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력적인 짧은 시를 찾아서 / 이승하
한국말을 잘하는 일본인 스승으로부터 1년 가까이 하이쿠[俳句]를 배운 적이 있다. 하이쿠 작법이 아니라 일본의 대표적인 하이쿠 작가 마쓰오 바쇼(松尾芭蕉, 1644~1694)의 시를 수강생들과 함께 해석하는 식의 공부였다. 스승이 한글로 번역한 바쇼의 하이쿠를 따라 읽은 뒤 어색한 부분을 제자들이 지적하고, 그 작품을 읽은 소감을 서로 이야기하는 식의 공부 방법이었다. 일방적인 강의식 학습이 아니라 토론식 수업이어서 더 재미가 있었다. 그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바쇼의 하이쿠였다. 하이쿠의 세계에 매료된 서구 시인의 이름을 들자면 한참 걸릴 것이다.
5ㆍ7ㆍ5의 17자를 정형으로 하고, 제작 당시의 계절을 나타내는 시어[季語]가 들어 있어야 하며, 내용을 안에서 끊는 역할을 하는 기레지[切字]에 의해 한 편의 시로서 완결성을 갖는 하이쿠가 지닌 생명력이 놀랍기만 하다. ‘하이쿠’라는 문예 형식이 생겨난 것은 15세기 후반이다. 장장 500년을 이어왔을 뿐 아니라 지금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는 문예 형식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우리나라의 시조? 시조 인구도 적지는 않지만 일본의 하이쿠 붐과는 확실히 다르다. 일본에는 하이쿠 동인지의 수가 800종이나 된다고 한다. 중앙지 및 지방의 신문에 하이쿠 난이 마련되어 있어 날마다 50에서 100여 수의 하이쿠가 선자의 평과 함께 실린다니 범국민적인 문예 형식이다. 지방 어느 도시에서 관광 사업의 하나로 하이쿠 대회를 개최하자 일본 전국뿐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룬 덕분에 해마다 개최하게 되었다고 한다. 미국에만도 하이쿠 잡지 4종이 발간되고 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구조주의 이론가 롤랑 바르트는 하이쿠를 “가까이 하기 쉬운 세계”이면서 “그러나 아무것도 말하려 하지 않는 이중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문예”라고 말해 하이쿠의 기이한 이중성에 주목하였다. 가장 유명한 하이쿠 작품은 바쇼의 “오래된 연못이여/ 개구리 뛰어드는/ 물소리”라고 알고 있으며, 그 다음쯤 되는 유명한 작품은 “조용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매미 울음소리”일 것이다. 바르트의 말이 일리가 있다. 한편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 하이쿠 작가 이이다 류타(飯田龍太)는, 뛰어난 하이쿠 작품을 두고 “의미 해석의 영역을 넘어서 읽는 사람의 가슴을 울리는 것”이라고 했는데 수긍이 가는 말이다. 이처럼 묘한 구석이 있는 세계가 하이쿠의 세계이다. 촌철살인, 정문일침, 일목요연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나도 시를 쓰고 있지만 짧은 시가 별로 없다. 시어의 남발을 넘어서 언어를 줄곧 학대해온 것은 아닐까. 기억나는 짧은 시 한 편.
아작아작 크고 작은 두 마리의 염소가 캬베스를 먹고 있다.
똑똑 걸음과 울음소리가 더 재미있다
인파 속으로 열심히 따라가고 있다
나 같으면 어떤 일이 있어도 녀석들을 죽이지 않겠다.
김종삼의 「掌篇ㆍ1」 전문이다. 내 어린 시절에만 해도 간혹 길거리에서 매매 울며 가는 흑염소를 볼 수 있었다. 병후 회복에 최고라는 흑염소를 시골 노인이 도회지로 팔러 나온 것이었고, 그 흑염소의 운명은 복날을 맞은 황구와 다를 바 없었다. 시인은 아비와 자식일 두 마리 흑염소의 운명이 너무나 안타까웠던 것이리라. 딱 4행, 건조한 산문의 나열임에도 시인의 마음이 내 마음에 파문을 전한다. 교통사고로 눈이 먼 후배 정상현 군이 낸 시집 『마음의 지옥에서 피우는 꽃』의 표제시도 내가 아는 짧은 시의 명작 가운데 하나이다.
이제 나는 여기서도 꽃을 피우리.
첫날밤 여인의 속옷을 벗겨내듯 가슴 설레는 꽃을
이제 막 탯줄을 잘라낸 아기의 깨끗한 살갗같이 맑은 꽃
아주 조심스레 피우리.
나는 진정 나 자신의 흉터보다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있을까?
이 시에는 비유의 대상이 두 개 있다. “첫날밤 여인의 속옷을 벗겨내듯 가슴 설레는 꽃”과 “이제 막 탯줄을 잘라낸 아기의 깨끗한 살갗같이 맑은 꽃”이 그것이다. 그런 꽃을 조심스레 피우고 싶지만 그는 반신불수에 맹인이다. “나 자신의 흉터보다 아름다운 꽃”이 암시하는 것이 시(詩)임을 알기에 가슴이 저려온다. 이런 가슴 저림이 있는 짧은 시를 나는 읽고 싶다.
숨바꼭질이라도 하던 참이었을까.
햇빛이 너무 맑아 마실갔던 날
앵두나무 그늘 기어들다 훔쳐본
툇마루에 끝에 놓인 요강 속
동무의 누님이 풀어놓은 개짐
두 볼에 고인 앵두빛 우련 붉어라.
―김석규, 「앵두」 전문
생리대의 순우리말이 개짐이다. 숨바꼭질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시인의 어린 날이었을 것이다. 앵두나무 그늘에 기어들다 훔쳐본 것은 툇마루 끝에 놓여 있던 요강이었고, 그 요강 속에는 동무 누님의 개짐이 들어 있었다. 동무 누님은 그 부끄러운 것을 그만 들켜버린 셈이고, 그래서 두 볼에 홍조를 머금더라는 이야기가 이 시의 내용이다. 지금도 시인은 앵두를 보면 붉은 개짐과 그 색깔에 못지 않게 달아오른 그 누님의 두 볼이 생각나는가 보다. 이 시에서 영 마음에 걸리는 것은 끝 행의 “우련 붉어라”이다. 조지훈의 「落花」제6연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가 아니던가. 표절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명시의 명구는 함부로 옮겨 쓰지 말아야 할 일이다. 트집잡힐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앞의 5행이 모두 설명에 그쳐버린 점도 아쉽다.
장터거리 어느 횟집 앞에서
칼 가는 사내가 무심하게 칼을 갈고 있는데 아까부터 수족관의 날렵한 넙치 몇 마리가 연신 수족관을 오르내리면서 그 맑고 투명한 눈알로 이 사내를 흘기듯 싸늘한 눈길을 쏘아 보내고 있었다.
―상희구, 「照應」 전문
시인은 지금 장터거리 어느 횟집 앞에 서 있다. 칼 가는 사내가 매일 하는 일이 회 뜨는 일일 테니 그야말로 ‘무심하게’ 칼을 갈고 있다. 그런데 수족관 속의 넙치 몇 마리는 제 운명을 아는 양, 칼 가는 사내한테 “흘기듯 싸늘한 눈길을 쏘아 보내고” 있다. 이것을 시인은 조응(correspondences)으로 보았다. 상징주의자들의 논리에 따르면 자연계에서 볼 수 있는 가시적인 사물은 불가시적인 정신계 내지 영계에 있는 사상(事象)의 대응물인데, 이 둘 사이의 관계가 조응이라는 것이다. 흔히 보들레르의 소네트 「조응」의 제 1, 2연이 ‘조응’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곤 하지만 그 작품을 인용해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칼 가는 사내와 수족관의 넙치 몇 마리의 관계는 ‘무심함’과 ‘싸늘한 눈길’로 설명이 가능한 관계이다. 그런데 시인은 양자를 불화하는 관계가 아니라 기이한 조응의 관계로 보았기에 제목을 이렇게 붙였을 것이다. 일단 넙치 중 몇 마리는 그날로 죽을 테고, 나머지 몇 마리의 목숨은 며칠 연장될 수 있을 것이다. 칼 가는 사내는 사형을 집행하는 사람이고 넙치는 사형을 당하려 그 수족관에 있다. 따라서 제목 ‘조응’은 아이러니인 동시에 패러독스이다. 그런데 시가 전반적으로 신선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묘사에 있어 관찰력의 부족 때문이 아닐까. 세부적인 묘사에 좀 더 신경을 썼더라면 훨씬 좋은 시가 되었을 것이다.
생애를 양분하는 분수령은
갱년기가 아니라 틀니[義齒]다
아직 이빨이 튼튼한 자들이여,
그대들이 인생을 어찌 알리.
―임보, 「치아」 전문
흔히 우리는 이런 말을 한다. ‘암, 나이는 못 속이지.’ 40줄에만 들어서도 노화는 한 해가 다르게 진행되는데 시인은 어언 60대이다. 임보는 젊음과 늙음 사이의 분수령을 갱년기 현상이 아니라 틀니로 인식하고 있다. ‘아직’ 이빨이 튼튼한 자들이 인생을 어찌 알리오 하고 탄식하면서. 시인은 다른 한편으로, 불편하기 짝이 없는 틀니를 통해 ‘늙음’이라는 자연계의 순리와 늙은이의 지혜를 들려주고 있다. 이 땅의 수많은 노인네들은 틀니를 넣었다 빼면서, 혹은 뺐다 넣으면서 무엇을 생각하는 것일까. ‘인생이란 참 덧없는 것을.’, ‘나도 튼튼한 이빨로 갈비를 뜯은 적이 있었지.’, ‘틀니 없는 너희들이 인생을 알어?’, ‘젊음이란 값진 재산을 저렇게 밖에 못 쓰는 것일까.’……. 이 시는 너무 빨리 시가 끝나버려 일종의 경구 같다. 그래서 짧은 것이 그렇게 미덕인 것 같지 않다. 틀니를 갖고 있는 사람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 양분한 것도 마음에 걸리고, 뒤의 두 행이 너무 단선적인 발언이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기도 한다.
애견 ‘고야’와 함께
이름 모를 짐승의 흔적을 추적하다
약간 지쳐서 행복해지면
세면장에 커튼을 두른다
동굴처럼 운신의 폭이 좁은 공간
문명의 상의와 하의를 벗어 던지고
더운물을 온몸에 끼얹으면
겨울 온천을 즐기는 크로마뇽인처럼
가슴에 털이 자라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송곳니가 쑥 자라고
눈알이 빨개진다
그리고는 이상한 평화
자욱하다
―이상옥, 「겨울 크로마뇽인」 전문
혹 시인의 취미 중 하나가 애견을 데리고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닐까. 들로 산으로 돌아다니다 집에 돌아와 목욕을 하는 시간을 즐긴다는 것이 이 시의 주된 내용이다. “문명의 상의와 하의”를 입은 이와 “겨울 온천을 즐기는 크로마뇽인”은 대조를 이룬다. 화자는 일단 그 옛날에도 더운물을 온몸에 끼얹으며 겨울 온천을 즐긴 크로마뇽인이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곤 곧이어 자신이 그 크로마뇽인이 된 착각에 빠져 “이상한 평화”를 누리고 있다. 가슴에 털이 자라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송곳니가 쑥 자라고 눈알이 빨개지는 상상을 가능케 하는 공간은 바로 욕조 속이다. 온천욕을 즐기기도 했을 크로마뇽인을 생각하며 시인은 지금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즐기고 있다. 하지만 이 이상한 평화도 문명이 제공한 것일 테니, 참 아이러니컬한 일이다. 이름 모를 짐승의 흔적을 추적한다는 것도 그렇고 크로마뇽인이란 존재도 그렇고 이 시에 드리운 안개가 너무 자욱한 것이 불만스럽다.
저렇게 일생 끌어안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다면
나 차라리 누에 한 쌍으로 꿈틀거리며 사랑하리
일어나면 영영 헤어질까 돌부처로 누운 서러운
저 사연아 어쩌나 우리같이 언젠가 헤어질
연인 만나 거기 눕히려는 저 와불의 눈치를
선연히 알고 난 나는 뒷걸음치며 무서운 숙명을
비켜서듯 돌아설 때 와불에 홀린 듯 빠져 있는 그대
저렇게 누운 영원한 자비나 되자 그대 말할까봐
서둘러 목 없는 천불 천탑이나 보자고 내려왔던
가슴 철렁했던 운주사 하늘은 쪽빛.
―신달자, 「운주사 와불」 전문
나는 이 작품을 상당히 에로틱한 시로 이해한다. 짐승도 몸이 가장 원기 왕성할 때 짝짓기를 하듯이 인간도 한창 나이 때라면 젊음의 요구에 순응해야 마땅하다고 시인은 생각한 것이리라. 화자는 운주사 와불을 보며 이렇게 생각한다. ‘아이구, 저렇게 일생 끌어안지도 못하고 누워만 있다면 차라리 누에가 되는 것이 낫지.’ 그리곤 돌부처로 누워 있는 저 와불이 여기 와서 같이 눕자고 할까봐 두려움을 느낀다. 와불의 의인화에 따른 일종의 환상이다. 화자의 연인인 ‘그대’는 와불에 홀린 듯 빠져 있는데, 화자는 그것이 영 불안하다. “우리같이 언젠가 헤어질/ 연인”이란 말은 시인이 두 사람의 운명을 이미 알고 있기에 한 것일까. 어쨌든 화자는 “저렇게 누운 자비나 되자”고 그대가 말할까봐 걱정이 되어 서둘러서 목 없는 천불 천탑이나 보자고 절 아래로 내려간다. 그때 가슴이 철렁했던 것은 그대가 ‘세속’을 버리고 ‘구법’의 길을 걸어가자고 할까봐 겁이 났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화자는 ‘욕망’의 세계를 버리고 ‘해탈’의 세계로 가고 싶지가 않다. 시인이 원하는 세계는 세속세계에서 아옹다옹 다투며, 살을 맞대고 사는 것이다. 행갈이에 좀더 신경을 썼더라면 좋았을 것을. “누에 한 쌍으로”도 이상하다. “누에가 되어”가 더 적합치 않았을까.
이상에서 언급한 5편 공히 썩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이런 유의 짧은 시 가운데 명시가 많이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내 1년 후배로 박형희라고 있는데, 폐결핵으로 서른도 되기 전에 죽어 친구들이 모여 유고시집 『다시 나기』를 내준 적이 있다. 그 시집에 있는 시 한 편을 이 자리에 적고 싶다.
수인 번호가
불려질 때마다
강아지풀
줄기 한 겹
벗겨지듯
죽음
한
고비
들여다보는
시한부 생명
―「사형수」 전문
나 같았으면 5행 정도로 썼을 시가 10행으로 되어 있다. 이 시의 묘미는 시가 전체적으로 짧은 데에 있기도 하지만 각 행의 길이가 다 짧은 데에 있다. 시란 행간에 숨은 뜻이 있어야 하고, 들이쉬고 내쉬는 호흡이 필요하며, 올라갔다 내려오는 리듬감이 느껴져야 한다. 그런데 나의 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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