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9일
신의 법칙은 온갖 종교 속에 표현되어 있다.
1
신의 의심할 수 없는 하나의 나타남은 선의 법칙이다.
2
인간의 상업, 계약, 전쟁, 과학, 예술, 들 등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은 다만 그렇게 보일 따름이다. 인간에게는 단 하나만이 중요하며 또 오직 그 하나만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은 자기 자신의 도덕상 지킬 일을 확실하게 하며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생존하고 있는 것이다.
3
자연 속에 보이는 이지는 인간들에게 할 일을 하도록 눈뜨게 하며 좋지 못한 일을 하지 못하도록 억제한다. 이 자연 속의 이치가 하나의 규칙으로 되는 까닭은 그것이 글로서 쓰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같이 영원한 신에 속하는 규칙으로 되기 때문이다.
< 시세로 >
4
어떤 성인을 향하여 사람들이 묻기를,
『자기의 행복을 위하여 일평생을 내걸만 한 규범이 있겠습니까』하였다.
성인이 대답하기를,
『있다. 그 규범의 뜻은 다음과 같다. 즉 사람들이 자기들이 바라지 않는 바를 타인에게 바라지 말라 하는 것이다.』라고. < 中國의 격언 >
*
사람들과 절충할 때마다 상호부조의 정신을 생각하라. 사람들이 나에게 해주듯이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베풀 생각을 하라. 나중에는 그것이 습관이 되리라.
◇ 폭압과 사랑
어떤 한 사람의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육체적인 혹은 도덕적인 폭압을 행사 한다면 옳은 일이겠는가? 그것이 가령 개인이나 사회의 행복에 대한 방해를 극복한다는 목적이던 혹은 더욱 그 이상으로 정신적인 결합이라는 고상한 목적을 갖고 있을 때에도 말이다.
성서 속의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의 가르침은 이 문제를 부정적 의의에 있어서 해결하고 있다.
기독교 신자로서는 폭압 을 행사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너의 오른뺨을 때리거든 왼뺨을 내어 주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것이 기독교 신자에게 대한 신의 가르침이다. 살인, 혹은 간음의 죄가 무엇 때문에 저질러졌다 하드라도 혹은 누가 하였다 하드라도 한 사람의 인간이 하거나 몇 백만의 사람들이 하거나 그것이 죄임에는 다름이 없다. 왜냐 하면 신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동등하며, 신의 법칙은 예외라든가 단서 따위를 가지며 때와 곳에 따라서 변화하는 인간적인 법칙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자에게 있어선 항상 죽이는 자보다 죽음을 당하는 자 편이 나은 것이며 폭압을 행하는 자보다 폭압에 괴로워하는 편이 나은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기독교 신자의 법칙에 의하여 생활하지 않는다. 즉 이해와 사양과 자기희생과 관용과 동포애에 의하여 생활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야수적이고 동물적인 법칙에 의하여 생활하고 있다. 즉 양육강식에 의하여 생활하고 있는 것이다.
중병환자, 정신병자, 백치에 대하여 사람이 불행을 막을 목적으로는 어떤 폭압을 요구하는 것이 허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어쨌든 인간의 심중에 있는 신의 왕국을 파괴하지 않는 경우이며 사람들이 여태껏 기독교 신자임을 단념하지 않는 경우인 것이다.
그것ㅇ은 피할 수 없는 죄라 생각하고 견딜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허용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 신자와 배기독교 그 신자와는 훨씬 이전부터 인생에 대한 두개의 상반하는 이해로서 생존하여 왔다.
기독교 신자 적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으로 즉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에 대한 갚음으로써 선을 행함을 의미한다. 우리들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기독교 신자 적으로 살려고 하는 노력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 사이에는 『사랑』과 『행복』이 불어 가리라. 우리들이 배 기곡교적인 가르침을 허용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사람들의 생활은 불행해지리라.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의 가르침은 인간의 의식 속에 온전한 선과 온전한 악에 대한 이해의 구별을 해결하고 두개의 길에 명확한 의의를 붙이는 것이다.
하나는 진정한 『그리스도』의 길, 마음속에서 울어 나오는 사색과 감정의 길, 즉 생활의 길이다.
다른 하나의 길은 기만과 악마의 길, 여러 가지 허위의 길, 즉 죽음의 길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무저항주의의 십자가를 짊어지게 하고서 악에 대한 희생에 자기 자신을 바침이 아무리 무서운 일로 생각되던, 우리들은 그때 신의 길, 구원에 길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을 말할 줄 알게 되리라.
그리고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며, 자기의 이해하는 빛을 가지고 이 길을 밝힘을 곤란하리라.
그러나 함부로 미래를 탐색하는 일 없이, 우리들은 결코 벽에 부딪치던가 지오를 향해 걸어 가는 것이 아닌 것이며 앞에는 『길』과 『빛』이 잇다는 신앙을 얻을 수 있도록 희망을 잃어 버려선 안 되는 것이다.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란 생활을 수호하며, 자기나 타인의 노동을 수호함을 그만 두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인간 속에 잇는 높은 이지를 갖는 존재에 대하여, 모순되지 않는 한의 방법을 갖고서 모든 필요한 것을 수호함을 의미함에 불과하다.
생활 수호하며 다른 사람들과 자기의 노동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덤벼드는 악인들 속에 이지를 갖는 실제의 생활을 각성하게 함이 필요하다. 그 방법은 특히 자기 자신의 정신적인 완전성 속에 이뤄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선과 이지적인 빛에 착용하기 때문에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를테면 만약에 내가 한 사람의 인간이 어떤 사람을 죽이려고 함을 보았을 때, 내가 무엇보다도 먼저 취해야할 태도는, 자기 자신을 그 살해되는 사람의 입장에 두는 것이다. 그리고 악인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자아! 여기에 내 가슴이 있다. 먼저 나를 죽여라. 살인하는 것을 보고 묵과할 수가 없다.』라고.
나 자신을 멸망시키는 것과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같은 일이다. 가령 내가 그러한 일을 하기에 무력한 자라 생각되어도 ━ 나 자신이 방황하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러한 나의 무력함이 다시는 죄를 범할 권리를 나에게 주지는 않는 것이다. < 브 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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