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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편의 詩

너에게로 다시 / 번즈

by 바닷가소나무 2018. 6. 3.

너에게로 다시


                  - 번즈 -


오,내 사랑은 6월에 갓 피어난

붉고 붉은 한 송이 장미.

오, 내 사랑은 아름다운 선율.

곡조에 앚춰 달콤하게 흐르는 가락.


나의 귀여운 소녀여,

그대는 정녕 아름답구나.

나 이토록 깊이 너를 사랑하노니

바닷물이 다 말라버릴 때까지

한결같이 그대만을 사랑하리라.


바닷물이 모두 말라버릴 땨까지.

바위가 햇빛에 녹아 스러질 때까지.

인생의 모래알이 다하는 그날까지.

한결같이 그대만을 사랑하리라.


그럼 안녕, 하나뿐인 사랑아.

우리 잠시 헤어져 있을 동안만

수백, 수만 리 떨어져 있다 해도

나는 다시 네에게로 돌아오리라.



번스

다른 표기 언어 Robert Burns


요약 테이블
출생1759. 1. 25, 스코틀랜드 애리셔 앨러웨이
사망1796. 7. 21, 덤프리스셔 덤프리스
국적 스코틀랜드, 영국

요약 :  스코틀랜드의 민족시인. 영어의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시와 시가를 썼다. 정통종교 및 도덕에 대한 반항과 연애로 유명하다.

번스의 아버지는 돈을 벌기 위해 킨카딘셔에서 애리셔로 왔다.


그는 1766년에 마운트 올리펀트 농장을 빌렸고 그뒤에는 로츨리 농장을 빌렸다가 1777년에는 이 농장을 소유하면서 매우 열심히 일했으나, 불운이 겹쳐 1784년 지치고 파산한 상태에서 죽었다. 아버지가 파멸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로버트 번스는 당시 사회질서에 반항했으며 비인간적 행위를 용서하고 유지시켜주는 모든 형태의 종교적·정치적 사상을 신랄하게 풍자하게 되었다. 프랑스어 읽는 법과 라틴어를 조금 배우고, 셰익스피어, 밀턴, 드라이든의 작품은 물론 18세기 영국의 대표적인 작품들을 대부분 읽었다.


스코틀랜드 문학에 대한 지식은 구전된 민요나 민담과 15세기 후반의 〈월리스 Wallace〉의 현대어판을 어린시절에 들은 것이 전부였다. 어른이 된 뒤에는 인본주의적 이신론을 계속 신봉한 듯하다.


어렸을 때 자존심이 강하고 침착하지 못했으며 표현할 수 없는 야심으로 가득 찬 번스였지만 농장에서 힘든 일을 했다. 아버지가 죽으면서 가족이 모스기얼 농장으로 이사하자 농장의 소작인이 되었으며, 이곳에서 뜻이 맞는 많은 친구들과 교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애리셔에서 지배적인 극단적 칼뱅주의에 반대하는 편이었고,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문제 때문에 최하급 장로파 교회회의(Kirk Session)와 말썽을 빚은 그 지방의 유지 개빈 해밀턴을 지지했다.


번스는 엘리자베스 페이턴이라는 농장 하녀와 연애하여 1785년 첫번째 사생아를 낳았다. 그는 아이가 태어나는 날 명랑한 시를 지어 탄생을 축하했다. 1784~85년 사이에는 행사시인으로 성장했으나 점점 그 자신의 사랑·우정·즐거움 등의 감정과 사회상에 대한 풍자적 명상을 표현하는 시인으로 변모했다. 그의 시는 문맹에 가까운 농부가 즉흥적으로 감정을 털어놓는 정도가 아니었다. 번스는 철저한 장인이었다. 1783년에 쓰기 시작한 비망록에는 초기부터 작시법의 기술적 문제에 보인 관심이 나타나 있다.


번스는 자신과 친구들을 즐겁게 하려고 시를 쓰긴 했지만 불안해 하고 불만족스러워했다. 그는 정통종교에 반항한 위험인물로 유명하다. 1786년에 진 아머와 사랑에 빠졌을 때, 그녀는 임신한 상태였고, 스코틀랜드 법에는 두 사람의 의사만으로 결혼이 성립되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결혼을 거부했다. 진은 아버지의 설득으로 다른 정혼자와 결혼했고, 번스는 상처를 받고 화가 나서 메리 캠벨이라는 처녀와 사귀었으나 그녀는 곧 죽었다. 진은 결혼생활중 9월 3일에 번스의 쌍둥이 자식을 낳았다. 한편 농장은 잘되지 않았고, 해결할 수 없는 문제로 괴로워하던 번스는 이민갈 생각을 했다. 그러나 떠나기 전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고향에 먼저 보여주고 싶었다. 괴로워하던 중에 킬마녹에서 시집을 출판할 계획을 진행했다.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 Poems, Chiefly in the Scottish Dialect〉이 1786년 7월 31일에 나왔다.


이 시집은 곧 압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소박한 시골사람들이나 지성적인 에든버러의 비평가들도 이 시집을 환영했다. 그결과 번스가 1786년 11월 27일에 에든버러로 갔을 때는 명사 취급을 받고 후원을 받았으며 의도는 좋으나 위험한 충고를 많이 받았다.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에는 다양한 성격의 시들로 〈2마리의 개 The Twa Dogs〉·〈스코틀랜드 술 Scotch Drink〉·〈거룩한 여인 The Holy Fair〉·〈악마에게 건넨 말 An Address to the Deil〉·〈불쌍한 메일리의 죽음과 유언 The Death and Dying Words of Poor Maillie〉·〈쥐에게 To a Mouse〉 등 빼어난 스코틀랜드 시와 여러 친구들에게 보낸 운문 서한이 실려 있다.


그밖에 자신의 영감을 표현하지 못하거나, 창작 의도가 애매하여 실패한 시가 몇 편 있다. 영어로 쓴 우울한 연극조의 시 6편이 있으며 시가 4편도 있는데 그중 〈수확제 밤에 있었던 일 It Was Upon a Lammas Night〉에는 위대한 작사가로서의 가능성이 보인다. 현대 비평가들은 〈소작농민의 토요일 밤 The Cotter's Saturday Night〉과 〈산에 핀 데이지에게 To a Mountain Daisy〉를 뛰어난 시로 꼽는다.


번스는 점잔 빼는 에든버러의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에 실을 시를 신중하게 골랐다. 이 시집 서문에서 그는 자연인과 고상한 농부에 대한 당시의 감상적인 견해를 두둔했으며, 교육이 부족한 자신의 상태를 과장하고, 자신이 천부적인 재능이 부족하다는 시늉을 했다. 그는 점잔 빼는 전통을 액면 그대로 시에 수용할 만큼 그러한 전통에 대해 잘 알지 못했으며, 인기가 절정일 때에도 타고난 직관력에 의해 쓰는 것이 옳다고 믿고 따르긴 했지만 소박하고 감상적인 교화 때문에 많은 시를 망쳤다.


에든버러에서는 정착하지 못하고, 그곳에서 많은 연애행각과 모험을 했으며 스코틀랜드의 다른 지방을 여행한 뒤, 1788년 여름에 덤프리스셔의 엘리슬랜드에 있는 농장에 정착했다.


에든버러에서 새 증보판 시집을 출판했으나(1787),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쓴 시집〉에 실린 시보다 중요한 시는 거의 없었다. 새로 화해한 진 아머와 1788년에 결혼하면서, 그녀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엘리슬랜드의 농장일은 여전히 힘들었다. 이 당시 번스는 스코틀랜드 노래를 열심히 수집하는 제임스 존슨을 만났다.


존슨은 곡이 붙은 시가집을 시리즈로 내면서, 번스가 곡을 찾아 편집하고 개작하는 일을 돕도록 했다. 번스는 열의를 다했고, 존슨의 〈스코틀랜드 음악박물관 Scots Musical Museum〉의 실질적인 편집자였다. 그뒤 이와 비슷한 조지 톰슨의 계획에 참여하기도 했으나, 톰슨은 존슨보다 품위를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번스는 톰슨이 가사와 곡을 '고상하게 하여' 특성을 망칠까봐 그와 싸웠다.


존슨의 〈스코틀랜드 음악박물관〉(1787~1803)과 톰슨의 〈독창적인 스코틀랜드 가곡 선집 Select Collection of Original Scotish Airs for the Voice〉(1793~1818)에는 번스가 가사를 쓴 노래가 대부분 들어 있다. 번스는 인생의 후반부를 스코틀랜드 전통 가락에 가사를 붙이거나 가사를 수집하는 데 바쳤다(→ 민속문학). 그는 자신의 일이 스코틀랜드에 대한 봉사라고 여기고 보수를 완강히 거절했다. 에든버러를 방문한 뒤에 쓴 유일한 시 〈탬 어섄터 Tam o'Shanter〉는 그의 시적 천재성을 명백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8음절 2행연구로서 민간전설에 기초한 기운찬 이야기체 시이다.


한편 번스는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상당히 높은 사람들이나 여러 문학가들과 평등한 관계에서 편지를 주고 받거나 방문하기도 했다. 그는 편지를 뛰어나게 잘 썼으며, 언변이 좋아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 있어도 자기 입장을 지킬 수 있었다. 동시에 그는 힘겹게 일하는 소작농민이었기 때문에, 농민과 시인으로서 모두 사회적·지적 능력을 발휘하다보니 지쳐버렸다.


오랫동안 노력한 끝에 1789년 세무국에 자리를 얻어 1791년 덤프리스로 이사했으며,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분주하게 살았다. 많은 행사용 시와, 노래집 2권에 들어가는 엄청난 가사를 썼으며, 동시에 세무원 일도 했다. 프랑스 혁명에 격앙되어 신중하지 못하게 감정을 표출했다가 실직의 위기에 놓였으나, 훌륭한 세무원으로 평판이 났고, 굴욕적이지만 현명하게 처신해 위기를 넘겼다.

번스에 대한 평가

번스는 지적으로 대단한 열정과 힘을 가진 인물이었으나, 계급사회 속에서 그의 개성이 충분히 발휘될 환경이 마련되지 않았다. 당시 스코틀랜드 문화는 번스가 배격한 칼뱅주의에 대신할 만한 지적인 토대를 갖추지 못한 현실이었다. 번스의 시대에 에든버러의 지식인들은 2류였으며, 더구나 문제는 사람들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번스가 칼뱅주의 대신에 신봉한 감상적인 이신론은 착한 마음이 전부라고 믿는 안이한 종교로서, 위대한 시를 지탱할 만큼 풍부하고 복합적인 교리를 갖추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도 번스가 많은 훌륭한 시를 썼다는 것은 그의 독특한 천재성을 증명하며, 그가 스코틀랜드 민족시인이 된 것은 대중적인 상상력을 잘 포착한 덕분이다. 번스는 풍자에서 가장 뛰어난 시적 재능을 발휘했다. 운문 서한에도 놀라운 기교를 써서, 구어체와 문법에 맞는 말을 아주 잘 대치시켜 강조했다. 번스가 유명하게 된 것은 시가 덕분이며 이를 통해 세계적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영국이 낳은 시가 시인이다(→ 민속음악).

번스는 모든 가사를 알려진 곡에 맞추어 썼으며, 한 선율에 가장 적합한 시를 찾아보려고 같은 곡조에 여러 편의 가사를 붙이기도 했다. 번스가 밝히지 않았으나 그의 작품으로 추정될 수밖에 없었던 많은 시가들이 여러 가지 자료에 의해 그의 것으로 입증되었다. 예를 들어 〈Auld Lang Syne〉은 자신이 발견한 옛 노래의 일부라고 설명했지만, 이 곡의 합창부와 제1연 정도가 옛 가사로 여겨질 뿐 가사는 그가 쓴 것이 확실시된다.

번스는 소박하고 감동적인 옛 곡조에 맞추어 이 가사를 썼으나, 톰슨이 가사를 다른 곡에 붙였기 때문에 오늘날 부르는 곡과는 다르다. 따라서 스코틀랜드 민요에 대한 번스의 공헌도를 완전히 파악하기는 힘들 다. 번스가 옛 민요를 다룰 수 있게 된 점을 비롯해 노래 〈나는 결혼하기에 아직 너무 어려요 I'm O'er Young to Marry Yet〉·〈Green Grow of Rashes, O〉와 옛 합창곡 등 다른 노래를 재창조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히 기적적이다. 스코틀랜드 민중이라는 거대한 익명의 목소리와 대화할 수 있는 초인적인 능력이야말로 번스가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느낌, 즉 '번스 숭배' 집단이 드러내는 그런 느낌을 설명해준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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