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총 / 이계설
빗맞은 사냥감이 눈 위에 선혈을 토하고 사라진 날부터 나는 총을 접어 두었다 마치 가정 파괴범이나 되는 것인 양, 죄의식의 사슬에 포박되었기 때문이다 납탄 자국이 얼마나 깊었으면 핏자국마다 붉은 가시가 자랐을까 지금도 눈이 오면 그 선명한 영상이 가슴을 찌른다
그러나 나는 매일밤 사냥을 떠난다
긴 총신을 겨누며
닥치는 대로 참새, 호랑이, 코끼리, 사람등
끝없는 욕망을 향해 부질없이 총질을 해대는 것이다
죄의식마져 전혀 느끼지 못한 채
땀에 젖어 눈을 뜨면
밤의 구릉을 힘겹게 넘어온 머리카락들이
여기저기 폐잔병처럼 널려 있다
몇 시 쯤일까
단정히 넥타이를 매고
빗질을 하고
로션도 문지른다
이제 가면만 뒤집어쓰면
수없이 쏘고 싶은 충동은 아랑곳없이
총을 한 번도 발사한 적이 없는 척
시치미를 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하루도 가면 뒤에는 얼마나 많은 본성이 잔털을 세울 것인지
가면 위로 털들이 삐져나온다
가늠쇠 사이로 넘나드는 표적들, 눈이 어리다
정조준된 순간
탕
오줌을 지리듯
나도 모르게 방아쇠를 당긴다
뒤로 넘어지는 낯익은 그림자 하나
'느낌이 있는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골목길 사생활 / 허이영 (0) | 2015.06.07 |
---|---|
석류 / 문리보 (0) | 2015.06.07 |
꽃샘 / 박찬세 (0) | 2015.05.08 |
보림사, 얼굴없는 부처 / 이대흠 (0) | 2015.05.05 |
목 련 / 정한모 (0) | 2015.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