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신화 여행
왜 한국 신화는 푸대접을 받는 걸까? 다른 나라들의 신화는 신비롭게까지 읽히고 제법 많이알려졌는데 우리의 신화는 슬프게도 외면을 받고 있다. 우리도 위대한 천손강림형(天孫降臨型)의 신화를 가지고 있는데 말이다. 그 신화 속으로 여행을 떠나 보자.
한국 신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태양 숭배이다. 하늘에 있는 신들이 땅에 내려와 나라를 세워 백성을 다스리는 건국 신화가 한국 신화의 주가 되어 있다. 고조선을 연 단군은 천제(天帝) 환인(桓因)의 손자로서 천제의 서자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군의 건국 신화는 단순 명쾌하지만, 거기에 철학이 존재한다. 거기에는 천제의 명령을 받아 지상에 내려와 나라를 열고 백성을 다스리는 구조가 잘 나타나 있다.
고구려나 신라, 가락국의 시조는 알에서 태어난 천손(天孫)으로서 난생(卵生) 신화가 건국 신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그것은 모두 천손강림형(天孫降臨型)의 수직적 세계관에 뒷받침되고 있다. 한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에는 국가의 쟁취나 양여(讓與), 신술(神術)에 의해 승패를 다투는 일도 있으나, 잔혹성이나 잔인성이 그다지 수반되지 않는다. 이들 신들이 민간에 전승되어 오는 사이에 수평형의 신이나 인격신(人格神)도 생겨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을 하느님,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것은 특정한 성격을 가진 신이 아니다. 전지전능한 절대신이다. 하느님은 하늘(우주)에 있는 신 즉 천제(天帝)이다.
<天>을 하늘, <一>을 하나라고 하는데 하느님은 하늘의 신을, 하나님은 하나의 신을 의미한다. <一>은 하나이며 동시에 전체이고 무한대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천(天)이다.
韓, 漢, 汗, 干, 一, 天 등의 문자가 최대 최고의 의미를 가지는 것은 천(帝)을 본뜬 것이다.
한국의 최고신은 천제이며, 고조선의 시조인 단군의 아버지(환웅)은 천제(환인)의 서자이다. 환인은 하느님, 하나님의 취음자(取音字)임에 틀림없다.
고조선, 고구려, 신라, 가락 등의 시조는 천손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와 건국의 시조가 되는 것처럼 천손강림형의 신화가 중심이 되어 있다.
천제인 환인에게 환웅이라는 서자가 있었다. 환웅은 언제나 하계(下界)를 내려다보며 하계에 생각을 쏟고 있었다. 그것을 안 아버지 환인은 환웅이 하계에 내려가는 것을 허락했다. 하계의 삼위태백(三危太白)을 내려다보면서 환인은 환웅에게 명령했다. <너는 하계에 내려가서 인간계를 다스리고 인간계에 유익을 가져다 주라>고. 환인에게서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하사 받은 환웅은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정의 신단수(神檀樹) 밑에 내려와 거기를 신시(神市)라고 이름 지었다.
하계에 내린 환웅은 바람, 비, 구름의 신들과 곡식, 목숨, 병, 선, 악 등 인간계의 3백60가지 일을 다스리고 인간계를 다스렸다. 환웅을 환웅 천왕이라고도 부르는데, 천신이 된 일도, 나라를 연 일도 없다. 나라를 연 단군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천왕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리라.
환웅이 내려온 것은 태백산정의 신단수 밑으로서, 즉 신단수를 거쳐서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다. 단수란 무엇인가? 이에 대한 학설은 많이 있지만 현조하는 서낭당(城隍堂)의 옛말 형태인 듯하다.
돌멩이를 만두 모양으로 쌓아올려 그 한가운데에 나무를 세우는 신목(神木)사상이라고 생각된다. 신목에 신이 접하거나 강림하는 형태는 성황 신앙의 강신(降神) 의식에서 볼 수 있다.
한국의 신들은 대개 신목을 통하여 강림하는 경우가 많다.
강신을 알리는 것은 신목에 매단 방울의 소리나 신목의 흔들림이다. 방울이 가장 많다.
환웅이 하계에 내려올 때 천제인 환인으로부터 천부인(天符印) 세 개를 받는다. 이 천부인 세 개는 무엇일까? 그 종류에 대해서 확실한 바는 없으나, 신령이 접한, 영검이 현저한 신기이다. 검과 거울과 방울이라고 생각된다. 방울 대신에 곡옥(曲玉)을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무당에서는 지금도 검과 거울과 방울이 쓰이고 있다.
환웅이 신들과 하계의 제사(諸事)를 다스린 것도 이 천부인 세 개로써 했다고 생각해도 좋다.
같은 동굴에 사는 한 마리의 곰과 호랑이가 환웅에게 인간이 되고 싶다고 빌었다. 보다 못한 환웅은 신령이 접한 쑥 한 다발과 마늘 스무 개를 곰과 호랑이에게 주고 이것을 먹고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인간이 된다고 일렀다. 그리하여 곰과 호랑이는 동굴에서의 은거가 시작되었다. 곰은 20일 만에 여자가 되었는데 그 여자는 웅녀(熊女)라고 한다. 호랑이는 은거를 참지 못해 인간이 되지 못했다.
곰과 호랑이의 신화는 토템 신앙에 의한 것으로서, 곰을 조상신으로 하는 부족이 이겨서 남고 호랑이를 조상신으로 하는 부족의 패퇴를 의미하고 있는 것 같다.
웅녀는 인간이 되었으나 혼인 상대자가 없었다. 그래서 매일 신단수 앞에 나아가 아이를 내려 달라고 빌었다. 그것을 보고 있던 환웅은 웅녀에게 신령(神令)에 의해서 수태를 시킨다. 이윽고 웅녀는 아들을 낳는다. 웅녀는 바로 성녀(聖女)로서 처녀 수태로써 아이를 낳는다. 웅녀를 어머니로, 천제 환인을 할아버지로, 강림한 신(환웅)을 아버지로 하여 난 아이이므로 단군 왕검이라고 이름 지었다.
단군 왕검(檀君王儉)은 당고(唐高)가 즉위하여 50년인 경인년(BC2333년), 서울을 평양에 정하고 조선국을 열었다. 후에 서울을 백악산의 아사달로 옮기고 1천5백 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주나라의 호왕(虎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에 바쳤으므로 단군은 기자에게 왕위를 물려 주고, 장당경(臟唐京)에 옮겼으나, 후에 아사달로 돌아와 산에 숨어서 산신이 되었다. 이 때 나이 1천9백8 세였다.
구월산에 환인, 환웅, 단조의 삼성(三聖)을 모신 삼성사가 있고, 각지에 삼신(성)을 모시는 사당이 있으나, 역사적 사실을 수반한 것은 아니다.
기자가 단군 왕검의 왕위를 이어 조선 왕국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중국의 사대사상(事大思想)이 가져 온 것으로서, 본래 단군 신화와는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이 아닌가 한다.
만주 북동쪽에 있던 북부여의 시조이다. 천제(天帝)가 대료(大僚)의 의주(醫州) 지방에 있는 흘승골성(訖升骨城)에 오룡차(五龍車)를 타고 내려왔다. 거기에 서울을 정하고 북부여국을 열어 그 왕이 되어 스스로 해모수라고 이름했다.
천제가 스스로 나라를 열어 시조가 된다는 신화가 특징적이며, 천제의 이름이 해모수라는 것도 진기하다. 해모수가 천제가 아니라 천제의 서자이거나 그 직계손이었다고 생각된다. 성인 <해>는 해(太陽)와 같은 음으로서 천손(天孫)을 의미하고 있다.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해모수와 관계가 있고 동부여 출신이라고 한다.
해모수의 아들 해부루는 천제의 명을 받아 북부여를 물려 주고 동쪽으로 피해 가서 동부여를 일으킨다. 부루는 왕위 계승자를 얻지 못해 산천에 아들을 점지해 달라고 빌었다. 부루가 탄 말이 곤연(鯤淵)이 이르러 큰 돌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그 돌 속에서 금빛 개구리의 모습을 한 사내아이가 나타났으므로 금와라고 이름 붙이고 왕자로 맞았고, 부루가 죽은 후 왕위를 이어 고구려 시조 주몽의 양아버지가 된다.
성북(城北)의 청하(靑河=지금의 압록강)에 하백이라는 수신이 있었다. 하백에게는 유화(柳花), 훤화(萱花), 위화(葦花)라는 세 딸이 있었다. 어느 날 자매들이 웅심연(熊心淵)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왕이라고 자칭하는 자가 나타나 자매 중에서 왕비를 선택하려 했다. 동생들은 빠져 달아났으나 유화는 정을 통하여 수태를 했다. 유화는 집을 쫓겨났다.
유화와 정을 통한 것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라고도 하고 단군이라고도 한다. 하백이 그 남자(신)의 신통보(神統譜)를 확인하기 위해 신기(神技)를 겨룬다. 사슴과 수달, 표범, 꿩, 매 등으로 변신하여 재주를 겨루지만 하백보다 뛰어난 신기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천제의 아들임을 안다. 남자(신)는 자취를 감추고, 하백에게 쫓겨난 유화는 태백산 남쪽에 있는 우발수(優渤水)에서 헤매고 있었다. 그러나 우연히 거기를 지나가던 동부여의 금와왕에게 구조된다.
금와왕은 유화를 방에 유폐했다. 하늘에서 유화를 향해 빛이 비치었으므로 유화는 빛살을 피했으나 빛살은 유화를 쫓았다. 빛살을 감수(感受)한 유화는 갑자기 산기(産氣)를 일으켜 다섯 되들이 되만한 큰 알을 하나 낳았다.
금와왕은 불길하게 생각하여 그 알을 멧돼지의 먹이로 주었으나 멧돼지는 먹지 않았으며, 길에 버리면 마소도 피해서 지나갔고, 들에 버리면 새와 짐승이 알을 감쌌으며, 쪼개려 해도 쪼개지지 않으므로 마침내 어머니인 유화는 알을 천으로 싸서 따뜻한 데에 두었더니 알의 껍질을 깨고 사내아이가 나타났다. 이것이 조선의 난생 신화이다.
앞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는 단정하고, 활을 쏘면 백발백중하고 마술에도 신동(神童)이었다. 활의 명수를 주몽이라 부르는 풍속에 따라서 주몽이라고 이름지어졌다. 활을 잘 쏘고 마술에 뛰어난 데에 수렵민이나 기마족들의 성격이 잘 나타나 있다.
난생 신화인 점에서 주몽의 출생 신화를 남방계 신화라고도 하지만, 태양 신앙에 바탕을 둔 천손강림형(天孫降臨型)의 변형이라도 볼 수 있겠다. 그 알은 태양을 본 뜬 것이리라.
주몽은 천제의 아들 해모수(일설에는 단군이라고 한다)를 아버지로 하는 천손이며, 수신 하백을 어머니편의 조부로 하고 태양신과 수신의 복합 신화를 이루어 수직적 세계관이 그 기둥이 되어 있다.
후한서(後漢書)에 따르면 주몽의 어머니는 부여왕의 시녀로서 천제가 보낸 계자(鷄子=병아리)가 배태시켰다고 한다. 주몽의 어머니가 시녀라고 하는 것은 사대적 중화사상(中華思想)이 가져온 것이다.
금와왕에게 양육된 주몽은 왕이 공포를 느낄 만한 신동이었다. 왕자들은 뒷일을 두려워하여 주몽을 죽이려 했으나 모두 실패로 끝난다. 주몽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세 추종자를 데리고 동부여를 벗어나 남하하여 엄수(淹水)에 이르렀다. 갈 길을 막은 엄수를 향하여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화백의 손자다. 지금 추격자가 다가오고 있는데 강을 건널 수 없으니 어찌해야 하느냐?> 하고 주몽이 외쳤더니, 물고기와 거북이 줄을 지어 다리를 놓아 건네 주었다. 추격자가 다가왔을 때 물고기와 거북은 자취를 감추어 진로를 막아 버렸다.
무사히 졸본주(卒本州)에 이른 주몽은 거기에 고구려국을 열고 왕이 되었다. 천제의 가호에 타고 난 신술(神術)로써 비류왕(沸流王) 송양(松讓)과의 싸움에 이겨 고구려의 기틀을 굳혔다.
주몽의 성은 해씨(解氏)였으나, 고구려를 세우고 고씨(高氏)로 이름하였다. 해(解)는 태양 해와 같은 음이며 높으므로 성을 고(高)로 정했다.
주몽은 활동 범위는 넓었고 힘차고 능동적이며 더구나 신술에 뛰어난 천손으로서 후에 기린을 타고 아침을 왕래하여 천정(天政=하늘을 다스리는 일)을 볼 만큼 신인(神人)이었다. 제위 19년 9월, 하늘에 올라간 채 돌아오지 아니했다.
박혁거세도 난생 신화와 관련된 왕으로서 경주 양산(楊山)의 나정(羅井)에 하늘에서 내려온 알에서 태어났다. 신라가 진한(辰韓)이라고 불리던 무렵 진한은 여서 고을로 이루어졌고 각 고을의 우두머리는 각기 하늘에서 내려온 신들로서 이(李), 애(崖), 배(裴), 정(鄭), 설(薛)씨의 시조였다. 이 시조들은 명활산, 대수산, 금강산 등 각기 다른 산에 하늘에서 내려와 번영하여 한 나라를 열 만한 세력을 이루었다. 그래서 여섯 고을을 다스릴 왕을 보내 달라고 염천(閻川)의 둑에서 하늘을 빌었다. 기원이 천제에게 사무치어 나정 쪽에 이상한 정기가 번개빛처럼 땅을 비추었다. 그 곳을 보니 한 마리의 백마가 큰 보랏빛 알 앞에서 예배하고 있었다. 여섯 고을의 우두머리들을 본 백마는 하늘로 날아 올라갔다.
알을 쪼개었더니 속에서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다운 동자가 나타났다. 이 이상한 모습에 놀란 사람들은 동천사(東泉寺)에서 목욕을 시켰더니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춤추었으며, 천지가 진동하고 태양과 달은 황황히 빛나고 있었다. 눈부시게 번쩍이는 연유로 해서 혁거세라고 이름지었고, 일명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고, 성인 박은 박과 같은 큰 알에서 태어난 데에 연유하나, 성과 이름이 모두 <밝다>는 어의를 지니고 있다.
혁거세는 신동이라는 명서이 높았고, 13세(BC57년)에 왕이 되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서벌(徐伐)이라고 바꾸었다. 사라(斯羅)니 사로(斯盧)라고도 불렀고, 후에 신라가 되었는데, 경<京>이니 <서울>을 뜻하는 신라어라고 생각되고 있다.
혁거세는 나라를 연 후에 61년째에 하늘에 숨었다(죽었다). 신체는 하늘에 날아올라가 오체(五體)가 나누어져 다시 내려왔다. 흩어진 신체를 모아서 장사 지내려 했으나 뱀이 나타나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오체를 따로따로 묻었기 때문에 오릉(五陵)이라고도 한다. 일설에는 하늘이 명하여 오체를 따로따로 묻었다고도 한다. 또 혁거세, 왕비, 남해왕(南海王), 유리왕(儒理王), 파사왕(破娑王)의 오성(五聖)을 매장한 것이 오릉이라고도 한다. 오릉은 현재 경주에 있다.
신라의 탈해왕(脫解王) 경신년 3월 8일의 일이었다. 호공(瓠公)이 월성(月城)의 서리(西里)를 걷고 있자니 시림(始林)에서 무엇이 빛나며 하늘에서 보랏빛 구름이 거기를 비추고 있었다. 그가 시림에 쫓아가 보았더니, 하늘에서 비추는 자운(紫雲) 한가운데에 금궤 하나가 있었다. 금궤는 나뭇가지에 걸리었고, 궤 속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호공의 보고를 받은 탈해왕이 시림에 가서 궤를 열었다. 속에는 한 동자가 자고 있었다. 혁거세의 고사(故事)를 본떠 알지(閼智)라고 이름지었다. 알지는 신라어로 어린이란 뜻이다. 알지를 안고 왕궁에 돌아오는데 새와 짐승이 다투어 줄을 지어 기뻐하며 춤추었다. 탈해왕은 길일(吉日)을 택하여 알지를 태자로 삼았으나, 알지는 왕위를 파사에게 양보하고 평생토록 왕위에 앉지 않았다. 금궤에서 태어났으므로 성을 김(金)이라고 정했고 6대손인 미추(未鄒)가 왕위에 올랐다. 미추 이후 신라의 왕위는 자손 김씨가 계승했다. 알지는 금궤에서 태어났지만, 이것도 난생신화로 간주된다.
천지 개벽 이래 이 지방은 아직 나라도 없고 나라 이름은 물론 임금과 신하의 칭호도 없는 시대였다. 아홉 개의 부족이 들이나 산에서 살며, 아도간(我刀干)을 비롯한 아홉 장(長=干)들이 각기의 부족을 다스리고 있을 뿐이었다.
한(漢)의 건무(建武) 18년(BC42년) 3월, 김해 북쪽에 있는 구지봉(거북이 엎드려 있는 형상의 바위가 봉우리 꼭대기에 있기 때문에 구지라고 한다)에서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구간(九干)을 선두로 하여 2,3백 명의 백성이 거기에 모였다. 그러나 사람의 목소리는 나면서도 형체가 없었다. 그러자,
"천제가 나에게 명하여 이 땅에 내려 나라를 열고 왕이 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가 하늘에서 여기에 내려왔노라. 너희는 산정을 파서 흙을 움켜쥐고 노래 부르며 춤을 추어라. 그러면 곧 대왕을 맞아 환희 용약하리라."
하고 가사를 거르쳐 주었다. 구간들은 그 가르침대로 백성과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보니 보랏빛 새끼줄이 하늘에서 스스로 내려와 지상에 닿았는데 새끼줄 끝에는 붉은 천에 싸인 금궤가 있었다. 궤를 열자 황금빛 알이 여섯 개 있었는데 그 모양이 태양처럼 둥글었다.
사람들은 놀라며 기뻐했다. 공손하게 알을 예배하고 천으로 싸서 아도간의 집으로 옮기어 평상 위에 안치해 두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열이틀째가 지난 이튿날 아침 사람들이 모여서 궤를 열었더니 여섯 개의 알이 모두 까져서 여섯 동자가 나타났다. 동자의 용모가 크고 단정하였으므로 방으로 맞아들여 배하(拜賀)하고 온 정성을 다하였다. 동자는 나날이 자라 십수일 후에는 키가 9척이나 되었고 용모는 용의 얼굴에 눈썹은 팔채(八彩)요 눈매는 순왕(舜王)과 비슷했다.
동자 중 한 사람이 그 달 15일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세상에 먼저 나타났으므로 수로(首露)라고 이름하고, 금궤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金)이라고 했다.
수로는 성인이나 최고의 사람이라는 어의를 가진다고 한다. 또 알에서 태어난 다른 다섯 동자는 각기 가야국(伽倻國)의 왕이 되었다. 후에 가야국이 합체하여 여섯 가락국(駕洛國)이 되고 수로는 그 시조가 된다.
가락국의 해변에 한 척의 배가 표착했다. 수로왕은 신하와 함께 북을 치며 맞으려 했으나, 배는 계림(신라)을 향해 떠나 버렸다. 다른 전설에 따르면 탈해가 수로왕과 왕위를 겨루다가 졌으므로 배를 타고 신라로 피했다고 한다.
계림의 아진포에 닿은 배는 혁거세의 고기잡이 소임을 맡은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에게 발견되었다. 배를 기슭에 끌어와 보니 배안에는 길이 20척, 폭 13척이나 되는 큰 궤가 하나 실려 있었다. 아진의선은 궤의 길흉을 하늘에 점을 치고 나서 뚜껑을 열었다. 궤 속에서는 단정한 동자와 일곱 개의 보물과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7일간 대접을 받은 동자가 입을 떼었다.
"나는 용왕국 사람입니다. 우리나라에는 스물여덟 명의 용왕이 있었는데 모두 인간의 태에서 나서 대여섯 살에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의 아버지 함달파왕(含達婆王)은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왕비로 받았으나 아들을 얻지 못했습니다. 대왕은 인간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는 일이라 불길한 징조라고 하시며 궤를 만들어 그 속에 넣고 일곱 개의 보물과 노비를 배에 실어 띄웠습니다. 그 알에서 난 것이 나입니다. 그 때 아버지는 인연이 있는 곳 도착하거든 나를 열고 집안을 일으키라고 빌어 주셨습니다. 항해를 하는 중에 돌연 용이 나타나서 배를 지키면서 여기로 끌어다 준 것입니다.
동자가 궤의 뚜껑을 열어 알의 껍질을 깨고 빠져 나왔다는 데서 탈해(脫解)라고 하고, 까치(鵲)에 의해 아진의선이 배를 발견하고 궤를 열었기 때문에 작(鵲)에서 조(鳥)를 빼고 석(昔)을 성으로 하였다. 후에 신라의 제 4대 왕이 되고, 탈해니사금(脫解尼師今) 또는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표착형 난생 신화이지만, 용왕의 불교 전설과 난생 신화의 복합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의 제주도를 탐라현이라고 부른 시대에 양(良), 고(高), 부(夫)의 세 사람이 지하에서 나타났다고 <고려사>에 적혀 있다.
그것에 따르면, 사람이 없던 태고적 세 신인(神人)이 주산(主山)의 북쪽 기슭에 있는 모흥(毛興)구멍에서 뛰어나왔다. 첫 번째를 양을나(良乙那), 두 번째를 고을나, 세 번째를 부을나라고 했다. 세 사람은 사냥을 하여 가죽으로는 옷을 만들고 고기는 먹었다.
어느 날 동쪽 바다에 나무상자가 떠 있는 것을 발견하여 열어 보았다. 나무상자 속에는 다시 돌상자가 있었다. 홍대자의(紅帶紫衣)를 입은 사자(使者)가 딸려 있었으므로 함께 돌상자를 열었다. 거기에 푸른 옷을 입은 세 아가씨와 망아지와 오곡의 씨가 있었다.
사자가 말하기를,
"저는 일본국의 사자인데 저희 국왕은 세 아가씨를 낳아 말씀하셨습니다. '서쪽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섬의 산에 신의 세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와 장차 나라를 연다는데 짝이 없다고 한다. 그러니 세 딸을 데려 가거라.' 하고 저에게 명하셨으므로 모셔 왔습니다. 거느리시어 큰 소원이 성취되시기 바랍니다."
하고는 사자는 재빨리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세 사람은 나이 순서대로 각각 아가씨를 취하고, 활을 쏘아 대지를 나누어서 샘물 맛이 좋고 기름진 땅에서 살았다.
그 후로는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송아지와 망아지를 기르며 줄거운 나날을 보냈고 자자손손 번영해 나갔다. 이것이 제주도의 시조이다.
성주고씨가전(星主高氏家傳)에 따르면 한라산에 이상한 기운이 감돌고 산의 북쪽 모흥혈(毛興穴)에서 세 신이 사람이 되었다고 하여 한라산이 세 신인(神人)을 낳았다고 되어 있다. 대지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것과, 일본국의 왕녀를 시집 보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신라의 헌강왕(憲康王)이 동해의 개운포(開雲浦)에 유람했을 때의 일이다. 어느 해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온통 뒤덮어 길을 잃고 말았다.
왕이 점쟁이에게 물으니,
"이것은 동해의 소행이오니 무슨 좋은 일을 하사이다"
하고 대답했다. 대왕은 곧 용왕을 위해 그 근처에 절을 세울 것을 약속했다. 그러자 홀연히 구름과 안개가 걷히었다. 그래서 개운포라는 이름이 생겼다.
대왕의 뜻에 감사하여 용왕은 일곱 동자를 거느리고 나타나서 대왕의 덕을 기리고 춤추며 음악을 연주했다. 용왕은 동자 한 사람을 대왕에게 바쳤고, 대왕은 서울로 데려가서 정사를 보게 하고, 이름을 처용이라고 지었다. 처용은 급간(級干)의 지위에 올라 미녀를 아내로 맞이했다.
그런데 처용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심을 품은 역신(疫神)이 인간의 모습을 취하여 처용의 아내 침실에 침입했다. 처용이 밤중에 집에 돌아와 보니 침상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것을 본 처용은 화를 내기는커녕 태연하게 노래를 부르고(향가인 <처용가>로 전해진다) 춤을 추면서 그 자리를 떴다. 역신은 처용의 이런 태도에 감복하여 그의 앞에 나아가,
"제가 공의 부인을 사모하여 지금 과실을 저질렀는데 공은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름다운 마음씨에 감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공의 상(像)을 보는 것만으로도 그 문 안에 발을 들여놓지 않기로 맹세하며 약속합니다."
하였다.
이후 풍속으로 처용의 문자나 그 상을 그려서 문이나 기둥, 벽 따위에 붙여서 악귀를 쫓는 것은 이 처용랑 전설에 연유한다.
환인, 환웅, 단군을 삼신이라 하며, 영검이 현저한 전지전능한 절대신으로 숭앙한다. 환인은 천제이다. 환웅은 천제의 아들로서 천제의 명령을 받들어 인간계를 다스리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온 신이다. 단군은 환웅과 웅녀의 사이에 태어난 아들로서 고조선을 연 시조이다. 삼신은 단군 신화에 유래하며, 환인은 전지전능한 천제로서 숭앙 받고, 환웅은 인간(=단군)을 창조한 산신(産神)으로서, 단군은 개국의 국신(國神)으로서 숭앙을 받고 있다.
산신(産神)에게 빌면 자식을 얻는다는 신앙이 있다. 이것은 웅녀가 환웅에게 자식 배게 해 달라고 기원하여 그 소원이 이루어져 단군을 낳았던 것에 연휴한다.
환인이나 환웅, 단군은 천손강림형 신화로서 수직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동일한 신앙 대상으로 친다. 삼신(三神)에게 비는 것은 동시에 산신(産神)에게 비는 것이기도 하다. 단지 산신보다 삼신이 훨씬 넓은 전지전능의 신들로 숭앙을 받고 있다.
고조선의 단군, 고구려의 주몽, 신라의 박혁거세, 가락국의 김수로 등 건국 시조는 천제의 명령을 받들어 하늘에서 내려온 천손이다. 그 시조들은 나라를 다스려 그 임무를 다하면 하늘로 돌아간다. 즉 죽는 것이 아니고 하늘로 되돌아가 숨어서 신이 된다. 시조의 대부분이 나무숲이나 산에 내려오기 때문에 하늘로 돌아갈 때는 그 순서를 다시 밟는다. 산에 숨어서 신이 되는 것은 산이 하늘로 통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산에 숨어서 산신이 되는 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시조 즉 귀인에 한하며, 그들은 반드시 천손이었다. 그것이 시대와 함께 일반의 왕이나 승려, 무인(武人)들까지 산신으로 모셔지게 되었다. 그것은 하늘을 숭배하는 신앙과 불교가 무속 신앙 등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것이다. 산사(山寺)에는 산신당의 사당(성황당)에 고승(高僧)이나 무인의 상이 모셔져 있는 것도 그런 원인으로 인한 것이다.
본래 산신과 같은 숭고한 신앙 대상이었으나, 시대와 함께 그 숭고성이 희박해졌다. 민간 신앙에서는 곳에 따라서 삼신과 산신을 혼동하는 데도 있다.
백두산에서 내려와 부소산에서 살며 아내를 맞이한 호경(虎京)은 어느 날 사냥을 나가 마귀 할멈을 만나 그 남편이 된다. 고려의 태조 왕건은 그 6대손에 해당한다. 산의 대왕(산신)이 된 호경은 부소산의 아내와의 사이에 강충(康忠)이 태어나고, 강충과 구치의(具置義)와의 사이에 태어나 손호술(損乎述=寶育)은 삼한(三韓)의 통솔자가 될 것을 예언 받는다. 보육(寶育)은 지리산에 들어가 중이 되어 도를 튼다. 어느 날 꿈 속에 혹령산에서 남쪽을 향하여 소변을 했더니 삼한이 물에 잠기어 은(銀)바다가 되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형 이제건(伊帝建)은 "너는 필경 하늘을 떠받칠 기둥이 될 것을 낳을 것이다." 하고 딸인 덕주(德周)를 아내로 주었다. 덕주는 두 딸을 낳았고, 밑의 아이를 진의(辰義)라고 했다.
재주가 뛰어나고 미목이 수려한 진의는 언니가 본 꿈(오악산에서 소변을 보니 천하가 물바다가 되는)을 샀다. 그러자 예언대로 당나라의 천자가 될 자(후의 당의 숙종이라고도 한다)가 진의의 집에 나타났다. 아들을 낳으면 이 활과 화살을 주라는 말을 남기고 떠나갔다. 아들을 낳아 작제건(作帝建)이라고 이름을 지었다.
작제건은 어느 날 서해의 용왕의 청으로 늙은 여우를 퇴치하여 구해 준다. 그 답례로서 용녀(龍女)인 창민의를 아내로, 버들 지팡이와 돼지를 받는다. 용녀는 남편에게는 비밀히 용궁에 왕래하고 있었으나, 남편에게 그것을 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남편이 그 약속을 어겼기 때문에 용녀는 용궁에 간 채 돌아오지 않았다.
용녀는 네 아들을 낳았고, 그 맏이를 용건(龍建)이라고 이름지었다. 용건은 꿈에 미녀를 만나 아내로 맞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것을 꿈부인(夢夫人)이라 하고 삼한의 어머니가 될 점괘가 나왔다. 왕건은 꿈부인한테서 태어나 고려를 일으켜 그 왕이 된다.
이 영웅 전설에서는 살아서 산신이나 용왕의 사위가 되고 꿈점이 적중하는 것이다. 선화 전설에서 영웅 전설로 변해 가는 재미가 있다.
부락의 수호신은 대개 서낭신이다. 부락의 고개나 뒷산에 모셔져 있다. 그 사당을 서낭당이라고 한다. 서낭신은 신목이나 고승(高僧), 무인(武人) 등이 있고, 때로는 <서낭신>이라고 쓴 신위(위패)이다 특정 신앙 이념을 가진 신이 아니라, 원시 종교신으로서 절대신으로 신앙하고 있다. 본래는 사당이 없이 돌멩이를 쌓아 올린 만두형의 석탑으로서, 중심에 나무를 세웠다. 신이 하늘에서 수목에 내려온다고 믿고 있었다. 후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수목 자체를 신으로 무시게 되었다. 그것이 신목이다. 이것을 서낭대, 별신대, 소도(蘇塗) 등으로 부르고, 부락의 수호신이나 경계신(境界神)으로서 마을 경계에 모셨다.
이것은 삼한 시대의 하늘을 모시는 제사의 유풍이며, 단군 신화에서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신단수와 동일한 것으로 보인다. 태양 신앙이 가져온 신목 신앙이다. 신목에 방울이나 어폐(御幣) 등을 매달아 강신(降神)을 비는 제사는 무속 신앙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서낭신은 무속 신앙의 절대신으로서 널리 분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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