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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편의 詩

사랑의 고통 / 데이비드 H. 로렌스

by 바닷가소나무 2018. 2. 15.

사랑의 고통


               - 데이비드 H. 로렌스 -


그대를 사랑하는 고통

나는 도저히 견디지 못할 거예요.


걸으면서도 그대를 두려워해요.

그대 서 있는 그곳에서

어둠이 시작되고

그대가 나를 처다볼 때

그 눈으로 어스름밤이 다가와요.

오, 태양 속에 머무는 그림자를

난 여태껏 본 적이 없어요.


그대를 사랑하는 고통을 나는

돕저히 견디지 못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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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스

다른 표기 언어 D(avid) H(erbert) Lawrence


요약 테이블
출생1885. 9. 11, 영국 노팅엄셔 이스트우드
사망1930. 3. 2, 프랑스 앙티브 근처 방스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소설가·단편작가·시인·수필가.

D.H 로렌스(David Herbert Lawrence)

영국의 소설가

20세기 영국의 주요작가로 당대에 떠들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주요작품으로는 〈아들과 연인 Sons and Lovers〉(1913)·〈사랑하는 여인들 Women in Love〉(1920)·〈날개 달린 뱀 The Plumed Serpent〉(1926)과 여러 나라에서 외설시비로 인해 발매금지당한 〈채털리 부인의 사랑 Lady Chatterley's Lover〉(1928) 등이 있다.


광부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어머니는 교직에 있으면서 시도 쓰는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1898년 장학생으로 노팅엄 고등학교에 입학, 졸업 후 회사의 서기와 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21세에 노팅엄의 유니버시티 칼리지에 진학했다. 1908년 이스트우드를 떠나 크로이든의 데이비드슨로드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일찍 창작을 시작했는데 처음으로 발표한 작품은 〈노팅엄셔 가디언 Nottinghamshire Guardian〉지에 실린 소설이었다. 첫 문학 친구 포드 매덕스 휘퍼(포드 매덕스 포드)의 도움으로 1910년 〈잉글리시 리뷰 English Review〉지에 처녀작 〈흰 공작 The White Peacock〉(1911)을 발표했다.


2번째 소설 〈침입자 The Trespasser〉(1912)는 친구 헬레나와 함께 한 아일오브와이트 섬 여행을 다룬 작품이다. 이 작품은 휘퍼의 마음에는 들지 않았으나 당시 덕워스출판사의 출판 고문이었던 에드워드 가넷은 이 소설을 호평했고 그후 한동안 로렌스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그의 삶에서 결정적인 시기는 1912년 4월 프리다 위클리를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녀는 독일 귀족 폰리히트호펜 가문 출신이며 노팅엄에서 로렌스를 가르쳤던 교수의 아내였다. 1912년 5월 그들은 독일로 떠났고 이때부터 지칠 줄 모르는 방랑의 삶과, 그의 많은 후기 작품들의 주제를 이루게 되는, 힘들지만 극도로 친밀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잠시 이탈리아에 머물렀다가 영국에 돌아온 그들은 1914년 7월에 결혼했다. 최초의 소설다운 소설인 〈아들과 연인〉은 많이 팔리지는 않았지만 이 작품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1914년 첫 단편집 〈프로이센의 사관 외(外) Prussian Officer and Other Stories〉를 발표했고, 1913년에는 이미 최초의 시집 〈연시 외(外) Love Poems and Others〉가 출판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그의 인생의 암흑기였다. 영국 각지를 유람하면서 세상의 공포를 피할 수 있는 이상적 공동체 '라나님'(Rananim)을 꿈꾸었으며 수시로 친구들에게 그곳이 어디에 있든 함께 참여할 것을 촉구했다. 〈무지개 The Rainbow〉를 발표하면서 에드워드 가넷과 불화가 생겼고 사회적으로는 외설 혐의로 판매금지당했다.


계획중이던 플로리다 행이 건강과 프리다의 여권 문제로 연기되자 1916년 콘월 주(州)의 세인트아이브스 부근 젠노의 한 오두막에 살게 되었다. 그러나 그해 5월에 징집당해 군당국에 의해 여러 차례 기분 나쁜 일들을 겪었는데 처음으로 경험한 신체검사와 그밖에 전쟁 때 겪은 체험이 〈캥거루 Kangaroo〉(1923)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로렌스 가족은 1917년 콘월에서 작가라는 직업과 긴 수염, 아내의 국적이 독일이라는 사실 때문에 의심과 반감을 받게 되었다.


그해 10월에는 그곳 경찰의 이주명령에 따라 그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런던과 더비셔를 전전해야 했다.


전쟁이 끝나자 로렌스는 다시 미국행을 생각했고 미국의 출판사를 통해 돈을 벌려고 좀 특이하지만 뛰어난 〈미국 고전문학의 연구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1923)를 썼다. 한편 1919년 10월 독일과 이탈리아로 각기 떠난 프리다와 로렌스는 재회하여 시칠리아의 타오르미나 근처에 머물렀는데 그당시 사르데냐 여행은 〈바다와 사르데냐 Sea and Sardinia〉(1921)라는 여행담으로 발표되었다.


1920년에는 재정 상태가 좋아졌다. 미국에서 그의 작품이 팔리기 시작했으며 〈무지개〉의 재판과 〈사랑하는 여인들〉의 출판을 기꺼이 맡아준 런던의 출판업자 마틴 새커의 도움도 컸다. 새커에게 판권을 넘긴 작품 중에는 〈길 잃은 소녀 The Lost Girl〉(1920)도 있다. 1920년 여름 독일에서 프리다의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자신의 심리이론을 다룬 논문 〈무의식의 환상 Fantasia of the Unconscious〉(1922)을 썼고 단시간에 〈아론의 지팡이 Aaron's Rod〉(1922)를 완성했다.


1921년이 되자 유럽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더욱 간절해졌다.


프리다와 함께 가거나 혼자 이탈리아·독일·오스트리아를 방랑했으나 정처없는 마음은 더해갔고, 작품 〈사랑하는 여인들〉이 런던의 저속한 신문으로부터 '부패에 대한 역겨운 연구'라고 비난받자 유럽에 대한 혐오는 더욱 커져갔다. 그래서 실론에서 불교를 공부하는 미국인 부부 얼과 아크샤 브루스터의 초청을 받아들여 프리다와 함께 그곳 방갈로에 머물렀으나 곧 불교와 실론에 반감을 느껴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났다.


실론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쓴 소설 〈캥거루〉에서는 성(性)과 권력에 관한 신비적 주장 및 〈아론의 지팡이〉에서 제시한 바 있는 구원의 문제를 잠시 멀리하고, 프리다와 함께 하는 생활방식이 그들에게 준 결과들을 돌이켜보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1922년 여름 마침내 〈바다와 사르데냐〉를 격찬한 미국의 부유한 여성 마벨 도지의 초청을 받아들여 미국의 뉴멕시코 타오스 여행단에 합류했다.


이곳에서 그는 자주 로렌초라고 불렸는데 도지는 자신과 로렌스, 프리다, 그밖의 다른 친구들 사이에서 처신하기 어려운 관계를 묘사한 뛰어난 작품 〈타오스에서의 로렌초 Lorenzo in Taos〉(1932)를 발표했다.


1923년 3월 멕시코로 간 그는 아스텍 문명에 매료되었고 라고데샤파라의 해수욕장에 은둔, 〈날개 달린 뱀〉을 쓰기 시작했다. 그해 7월 유럽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뉴욕으로 갔으나 멕시코에 대한 향수를 이기지 못해 떠나지 않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우유부단함에 화가 난 프리다는 결국 혼자서 유럽으로 갔다. 1923년 12월 런던에 돌아와 프리다를 다시 만났고 곧 함께 멕시코에서 새로운 사회운동을 이끌 친구들을 찾았는데 캐서린 카즈월의 〈야만의 순례 The Savage Pilgrimage〉에는 로렌스가 이러한 내용을 호소한 카페 로열의 오찬모임이 잘 묘사되어 있다. 1924년 3월 귀족 친구 도로시 브렛과 런던을 떠나 타오스로 갔으며 그곳에서 마벨 도지와 프리다의 대립은 브렛의 출현으로 더욱 깊어만 갔다. 1924~25년 겨울에 건강이 매우 악화되었으며, 죽는 날까지 나빠진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1925년 9월 로렌스는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해 훌륭한 단편소설 〈세인트 모어 St. Mawr〉를 발표했는데 이 단편이 실린 책에는 〈공주 The Princess〉도 함께 실렸다. 또 멕시코에서 쓴 소설 〈날개 달린 뱀〉은 1926년에는 빛을 보았다. 한편 로렌스 부부가 제노바 근처 스포토르노에 살 때 오랜 친구인 비평가 존 미들턴 머리와의 우정에 금이 가고 말았다. 머리에 의하면 로렌스의 여동생, 프리다의 딸, 그들의 변함없는 벗 브렛 등으로 이루어진 로렌스 서클에 참여하라는 로렌스의 요청을 거절한 것이 발단이었다고 한다. 1926년 4월 로렌스 부부는 피렌체로 옮겼고 고대 에트루리아에 관심을 갖게 되어 사후에 출판된 수필 〈에트루리아의 이곳저곳 Etruscan Places〉(1932)을 썼다.


말년에 이르러서 그림과 창작으로 시간을 보냈으며 마지막 소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완성했다. 이 작품에는 작가의 사회에 대한 신랄한 저주와, 새로운 성관계만이 현대 문명세계를 치유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다. 이 소설은 피렌체(1928)와 파리(1929)에서 한정판으로 나왔으며 영국(1932)에서는 많은 부분이 삭제되어 출판되었다.


외설 시비로 레지나와 펭귄출판사의 떠들썩한 오랜 법정싸움 끝에 뉴욕에서는 1959년, 런던에서는 1960년에야 비로소 완본이 출판되었다.

로렌스는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쓰면서 건강이 급격하게 나빠졌다. 〈팬지 Pansies〉(1929)는 역시 사회에 대한 증오를 담은 가벼운 시이며 신랄한 소설 〈죽은 남자 The Man Who Died〉(1931)도 이 무렵에 완성되었다. 미국에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의 해적판이 나오고 런던에서는 경찰이 자신의 그림 전시회를 금지하자 격분하여 더욱 신랄한 시 〈쐐기풀 Nettles〉(1930)과, 〈최후의 시집 Last Poems〉(1932)에 실린 〈More Pansies〉를 써서 분노를 달랬다.


피렌체를 떠난 1928년 6월부터 1930년 요양소에서 결핵으로 운명하기까지 죽음과의 처절한 투쟁을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했다. 그는 임종 전까지도 작품을 써 〈요한의 묵시록〉의 해석서 〈묵시록 Apocalypse〉(1931)을 완성했다.


로렌스는 매력적인 개성으로 그를 아는 모든 이들을 사로잡았다. 그가 남긴 서간문·소설·시와 여러 편의 산문, 자서전적 기록에도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나 있다. 그를 보는 시각은 다양하다. 캐서린 카즈월은 〈야만의 순례〉(1932)에서 매력적이고 현명하며 동정심이 있는 인물로 묘사했고, 머리는 〈여자의 아들 Son of Woman〉(1931, 새로운 서문이 실린 재판 1954)에서 부정적이고 병적이며 증오심에 가득찬 인물로 나타냈다.

다만 확실하게 결론지을 수 있는 것은 다양한 면모의 복잡한 인물이라는 점이며 그의 사상, 메시지, 예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만의 심리적·사회적 문제에 대한 연구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는 상상의 문구들로 자신의 능력을 상당부분 실현시킨 독창적인 천재였다. 로렌스의 모든 소설이 그의 천재성을 충분히 발휘한 것은 아니다.


가장 뛰어난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무지개〉와 〈사랑하는 여인들〉이 꼽힌다. 이 작품을 보면 마치 커다란 도화지 위에 세부묘사의 상당한 부분이 얼룩졌거나 급히 그려진 듯하지만 전체로서는 대담한 상상력의 효과를 거두고 있는 그림을 연상하게 된다. 여기에서의 주제는 결혼한 남녀 관계이다. 그의 뛰어난 작품들은 성관계를 깊이있게 보여주며 그것의 실재(實在)를 조명하고 그 의미를 대담하게 해석했다.


로렌스의 시도 소설 못지 않게 독자적인 가치가 있다.


유년기를 보낸 곳의 방언으로 쓴 시를 제외한 초기시는 필치가 불분명하고, 지나치게 문어체에 의존해 종래의 전통적 시형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그는 전통적인 시 형식과 과감하게 결별하고 독자적인 시형을 개발했으며 자유와 자발성에 의해 존재와 벗겨진 자아의 떨리는 순간을 표현해냈다. 그의 시는 〈보라! 우리는 이렇게 극복하였다! Look! We Have Come Through!〉(1917)에서처럼 자전적 요소가 강하다. 그러나 영시사(英詩史)에 큰 공헌을 한 작품은 지중해 연안과 미국 남서부지역의 경치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 유례없이 독창적인 자연시 〈새, 짐승, 꽃 Birds, Beasts and Flowers〉(1923)이다.


분량은 많지 않지만 서간문에 대한 평가도 빼놓을 수 없다.


서간문에서는 다양한 논조와 넘치는 생동감으로 폭넓은 영역에 걸쳐 그 자신과 편지를 받는 이의 관계, 방랑생활에서 겪은 유쾌한 일, 우울한 일, 예언자적 명상 등을 완벽하고 훌륭하게 표현했다. 이러한 서간문은 작품 전체에 대한 매우 훌륭한 서문 역할을 했다.


로렌스는 위대한 작가였지만 항상 신중하거나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지나친 감정 때문에 통찰력은 흐려지고 반복되는 어조는 문체를 망쳤다. 모든 작품에서 언어는 생활 속의 즉각적인 감정들을 표출했다. 또 너무 빠르게 스쳐가 포착하기 힘든 감각과 직관을 표현하려다가 더듬거리게 되고 과도하게 주장하거나 반복을 일삼다가 난해함에 빠지기도 했다. 그러나 유기적 구성방식을 개척하고 결코 감정과 감각에 이성을 배제시키지 않음으로써 그보다 더 신중한 작가의 작품은 부자연스럽고 차가워 보이도록 만드는 위대한 상징문학의 탑을 세웠다.


소설·시·수필에서 표현하려고 한 것은 인간의 총체성이었으며 그가 표현한 것은 무엇이든 삶의 깊은 자극에서 비롯된 감정들로 충만해졌다. 그는 혼탁하고 혼돈된 세상이라고 규정지은 현대문명세계에서 작품을 통해 형식과 일관성을 발견하려고 노력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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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