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2일
『죽이지 말라』ㅡ는 말은 다만 인간에게만 관한 말이 아니다. 모든 살고 있는 생명에게 대한 말이다.
그리고 이 가르침은 성서에 나타나기 전부터 모든 인간이 마음속에 나타나 있던 것이다.
1
그러나 양이나 토끼를 불쌍하게 생각한다면 늑대나 쥐도 역시 불쌍하다고 하여야할 것이라고 채식반대론자들은 말한다.
우리는 늑대나 쥐도 역시 불쌍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우리들에게 미치는 해독을 살생으로써 아니라 다른 방편으로 막아 보려고 노력도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찾을 수가 있다. 또한 벌레 같은 것들에게 대해서도 직접적인 연민을 느끼지 않는다 하더라도, (리프텔베그는 동물에 대한 연민은 그 동물의 크기에 비례 한다고 말하였다) 마찬가지로 연민을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예컨대 시리오 페리마가 거미에게 느끼는 연민과 같이) 그리고 그들의 해는 살생함이 없이 막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식물은 어떠냐. 식물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대들은 식물의 생명을 빼앗고 있지 않는가?』 하고 채식반대론자는 다시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 자체가 채식논의 본질을 정의한 것이며, 그 충분한 범의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채식은 과실, 즉 그 속에 생명을 가지고 있는 종자의 껍질을 먹는 그것이다. 예컨대 배, 복숭아, 수박, 참외, 딸기 등이 그것이다.
위생학은 이와 같은 식사가 가장 건강에 적합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식사를 하고 있을 때에는, 사랑은 어떠한 생명도 빼앗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이와 같은 식사를 하고 나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종자의 껍질은 맛있는 것이며 사람은 과실을 따서 먹음으로써, 씨를 땅에 뿌리고 식물을 번영하게 한다는 그것이다.
2
광대한 토지가 사유지로 되어버린 그것이 과실을 아쉬운 것으로 만든 것이다. 토지가 공평히 분배되면 될수록 과실은 더욱더 많이 산포되는 것이다.
3
채식에 반대하는 여러 가지 논거기 있다. 그리고 육식논자는 그런 논거를 확신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록 어떠한 것이라 할지라도 인간은 양이나 닭을 죽이는 것을 보면 불쌍한 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그런 감정은 양의 군고기나 닭볶음을 먹는 만족이나 영양으로서는 치를 수 없는 것이다.
4
인류의 교화가 진보되고 인류의 수효가 늘어감에 따라서 인간은 인육 식에서 동물식으로 옮아간다.
그리고 동물식에서 식물의 씨나 뿌리를 먹고 그 다음 다시 이 시대부터 참으로 자연스러운 과실 적을 하게 된 것이다.
*
육식하는 어리석은 부정의와 해악을, 도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명백해지고 있다.
오늘날에 있어서는 육식은 올바른 판단에 의해서 지지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옛날부터의 전통과 남의 시사와 그리고 습관에 의해서만 지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명백한 육식의 어리석음을 사람들에게 이해시키는 것보다 실례로써 그 시사를 파괴해 버리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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