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슐라르 [Gaston Bachelard, 1884 ~ 1962]
프랑스 과학철학자. 상파뉴지방 바르쉬르오브 출생. 디종대학 철학교수를 거쳐 소르본대학 교수를 지냈다. 과학사·과학철학과 문예평론의 연결로 독자적 지위를 차지했다. 이 두 이질적인 영역은 그에게 서로 보완적 긴장감을 조성해 다채로운 사상을 전개시켰다. 과학사·과학철학은《근사한 인식시론(認識試論, 1928)》으로 시작하여 《신과학적 정신(1934)》 《지속된 변증법(1935)》 《과학적 정신의 형성(1938)》《부정(否定)의 철학(1940)》 《합리적 유물론(1935)》으로 전개되었는데, 참된 합리주의의 발전에 대하여 그릇된 합리화가 장애가 되므로 고정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인식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실재(實在)란 과학적 인식의 투기(投企;프로제)라고 하는 과학의 기술적 성격을 강조하였고, 참가(앙가제)로서의 전면적인 합리주의, <개방된 철학>을 주장하였다. 문예비평에 대하여서는 《불의 정신분석(1938)》 《로트레아몽(Lautramont, 1940)》에서 불·물·대기·흙의 4원소에 대한 일련의 정신분석을 거쳐 《촛불(1961)》에 이르는 저작으로서 몽상에 대한 현상학적 기록을 했음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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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슐라르(Gaston Bachlard, 1884-1962)
철학자와 시인의 고독한 작업
바슐라르의 작품들은 시와 과학이라는 두 개의 덧문(volets; 들여다보기 위해서 열어야 할 창문의 덧문)이 있다. 그래서 그는 작품을 다양하게 쓸 수 있었고, 그 작품들에서 합리적 엄격성으로 몽상을 따로 떼어놓으려 했을 것이다. 그의 사상의 다양성은 바슐라르 생애의 충만성을 표현한다. 바슐라르는 "사분 오열되고 사분 오열하는 경험(écartelée, écartelante expérience)"에 직면하여, 작업장에서 실존의 내재성을 요청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방구석에서 움직이지 않고 있는 자의 씁쓸한 몽상"을 고발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꿈을 알기 위하여, 실재적인 것과 깊숙이 연결되어야 한다. 즉 물질의 요소들에 뿐만 아니라 단어와 시에도, 그리고 [바슐라르의 출신지인] 바-쉬르-오브(Bar-sur-Aube)의 고향집과 꿈꾼 집에 뿐만 아니라, 파리의 거리와 인간의 투쟁들에도 깊숙이 연결되어야 한다. 그래서 바슐라르의 작품은 구체성에 뿌리 박혀 있다. 의심할 바 없이 작품의 두 방향인 꿈과 과학의 합리성은 의미상으로 진솔하다. 그러나 바슐라르는 모든 독단의 거부라는 동일한 태도에 의해서 두 요구를 화해시키려 했다.
논쟁적 인식론
바슐라르는 자신의 반성의 중심에서 지적인 동기를 가지고 실행했다. 그러한 것은 과학적 작업에 관한 그의 초기 작품들에서부터 나타난다. 『접근된 인식(La connaissance approchée, 1934)』과 『새로운 과학적 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 1934)』은 1934년에 출판되었다. 그는 여기서 미래로 열린 이성, 진리의 정복을 위하여, 지금까지 조용히 지지 받고 있었던 원리를 문제삼을 수 있는 이성을 제시한다. 바슐라르는 과학적 사유의 진보에서 획득된 지식이 단절에 의하여 불연속적으로 이루어진다고 강조한다. 그는 20세기초에 학문의 위기를 증거로 삼고 있다. [후설의 유럽 학문의 위기에 대해 것과 비교해 보라] 그 위기들은, 상대성, 결정론, 집합론에서 있었다.
그의 학문에 대한 근본적 공헌은, 문화적 측면이기는 하지만, 심리주의(psychisme)의 무의식적 심층 속에서 사유에 내재하는 인식론적 "장애물(les obstacles)"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이런 계획에서 나온 『과학적 정신의 형성(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 1938)』, 『불의 정신분석학(La psychanalyse du feu, 1938)』은 같은 해에 나왔으며, 매우 교훈적인 작품들이다. 그의 저술은 매카니즘을, 과학적 광경을, 세밀한 분석을, 단순한 것에로 환원을, (응결된) 개념에 해당하는 물질의 정태적 개념을 잊게 하기 위한 소중한 조언이다. 바슐라르는 이성의 응결된 개념에 대립되는 인식의 변증법적 공헌을 표현하기 위하여 "부정의 철학"을 불러 일으켰다.
[인식론은 대립자 또는 타자의 부정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다. 말하자면 자신과 다른 것 사이의 차이에서 출발한다. 이런 구분에서 동일성(le même)에서 이질성(l'autre)은 구별되어 나온다. 이런 동일성을 단초로 학문이 성립한다. 이질성에서는 자료의 항상성으로 찾을 수 없다. 그래서 각 학문은 자기 한계 내에서 정합성을 유지하고, 그래서 타학문에 대하여 암암리에 배타성을 견지하고 있다. 이에 비해 인간의 문제는 타인을 부정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성립을 불가능하게 한다. 인간 없는 사회 속에 산 늑대 인간은 인간이 아니라 늑대이다. 그러나 타인 없는 개인으로 살아본 적이 있는 로빈슨 크루소는 이미 인간 속에 살아보았던 사회성이 있기 때문에 그는 자연 종으로써 인간으로 산 것은 아니다. 그는 이미 보이지 않는 타인 즉 습관의 타인과 함께 살고 있고, 또한 욕망의 타인과 살고 있으면서, 미래의 상징을 설정하며 그 상징과 더불어 살고 있다. 그래서 개체로서 인간에게는 이미 타인의 너울이 느리워져 있다. 이를 벗기면, 자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지 않다. 이미 입혀진 방식으로 존재하는 인간이 본성의 인간이다]
그는 자신의 사유를 "극복합리주의(surrationalisme, 또는 승화합리주의)"이라고 지칭한다. 몇몇 역사가나 과학 철학자는 오늘날 바슐라르의 정식화 작업의 과감함에 대해 비난한다. 그러나 그런 비판은 바슐라르의 사유가 대학에 갇혀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며, 그의 사유가 "이성의 오류와 공포"라는 장애물을 고발하는 교육적 의지에서 자발적 반란(volontiers frondeuse)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것이다.
창조적 상상의 탐험
창조적 자유를 요청하면서, 바슐라르는 상상을 회복시키고자 하였다. 현상학과 정신분석학에 접근한 그는 이마쥬의 "실체적(chosiste)" 개념을 거부했다. 그에 따르면, 상상은 열려져 있으며, 미래로 완전히 개방되어 있다. 과학의 지성성(intelligibilié, 인식될 수 있는 대상과 영역)에서처럼, 이마쥬에 대해 정신분석학을 통하여 그는 실재적인 것에 대해 화수분처럼 마르지 않는 풍부성에 침투하고자 애썼다. 여기서 실재적인 것이란 사유되기 앞서서 체험된 것이다.
[베르그송은 『물질과 기억(MM, 1896)』에서 생성하고 변하고 있는 실재를 이마쥬라는 가설을 제시한다. 이에 따라서 우리는 질료 형이상학에서 생성중인 실재인 모든 물체(신체)는 이마쥬이다. 이 이마쥬에는 기억이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무기물이 물체는 자신의 고착된 방식으로밖에 존속하지 않지만 즉 망각으로 존속하지만, 생명 있는 신체는 다른 물체에 대해 행위 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지각하며 활동하는 기억을 지닌 실재이다. 이 신체에 내재하는 기억은 일차적으로 사유의 대상이 아니며, 체험된 경험으로서 현재에 행위 하는 대상에 따라(또는 주위에서) 적응하고 작용하는 권능(puissance)이다. 그래서 신체라는 이마쥬의 범위는 이 권능을 현실적으로 표현하는 기능의 한계이다.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하여 인간은 도구(시각적인 예만을 들자면 안경, 현미경, 망원경을 이용한다)를 사용한다. 이때 고정된 추억은 습관에 맞추어 수동적으로 나온다는 점에서 물체에 동연적이다. 그러나 유동적 덩어리인 기억은 살아 있는 신체에 공연적이다. 여기서 '동연적'은 복사적 반복이라면, '공연적'은 반복의 내용이 자기 성장과 발전이다. 즉 공연적이란 이마쥬의 자기 생성 변화를 의미한다. 이마쥬의 자기 생성은 상상의 역할인가? 이마쥬가 미래를 잠식하려는 즉 가능적 행위를 앞으로(미래로) 실현하려는 작용에서 상상이 나온다. 이 상상은 과거의 기억에 미래의 가능성을 보탠 것이다. 여기서 가능은 실재보다 많은 것일 수 없으며, 많은 실재가 가능의 일부와 결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실재는 반과거적 현재이지만 미래보다 더 많다(양적으로 크다). 일반적 상식으로 미래가 현실보다 더 크다는 것은 현실과 연관 없는 허위 또는 착각적 미래를 모두 나열하고 그 모든 것을 존재로서 상정하기 때문이다. 가능적 현실은 얼마 되지 않는다는 것에 대한 인간의 자각이 필요하다.]
상상은 심리주의(psychisme)의 힘 자체인데, 그러나 꿈꾸기를 배워야 한다고 한다. 그 이유는 바슐라르가 선잠 자면서 몽상하는 것과 대립시키는 시적 몽상은 훈련을 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베르그송(Bergson, 1859-1941)과 반대로 바슐라르는 존재로부터 창조된 언어(langage)의 힘을 옹호하였다.
[베르그송이 언어에 대해서 비판적인 것은 언어의 실재성 없는 관념에 대한 것(유명론적 단어)과 개념이 구체적 대상을 표현해주지 못하는 일반성으로 공통개념이 되는 것(개념론)에 대한 것이다. 소위 일반관념으로 사용되는 개념 또는 용어는 사회, 상식, 과학에 의해 사물의 변화와 생성을 표시해주지 못하는 고착된 것으로 보았다. 언어의 발생적 전개가 내포성을 확장하는 의미라면, 그런 언어의 생성과 발전은 랑그(langue)의 차원이라기보다, 빠롤(parole)의 차원일 것이다. 말하자면, 랑그는 추억의 측면에 반영된다면, 파롤은 추억의 차원을 넘어서 개체의 고유성을 포함하는 의미를 담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의 비판은 랑그의 두 차원, '공시태(synchronie)'와 '통시태(diachronie)'의 차원들을 비판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베르그송이 빠롤의 차원은 비판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질적 다양성을 가진 존재에 대한 논의를 빠롤의 차원에서 다루면, 다른 의미를 생산한다 것이다. 예를 들어, 실재는 이미 네 가지 차원 그 이상이 있다. 질료의 실재성은 고착을 설명하는 개념이 아니다. 이것은 언어의 고착성으로 해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미의 생성 차원에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논의를 발전시킨 것은 후기 구조주의의 장점일 것이다.]
상상적인 것이 실재성의 창조적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상상적인 것 우리에게 새로운 삶의 길을 열어 준다면, 상상은 분열(scission)이기에 앞서서 자연 내에서 인간존재의 확정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맞다. 상상은 미래와 관련하여 현실적 행위에 대한 가능적 세계에 대한 선택이 일어나기 전의 것일 것이다. 그 상상은 가능적 세계에 대한 적응과 수용 이전에 실재성의 자기 계시 또는 자기 표출의 양태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슐라르는 "타자와의 만남은 조화로운 질서(cosmos)를 관통한다"고 말한다. 바슐라르 작품의 "풍부한(profuse)" 풍요와 구체적 다양은 우리에게 세계의 조밀함에(densité) 길을 열어준다.
* 주요저술: 『접근된 인식(La connaissance approchée, 1934)』, 『새로운 과학적 정신(Le nouvel esprit scientifique, 1934)』,『과학적 정신의 형성(La Formation de l'esprit scientifique, 1938)』, 『불의 정신분석학(La psychanalyse du feu, 1938)』, 『물과 꿈들(L'Eau et les rêves, 1942)』, 『땅과 의지의 몽상들(La Terre et les rêveries de la volonté, 1948)』, 『공간의 시학(La Poétique de l'espace, 1957)』.
출처 : www.sunslif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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