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신화가 빈곤한 나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현실을 숭상하고 공상을 경시하는 중국인의 현세주의와 그 속에서 생성된 유교적 이념의 제약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정통적인 경서, 사서는 모두 <괴(怪), 역(力), 난(亂), 신(神)을 논하지 않는> 공자(유교)의 교설에 충실한 나머지 낭만적인 신화적 요소를 밖으로 따돌리기나 한쪽 구석으로 치워 버려 일부러 무관심을 가장해 보이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이 고대 중국인의 소박하고 건강한 신화 전설의 존재 형태를 알려고 하는 경우에는 그들 정통적인 경서, 사서보다는 오히려 비정통적인 고전이나 민간 전승 속의 자료를 찾아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중국 신화의 의하면 천지와 함께 태어난 신의 이름은 반고이다. 그러나 반고의 이름은 처음 나타나는 것은 비교적 가까워 삼국 시대(서기3세기)에 씌어진 서정(徐整)의 <三五曆記>라는 책에 실려 있는데 거기에 적힌 바에 따르면 반고는 천지가 아직 나누어지지 않고 혼돈하여 계란의 알맹이 같은 상태였던 속에서 태어난 정신 없이 1만8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잠을 잔 후 하루에 1장씩 키아 자라는 눈부신 성장을 나타내어 그 체력으로 하늘과 땅을 상하로 밀어서 갈라 나갔다. 그리하여 다시 1만8천 년, 그 성장은 극점에 달하여 그의 키에 의해 갈라진 천지의 간격은 실로 90만 리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원시의 혼돈에서 천지를 분리시켜 세계를 만들어 낸 것이 반고의 억센 <육체의 힘>으로 얻은 서업이었다고 하는 이 설화는 근로를 존중하고 인력을 신뢰하는 고대 중국 민중의 건강한 사념의 소산으로서 더욱 흥미 깊게 읽힐 것이다.
반고의 천지창조의 상태를 정확하게 말하면 전지전능한 천지창조신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지만 그의 그 육체력의 초인간적인 점과 보통 사람이 아닌 점에 있어서 바로 신이며 자연 그 자체이었다.
그러므로 - 하고 다른 고전은 다시 말을 잇는다 - 반고가 죽음에 임했을 때 그 내뿜는 숨은 바람과 구름으로, 목소리는 천둥으로 화하고, 두 눈은 해와 달로, 혈액은 강하(江河)로 근맥(筋脈)은 도로로, 살과 가죽은 전토(田土)로 머리카락과 수염은 성신(星辰)으로 몸의 털은 초목으로, 치골(齒骨) 정수(精髓)는 금석주옥(金石珠玉)으로 흘러나오는 땀은 비와 이슬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죽음에 임하여 변신한 반고는 자기 몸 전체를 바쳐서 이 세상을 풍요하고 아름답게 하는 데 공헌한 것이다.
반고에 의어서 가장 오래된 신화적 세계에 나타나는 세 사람의 제왕(三柱의 神)을 <삼황>이라고 하는데, 누가 거기에 해당하는지는 제설(諸說)이 구구하다.
일설에 따르면 천황, 지황, 인황이라고 하나, 이것은 물론 천지, 인간의 성립을 의인적으로 설명하려고 한 합리적 신화이다.
그밖에 복희(伏羲), 여와(女와), 신농(神農)을 삼황으로 하고, 또 그 가운데 여와를 축융(祝融) 혹은 수인(燧人)에게 대치하는 설도 있으며, 예의 <십팔사략(十八史略)>에서는 복희, 신농, 황제(黃帝)를 이에 해당시킨다.
이들 제신에 관해서는 아래에 다시 언급하겠으나, 그 중에서도 여와의 인간 창조, 천지 보수(補修)의 신화는 가장 이색정채(異色精彩)에 뛰어나고, 다른 신들에게는 각각 인간의 문명 생활의 창조자, 추진자의 역할이 배정되어 있다.
성경의 하느님(여호와)은 흙먼지로 사람을 빚어 넣어 생명의 기운을 그 콧속에 불어 넣었으므로 <사람 즉 생명 있는 인간이 되었다>고 되어 있는데, 여와의 인간 창조도 얼마간 그것에 가깝다.
다만 그녀의 경우에는 인간 제조의 재료는 흙먼지가 아니고 황토이다.
그것을 손으로 주물러서 인간을 만드는데 아무튼 무대가 풍부한 황토지대인 중국이고 보면 재료에는 아쉬움이 없는 대신에 그만큼 일은 바빠진다.
그래서 그녀는 수고를 더는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내어, 먼저 흙탕에 반죽한 황토 속에 거친 새끼를 집어넣어 질척하게 휘저은 다음 적당한 때를 보아 새끼를 꺼내어 그 새끼 끝에서 땅 위로 뚝뚝 떨어지는 흙탕이 엉긴 것을 그대로 인간으로 만들었다. 얼마간 대량 생산 공정(工程)이다. 그러나 수고를 덜고 만든 인간과는 자연히 됨됨이가 달랐다. 즉 인간 중에 부귀한 자와 빈천한 자가 있는 것은 그것이 원인이라는 것이다. 긴 중국의 역사를 특색 짓는 사회 계급의 분화와 인구 과잉 현상을 설명하는 기발한 인간 창조설이 아닌가.
고매는 교매(郊매), 고매(皐매)라고도 적는다. 이것은 혼인의 신, 자식을 주는 신을 말하는데 그 고매신으로 모셔지는 것이 다름 아닌 여괘이다.
인간 창조의 큰 역사를 완수한 여괘는 창조한 인간들이 끊어지지 않고 영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인간의 남녀가 그들 자신으로 자손을 만들어 낼 수 있도록 혼인제도를 정했다. 사람들이 여괘를 고매 즉 혼인의 신으로 모시는 연유이지만, 동시에 결혼했어도 아이가 없는 자는 다시 한 번 고매에 대하여 자기들의 혼인이 완전히 성취되도록 기원한다. 이와 같이 하여 여괘는 인간의 창조신일 뿐만 아니라, 혼인의 신이기도 하며, 자식을 주는 신이기도 하다는 빛나는 영광을 지고 중국 민중의 신앙 속에 길이 생명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인간의 창조와 아울러 여와가 이룩한 대사업은 <보천(補天)> 즉 천공(天空)의 보수 사업이다. 언젠가 물의 신인 공공(共工)과 불의 신인 축융이 큰 싸움 끝에 진 공공은 분함을 참지 못하여 자기 머리를 부주산에 들이받았다.
부주산 꼭대기에는 하늘을 받치는 하늘의 기둥과 천주를 대지에 이어 주는 밧줄이 있었는데, 공공의 난폭한 행동으로 천주는 부러지고 지유는 끊어져서 그 때문에 하늘은 서북으로, 땅은 동남으로 기울어지고 구멍이 뚫린 하늘에서는 큰 비가 패연(沛然)하게 쏟아지고, 하천에는 대홍수가 졌으며, 산림에 사는 맹수와 흉조가 날뛰기 시작하더니 인간에게 덮쳐 왔다.
그것을 본 여와는 서둘러 강물 속에서 오색의 돌을 찾아내어 불에 녹여서 어울려 이기더니 창천의 큰 구멍을 막고, 바닷속에 사는 거대한 바다 거북의 네 다리를 잘라서 부러진 천주 대신으로 하고, 또 물가의 갈대를 베어 모아서 그것을 태운 재를 쌓아 범람하는 강물을 막았으며, 맹수와 흉조를 죽여서 겨우 지상의 평온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천지의 경사만은 완전히 되돌리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도 중국 대륙은 서북과 동남으로 기울어진 채로 있어서 가끔 홍수가 사람을 괴롭힌다고 한다.
수인씨의 이름은 <삼황>의 한 사람으로 꼽히지만, 이에 유소씨를 선행시켜 인간 생활의 진보를 설명하려 하는 합리적 신화도 있다.
한비자(韓非子)의 오낭편에 따르면, 상고 시대에는 백성이 적었고 금수와 뱀, 벌레의 해에 시달렸기 때문에 유소씨가 나타나서 나무 위에 둥우리를 지어 그 재해를 피하게 했다. 또 백성이 초목의 열매를 날로 먹고 조개 등 비리고 나쁜 냄새가 나는 것을 날로 먹어서 위장이 상해 병이 났으므로 수인이 나타나서 부싯돌을 써서 불을 일으켜 비린내를 가시게 하는 방법을 발명했다. 즉 인간의 소거(巢居) 생활, 화식(火食) 생활의 시작을 표징하는 것이 이 신들이다.
<십팔사략>에는 <태호(太昊) 복희씨, 풍성(風性), 수인씨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는데 몸은 뱀이요 머리는 사람이었다>고 적혀 있다. 수인씨는 화식의 발명자로 알려졌으나 복희도 역시 역시 그것과 인연이 없지 않다. 그의 이름은 포희(包羲) 또는 포희(포羲)라고도 했는데, 이 이름들은 <희생을 길러서 포주(포廚)를 채운다>든가 <희생을 포락(포烙)한다>는 의미로 풀이된므로 사람들에게 동물의 고기를 익혀서 음식으로 제공할 것을 가르친 것을 그의 공헌으로 친 것이리라.
그는 또 역의 팔괘를 만들어 인사의 길흉을 점치고 서계(書契=文字)를 발명하고 그물을 짜서 물고기와 짐승을 잡는 기술을 고안해 내고, 다시 여괘를 처로 삼아 둘이서 혼인의 예를 정했다고 한다.
이 사람도 삼황의 하나로 꼽히는 신농, 즉 염제(炎帝) 신농씨는 그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우선 농업의 신이다. 염제 즉 태양의 신이기도 한 그는 사람들에게 가래를 써서 경작을 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태양의 빛과 열로써 풍요하게 자라게 하여 인간의 식생활에 공헌했을 뿐만 아니라, 태양이 중천에 걸리는 한낮(정오) 때를 표준으로 하여 사람들을 사장에 모아 교역(=상업)의 길을 가르쳤다. 이 점에서 그는 상업의 신이지만, 거기다가 다시 의약의 신으로도 모셔진다.
태양은 원래 건강의 원천이므로, 태양의 신인 그가 건강 지키기를 목적으로 하는 의약과도 깊은 관계를 가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느 전설에 의하면 그는 산야를 돌아다니며 신통력을 가진 붉은 회초리(자편)으로 약초를 매질하여 각 풀의 독성의 유무나 각종 효능을 분별하여 사람들의 질병 치료를 도왔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맹독이 있는 단장초(斷腸草)를 빨았기 때문에 장이 녹아서 생명을 희생당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신농에게는 딸이 셋 있었는데 그녀들의 운명은 각기 달랐다. 한 딸은 단지 신농의 소녀라고만 불리고 있어 이름을 알 수가 없다. 그녀는 아버지 밑에서 비를 다스리는 일을 맡아 보았고, 후에 수련에 의해 선인이 된 적송자(赤松子)의 선술(仙術)을 동경하여 자기도 그 뒤를 따라 여선이 되었다고 한다.
또 한 딸은 여왜(女娃)라고 한다. 아직 젊었던 그녀느 어느 날 동해로 미역을 감으러 갔다가 파도에 휩쓸려 익사했다. 그리하여 그녀의 영혼은 정위라는 작은 새로 살았다. 정위는 자기 생명을 빼앗은 동해에 부질없이 끈질긴 보복을 꾀하고 매일 서쪽 한에서 작은 돌과 작은 나뭇가지를 물어다가 거칠게 날뛰는 동해의 파도 상이에 떨어뜨려 이것을 다 메우려고 했다. 이것이 <정위전해>의 고사인데 일반적으로는 무모한 일을 꾀하여 헛일로 끝나는 비유로 삼고 있으나, 관점을 달리한다면, 일의 성사를 도외시하고 뜻에 순(殉)하는 끈기 있는 노력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겠다.
나머지 한 아가씨인 요희도 역시 여왜와 같이 아주 아름답고 정열적인 소녀였으나, 나이 차서 더구나 아직 이성의 사랑을 받느 기쁨도 모른 채 처녀의 몸으로 죽고 말았다. 얼마 지나서 고요산이라는 산 중허리에 가련한 노란 꽃을 피워 열매를 맺은 한 포기 요초(瑤草)야말로 그녀의 화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풀의 열매를 따먹은 자는 누구든지 반드시 이성의 사랑을 받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어린 봉오리인 채로 죽은 요희의 운명을 가련하게 여긴 천제는 이윽고 그녀를 사천성에 있는 무산에 파견하여 운우(雲雨)의 신에 봉했다. 그 후로 그녀는 아침에는 미련한 아침 구름이 되어 산꼭대기 근처를 떠돌아다니고 저녁에는 쓸쓸한 저녁비로 변하여 골짜기에 내려 풀 길 없는 가슴속의 정열을 달랬던 것이다.
훨씬 후세 - 전국시대(BC3세기) 말에 초나라의 회왕과 또 그의 아들 낭왕이 운몽택(늪의 이름)에서 노닐며 고당의 대(臺)에서 쉴 때 꿈길의 베갯머리에 환영처럼 나타난 무산의 여신- 요희가 타는 듯한 정열을 다하여 두 사람과 차례로 인연을 맺었다는 정사의 전말은 초나라의 궁정시인 송옥(宋玉)의 <고당부(高唐賦)>, <신녀부(神女賦)> 두 편에 의해 세상에 전해진다. 남녀의 비사(秘事)를 무산의 꿈 또는 무산의 운우라고 익히 부르는 기원이 이것이다.
여와(女와) 때에 난폭을 일삼아 천리를 혼란에 빠뜨린 물의 신 공공(共工)은 이른바 황폐의 신으로서 감당할 수 없는 난폭자였고, 그의 어린이나 하인들도 모두 그를 본떴다. 오직 한 사람, 수(修)라고 하는 아들은 한량없이 착한 사람이었다. 소탈한 성품에 여행을 좋아하여 각지를 방랑하였고, 갈 만한 곳이면 어디라도 표연히 떠나는 식이었으므로 그의 사후 사람들은 그를 여행의 신으로 모시게 되었다. 소위 도신(道臣), 행신(行神)이라고 불리는 이가 그 사람이다. 그래서 후세에서는 사람들이 여행을 떠날 때에는 길가에서 도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아울러 송별 잔치를 베풀어 여행의 평안을 빈다. 이것이 이른바 도연(道宴), 도전(道餞)인데, 이 도신(道神) 신앙이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전래하여 보급되어 있는 것은 아는 바와 같다.
염제(炎帝) 신농씨 후 같은 성이 이어지기 8백 년이었고 바뀌어서 출현한 것이 황제 헌원씨(軒轅氏)이다. <황제>란 그 발음으로서는 <황제(黃帝)>와 통한다. 후세에는 진(秦)의 시황제 같은 현세의 황제도 나타나지만, 본래는 황제란 <皇天上帝>, 즉 천상을 지배하는 최고 주신(主神)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천상 세계의 황제는 그 중앙인 천궁(天宮)에 살며, 신들의 보좌를 받으면서 사방을 통할하는 중앙신이며 그에 걸맞게 네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황제, 황색의 제왕이란 중국에 군림하는 제왕이란 뜻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황색은 다름 아닌 중국의 빛깔이기 때문이다. 만만(漫漫)한 물이 천고(千古)에 흘러오고 흘러가는 황하와 그 주변의 멀리 바라다보이는 끝간 데 없이 메워 나가는 비옥한 황토의 평야로 구상되듯이 황색은 중국의 빛깔이기 때문이다.
누런 빛깔의 나라 - 중국 최고(最古)의 제왕으로서 황제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경앙(敬仰)의 표적이 되었다. 따라서 황제에게는 또 복희, 신농보다도 중국 문명의 개발자로서의 수많은 영예가 주어져 있다.
그는 소거(巢居)나 혈거(穴居) 대신에 처음으로 가옥을 만들었다. 그는 실과 삼으로 의복을 짜는 것을 생각해 냈다. 그는 배와 수레를 발명하여 교통의 편리를 개척했다. 문자를 만들고 천문역산(天文曆算)의 학문을 일으킨 것은 그였다. 약초를 조사하고 의료의 기술을 넓힌 것도 그였다. 시장에 엄중한 관문을 설치하고 또 격탁(擊柝, 딱딱이를 치는 일)으로써 외부로부터의 침입자를 막은 것도 전신의 무기로는 궁시(弓矢)나 지남차(指南車, 언제나 남쪽을 가리키는 방향 지시기를 단 병사용 수레로서 아마 자석의 응용이었으리라)를 발명한 것도 그라고 한다.
황제의 부하에 치우라고 하는 사나운 신이 있었다. 그는 사람 몸뚱이에 소의 발굽을 가졌고 눈이 넷이요, 팔이 여섯 개 있었고, 더구나 구리로 된 머리에 이마는 쇠로 되어 있었고, 쇠와 돌을 주워 먹는 괴상한 모양을 한 괴이한 성품의 신이었고, 죽지 않는 몸을 가지고 싸움에 능한 난폭자였다. 이윽고 그는 그 형제로서 마찬가지로 구리 머리에 이마가 쇠로 된 괴신(怪神) 72인과 힘을 합쳐 풍백(바람의 신), 우사(비의 신)도 자기 편에 끌어들여 황제에게 반기를 들었다. 황제는 그 소식을 듣고도 우선 판천(阪泉=하북성의 땅)에서 싸우고, 이어서 그 북쪽 탁록(탁鹿)에서 다시 결전에 임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치우는 풍백, 우사의 활동으로 큰 바람과 큰 비를 일으켜 짙은 안개를 일게 하고 그 사이에 동두철액(銅頭鐵額)의 괴신군(怪神軍)과 이매망량(리魅망량)의 요괴군을 활동시켜 황제군을 괴롭혔으므로, 만만찮은 황제군도 얼마간 고전을 면치 못하였으나, 그는 쩔쩔매는 군사들을 독려하며 예의 지남차를 선두로 하여 농무(濃霧) 속을 헤쳐 나가고, 또 천상으로부터 불러 모은 자기 딸 발(魃)이라는 여신의 도움을 받아 풍우와 농무를 물리치고 계속 싸웠기 때문에 치우도 마침내 힘이 다하여 황제의 군문에 항복하였고, 천하는 겨우 평온을 되찾았다고 한다.
황제가 치우와의 싸움에 왜 자기 딸인 발(魃)을 기용했느냐 하면 이런 이유가 있다.
그녀는 여신이면서 얼굴이 못 생긴 데다가 머리는 번들번들 벗겨져 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체내에 대단한 열기가 충만하여 용광로처럼 이글이글 타고 있었기 때문이며, 그 열기를 토해 냄으로써 치우가 터뜨려 놓은 풍우와 농무를 소산(消散)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싸움을 끝낸 발은 이미 그 정력을 다 써 버려서 이미 천상으로 돌아갈 신통력을 잃고 지상에 머물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녀가 있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그 열기 때문에 가뭄이 들어 온통 건조하여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게 되므로, 사람들은 그녀를 <한발>이라고 부르며 원망하였다.
그래서 황제가 그녀늘 적수(赤水=성서성) 북쪽으로 추방하고 논의 숙균(叔均)에게 명하여 그 행동을 감지시켰으나, 그녀는 감시의 눈을 피하여 가끔 도망을 꾀했고 도망간 데서는 또 가뭄을 만나며, 우선 논의 물길이나 골을 깨끗이 치고는 <신이여, 북쪽으로 가소서!> 하고, 가뭄의 원인인 발을 적수 북쪽으로 내쫓으면 된다고 한다.
치우(蚩尤)의 난 후에 황제의 천하는 평온이 계속되었다. 황제는 치우를 평정한 전공을 기념하기 위해 수양산에서 파낸 구리로 큰 보정(寶鼎)을 만들게 했다. 이윽고 천상의 신들은 오래도록 천계(天界)를 비웠던 황제를 맞아 귀환시키기 위해 한 마리의 신룡(神龍)을 파견하였다. 그리하여 황제는 지상의 생활을 고별할 결심을 굳히고 주된 신하와 황후들 70여 사람과 함께 그 신룡의 등에 업히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그 용의 수염에 매달리어 같이 데려가기를 탄원하였으나 원래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소원이었다. 황젤르 태운 신룡이 승천을 함에 따라서 용의 숭염은 모조리 뽑히었고 그것에 매달렸던 사람들은 지상에 떨어졌다. 가엾게 여긴 황제는 석별의 포로 애용하던 활을 지상의 사람들에게 던져 주었으므로 사람들은 그 활을 끌어안고 슬픔의 눈물에 잠기었다. 이리하여 그 활은 오호(嗚呼=흐느껴 욺)라고 이름지어지고 이별의 장소는 정호(鼎胡=寶鼎 위의 용의 수염)라고 명명하였다. 그 때 빠져 떨어진 용의 수염이 지상에서 자라 용염초(용의 수염)라는 풀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삼황>에 이어서 천하를 다스리게 된 것은 소호(少昊), 전욱(전頊), 제곡(帝곡), 제요(帝堯), 제순(帝舜)의 <오제>이다(오제를 세는 법에도 여러 설이 있어 예컨대 <사기>에서는 소호 대신에 황제를 꼽지만, 여기서는 <십팔 사기>를 따른다). 위 오제 가운데 소호는 황제의 아들, 전욱은 황제의 증손, 제곡은 소호의 아들(또는 손자), 제요는 제곡의 아들, 제순도 일설에 의하면 전욱 6세의 손자로 치므로 <오제>는 우선 <황제 일가>로 보아도 좋겠고, 또 그들이 <오제>로서 표창되는 것은 한결같이 모두 고조(高祖)인 황제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는 유덕한 제왕이었기 때문임에 틀림없다.
우선 오제의 첫 자리에 자리한 소호는 <십팔 사기>에 따르면 <소호 김천씨, 이름은 현효(玄효), 황제의 아들이며, 또 청양(靑陽)이라고도 한다. 그가 일어서면 가끔 봉새가 찾아왔다. 새로이 관(官)을 터 잡았다>라고 만 씌어 있을 뿐이다. 영조(靈鳥)인 봉새의 출현은 원래 치세의 상징이며, 새로운 관을 다 잡았다는 것은 그 봉새의 출현에 연유하여 제관(諸官)의 관명(官名)을 붙였다는 정도의 의미이겠으나, 다른 전설을 참작하여, 이에 신화적 연역(演繹)을 베풀어 보면 이러하다.
우선 봉새라는 것은 세상에도 드문 영조로서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 영조가 간택에 따라서 소호의 세상에 출현한 것은 그가 다름 아닌 조족(鳥族)의 신이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되는 점이 있다. 그렇다면 그가 <새로써 관을 터 잡았다> 함은 실은 <새를 관에 임명했다> 즉 그가 세운 왕국이 조족 지배의 나라였다고 생각할 수 있으리라. 그러므로 그는 우선 봉새를 수상에 임명하고, 교육상에는 온순한 비둘기, 국방상에는 용맹한 독수리, 건설장에는 세심한 뻐꾸기, 법무상에는 준엄한 매, 그밖에도 적재적소의 임용으로 천하를 다스렸다고 한다. 그 정도로 물욕, 권세욕이 왕성한 대신병 환자의 내각이 아니었으니만큼 세상도 무사하게 다스렸을 것이다.
오제의 둘째, 전욱 고양씨는 <십팔 사시>에 따르면 <남정(南正=관명)인 중(重)에 명하여 하늘을 다스림으로써 신을 따르게 하고, 화정(火正=관명)인 여(黎)에게 명하여 땅을 다스림으로써 백성을 따르게 하여, 서로 침범하여 더럽힘이 없었다>고 되어 있으나, 그 신화적 연역은 이러하다.
그 옛날 하늘과 땅을 반고(盤古)에 의하여 상하로 밀리어 떨어지기는 했으나, 그 후에도 천지간의 교통은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러나 하늘과 땅, 신과 인간의 관계가 너무 헐렁한 것은 <우주 질서>의 확립을 위해 유해 무익하다고 판단한 전욱은 힘이 센 중, 여 두 신에게 명하여 하늘과 땅을 힘대로 완전히 겨리시켜 신계(神界) 질서를 구분했다는 것이며, 이것은 다시 인간 세계에 있어서의 계급 사회, 봉건 질서의 형성도 시사한다. 그래서 다른 고전(古傳)에 따르면 그는 또 예법을 엄히 하고 남존여비의 제도를 강화했다고 한다.
전욱 고양씨의 봉건 군주로서의 인품은 과연 <명군(明君)>이라 할 만하나, 또 그만큼 민중의 반감을 사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므로 그의 자손 중에는 뒤에 나오는 제순(帝舜)이나 하(夏)의 우왕(禹王) 같은 성왕(聖王)도 있지만 직계 자식들에는 쓸모 없는 사람이 많다. 어느 고전(古傳)에 의하면 그에게는 세 아이가 있었으나 셋이 모두 태어나서 곧 죽은 다음 악귀가 되어 사람들을 괴롭혔다. 하나는 강물에 정착해거 학질이 되어 이 세상에 병균을 퍼뜨리고, 하나는 정화수에 정착해서 사람의 목소리를 써서 사람들을 괴롭히며 나머지 하나는 작은 도깨비가 되어 인가의 지붕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종기를 퍼뜨리거나 아기들을 놀라게 했다. 이 인가에 숨어 있는 악귀를 쫓는 행사가 후세의 구나(驅儺), 액막이의 기원이다.
오제의 셋째 제곡 고신씨는 <태어나면서 신령하여 스스로 그 이름을 말할> 만큼 조숙한 신동(神童)이었고, 갖가지 악기와 음악을 짓게 할 만큼 문화 군주의 성품을 발휘하였으나, 그것보다도 그의 명성은 그 자식에 제요(帝堯)를 비롯하여 은(殷) 왕조의 시조인 설(契)과 주(周) 왕조의 시조인 후직(後稷)을 낳았다는 순혈종적 가계(家系)의 우수함으로 드높여졌다고 할 수 있으리라.
지금이나 옛날이나 계보라는 것은 믿을 만한 것이면서도 믿지 못할 물건이지만, <사기>나 <십팔 사기>의 기재를 신용한다면 제곡이 제후(諸侯)의 한 사람인 진봉씨(陳鋒氏)의 딸을 취하여 낳은 것이 제요고, 둘째 부인인 간적(簡狄)이 낳은 아들이 설이요, 첫째 부인인 강원(姜原)이 낳은 아들이 주의 후직이라는 것이다(뒤에 나오는 은주 제왕의 감생 전설> 강원, 강적의 항 참조).
오제의 넷째, 다섯째로 꼽히는 제요(帝堯), 제순(帝舜)이라고 하면 <논어>, <맹자>를 증거로 끌어대지 않더라도 우리들에게 귀에 익은 고대의 <성왕(聖王)>으로 알려졌다. 물론 현대 사회의 과학적 논증으로 따진다면 요순은 아직도 유사 이전의 가상전설적 인물에 지나지 않지만, 옛날부터 중국인의 뇌리에 깊이 새겨진 성천자(聖天子) 요순의 이미지는 오늘 역사학자가 아무리 <요순말살론>을 부르짖더라도 결코 지워지지 않을 만큼 선명하며, 유교의 경전인 <오경(五經)>의 하나로 꼽히는 <서경>의 기술도 우선 요순의 사적으로부터 시작이 되어 있다.
<고복격앙(鼓腹擊壤)>의 고사를 비롯하여 요순에 관한 이야기는 적지 않지만, 단지 그것들을 너무도 유교적 분식(粉飾)이 농후한 성천자 예찬의 이야기 투성이로서 이미 소박하고 건강한 신화의 테두리에서는 밀려나가 버렸다고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제곡 고신씨 때에 만장(蠻將)인 방왕(房王)이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제왕은 나라의 멸망을 우려하여 <만일 방왕의 목을 잘라 오는 자가 있으면 황금 1천 일(鎰)과 1만 호(戶)의 읍을 상으로 내리고 내 딸을 주리라>하고 포고했다. 그랬더니 제왕의 애견(愛犬)인 반호가 얼마 동안 자취를 감추었는데 이윽고 방왕의 목을 물고 돌아왔다. 제왕은 상대가 개이므로 약속의 실행을 주저했으나, 공주는 <황제가 약속을 어김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옵니다>하고 스스로 반호의 아내가 되었다. 후에 부부 사이에 3남 6녀가 태어나서 그 자손은 점점 번영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것을 견융(犬戎)의 나라라고 불렸다고 한다.
일종의 이족(異族) 결혼담이며 또 부족 신화설이지만, 반호는 예의 천지 개벽신인 반고(盤古)와 음이 비슷한 데서 양자를 관련시켜서 생각하는 학자가 많다.
제준의 이름은 <오제> 속에 포함되지 않았고 또 정통 사서 속에도 보이지 않는다. 어느 고전(古傳)에서는 이를 황제(黃帝) 혹은 제곡(帝곡)이나 제순(帝舜)의 이칭(異稱)이라고도 하지만, 은(殷) 민족의 조상이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서 본다면 제곡에 가장 가깝다.
제준에게는 아황(娥皇), 희화(羲和), 상희(常羲)라는 세 아내가 있었고, 아황은 삼신국(三神國=머리 하나에 몸이 세 개인 사람이 사는 나라)을 낳았다고 전해지며, 희화는 태양의 여신으로서 태양의 아들 열을 낳았고, 아들들을 차례로 올려 보내어 하계에 빛을 주었고, 또 상희는 달의 여신으로서 달의 딸 열둘을 낳아 이들을 차례로 하늘을 올려 보내어 밤을 밝게 하였다고 한다.
열의 태양, 열둘의 달이라는 것은 십간(十干), 십이간(十二支)의 사상과도 결부될지 모르지만, 태양과 달의 아버지 신으로서 제준의 존재는 주목할 만하다.
후예는 천상에 사는 활의 명인인 신이다. 혹은 단순히 예라는 것이 바르며, 후예는 조금 후의 하(夏)시대에 나온 예의 자손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제요(帝堯) 때의 일이다. 제준이 낳은 열 개의 태양이 차례차례 천상에 올라가는 동안에 무사하고 순조로웠으나, 언젠가 그들이 의논을 한 끝에 반장난으로 열 사람이 일시에 하늘을 건너기 시작했기 때문에 지상은 갑자기 염열(炎熱) 지옥으로 화하고 농작물은 타고 초목은 시들었으며, 하천은 말라 버렸다. 제요도 이 뜻하지 않은 천재에는 어쩔 도리가 없어서 제준은 활의 명수인 후예를 하계로 보내어 어떻게든 원만하게 사태를 처리하라고 명했는데, 재주를 자랑하는 후예는 지상에 내리자 약간 높은 언덕에 올라서서는 마침 탈 듯이 햇살을 내리쏟고 있는 열 개의 태양을 겨냥해 활을 쏘아 보기 좋게 아홉 개의 태양을 떨어뜨렸다. 마지막엔 오직 하나의 태양만이 남게 되어 덕분에 지상의 사람들은 다시 온화한 햇빛의 은혜를 입게 되었으나, 후예는 그 난폭한 처리 때문에 제준의 분노를 사서 지상으로 추방되는 운명이 되었다고 한다.
항아(상아라고도 하는데)도 천상의 여신이다. 후예의 아내였으나 추방된 후예와 함께 신에서 인간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그 후 후예는 지상에서 실의의 생활을 보냈고, 아내와의 사이도 점점 나빠져 가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곤륜산에 사는 서왕모(西王母)라는 여신이 불로불사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는, 그를 찾아가 그것을 얻어서 돌아와 아내에게 맡겼다.
약을 맡은 아내 상아는 후예가 집을 비운 사이에 혼자서 그 약을 마셨더니 신기하게도 그녀는 몸이 공중에 둥둥 뜨면서 하늘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계에서 추방된 몸이니 이제 새삼 그리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우선 월궁(月宮)에 날아가서 몸을 숨기려고 결심했으나, 월궁에 닿자마자 그녀의 몸은 점점 짧게 줄어들고 배와 허리가 옆으로 퍼지며 입이 갈라지고 눈이 튀어나오고 무서운 두꺼비로 변신해 갔다.
맑게 갠 밤에 달 속에 비치는 두꺼비의 그림자는 다름 아닌 상아의 구슬픈 말로이다. 이 <상아분월>의 고사는 후에 연극으로도 구성되고 있으며, 중국인에게는 친숙한 월궁 전설이 되어 있다
견우 직녀에 관한 것은 오래 전에 <시경>의 대동시나 <문선(文選)>의 고시(古詩) 19수 속에도 읊어져 있지만, 6세기 무렵에 쓰인 <형초세시기(刑楚歲時記)>의 기록에 따르면 이러하다.
은하수 동쪽에 직녀가 있었다. 그녀는 천제(天帝)의 딸로서 밤낮 없이 베짜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천제는 그녀의 고독을 가엾게 여겨 은하수 서쪽에 있는 신랑 견우에게 시집을 보내었다. 그런데 그녀가 결혼을 함과 동시에 베틀일에 게을러졌으므로, 천제는 분노하여 직녀를 다시 은하수 동쪽으로 돌아오게 하고, 그 후로는 한 해에 한 번 7월 7일 즉 칠석날 밤에만 만나기를 허락했다고 했다.
후세에서는 이 견우 직녀의 비련 이야기가 별을 향하여 소원을 비는 행사와 결부되어, 이른바 칠석제(七夕祭)를 성대하게 행하게 되고, 그 풍습은 우리나라에도 전래되었다.
<상아분월>의 고사에서 약간 비친 서왕모라는 여신에 관한 전설은 구구하다. <산해경(山海經)>이라는 책에 따르면 서왕모는 중국의 아주 서쪽에 있는 옥산(玉山)이라는 산에 살며, 그 형상은 사람을 닮았고 표범의 꼬리에 호랑이의 이빨을 가졌고, 시가를 잘 읊조리며 봉발(蓬髮)에 화승(華勝=머리 장식)을 달고 하늘의 여(려=액운과 질병의 신) 및 오잔(五殘=재앙 질병을 일으키는 별)을 다스린다고 하였다. 역병신(疫病神)의 단속을 임무로 하는 괴수(怪獸) 같은 색다른 신으로서, 단지 봉발에 화승을 달았다는 데에 여성다운 면모를 남기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서왕모는 그 후에 신비적이고 기품이 높은 여신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동왕공(東王公)이라는 동방의 남신(男神)과 한 쌍의 여신이라고도 한다.
<목천자전(穆天子傳)> <한무내전(漢武內傳)> 등의 소설에는 주(周)의 목왕(穆王)이나 한(漢)의 무제(武帝)와 교섭을 가진 서방 나라의 실존의 여왕이라는 형태로 묘사되고, 다시 후세에서는 도교(道敎)의 신으로서 민중의 신앙의 대상이 되고도 있다.
제요(帝堯)는 늙어서 측근의 추천에 따라서 제위의 계승자에 순(舜) 즉 제순(帝舜)을 간택하고, 우선 자기의 두 딸 아황(물론 제준의 아내 아황과는 다른 사람)과 여영을 시집 보내어 그 생활상을 관찰했더니, 과연 부부 사이가 화목하고 가정도 잘 다스렸으므로 요도 안심하고 후계를 제순에게 맡겼다. 그 후 두 사람은 제순과 해로하며 행복하게 살았으나, 아황에게는 자식이 없었고, 여영은 상균(湘均)이라는 아들을 낳았으나 불초한 어린이로서 제위(帝位)를 이을 만하지 못했으므로 순은 남몰래 우(禹=하나라의 시조)를 후계자로 작정했다.
이윽고 순은 즉위 후 39년 남쪽 나라들을 순행(巡幸)하며 창오(蒼梧)까지 가서 병이 들어 갑자기 세상을 떴다. 순의 남행(南行)을 따라 상수(湘水)까지 가 있는 아황과 여영은 돌연한 비보를 듣고 비탄에 잠겨 그 눈물은 근처 대나무에 스며들어 점점이 얼룩을 지게 했다. 지금의 상수 부근에서는 보라빛 반색이 있는 <반죽(斑竹)>이 생산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녀들의 피눈물이 화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윽고 두 사람은 죽은 남편을 그리워한 끝에 서로 부둥켜안고 상수 기슭에 <황릉비(黃陵비)>를 세워 모셨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두 왕비는 상수의 여신으로 화하여 각각 상군(湘君), 상부인(湘夫人)으로 불리었다. 전국(戰國)말의 초나라의 대신인 굴원(屈原)의 <상군>, <상부인>의 두 노래는 이 두 왕비를 애도한 노래라고 전해지고 있다.
산해경(山海經)에 따르면 제순의 아내로서 앞에 말한 아황이나 여영 대신에 등비씨(登比氏)의 이름이 적히어 있다. 그녀는 순과의 사이에 그 딸을 낳았다. 이름은 소명, 촉광이라 했고, 황하에 가까운 대택(大澤)에 살았으며 그 몸에서 발하는 후광(後光)으로 주위 백 리 사방의 땅을 언제나 환히 비추었다고 한다. 소명이라는 말이 쓰이는 소명성(宵明星)이라고 하는 말은 <새벽의 명성(明星)> 즉 샛별을 말하는데, 소명이나 촉광은 모두 밤의 어두움을 밝혀 주는 구실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제순의 이 두 딸은 이미 말한 제준(帝俊)의 태양의 달의 여신 희화(羲和)와 상희(常羲)의 이전(異傳), 와설(訛設)이라고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고대의 제왕 혹은 그 선조의 출생에 관하여 모친이 천제(天帝)의 신령을 느껴 그 사람을 낳았다고 하는 신비적 전설이라도 하는데, 그 대표적 사례로서 여기서는 은주(殷周) 제왕의 감생전설을 들어 보겠다. 위의 내용 중 제곡고신씨(帝곡高辛氏)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제곡과 그 두 번째 부인 간적(簡狄) 사이에 태어난 것이 은 왕조의 시조인 설(契)이며, 첫째 부인의 강원(姜原)과의 사이에 태어난 것이 주 왕조의 시조인 후직(後稷)이라고 하는데, 두 시녀와 함께 강에 미역을 감으러 갔다가 제비가 알을 떨어뜨리는 것을 보고 그것을 삼켜 설(契)을 배고, 강원은 들에 나가 거인의 무민(武敏=발자국의 엄지발가락)을 밟아 후직을 낳았다고 한다. 무민을 밟아서 잉태했다는 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있으나 거인, 즉 천제와 실제적인 교섭을 가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밖에 고대의 각 제왕에 관해서는 유사한 감생전설이 많이 지적되지만, 대개는 후세의 부회적(附會的)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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