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난한 선비 이야기
보은설화
옛날, 청빈한 한 선비가 살고 있었다. 선비의 생활이라 가세는 곤궁하기 이를 데 없고, 50이 가깝도록 슬하에 자식을 두지 못했다.
어느 해 동지 섣달, 눈이 쏟아지고 모진 바람이 부는 겨울밤이었다. 이 선비 내외는 추운 방에서 잠자리에 들어 말을 주고 받았다.
“여보, 오늘날까지 당신을 고생만 시켜 미안하기 한이 없소.”
하고 선비가 말을 꺼내자 부인이,
“왜 그런 말씀을 하세요. 임자를 만나 아무것도 더 바랄 것이 없으나, 오직 슬하에 혈육이 없어 선조의 향화를 끊게 되었으니 소첩의 죄 죽어 마땅하오나 임자의 은덕으로 살고 있어 몸둘 바를 모르나니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여보 밖에 날씨가 추워지는가 봅니다. 어서 주무세요.”
하고 막 잠이 들려고 하는 때에 어디선지 ‘사람 살려주오’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선비는,
“밖에서 사람 소리가 나는데 이 추운 날씨에 웬 사람인가?”
하고 일어나 문을 열어 보았다. 한 걸인이 눈을 맞으며 벌벌 떨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하였다. 선비는 걸인을 친절히 안내하여 방으로 들어왔다.
“안사람은 윗방으로 올라갔지요. 방이라고 하지만 냉방 같습니다. 아랫목 이불 속으로 들어오시지요.”
하면서 이불을 들어주었다. 걸인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이 선비가 등잔불에 비친 걸인의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니 얼굴에 종기가 난 문둥이었다. 선비는 부인을 불러 손님이 오셨으니 식사를 올리라고 했다. 부인은 밖으로 나갔다. 선비도 방에 불을 때기 위해 부엌으로 나가니 부인이,
“좁쌀이 아침거리밖에 안 되는데 지금 밥을 지으면 내일 아침은 죽거리밖에 안 되는데요.”
하자 선비는,
“여보, 손님인데 밥을 지어야지요. 불은 내가 지피겠소.”
라고 했다.
얼마 후 밥상을 들고 들어간 선비는 이불을 밀어 놓고,
“어서 밥을 드시오. 얼마나 시장하시겠습니까?”
하니 걸인은 아주 고마워하였다. 걸인은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웠다. 상을 물리고 둘이 나란히 잠자리에 들었다. 부인은 윗방에서 자리에 누웠다. 잠시 후에 걸인은,
“주인 양반 잠이 들었습니까?”
선비는 막 잠이 들려고 하던 참에 손님이 말을 청하여 눈을 떴다.
“예, 그런데 어찌해서 안 주무십니까. 무슨 걱정되는 일이 있는지요.”
“주인 양반이 보다시피 저는 온 몸에 종기 투성이지요. 더운 물로 목욕이라도 하고 나면 가려운 데가 좀 시원할 텐데, 어렵지만 물 좀 데워주실 수 있을까요?”
선비는 귀찮다는 기색도 없이 부엌으로 나가 목욕할 물을 데웠다. 부엌에서 나오려고 하니 걸인은 등을 밀어달라고 부탁했다. 더럽고 악취가 났지만 선비는 아무 소리도 없이 걸인을 불쌍하게 생각하여 정성껏 닦아주었다. 닦고 나니 걸인이,
“주인 양반은 들어가시지요. 저는 물기를 닦고 천천히 들어가리다.”
라고 했다. 선비는 방에 먼저 들어가 누워서 걸인이 들어올 때를 기다렸으나 걸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해서 부엌으로 나가보니 걸인은 온데간데가 없었다. 집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아무리 기다려도 걸인은 돌아오지 않았다. 선비는 궁금하고 이상한 생각을 하면서 늦게서야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이들 부부가 일어났다. 선비가,
“여보, 간밤에 난 이상한 꿈을 꾸었소.”
하니, 부인도,
“예? 저도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요.”
“그럼 부인이 먼저 이야기 해 보오.”
부인은 간 밤에 꾼 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잠이 깊이 들었는데 밖에서 ‘이 선비’ 하고 부르기에 문을 열고 내다보니 어떤 백발 노인이 ‘그대들은 죽어가는 사람을 살렸으니 활인지덕(活人之德)을 베풀었소. 내일 뒷산에 올라가 목욕 재계하고 천제를 지내면 옥동자를 낳아 부귀 영화를 누리리라. 명심 불망할지어다’ 하면서 미처 인사도 못 했는데 백발노인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더군요.”
“허어 어찌 그렇게 내 꿈과 꼭 같으오. 우리 자식이 없으니 천제를 지내 봅시다.”
선비 내외가 천제를 정성껏 지낸 달부터 부인은 이상하게도 태기가 있었다.
얼마 후 부인은 옥동자를 낳았는데, 이 아기는 무럭무럭 잘 자라서 학문에도 뛰어나 벼슬이 정승에 올랐다. 이리하여 이 선비 집안은 대대로 번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