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에게 보내는 소네트
- 롱사르 -
한 다발 엮어서
보내는 이 꽃송이들
지금은 한껏 피어났지만
내일은 덧없이 지리.
그대여, 잊지 말아요.
꽃처럼 어여쁜 그대도
세월이 지나면 시들고
덧없이 지리, 꽃처럼.
세월이 간다, 세월이 간다.
우리도 간다, 흘러서 간다.
세월은 가고 흙 속에 묻힌다..
애끊는 사랑도 죽은 다음에는
속삭일 사람이 없어지리니
사랑하기로 해요, 나의 꽃 그대여.
롱사르
다른 표기 언어 Pierre de Ronsard
출생 | 1524. 9. 11, 프랑스 쿠튀르 근처 라포소니에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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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585. 12. 27, 투르 근처 생코슴 |
국적 | 프랑스 |
요약 : '플레야드'(La Pléiade:칠성시파)라고 불리는 프랑스 르네상스 시대 시인들의 우두머리.
그는 방돔 현의 귀족 가문에서 작은아들로 태어났다.
1536년에 왕가의 시동으로 들어갔다가, 마들렌 공주가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5세와 결혼하자 공주와 함께 에든버러로 갔다. 2년 뒤 프랑스로 돌아왔을 때, 그의 앞에는 궁정 신하로 봉사하거나 군인 또는 외교관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다. 1540년에 그는 외교관 라자르 드 바이프와 함께 알자스 지방의 아그노에서 열리는 국제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이 여행에서 걸린 병으로 인해 귀가 어두워진 그는 학문과 문학 쪽으로 야심의 방향을 바꾸었다. 그와 같은 신분을 가진 사람에게는 교회가 유일한 미래를 보장해주었고, 따라서 그는 서품을 받고 하급 성직에 올라 성직록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한번도 사제로 임명되지는 않았다.
병이 나은 뒤에는 고전문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훌륭한 스승인 장 도라에게서 그리스어를 배웠고, 그당시 알려져 있던 그리스어 시와 라틴어 시를 모조리 읽었으며, 이탈리아 시에 대해서도 약간의 지식을 얻었다. 동료 학생들과 함께 문학 유파를 구성했는데, 옛날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한 7명의 고대 그리스 시인들을 본떠서 이 유파를 '플레야드'라고 부르게 되었다.
플레야드의 목표는 고대의 운문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프랑스 시를 짓는 것이었다.
자신의 첫번째 시집에 〈송가집 Odes〉(4권, 1550)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그가 고대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송가와 쌍벽을 이루는 프랑스 송가를 지으려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연애시집 Les Amours〉(1552)에서는 또한 힘찬 표현 양식과 풍부한 이미지로 연인에 대한 찬사와 간청 및 한탄이라는 연애시 형식의 전통적 특징에 생기를 불어넣음으로써, 이탈리아 '칸초네'의 해설자로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었다.
항상 새로운 문학적 영향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던 그는 얼마 전에 발견된 그리스 시인 아나크레온(BC 6세기)의 운문에서 신선한 영감을 얻었다. 1554년에 발표한 〈작은 숲 Bocage〉과 그의 가장 아름다운 전원시가 몇 편 실려 있는 〈시문집 Meslanges〉(1554), 또 시골 소녀 마리에게 보낸 〈연애시집 속편 Continuation des amours〉과 〈신(新)속편 Nouvelles Continuations〉에서는 아나크레온의 시에서 자극을 받은 쾌활한 작풍을 느낄 수 있다.
1555년에 그는 〈하늘의 찬가 Hymne du Ciel〉 같은 일련의 장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주로 자연 현상이나 죽음·정의 같은 추상 개념, 또는 고대의 신과 영웅들을 찬양하는 내용이었다. 이 시에 영감을 준 BC 3세기의 그리스 시인 칼리마코스의 시집 제목을 본떠 〈찬가집 Hymnes〉이라는 제목으로 출판된 이 시들은 감동적인 표현과 생생한 묘사를 보여주는 구절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현대 독자들의 관심을 처음부터 끝까지 붙잡아둘 만한 작품은 거의 없다.
어린시절의 추억에서 영감을 얻은 〈운명에 대한 하소연 Complainte contre fortune〉 같은 시들은 〈시문집〉 제2권(1559)에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어린시절 숲속을 혼자 헤매던 일과 자신의 천직이 시인임을 발견한 과정이 자주 묘사되어 있다. 이 시는 또한 신세계의 식민지화를 비난한 것으로도 주목할 만하다. 그는 신세계 주민들이 손상되지 않은 자연 상태, 즉 자신의 어린시절과 비슷한 상태 속에서 살고 있는 고귀한 야만인이라고 생각했다.
종교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극단적인 왕당파로서 가톨릭 교도의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신교도의 적개심을 불러일으켰다.
반대자들을 반역자며 위선자라고 비난한 〈이 시대의 불행에 대한 논설시 Discours des misères de ce temps〉(1562)·〈논설시 Discours〉등은 모두 이 시기에 쓴 글들이다. 그러나 이 시기에 그의 충실한 숭배자인 젊은 왕 샤를 9세의 격려를 받아 연애시도 많이 썼고, 1571년 왕이 오스트리아의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때는 왕의 명령을 받아 시를 짓고 파리 시내를 지나 식장으로 들어가는 길을 장식하는 일을 맡기도 했다.
당시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프랑스의 계관 시인이 되어 있었지만, 국민 서사시로서 쓰기 시작한 〈라 프랑시아드 La Franciade〉는 좀처럼 진척되지 않았다. 베르길리우스의 위대한 라틴어 서사시 〈아이네이스 Aeneid〉를 다소 모방한 이 시는 샤를 9세가 죽은 뒤 중단되었고, 1572년에 4권으로 출판되었다. 그를 별로 좋아하지 않던 앙리 3세가 즉위한 뒤로는 거의 은퇴생활을 했지만 그의 창조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1578년에 출판된 그의 작품집에는 주목할 만한 새로운 작품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특히 옛날 집 근처의 숲이 파괴된 것을 〈가스틴 숲의 나무꾼들에 대하여 Contre les bucherons de la forêt de Gastine〉, 〈마리의 사랑 Les Amours de Marie〉의 속편, 〈엘렌을 위한 소네트 Sonnets pour Hélène〉 등을 들 수 있다.
오늘날 그의 작품집 가운데 가장 유명한 〈엘렌을 위한 소네트〉에서 이 노련한 시인은 궁정 연애시의 판에 박힌 유형을 되살리는 데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한 마지막으로 병석에 누워 죽음을 기다릴 때에도 여전히 세련된 형식을 갖추고 고전문학을 많이 언급한 시를 썼다. 그가 죽은 뒤에 나온 〈마지막 시집 Les Derniers Vers〉은 잠들기를 갈망하면서 새벽을 기다리고 죽음을 기원하며 혼자 고통 속에서 밤을 보내는 불치병자의 고뇌를 표현하고 있다.
그는 그때까지 프랑스 운문에서 너무 길고 산문적이라는 이유로 기피했던 12음절 시구인 알렉산더격 시구를 완성하여, 이를 신랄한 풍자와 애가체의 부드러움 및 비극적인 열정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수단으로 확립했다.
그는 강력한 지성과 폭넓은 학식을 갖춘 사람이었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국가적 명사일 뿐 아니라 시인들의 왕자로 인정받기도 했다. 19세기에 들어와 빅토르 위고가 나타날 때까지 롱사르와 비교될 만한 시인은 거의 없었지만, 17~18세기에는 이 중요성이 상대적으로 차츰 소홀히 취급되었다.
그러나 낭만파 비평가인 생트 뵈브가 그의 명성을 원래대로 회복시킨 뒤부터 롱사르의 명성은 지금까지 확고하게 유지되고 있다.
20세기 독자들에게 있어 그의 글이 가장 호소력을 갖는 이유는 자신의 고향인 시골을 찬미하고, 젊음과 아름다움의 덧없음을 한탄하며, 짝사랑의 다양한 상태를 표현할 때이겠지만, 고대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나 상황을 상상 속에서 자신과 동일시하고 불타는 애국심이나 깊은 인간애 같은 감정을 표현할 때에도 그에 못지않은 감명을 준다.
그는 서정적 주제와 형식을 능숙하게 다루었고, 그가 쓴 시는 현대의 작곡가들에게 지금까지도 여전히 매력적인 소재가 되고 있다. "애인아, 보러 가자, 장미꽃이…… Mignonne, allons voir si la rose……"와 같은 송가는 16세기에만도 6번씩이나 곡이 붙여져, 프랑스 일반대중에게 민요처럼 친숙한 곡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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