼 일 없는 생각”이라고 비하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분명 역설일 것이다. “박혁거세 돌덩이”도 엉뚱하다기보다는 신비감을 자아내기 위한 장치로, “짜릿한 맛을 느끼며 즐겼던/ 카바레 작업장에서처럼”도 현장감의 흥미를 돋우기 위한 장치로 이해하기로 한다.
4. 나만의 창, 구름의 위안을 찾아서
네 번째 작품 「괴로움이 꿈틀거릴 때」는 매우 흥미로운 진전을 보여준다. 독특한 상상력의 작품을 읽어보자.
빈 깡통을 콘크리트 바닥에 두고 망치로 찌그려뜨린다 나는 망치를 들고 다니는 건축가다 내가 새로 짓는 집은 시간이 흐르면 집 모양이 바뀌어 간다 창문이 꽈배기처럼 휘기도 하지만 중간층이 장구 모양으로 변하기도 한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이상한 집을 짓는 이상한 건축가라고 수근거린다 그렇다고 나는 주춤거리지 않는다 보라는 듯이 이번에는 창문이 하늘을 보며 놀고 있는 파란 집을 지었다 창문도 파랗게 웃었다 입이 머리통 뒤에 달린 사람들, 눈이 발톱 밑에 붙은 사람들 그들이 보고 수군거리는 소리를 듣는 대신, 날아가는 새들의 몸짓을 볼 수 있고, 웃고 가는 뭉게구름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사람들은 나를 갸우뚱 건축가라고 부른다
― 박흥순 「괴로움이 꿈틀거릴 때」 부분
건축가인 화자는 망치를 들고 다니며 빈 깡통을 망치로 찌그러뜨린다. 그것은 정형화된 것을 견디기 어려워하는 욕구 부수기일 것이다. 창문이 꽈배기처럼 휘고, 중간층은 장구 모양으로 하기도 하고, 창문이 하늘을 보도록 하는 창의적인 집을 짓지만,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건축가라고 불렀다. 그렇다고 그가 물러서지 않았다. “날아가는 새들의 몸짓을 볼 수 있고, 웃고 가는 뭉게구름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큰소리쳤다.”
그는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실용 이상의 가치, 나는 새들의 몸짓을 보고, 흘러가는 뭉게구름을 보는 문화의 가치를 실현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돈키호테였던 것이다.
그것이 시로 성공하기 위하여 그는 물푸레나무로 사다리를 만들어 사용했던 아버지 이야기를 이어간다. “망치 같은 연장을 쓰지 않고 초승달 같은 집을 지어서 거기 살고 싶다”던 아버지는 한 발 더 나아가 “푸른 깡통이 열리는 한 그루 나무를 초승달이 뜨는 언덕에 심으라고 했다.” 그가 망치로 빈 깡통을 찌그러뜨리는 이유는 바로 그것이었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읽고 난 다음에는 세상의 수군거림이 사라질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세상의 수군거림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듯, 갈등을 이겨내고 초연히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을 시인의 마음이 짠하게 밀려온다. 독특한 화법과 함께 상상력을 밀고 나가는 필력이 돋보이는 수작(秀作)이다.
5. 그대와 함께 꿈꾸며 살고 싶은 곳
어느 사이 다섯 번째 시 「그대와 함께 갯뻘로 가고 싶다」에 이르렀다. 제목만으로도 다섯 편을 따뜻하게 매듭짓고 싶은 시인의 마음이 느껴진다. 시는 그가 그대와 함께 이미 당도한 갯뻘에서 시작된다. 표준어 “갯벌”을 굳이 소리나는 대로 “갯뻘”로 표기하는 것 역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시인의 내재된 심리에 기인할 것이다.
갯뻘이 옷을 벗고 가슴을 내보이기 시작하면/ 그대는 가래로 갯뻘의 가슴을 파헤쳐 낙지를 잡아내고/ 나는 갯뻘의 혈관 속에 낚싯줄을 드리우는/ 그렇게 갯바람 같은 한 철을/ 그대와 살았으면 좋겠다 // 그대는 더 많은 낙지를 바랑에 넣기 위해/ 쩍을 밟고서라도 가래질을 하고/ 나는 갯골에 밀물이 밀려와도/ 한 마리 물고기를 바구니에 더 넣기 위해/ 가난한 파도 소리가 되어가면서/ 그대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 박흥순 「그대와 함께 갯뻘로 가고 싶다」 부분
도회에 화합 적응하지 못하고 이상한 수군거림에 싸여 불화를 인내하고 있는 시인이 꿈꾸고 있는 마지막 이상향은 고향 바다이다. 때묻지 않은 갯뻘에서 건강한 몸으로 건강한 그대와 땀흘리며, 꿈꾸며, 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의 잠재의식에는 가난에 대한 걱정이 숨어 있는 것 같다. “가난한 파도소리”가 그렇게 말해준다. 아직은 특별시에서의 상처가 회복되지 않은 까닭이리라. 그래도 갯뻘로의 귀향을 꿈꾼다. “달려오는 흙탕물이/ 갯뻘을 통째로 삼켜도/ 태초부터 조간대의 아버지는 달이었다고/ 갯뻘도 그 달의 새끼라고/ 그대와 갯메꽃 바라보며 웃을 수 있기에/ 그대와 함께 갯뻘로 갔으면 좋겠다.”는 그의 소원은 절절하다 못하여 엄숙하기까지 하다. 갑자기 튀어나온 조간대(潮間帶)의 아버지가 달이라는 발상에서 갯뻘로 확대하여 나아간 것도 재미있다. 만약 자전적인 스토리를 이 정도의 시로 구성해 냈다면, 그는 상당 기간 타고난 재능에 걸맞게 내공을 쌓아왔음에 틀림없다.(시인)
‘파랑’을 찾아 헤맨 섬 태생 시인
이승하
시인의 출생지는 전남 신안군에 있는 섬 안좌도이다. 얼추 1천 개나 되는 섬이 흩어져 있다 해서 1004의 섬이라고도 불리는 신안군의 섬 중 하나다. 목포로부터 22.9km의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이 섬은 인구가 약 2,500명 정도 된다. 논농사와 밭농사가 주를 이루지만, 간석지를 막아 염전과 김 양식 등의 어업도 겸해 소득은 높은 편이다. 김환기 화가의 고향으로도 유명한데 유인도 6개, 무인도 57개 등 모두 63개의 도서로 구성되어 있다. 1990년 신안군 최초로 안좌도와 팔금도가 연도교(신안 제1교)로 연결되어 같은 생활권이 되었다. 간척공사에 의해 안창도와 기좌도가 연륙되어 하나의 섬이 되었으며, 두 섬의 이름, 즉 안창도의 ‘안’과 기좌도의 ‘좌’를 한 자씩 따서 안좌도라 부르게 되었다.
소년 박흥순은 여기서 태어나 초등학교까지 마친다. 중학교 진학을 이루지 못하고 서울로 가서 갖은 고생을 다하는데, 그간의 사정을 시를 읽어 나가면서 천천히 얘기하기로 하자. 우선 바다를 소재로 한 일련의 시를 읽어보는 것이 좋겠다.
고향마을 앞에는,
저, 파도가 끝나는 곳은 어떤 세상일까
동경하던 바다가 있었네,
수통게. 꽃게, 문저리, 꼬막 잡던,
뱃고동소리 들리면 마음 설레던 바다.
빨가벗은 몸에 뻘칠을 하고 낄낄대던 꿈의 바다,
파도 가르며
섬과 육지 오가며
뱃고동소리 울리던 여객선에는
욕쟁이할머니 육지 유학간 손자 사랑의 보따리도
동생 공부시키겠다고 공장으로 간 영순이 마음도
서울에 가 마음껏 헤엄치고 싶다던
만천이 꿈도 가득 실려 있었네,
지금은
그 꿈 찾아
키보드소리 길잡이로
갯메꽃피는 마을 찾아가고 있다네,
―「갯메꽃 피는 마을 가는 길」 전문
특이하게도, 4개 연이 다 쉼표로 끝나고 있다. 그리움(동경)이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뜻이리라. 제1연에서 소년은 저 파도가 끝나는 뭍은 도대체 어떤 세상일까 동경하면서 십수 년을 살았다. 어린이에게 바닷가는 놀이터였지만 어른들에게는 삶의 터전이었다. 아낙네는 수통게ㆍ꽃게ㆍ문저리ㆍ꼬막 등을 잡아서 생계를 꾸려갔고, 어버이는 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로 나가야만 했다. ‘만천이’는 시인 자신의 어린 시절을 나타내는 일종의 아명이 아닌가 한다. 만천이의 꿈은 바닷가에서 꼬막을 캐는 데 있지 않았다. 만선의 깃발을 펄럭이며 귀항하는 것도 꿈이 아니었다. “서울에 가 마음껏 헤엄치고 싶다”는 꿈을 이루고자 결국 만천이는 학업을 접게 된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그는 갯메꽃피는 자신의 고향마을로 키보드소리를 길잡이로 삼아서 찾아가고 있다. 즉, 예전과 달리 시인이 되어 시인의 마음으로 고향을 찾아가고 있다. 수구초심이라고, 나이를 어느 정도 먹자 마냥 떠나고 싶었던 고향이 이제는 가보고 싶은 곳으로 바뀌었다. 시인의 고향 예찬을 그 지방의 사투리를 통해 듣게 되는 일은 참으로 정겹다.
느그들 아냐
입맛 다시며 환장하게 좋아하는
나의 출생지가 어디 콧구멍에 붙었는지
파도가 말이여 시퍼렇게 흰 거품을 물고 늘어지는 곳
그랑께, 갈매기가 똥을 싸갈겨도
파도가 금시 꿀꺽해 불고 눈 깜빡해 부리는 그런 곳이여
긍께, 나는 그 바다 속에선 완전 무용수였제,
내가 너울너울 춤을 추기 시작하면
상쾡이도 한몫 거들다 챙피하다고 내빼부럿당께
거시기, 거기가 어디냐문
정약전 선상이 자산어보를 긁었다는 곳이제
―「자산어보 홍어편」 초, 중반부
이 시의 화자는 홍어다. 정약전은 1801년에 일어난 신유사옥으로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유배생활 중에 홍어를 포함한 155종의 수산 동식물을 직접 관찰하고 각각의 명칭과 분포, 형태와 생태뿐 아니라 그 수산물의 이용 방법까지 상세하게 기술한 『자산어보』를 썼다. 시인은 『자산어보』의 홍어편을 시로 써본다는 생각으로 의인화를 시도하였다. 자, 그런데 홍어는 삭혀야 제맛이 난다.
근데 말이여, 나는 지금 두엄 속에서
숙성의 도를 당신에게 맛봬 줄라고
벌러덩 누워 있어라우
코가 쏴한 코빼기 한 점
아자씨 입속에서 꿀꺽 넘어가게 해줄 것잉께
막걸리 한 대빡 옆에 놔두고
째끔만 기다려보쑈잉
―「자산어보 홍어편」 후반부
사람에게 잡혀 죽었지만 홍어는 “두엄 속에서 숙성의 도롤 당신에게 맛봬 줄라고/ 벌러덩 누워 있”다. 유머가 넘치는 이 시는 신안군의 지리지이며 어촌생활의 풍물지이며 물고기 생태지이기도 하다. 세파를 헤쳐 온 자신의 지난 생을 돌이켜보니 망둥이가 생각난다.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대체로 바다와 연관이 있는 것들이 연상된다.
우리들이 살아가는 데도 확실한 법도가 있다우
낚시꾼이 던진 낚시 바늘을 덥석 물었다
주둥이가 찢겨나가도
우리는 그딴 건 오래도록 품고 있지 않아요.
그딴 걸 오래 품고 있으면,
짱뚱이처럼 뛸 수 있는 용기가 생길 수 없거든
우리는 말이우
찰나의 선택은 놓치지 않는 머리라우
멍청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남았겠수?
―「망둥이 처세술」 전문
이 망둥이처럼 살아왔다고 한다. 그래서 낚싯바늘을 문 주둥이가 찢겨나가도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는 짱뚱이처럼 잡혀 죽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때그때 상황을 보고서 치고 빠지는 영리함을 망둥이를 보고 터득했다는 얘기다. 짱뚱이를 화자로 한 시에서는 실수담을 얘기한다. 짱뚱이처럼 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말이야, 나는 지금 낚시꾼이 잡아채는 멍텅구리 낚시 바늘에 옆구리가 찔려 끌려가는 중이야. 사실 난 말이지, 뻘밭을 벗어나고 싶어서 날았던 게야, 또 다른 세상이 궁금하고 그리웠던 게지, 그래서 생각했어, 높이 날아보면, 멀리 날아보면, 그 꿈이 이루어질 거라고, 멀리, 높이 나는 데만 정신이 팔려 있었어, 나의 결정적 실수는 툭 불거져 나온 서치라이트 같은 내 두 눈으로 사방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던 게야, 당신 말 좀 해봐,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게지?
―「한낮의 짱뚱이」 후반부
짱뚱이는 낚시꾼의 멍텅구리 낚싯바늘에 옆구리가 찔려 끌려가는 중이다. 멀리, 그리고 높이 나는 데만 정신이 팔려 “툭 불거져 나온 서치라이트 같은 내 두 눈으로 사방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았던” 실수의 결과, 그만 죽음 일보직전에 이른다. 바닷가에서 성장기를 보낸 시인인지라 이런 시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삶의 지혜를 바다에서 거의 다 배운 셈이다. 바다를 다룬 시에는 대개 시인의 인생철학이 담겨 있다.
만선 깃발 펄럭이려 먼 바다 더 깊은 바다로 나가야 하는
질퍽한 포구의 어부들은
잔바람이라도 이는 날이면 갯내음까지도 무거워진다
그런 날이면
포구의 갈매기들도 꺼억꺼억 허공에 울음을 그리며 난다
이곳 포구에도 언제나 파도가 일렁인다
그래서 어부는
더 넓은 바다로
더 먼 바다로 나가
파도를 재우기 위해서
힘차게 그물을 던져야 하는 것이다
육지의 파도가,
포구의 파도가,
더, 무섭다는 것을 어부는 잘 알기에
꺼억꺼억 갈매기 울음소리 들으며
먼 바다로 나가는 것이다.
―「포구에 파도가 일렁인다」 전문
어부가 먼 바다로 나가 힘차게 그물을 던지는 이유가 바다 한복판의 파도보다 육지의 파도와 포구의 파도가 더 무섭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어부는 자신의 삶의 터전을 바다로 삼았는데, 사람들은 종종 폭풍의 위험성을 말하지만 어부로서는 가장 마음 편히 일할 수 있는 곳이 바로 바다 위이다. 「그 때, 파도소리」 「그대와 함께 갯뻘로 가고 싶다」 「고래 잡으러 가는 세월」 「어떤 어부」 「갓섬 등대」 「무얼 하고 있는가, 순아」 등의 시도 바다 소재 시로서 이번 시집의 수확에 속하는 가편이다.
안좌도의 주민은 반농반어로 살아가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시인의 어린 시절 추억담 중에는 농사를 지어본 경험이 드러난 시가 있다. 초등학교 6학년이라고 해도 아직 10대 초반의 어린아이였을 텐데 농부의 마음을 어찌 이렇게 잘 알고 있을까.
쌩땅을 기름진 땅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곡괭이질부터 해야 하죠
힘껏 곡괭이를 내리찍었을 때
곡괭이가 튕겨지며
온몸으로 전해오는 통증
파헤쳐진 그 쌩땅
잔돌 골라내고
별을 심고
달을 묻고
파랑도 뿌리고
근데 말이죠
퇴비는 봄 햇살처럼 내려야 해요
별이 숨을 쉬고
달이 휜 뿌리를 내리고
파랑이 꽃을 피우면
지는, 농군이라
곡괭이질만 열심히 했다 하겠습니다.
―「어느 농부의 마음」 전문
이 시는 봄에 파종하기 전에 곡괭이로 땅을 파헤치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중요한 시어가 하나 보인다. “파랑도 뿌리고”, “파랑이 꽃을 피우면”의 ‘파랑’이다. 사전적인 의미는 ‘blue’와 ‘작은 물결과 큰 물결’의 ‘波浪’이다. 그런데 이 시에는 이 두 뜻을 생각하면 의미가 불통이 된다. 꿈, 희망, 이상을 상징하는 낱말이 바로 ‘파랑’이다. 바닷가에서 큰 파도와 작은 파도를 보며 자란 시인이기에 이 낱말을 자신의 이상향으로 설정한 것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시인의 어느 시에서 자신의 유년기 얘기를 아주 사실적으로 한다.
불볕의 이맘때가 되면
죽교동 언덕배기
버섯 닮은 집, 그 문간방 생각이 난다
삼십대 엄마는
양은그릇장수, 집을 떠나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외로운 섬이 되어 떠돌고,
머리에 산더미 같은 양은그릇을 이고,
땀 흐르는 등짝에는 삼남매 눈빛이 흐르고,
당신의 아픔을 이고지고 돌 때……
―「장다리꽃」 전반부
이 시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라면 아버지의 부재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삼십대의 엄마가 양은그릇 장사를 하러 “이 섬에서 저 섬으로/ 외로운 섬이 되어 떠돌”았으니 아이의 외로움은 얼마나 컸을까. 삼남매는 엄마를 코가 빠지게 기다렸을 것이다. 이윽고 당신은 땀 흐르는 등짝에 아픔을 이고지고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밥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옥수수죽 먹기 싫다고
울며 보채며
엄마 찾는 누이들 달래는
나는 까까머리
땡볕은 탱탱해 터질 듯하기만 한데
개구락지참외
무화과 몇 개
시콤세콤 물외국 앞에 두고
엄마 바라보며
파란 웃음 방안 가득 쏟아내던
죽교동 언덕배기 그때 생각이 난다
―「장다리꽃」 후반부
엄마는 옥수주죽을 해놓고 가셨는데 계속 이 죽만 먹게 하니 두 누이동생은 다른 것이 먹고 싶다고 울며 보챈다. 이때 나타난 엄마가 참외와 무화과를 깎고, 물외국을 만들어준다. 시의 제목으로 삼은 장다리꽃은 무, 배추 따위의 꽃줄기를 말한다. 씨를 받으려고 키가 쑥쑥 커 장다리꽃이 피도록 가꾼 무나 배추를 ‘장다리무’, ‘장다리배추’라고 한다. 장다리무나 장다리배추는 꽃을 피우고 씨앗을 여물게 하는 데에 모든 양분을 소모하므로 뿌리에는 바람이 들고 잎사귀는 노랗게 시들어 죽는다. 삼남매를 혼자서 키운 어머니의 삶이 바로 장다리꽃인 것이다. 이 시에서도 “파란 웃음”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바다의 주된 빛깔이 파란색이고 맑은 하늘의 색깔이 파란색이다. 박흥순 시인은 이 파란색을 늘 마음에 담고 있었기 때문에 시인이 된 것이 아닐까. 이제부터 시인의 파란색 연구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상략) 개똥에 미끄러져도
노랗게 웃으며 홀씨는 날려야 한다고 소리치던 아이는
보이지 않는데
녹슨 자물통에 열쇠를 넣고 돌리는
흐릿한 눈빛 속에서는 푸른 바람이 솟구쳐 나오고 있다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길」 끝부분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 언덕 위에 파랑의 집을 지을 거야
그 집에 그들을 초대해
넓고 환한 길을 그릴 수 있도록 할 거야
―「늪」 중간부분
바람에 색깔이 있을 리 없다. 그런데 “푸른 바람”이라고 한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화자의 희망을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녹슨 자물통에 열쇠를 넣고 돌리는 행위는 한 세상에서 다른 세상으로 출분하게 되었음을 뜻한다. 아이는 마침내 새로운 세상(즉, 육지다)으로 나가게 되었는데, 그때의 마음가짐과 다짐을 위의 시에서 표현하였다. 언덕 위에 지을 집을 시인은 “파랑의 집”이라고 했다. 꿈의 집, 희망의 집, 이상의 집이다. 그런데 파랑일 줄 알았던 집이 이상하게도 정말 꿈속의 집인 양 보이지도 않았고 만들어지지도 않았다. 일단 배가 너무 고팠다.
배가 고팠다.
중국집에 혼자 앉아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켰다
단무지 한 접시를 먼저 먹었다
면발은 당연히 게걸스럽게 다 먹었다
짜장면 그릇에 남은 춘장까지 남김없이
개가 핥아먹은 것처럼 깨끗하게 다 먹어치웠다
이상했다
왜 먹어야 하는지
왜 짜장면이었는지
왜 춘장까지 다 먹어치웠는지
―「이상했다」 앞부분
화자는 짜장면 그릇에 남은 춘장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울 만큼 배가 고팠다. 초등학교 졸업장만 갖고 서울생활을 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학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에서는 주로 노동력이 투입되어야 밥이 나온다. 지난날의 신산했던 삶을 은근히 고백하는 몇 편의 시가 있다.
한잔 술, 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갈 때
내 아이가 웃고 있어
아침은 햇살을 마시고
점심은 그리움을 떠먹고
저녁은 기름기 넘치는 순댓국
그래야만
내 야윈 창자 속
기름기가 마르지 않아
그래야만
내 아이와 함께 웃을 수 있어
―「고시원의 낮달」 후반부
이렇게 앉아 있다 죽는 것보다는 작은아들을 찾아서 한번이라도 보고 죽어야 하겠다는 생각에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나는 아수라장이 되어 있는 사람들 틈에서 미친 듯이 아들애 이름을 부르며 아들을 찾아서 이리 뛰고 저리 뛰기 시작했다 사람들을 붙잡고 내 아들을 보았느냐 물었다 나는 도망가는 그들보다 더 미쳐 있었다
다행히 아들애 행방을 아는 사람들이 있었다 묻고 물어 찾아낸 내 사랑하는 아들은 초췌한 모습, 파리한 눈으로 얼이 나간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와락 아들을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람들의 아우성 비명소리가 귓가를 때리지만 난 내 사랑하는 작은아들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더 힘을 주었다/
아들이 희미하게 웃었다.
―「한밤중에 일어난 일」 후반부
이제는 홀몸이 아니다. 아내와 큰아들, 작은아들을 위해 분골쇄신 일을 해야 하는 가장이 된 것이다. 시인의 지나온 생의 면면을 다 알 수는 없지만, 그의 문학 인생을 가늠하게 하는 특이한 경력을 쌓게 된다. 명지전문대 문창과와 서울디지털대 문창과 및 사회복지과를 졸업하고, 중앙대대학원 문예창작과를 수료한 것이다. 생의 지표가 바뀐 연유가 어디에 있을까? 파랑을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
갈대밭에
눈이 내립니다
갈대는
미동도 하지 않고 싶지만
흔들리며 흔들리며
온몸으로
눈을 맞고 있습니다
태풍 앞에서도
꺾이지 않고
연초록 몸짓으로
그 뙤약볕 길
푸르게 푸르게 지내와
갈색으로 숨죽이고 있는 지금
쇠잔한 몸으로 눈발 속에 서 있습니다.
오직, 바램은
남풍을 기다리며
그때, 손짓할
연둣빛 날갯짓을 생각합니다.
―「파랑새」 전문
때는 겨울이다. 갈대가 바람에 흔들리며 온몸으로 눈을 맞고 있다. 제2연에서도 파랑새는 등장하지 않고 겨울 갈대의 모습을 그리고 있을 뿐이다. 제3연에서는 새봄이 오기를, 그래서 갈대가 다시 연둣빛으로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데서 시는 끝난다. 그런데 왜 시의 제목을 ‘파랑새’로 한 것일까? 파랑새가 이상의 새이기 때문이다. 고대 동양에서 파랑새는 길조를 상징해 왔고, 서양에서도 행복을 부르는 새로 널리 알려져 왔다. 1906년 벨기에의 극작가 모리스 메테를링크가 6막 12장으로 쓴 아동극이 「파랑새」이기도 한데, 1908년에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가 연출해 모스크바 예술극장에서 공연되었다. 공연이 성공을 거두자 1909년 파리의 파스켈 출판사에서 대본을 출간하였고 이후 동화로 각색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주인공 남매의 이름인 틸틸과 미틸이 한국에서 치르치르와 미치르로 쓰인 것은 일본어로 번역된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이 동화의 줄거리를 이 자리에서 얘기하기는 그렇고, 작품에서 파랑새는 행복을 의미한다. 틸틸과 미틸이 파랑새를 찾기 위해 헤매지만 결국 집안의 새장에서 파랑새를 찾게 되는 모습을 통해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주제를 전해준다. 의식주가 해결되어도 영혼의 기갈은 해결되지 않았기에 파랑새를 찾아 헤맸던 것이고, 파랑, 파란색, 파랑새의 실체는 바로 시가 아닐까. 시인이 대상을 타자화하여 ‘그대’라고 부르지만 실은 자화상처럼 쓴 시가 있는데 보들레르의 시에도 나오는 새, 알바트로스이다. 보들레르가 친부를 잃은 이후 방탕한 생활을 하자 계부가 그를 배에 태워 인도양 항해를 억지로 하게 된다. 배에서 날개가 너무 커(거의 3미터나 된다) 선원에 잡혀 괴롭힘을 당하는 알바트로스를 보고 쓴 시가 자신의 저주받은 시인으로서의 운명을 다룬 「알바트로스」이다.
자주 선원들은 심심풀이로 붙잡는다
거대한 바다새인 알바트로스를
아득한 심연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배를
태평스레 뒤따르는 길동무를.
선원들이 갑판 위에 내려놓자마자
창공의 왕자는 서툴고 창피해하며
그 크고 하얀 날개를 배의 노처럼
가련하게 질질 끌고 다닌다.
날개 달린 이 여행객은 얼마나 어색하고 무기력한가!
조금 전까지도 멋있던 그는 얼마나 우습고 추해 보이는지
선원 하나가 담뱃대로 그의 부리를 성가시게 하고
절뚝거리며 다른 이는 더 이상 날지 못하는 불구자를 흉내내는구나!
시인은 폭풍우를 넘나들고 사수들을 비웃는
이 구름 속의 왕자와 비슷하다.
야유 속에 지상에 유배당하니
거인의 날개가 걷기조차 힘겹게 하는구나.
―「알바트로스」 전문(이건수 역)
창공에서는 왕자일지 모르지만 선원 하나가 담뱃대로 부리를 성가시게 하고 절뚝절뚝 불구자 흉내까지 낸다. 보들레르 자신 친부가 물려준 재산을 쓰지 못하는 한정치산자 선고를 받았고 시집은 외설죄와 신성모독죄로 유죄선고를 받아 벌금을 냈고 6편의 시는 아예 삭제를 해야만 했다. 애인 잔느 뒤발과의 연애도, 사바티에 부인과의 연애도 그에게 고통만 가중시켰다. 예술원 회원에 입후보하자 세상이 그를 손가락질하며 놀렸다. 그래서 이런 시를 쓴 것이다. 박흥순 시인은 생각이 달랐다.
피고 지는 꽃을 보고
미소짓거나 눈물훔치지 말 거라
어제 진 꽃은 먼 나라의 전설이고
내일 피는 꽃은 다른 나라의 꿈이란다
그대에게는 오직
오늘의 햇살이 있을 뿐
웃거나 슬퍼하는
그 사이
그대 검은 머리 위에
박꽃 만발할 것이다.
그대 옆에 떨어진
한 잎의 꽃
그 한 잎의 꽃이라도
우직한 손으로
정성들여 받쳐 들고
석양을 노래하며 날아가는
한 마리 알바트로스가 되는 것이다.
―「알바트로스의 노래」 전문
저주받은 새가 아니다. 알바트로스 그대에게는 오직 오늘의 햇살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 시인이 되어 시를 쓰고 있기에 “웃거나 슬퍼하는/ 그 사이/ 그대 검은 머리 위에/ 박꽃 만발할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 연은 시인으로서의 바람을 피력한 부분이다. 시인이 반드시 저주받은 존재가 아님을 천명하면서 남은 생을 시인으로 살아가리라 다짐하고 있다.
붉게 물들어가는 산을 보았다 북한강과 남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수종사에서 산사의 염불소리 찻잔에 함께 기울이며 붉은 잎으로 변해가는 나뭇잎과 가는 세월 그 의미를 음미하여 본다 멀리 두 물줄기 강물이 스스럼없이 한 강으로 흐르는 사연을 먼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에게 물어보았다 두 강물은 소용돌이치지 않고 어찌 하나가 되느냐고, 강물은 언제 붉게 물드느냐고, 구름은 하얗게 손만 흔들고 하늘은 파랗게 웃기만 하였다, 두물머리를 바라보고 있는 수종사의 세월과 타들어 가는 운길산을 바라보며 나는 찻잔을 기울이며 푸른 물방울 속 한 잎 낙엽으로 물들어가고 있다.
―「푸른 물방울 속 한 잎」 전문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이라는 각오는 또 다른 시에서도 하고 있다. “나는 찻잔을 기울이며 푸른 물방울 속 한 잎 낙엽으로 물들어가고 있다”는 것은 시인 자신이 파랑의 화신이 된다는 말이다. 구름은 하얗게 손만 흔들고 하늘은 파랗게 웃기만 한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이 캄캄한 어둠 속이었지만 이제는 파랑의 날만 이어지기를 기원한다. (시인ㆍ중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