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명순 시집 『햇빛 미사』
서 천
누군가 빨간 수박 반쪽을 먹다가
서산 골짜기 위에 걸쳐놓았다
참 달디 달게 생겼다
마침 갈증이 나던 차에
아삭아삭 단물 흘리며 마저 먹어 버리려고
손을 뻗어 수박을 집으려는 순간
어두운 하늘이
나보다 먼저 순식간에 먹어치워 버린다
먹으며 흘린 수박물만 서산위에 붉게 젖는가 했더니
곧 말라버린다 깜깜한 어둠이다
더욱 목이 탄다.
노명순 시인의 시집 『햇빛 미사』가 그의 유고시집으로 출간되었다. 갑작스런 사고로 유명을 달리한 시인을 보내면서 당혹스런 안타까움을 어쩌지 못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1989년『월간문학』으로 등단한 시인은 시집『살아있는 것은 모두 따뜻하다』,『서천』,『눈부신 봄날』등을 상재했으며 이번이 그 네 번째 시집이다. 10여 년 동안 시극공연가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던 시인을 기리는 뜻으로 이번 문학아카데미에서 출간한 노명순 시인의 유고시집 속에는, 생전에 시집으로 엮지 못한 작품과 발표작 중에서 선별한 68편의 시가 시극 공연을 하는 화보 속의 그의 모습과 함께 실려 있다.
시인이 떠난 지 1년여의 시간이 지났건만 화보 속 시인을보니 금방 손을 휘휘 저으며 걸어 나올 것만 같다. 노명순 시인의 시집 리뷰를 쓰기로 마음먹고 시집을 펼쳐들기를 참 여러 번 반복하였다. 2010년 숲속여름시인학교에서 강우식 시인의 시「어머니의 물감상자」를 시극으로 올린 것이 노명순 시인에게는 마지막 공연이 된 반면 필자에게는 시인과 호흡을 맞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만 아쉬움 때문일까 시집을 펼쳐 들 때마다 엉킨 언어의 봇물이 가슴 속을 먹먹하니 적시는 바람에 이성적 언어를 생각해 내기 어려웠다.
시인의 시편을 읽다보면 가스통 바슐라르가 『촛불의 미학』에서 언급한 ‘촛불은 혼자 꿈꾸는 인간 본래의 모습 그 자체이다. 속으로 애태우면서 절망과 체념을 삼키는 외로움이나 그리움은 혼자 조용히 타오르는 이마주와 같은 것이다.’ 라는 구절이 떠오른다. 태생적으로 존재의 고독에 익숙했을 시인은 촛불처럼 스스로를 태워 빛을 발하는 내면의 시어로 외로움이나 그리움을 또 다른 꿈인 몸짓언어로 표현하는 능력도 가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의 시편 곳곳에서 드러나는 불의 이미지는 원형질의 정열을 불러오는 그의 魂처럼 느껴지는 동시에 그의 혼이 추구하는 상상의 신우주, 그곳으로 향한 또 다른 길을 보여주고 있음이다.
“누군가 빨간 수박 반쪽을 먹다가/ 서산 골짜기 위에 걸쳐 놓았다/”로 시작하는 위의 시「서천」을 음미해보자. 시인은 서산에 지는 해를 누군가 먹다 놓아둔 달디 단 수박으로 형상화하였다. 독자로 하여금 금방 입안에 침이 고이도록 시각적인 욕구를 자극하고 있다. “마침 갈증이 나던 차에/ 아삭아삭 단물 흘리며 마저 먹어 버리려고/ ” 에서는 시인의 탁월한 상상력으로 시적화자의 적극적 개입이 활기를 띄며 다음 행로로 진행한다. 점진적 시행이 던져주는 긴장감은 “손을 뻗어 수박을 잡으려는 순간/ 어두운 하늘이/ 나보다 먼저 순식간에 먹어치워 버린다/” 로 나아가면서 절정과 절망의 순간을 동시에 맛보게 한다. 절묘한 시행 배치로 꿈이 주는 행복과 꿈을 이루지 못한 허탈감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먹으며 흘린 수박물만 서산 위에 붉게 젖는가 했더니/ 곧 말라버린다 깜깜한 어둠이다/ 더욱 목이 탄다.” 허탈감의 잔상은 미련이라는 작은 기다림을 기대하게 된다. 그러나 혹여나 하는 기대는 캄캄한 어둠이 되어 시적화자의 갈증을 배가 시킨다. 시적화자의 내면을 뜨겁게 했던 불꽃은 그 불꽃의 열기를 식혀 줄 대상인 물의 이미지, 수박을 끌어옴으로써 우주적 상상력의 조화를 이루어내고 있다.
타자의 개입으로 달디 단 수박을 놓치는 순간 시적 화자는 원형적 어둠 속으로 들어가 이루지 못한 욕망으로 더욱 깊은 갈증을 느끼게 되고 이는 다시 도래하게 될 순간을 기다리는 그리움의 연속성상 위에 스스로를 존재하게 한다. 노명순 시인의 숨결이 느껴지는 그의 시작들을 통해 그는 늘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느끼면서 새 우주의 꿈을 키워나갈 것이다. 물과 불의 혼이 된 그의 시혼이 그를 숨 쉬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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