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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명화

고갱

by 바닷가소나무 2006. 9. 27.

 

1848. 6. 7 파리~1903. 5. 8 마르케사스 제도 아투아나.

후기인상파 시대를 이끈 프랑스 화가.
[개요]

고갱이 그린 패널화 〈자화상〉(1889)
그가 보여준 개념적인 표현방법은 20세기 미술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쳤다. 1888년 아를에서 빈센트 반 고흐와 얼마간 같이 지낸 뒤 고갱은 차츰 모방적인 작품을 그만두고 색채를 통한 개성적인 표현을 추구해나갔다. 1891년부터는 남태평양의 타히티와 다른 여러 곳에 살며 작품활동을 하였다. 대표작으로는 초기작인 〈설교 후의 환영 Vision After the Sermon〉(1888)과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Where Do We Come From? What Are We? Where Are We Going?〉(1897~98)가 있다.


 
[초기]

고갱은 오를레앙 출신의 저널리스트인 아버지와 페루의 프랑스계 혼혈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 3세가 쿠데타를 일으킨 뒤인 1851년 고갱 가족은 리마로 이주했다가 4년 뒤에 폴과 그의 어머니는 오를레앙으로 돌아왔다. 고갱은 17세부터 6년 동안 화물선과 군함을 타고 세계를 항해하다가 1871년 파리의 베르탱 주식중개회사에 들어갔고, 1873년 젊은 덴마크 여인 메트 소피 가드와 결혼했다. 그는 후견인이었던 귀스타브 아로사의 영향으로 미술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아로사는 코로ㆍ들라크루아ㆍ밀레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주식중개회사 동료이며 함께 그림 그리기를 시작한 에밀 쉬프네케르도 그에게 영향을 주었다. 고갱은 곧 화실에 다니며 모델습작도 하고 미술지도도 받았다. 1876년 작품 〈비로플레 풍경 Landscape at Viroflay〉이 해마다 공식적으로 열리는 전시회인 살롱전에 입선했다. 그는 인상파 그림에 관심을 갖고 1875~76년에는 마네ㆍ세잔ㆍ피사로ㆍ모네ㆍ용킨트 등 인상파 화풍의 그림을 수집했다.

1875~76년 고갱은 카미유 피사로를 만나 그와 함께 작업을 시작하면서 소묘와 유화 기법을 터득하기 위해 노력했다. 1880년 그는 제5회 인상파전에 출품했으며 1881년과 1882년에도 계속 출품했다. 휴일을 이용해 피사로, 폴 세잔과 함께 그림을 그렸는데 초기에는 재주가 서투르고 단조로운 색채를 주로 썼지만 곧 눈에 띄게 발전해갔다. 이렇게 하여 고갱은 점점 그림에 빠져들어갔는데, 1883년 파리 증권거래소가 파산하여 직업을 잃게 되자 그는 '매일 그림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이 결정은 그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그에게는 아내와 4명의 자녀가 있었지만 수입이 전혀 없었고, 아무도 그의 그림을 사주지 않았다. 1884년 고갱의 가족은 코펜하겐으로 이주했으나 그곳에 있는 처가에서도 그들을 박대하여 결국 그의 결혼생활은 깨지고 말았다. 1885년 그는 파리로 돌아와서 예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기로 결정했다. 그뒤로 가난과 고난 속에 살았으며, 건강도 악화되었다. 결국 사회에서 버림받고 명성을 얻지도 못한 그는 유럽과 문명을 경멸하게 되었다. 1886년에 그는 조르주 쇠라와 폴 시냐크의 그림에서 색채의 표현가능성을 깨닫고 브르타뉴의 퐁타방에서 색채연구에 전념했다. 이때 고갱은 2가지 결정적인 경험을 하게 된다. 하나는 파리에서 반 고흐와 만난 것이고(1886), 다른 하나는 마르티니크로 여행한 것이다(1887). 반 고흐는 그와 그림에 대한 생각이 비슷한 정열적인 인물이었고, 화가공동체를 만들어 그 생각을 실현하려는 데 고갱을 끌어들이려 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1888년 아를르에서 지낸 몇 주일 뒤에 비참한 결과로 끝장이 나고 말았다. 마르티니크 여행에서는 열대지방 풍경에서 찬란한 색채와 관능적인 기쁨을 발견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원시공동체의 매력을 경험했다. 고갱은 그림을 통해 감정을 표출하려 했으며, 그결과 인상파에 반발하게 되었다. 1888년부터 그가 가졌던 예술에 대한 주된 태도는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원시미술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며 자연을 이용하지만, 이른바 정제된 미술은 관능으로부터 나오며 자연을 섬긴다. 자연은 원시미술의 하녀이며, 정제된 미술의 정부(情婦)이다. 자연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을 찬양하게 함으로써 사람의 영혼을 실추시킨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자연주의라는 가증스러운 오류로 굴러떨어지고 마는 것이다."

 

[인상파와의 결별]

결국 고갱은 심사숙고한 뒤 솔직하게 태초로, 즉 원시미술로 복귀함으로써 이러한 오류를 극복하기 시작한다. 그는 그림의 새로운 표현형식에 이를 수 있는 방법을 에밀 베르나르를 통해서 알게 됐는데, 베르나르는 스테인드 글라스, 필사본, 민속미술을 잘 아는 젊은 예술가였다. 그에 따르면 이러한 예술들은 현실묘사가 전반적으로 비모방적이며 그림 속의 형상들이 진한 검은색 윤곽선에 둘러싸인 각각의 순수한 색채영역으로 형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클루아조니슴(cloisonnisme) 또는 종합주의(synthétisme)라는 양식의 기원이 되었으며 고갱의 〈설교 후의 환영 The Vision After the Sermon〉·〈안녕하세요, 고갱씨! Bonjour Monsieur Gauguin!〉, 〈황색의 그리스도 The Yellow Christ〉(1889)에서 그 표현가능성을 최대한 보여주고 있다.

고갱은 과거의 인상파 경향과 결별한 뒤 그림 평면의 상이 마치 실재처럼 보이도록 착시현상을 일으키게 하는 선과 색채의 사용을 중단했다. 대신 그러한 회화적 수단의 가능성을 살려, 보는 이가 특별한 감정을 체험할 수 있도록 시도했다. 그의 형상은 갈수록 관념적인 것으로 바뀌고, 그의 색채는 암시적인 추상으로 변했다. 모리스 드니는 그의 저서 〈이론 Théories〉(1920)에서 고갱의 지도 아래 1888년에 폴 세뤼지에가 그린 작은 그림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이 풍경은 보라색과 주홍색, 녹색 그리고 다른 순색을 써서 종합적으로 표현되어 있어 아무 형식도 없는 듯이 보입니다…… '저 나무가 무슨 색깔로 보이지?' 고갱이 물었습니다. '저건 녹색이잖아 그래, 그럼 녹색으로 해. 팔레트에서 가장 순수한 녹색으로. 그리고 저 그림자는 파란색 같지 않나? 그럼 주저 말고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파랗게 칠하도록 해봐', 이렇게 그림을 '어떤 질서에 따라 배열한 색채로 뒤덮인 평면'으로 보는 풍부한 창조적 개념이 처음으로 우리에게 역설적이지만 결코 잊지 못할 방식으로 제시된 것입니다."

고갱은 쉽게 분명한 이미지를 만들 수 있게 한 원시주의(primitivism)에 몰두했다. 그의 단순한 색채 조화는 그 이미지를 더욱 강화했다. 그리고 자신의 그림이 보기에 즐거운 것이 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림의 장식적인 효과를 목표로 삼았다. 이 모든 것에서 그의 의도는 어떤 '관념'을 그림으로 표현하려는 것이었고, 그결과 그는 상징주의 운동을 주도한 화가로 인정받았다. 고갱의 모든 작품은 영혼을 파괴하는 부르주아 문명의 물질주의에 대한 반항이었다. 그는 스웨덴의 극작가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에게 보낸 편지(1891)에서 "당신은 문명세계에서 고통받고 있는데 나는 야만의 세계에서 다시 활력을 얻고 있다"고 썼다. 이처럼 고갱은 브르타뉴의 퐁타방(1889~90), 르풀뒤(1894), 타히티(1891~93, 1895~1901), 마르케사스 제도(1901~03) 등지에서 지내면서 '자연 그대로의' 남녀의 모습을 그렸다.

1891년 이전에 고갱은 의식적으로 사물을 평면화하려는 경향이 있었으며, 이로 인해 종종 부자연스러운 효과를 낳기도 했다. 그러나 1890년대를 거치면서 그의 원시주의는 앵그르퓌비 드 샤반의 영향으로 공격적인 면이 완화되어 점차 둥글고 입체적인 형상과 좀더 완만한 곡선을 보여준다. 이러한 발전은 〈우리는 언제 결혼할까 Nafea Faa Ipoipo〉ㆍ〈휴일 Nave Nave Mahana〉ㆍ〈황금빛 육체 Golden Bodies〉와 같은 작품에서 나타난다. 동시에 고갱의 그림은 뛰어난 색조 조화를 이루면서 더욱 화려해지고 더 자연스러운 시적 분위기를 띠었다. 타히티에서 그린 그의 대표작 〈우리는 어디에서 왔는가?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는 1897~98년에 그린 대형작품으로 6년 동안의 작업이 절정에 달한 걸작이다. 원시생활을 거의 철학적이고 우의적으로 표현한 이 그림의 환상적이고 일관성 없는 시적 분위기는 아주 인상 깊다. 1899년부터 병이 깊어져서 계속 고통을 받으면서도 그는 원주민들을 옹호하기 위하여 행정당국과 자주 충돌했다. 그러나 이렇게 우울한 생활 속에서도 그의 말년의 작품들에는 여전히 평온과 희망이 배어 있다.

 

[영향]

1889~90년 젊은 추종자들이 퐁타방으로 그를 찾아 모여들었다. 이들 세뤼지에, 샤를 필리거, 드니 등은 고갱의 사상을 에두아르 뷔야르와 피에르 보나르에게 전했다. 노르웨이 화가 에드바르트 뭉크도 고갱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또한 앙리 마티스를 포함한 야수파 화가들도 그의 색채 구사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 한편 고갱의 원시주의와 양식의 단순화는 젊은 시절의 피카소에게 큰 영향을 주어 흑인 미술의 아름다움을 깨닫게 했으며, 입체파로 나아가는 길을 열게 했다. 독일에서도 고갱의 영향은 컸다.

고갱은 관념과 지각, 시각적 형상 간의 신비로운 균형을 잡는 능력이 특출한 화가였다. 그의 그림은 문학적 함축보다는 시각적으로 그 효과를 창출한다. 그는 표현기법을 변화시킨 위대한 개혁가였는데, 그림을 거울에 비친 현실의 상으로 여기던 생각을 거부하고 경험적인 표현기법에서 개념적인 기법으로 전환함으로써 널리, 오래도록 영향을 미쳤다.

D. Cooper 글 | 李容大 옮김

 

 

 

 

 

4명의 브르타뉴 무용수1886

 

 

 

 나부습작1888

 

 

 

 만돌린이있는 정물1885

 

 

 

망고의 여인1886

 

빨간꽃과 유방1889

 

 

 

아이타 파라리

 

야회복 입은메트1884

 

 

열대식물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는가

 

 

자화상1889-90

 

 

피사로(Right)와 고갱(Left)

 

 

해변가의 타히티 여인들1891

 

 

황색의 그리스도1889

 

 

 

Arearea(Joyousness)1892

 

 

 

Fatata te Miti(해변가에서)1892

 

 

Nafea faa ipoipo18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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