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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명화

고야

by 바닷가소나무 2006. 9. 27.

1746. 3. 30 스페인 푸엔데토도스~1828. 4. 16 프랑스 보르도.

스페인의 화가.
[개요]

그의 다양한 유화·소묘·판화는 당대의 격변하는 역사를 반영하고 있으며, 19세기와 20세기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동판화 연작인 〈전쟁의 참화 Los desastres de la guerra〉(1810~14)는 나폴레옹 침략의 공포를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옷을 벗은 마하 Maja desnuda〉와 〈옷을 입은 마하 Maja vestida〉(1800~05경)가 있다.

[초기교육과 경력]

고야는 사라고사에서 그림공부를 시작했다. 스승은 나폴리에서 공부한 호세 루산 이 마르티네스라는 화가였다. 그뒤 마드리드로 가서 궁정화가인 프란시스코 바예우의 제자가 되었고, 1773년에 스승의 누이동생과 결혼했다.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갔으며, 1771년에는 로마에 있다가 사라고사로 돌아와 처음으로 대성당에 프레스코를 그리는 중요한 일을 맡았다. 그뒤 10년에 걸쳐 이 일을 했다. 사라고사에서 그린 이 프레스코들과 초기의 다른 종교화들은 당시 스페인에 유행하던 바로크-로코코 양식으로 그려졌으며 특히 베네치아의 위대한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고야는 1775년부터 궁정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그 때부터 1792년까지 산타바르바라의 왕립태피스트리 제작소를 위해 60점이 넘는 밑그림(대부분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음)을 그렸다. 당시 귀족과 서민의 오락과 생활을 그린 이 그림들은 티에폴로가 죽은 뒤 스페인 궁정의 미술감독이 된 독일의 대표적 신고전주의 화가 안톤 라파엘 멩스의 지시에 따라 제작하게 된 것이다. 고야가 초기에 그린 밑그림에서는 티에폴로의 영향을 받았던 장식적 화법이 단순함을 강조하는 멩스의 가르침에 따라 많이 바뀌었다. 후기의 밑그림은 그가 외국의 전통에서 벗어나 독특한 양식을 개발했음을 보여주며, 이런 독특한 양식은 17세기 궁정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연구한 뒤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1778년경 고야는 궁전에 소장된 벨라스케스의 그림을 대부분 동판화로 모사했다. 만년에 그는 벨라스케스, 렘브란트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연(自然)을 가장 위대한 세 거장으로 인정했다고 한다. 렘브란트의 동판화가 고야의 후기 소묘와 판화에 영감을 준 것이 분명하며, 벨라스케스의 그림은 고야로 하여금 자연을 연구하게 만들고 그에게 사실주의 표현을 가르쳤다.

1780년 고야는 마드리드의 산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그가 입회를 위해 제출한 작품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Christ on the Cross〉였다. 이 그림의 구도는 멩스의 방식을 따른 틀에 박힌 것이었지만, 벨라스케스가 그린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자연주의 양식으로 채색된 것으로 보아 고야는 분명히 벨라스케스의 작품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1785년 왕립 아카데미의 회화부 부감독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국왕 카를로스 3세의 전속화가가 되었다. 그는 이 10년 동안 전형적인 18세기식 자세를 취한 궁정관리들과 귀족들을 그린 초기 초상화를 제작했다. 〈폰테호스 후작부인 The Marquesa de Pontejos〉 같은 상류사회 부인들의 전신 초상화에서 인물의 거만하면서도 우아한 모습과 화려한 의상을 능숙하게 표현해낸 점은 벨라스케스의 궁정 초상화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며, 〈사냥복을 입은 카를로스 3세 Charles Ⅲ as Huntsman〉(개인소장)도 벨라스케스가 그린 사냥하는 왕족들의 모습에 직접적으로 바탕을 두고 있다.

[카를로스 4세 시절]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기 몇 달 전 카를로스 3세가 죽자(1788), 고야의 예술이 원숙기에 달하던 번영과 개화의 시대는 끝났다. 허약하고 우둔한 카를로스 4세와 영악하고 파렴치한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집권에 따른 극히 보수적인 통치와 정치적·사회적 부패는 나폴레옹이 스페인을 침략함으로써 막을 내렸다. 그러나 카를로스 4세 밑에서 고야는 궁정화가가 되었고 스페인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화가로서 인기를 누렸다. 1795년 왕립 아카데미 원장이 되었고(건강 때문에 2년 뒤 그만두었음) 1799년에는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다. 명예와 세속적 성공을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자신이 몸담았던 상류사회와 후원자들에 대한 그의 기록은 무자비할 정도로 신랄하다. 1792년에 병을 앓고 귀머거리가 된 뒤 그의 예술은 새로운 특성을 나타냈는데, 자신의 예리한 눈과 비판적인 정신으로 관찰한 현실과 상상의 세계를 자유롭게 표현했다. 병세를 회복하는 동안 〈난파선〉·〈역마차를 습격하는 강도들〉·〈불〉 등의 재앙을 나타내는 작은 그림들을 그려서 편지와 함께 왕립 아카데미 부고문에게 보냈다. 1794년에 쓴 그 편지에는 "나는 주문작품에서는 환상이나 창의력을 발휘할 수 없어 전혀 관찰하지 못했던 것을 지금은 관찰할 수 있습니다"라고 씌어 있다. 연작으로 그린 이 그림들은 1794년 〈정신병원 The Madhouse〉으로 완성되었다. 이것은 고야가 사라고사에서 실제로 본 장면을 대담한 스케치 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풍자화처럼 과장된 사실주의의 효과를 낸 작품이다. 그러나 그는 더 의도적이고 진지한 풍자를 위하여 능통해 있던 소묘와 판화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80점의 동판화로 이루어진 〈변덕 Los caprichos〉(1799)에서 그는 풍자만화의 대중적 상상력을 이용하여 정치적·사회적·종교적 악습을 비판했으며, 수준 높은 독창성을 발휘했다. 색조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새로 개발한 애쿼틴트(aquatint) 기법을 능란하게 구사한 이 작품은 놀랄 만큼 극적인 생생함을 보여주며 동판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업적으로 남아 있다. 고야는 테마와 제목을 모호하게 한 채 '모든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방종과 어리석음'에서 주제를 얻었다고 말했지만, 이 작품은 유명인사들을 지목한 것으로 여겨져 며칠 뒤 판매가 금지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야는 몇 달 뒤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다. 나중에 그는 종교재판소로부터 협박을 당했고, 1803년에는 아들이 연금을 받게 된 답례로 왕에게 〈변덕〉의 원판을 증정했다. 그는 의뢰받지 않고 그린 그림에는 관찰력·상상력·독창성을 마음껏 발휘하면서도, 의뢰받고 그린 그림에는 여전히 틀에 박힌 형식을 취했다. 마드리드의 산안토니오데라플로리다 교회를 장식하고 있는 그림(1798)은 여전히 티에폴로의 전통을 따르고 있기는 하나, 이처럼 대담하고 자유로운 기법으로 종교적인 인물과 세속적인 인물들의 전형을 표현적 사실주의에 입각해 묘사한 것은 유례없는 일이었다. 그는 친구와 관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렸는데, 더욱 폭넓은 기법과 아울러 성격묘사에 새로이 중점을 두었으며 특히 얼굴 묘사에는 성격을 꿰뚫어 보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점은 〈도냐 이사벨 데 포르셀 Doñ Isabel de Porcel〉과 같은 여성의 초상화에서 특히 진가를 보여준다. 그는 왕족의 초상화도 아첨하기 위해 더 잘 생기게 그려주는 법이 없었다. 〈카를로스 4세의 가족 The Family of Charles Ⅳ〉에서는 주요 인물들의 보기 흉하고 천박한 모습이 풍자화의 효과를 자아낼 정도로 아주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나폴레옹의 침략과 왕정복고 이후]

웰링턴, Francisco de Goya가 그린 초상화(1812)
고야가 가장 높은 공직에 있던 1808년, 카를로스 4세와 그의 아들 페르디난도는 잇따라 왕위에서 강제로 물러나고 나폴레옹군(軍)이 스페인에 들어와 나폴레옹의 동생인 조제프가 왕위에 올랐다. 고야는 궁정화가의 신분을 유지했지만 전쟁 동안 스페인과 프랑스 장군들도 그렸고, 1812년에는 웰링턴 공작의 초상화를 그렸다. 이때 그는 〈전쟁의 참화 Los desastres de la guerra〉를 위한 소묘도 그렸는데, 이 연작 동판화는 침략과 전쟁의 공포 및 그 비참한 결과에 대한 자신의 반감을 담은 것이었다. 이 작품에서 그는 자신이 목격한 난폭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을 기록형식의 사실주의가 아니라 선묘와 애쿼틴트를 써서 극적으로 구성했으며, 빈틈없는 세부묘사로 실물 같은 생생한 효과를 창조해냈다.

침략자들이 추방되고 1814년 페르디난도 7세가 복위하자, 고야는 프랑스 왕에게 봉사한 죄를 용서받고 다시 수석 궁정화가가 되었다. 〈1808년 5월 2일:마멜루크족의 진격 The 2nd of May 1808:The Charge of the Mamelukes〉과 〈1808년 5월 3일:마드리드 수비군의 처형 The 3rd of May 1808:The Execution of the Defenders of Madrid〉은 마드리드의 민중봉기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작품들이었다. 〈전쟁의 참화〉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들도 극적인 사실주의로 표현되었고, 웅대한 규모 때문에 한층 감동적이다. 이 그림의 인상주의적 양식은 인상파의 등장을 예고했으며, 19세기 프랑스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특히 마네는 〈1808년 5월 3일〉의 구성에서 영감을 받았다. 페르디난도 7세가 복위한 뒤에 그린 왕의 초상화에서 고야는 잔인한 폭군의 성격을 어떠한 묘사보다도 훨씬 강력하게 표현해냈다. 왕의 억압정치 때문에 고야의 친구들은 대부분 망명길에 올랐고, 결국에는 고야 자신도 추방을 당했다. 고야는 더이상 공식 초상화는 그리지 않았지만, 친구와 친척들의 초상화와 〈자화상〉(1815)은 모두 개성이 강한 작품이다. 이 시기에 그린 종교화 가운데 〈게쎄마니 동산의 고뇌 Oracion del Huerto〉와 〈성 호세 데 칼라산스의 마지막 성찬식 The Last Communion of St. Joseph of Calasanz〉(1819)은 초기의 어떤 작품보다도 진실한 신앙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귀머거리의 집'(Quinta del Sordo)이라고 하는 시골 별장의 벽을 장식한 수수께끼 같은 〈검은 그림들 Pinturas negras〉(1820~23, 프라도 미술관)과 비슷한 시기에 만든 연작 동판화 〈속담놀이 Los disparates〉(1864)는 표현주의 기법으로 악몽같은 환상을 보여주며 냉소적이며 염세적인 절망을 반영하고 있다.

[말년]

1824년 자유주의 정부를 세우려는 기도가 실패로 끝난 뒤 새로운 박해가 시작되자, 고야는 건강을 핑계 삼아 프랑스에 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 그는 잠시 파리에 머물다가 보르도를 망명지로 선택했고 마드리드에 잠깐 다녀온 것 말고는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늙고 쇠약했지만 주위 세계에서 받은 인상을 유화·소묘·석판화에 계속 담았다. 그가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 중에는 풍속화와 망명한 친구들의 초상화가 있다. 〈돈 후안 바우티스타 데 무기로 Don Juan Bautista de Muguiro〉·〈레안드로 페르난데스 데 모라틴 Leandro Fernández de Moratín〉·〈돈 호세 피오 데 몰리나 Don José Pío de Molina〉에서는 윤곽과 세부 묘사를 생략하고 색깔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명암을 통하여 인물의 형태와 성격을 통합하는, 그의 화풍의 최종적인 국면을 보여준다.


 
[평가]

고야의 성격이 반항적이고 행동이 난폭했다는 설은 입증할 만한 증거가 거의 없지만 그가 혁명적인 예술가였던 것만은 분명하다. 당대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묘사한 그의 수많은 유화·소묘·판화는 그가 살았던 시대의 정치적·사회적 격변을 반영하고 있다. 직속 후계자는 없었지만 독창적인 그의 업적은 19세기 후반 낭만주의에서 사실주의·인상주의에 이르는 유럽의 새로운 미술사조를 이끈 프랑스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는데, 들라크루아도 고야를 숭배한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20세기 표현주의와 초현실주의 화가들도 고야의 작품을 찬양하고 연구했다.

E. Harris 글 | 金碩禧 옮김


 1805년 5월 3일의 총성1814

 

 

 

1808년 5월 3일1814

 

거인 티 1808-12

 

 

누드의 마하1800

 

 

눈보라1786

 

 

도자기 상인1779

 

 

마녀의 집회1778

 

 

마하와 얼굴을 가린 사나이들1777

 

 

만자나르 언덕에서의 소풍1776

 

 

불1793

 

 

사투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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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 입은 마하1800-03

 

자화상1795

 

 

 

투우

 

 

 파라솔17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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