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미천왕 설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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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때의 설화로 《삼국사기(三國史記)》 권17 〈고구려 본기〉에 전한다. 고구려 제15대 왕인 미천왕이 즉위하기 전에 왕손(王孫)의 신분을 감추고
살았던 피신시절의 행적을 전하는 이야기로서, 3세기 후반의 고구려 사회상을 전하는 사실적인 자료로서 가치가 높다. 미천왕의
이름은 을불(乙弗)이며, 서천왕(고구려 제13대 왕)의 아들인 고추가(古鄒加) 돌고의 아들이다. 큰아버지인 봉상왕(고구려 제14대 왕)이 즉위한
다음 해에 백성의 신망이 두터운 동생 돌고를 역모자로 몰아 죽이자 을불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신분을 감추고 숨어지내야 했다. 처음에 을불은
수실촌의 부호인 음모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는데, 음모는 을불의 신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밤낮으로 심하게 일을 시켰다. 어떤 때는 연못의 개구리가
울지 못하게 밤새도록 연못에 돌을 던지게 해 잠을 자지 못하기도 했다. 이렇게 1년을 지낸 을불은 괴로움을 견디다 못해 집에서 나와 동촌으로 가
그곳에서 소금장수 재모를 만나 함께 소금을 팔러다니게 되었다. 어느날
을불은 배를 타고 압록강 동쪽의 사수촌이란 마을로 가서 한 노파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숙식비로 소금을 달라고 해 소금 한 말을 주자, 노파는
더 달라고 했다. 을불은 한 말이면 적당한 값이라고 생각해 더 주지 않았다. 그러자 노파는 앙심을 품고 자신의 신발을 몰래 을불의 소금짐 속에
넣어 두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을불이 소금짐을 지고 그 집을 나서자, 노파가 뒤쫓아와 자기 신발을 찾아내고는 압록태수에게 고소했다. 태수는
을불에게 절도죄를 물어 태형을 가하고 소금자루는 빼앗아 노파에게 주었다. 이처럼 고단한 나날을 보내던 중 봉상왕의 폭정이 더욱 심해지자
국상(國相) 창조리(倉助利)는 무도한 왕을 폐하고 새 왕을 옹립하기 위해 조불과 소우를 몰래 보내 을불을 찾게 했다. 비류강가에서 을불을 만난
이들은 을불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한 후 창조리와 만나게 했다. 남몰래 을불을 받들던 창조리는 그 해(300년) 9월, 봉상왕이 후산(侯山)으로
사냥을 떠나자 사냥터에서 신하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나와 뜻을 같이할 사람은 모두 나를 따라 하라."고 말하며 갈대잎을 모자에 꽂으니
모두가 그렇게 했다. 봉상왕을 폐한 창조리는 을불을 즉위시켰으며, 왕위에 오른 을불은 고구려의 국력을 크게 키웠다. 331년 2월 을불이 세상을
떠나자 미천원(美川原)에 장사지내고 미천왕이라 했다. 어려서 갖은 고생을 겪은 뒤 자라서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한다는 내용의 이야기는 백제 무왕(武王)의 어린시절 이야기인 서동요(薯童謠)나 고구려의 장군 온달(溫達) 이야기와 궤를 같이하는 것으로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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