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의 씨앗 ―이미지
임보
한 편의 시가 태어나려면 우선 시가 될 수 있는 근거 곧 씨앗이 있어야 한다. 시의 씨앗을 동양에서는 시상(詩想)이라는 말로 표현해 왔고 서양에서는 이미지라는 용어로 즐겨 사용해 오고 있다. 시상 가운데 특출한 시상을 특히 영감(靈感)이라고 하는데 이는 마치 인위적인 한계를 넘어선, 자연 발생적으로 주어진 천혜의 신비한 정신적 체험인 것처럼 여기고들 있다. 이러한 동양적인 견해와는 달리 서양인의 이미지 관(觀)은 보다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것으로 보인다. ―(중략)― 주지하다시피 이미지는 대체로 유추(類推)와 연상(聯想)에 의해 형성된다. 달을 보자 머릿속에 둥근 쟁반이 떠올랐다면 이는 유추이고 꽃을 보자 벌이 생각났다면 이는 연상이다. 유추는 두 사물 사이의 동일성이나 유사성에 근거하고 연상은 인접성이나 친근성에 근거한다. 따라서 유추적 이미지는 동일성이 클수록, 그리고 연상적 이미지는 인접성이 클수록 독자의 공감을 능률적으로 불러일으킨다.
그런데 이러한 동일성이나 인접성에 근거한 친근한 이미지들과는 달리, 아주 생소한 느낌을 주는 이미지들을 끌어내어 작품을 만들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것은 독자의 공감을 쉽게 불러일으키는 보편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의도적으로 독자를 낯설게 만드는 개성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를 상상적 이미지라고 일컫는데 이것이야말로 창조적인 이미지라고 할 수 있다.
내용 없는 아름다움처럼
가난한 아이에게 온 서양 나라에서 온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카드처럼
어린 양들의 등성이에 반짝이는 진눈개비처럼 ―김종삼 「북 치는 소년」전문
김종삼의 「북 치는 소년」은 '내용 없는 아름다움' '크리스마스 카드' 그리고 '진눈개비' 등 세 개의 단순한 이미지들의 병치로 구성된 작품이다. '북 치는 소년'에게서 앞의 세 이미지들을 동일성이나 인접성에 근거하여 설명하기란 곤란하다. 이러한 이미지들은 과거의 누구에게서도 제기되지 않았던, 비로소 김종삼에 의해 처음으로 들춰진 낯선 것들이다. 그래서 보편적인 공감을 얻기란 쉽지 않지만 우선 신선하고 신기하게 와 닿는다. 뿐만 아니라 유추적 이미지와 연상적 이미지는 동일성과 인접성에 근거하기 때문에 대상과 이미지가 만들어 내는 의미망은 비교적 단순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적 이미지인 경우는 대상과 이미지가 동일성이나 인접성으로 고착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두 관계는 무한히 열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독자들은 자기들 나름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시인이 제시한 이미지에 끝없는 의미망을 구축할 수 있다. 소위 수용론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창조적 독서가 능률적으로 실현될 수 있게 된다. 현대시에서 상상적 이미지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그 상상적 이미지는 대상이 시인에게 스스로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시인이 대상 속에 파고들어 발굴해 내야 하는 것임을 기억해야 한다. 광부가 하나의 광맥을 찾기 위해서 수백 미터의 지하를 뚫고 들어가듯이, 창조적 이미지를 찾는다는 것은 예지와 인내와 노역을 동반하는 고행의 길이다. 그것은 사물과의 피나는 투쟁이며, 세계를 처단하는 폭력이며,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는 독재다. 시인이 그러한 고뇌를 감수하면서도 시의 길을 가는 것은 바로 이 독재적인 창조를 통해 맛보는 환희로 보상받기 때문이리라. 시의 눈부신 씨앗―영감은 기다리는 자의 것이 아니라 땀 흘려 찾는 자의 몫이다.
창조적 이미지가 무엇인지 쉽게 이해되지 않지요? 네, 그러면 잠시 보류해 둡시다. 골치 아프면 밀쳐 두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기억해 두어야 할 중요한 것은 사물에 대한 깊은 생각입니다. 전에 거론한 바 있는 구양수의 삼다(三多) 중 다상량(多商量)의 중요성입니다. 한 사물을 두고 계속해서 깊이 생각을 거듭하다 보면 깨달음의 어떤 경지에 이르게도 됩니다. 유학(儒學)에서는 이를 격물(格物)이라는 어려운 말로 표현합니다만 쉽게 말해서 늘 생각을 게을리 하지 않으면 언젠가는 좋은 생각을 얻게 된다는 의미쯤으로 이해해도 상관없습니다. 이 이야기도 역시 골치 아프기는 마찬가진가요? 그럼 이것도 그만 접어둡시다. 그것 아니라도 좋은 시를 쓸 수 없는 건 아니니까요.
관념의 사물화
이미지 찾는 연습을 열심히 하고 있지요? 두드리는 자에게 문이 열린다고 하지 않던가요? 이미지도 열심히 찾는 이에게 머리를 내밉니다.
나는 전에 소재를 양분하여 우리의 몸 밖에 존재하는 대상들을 '객체적 소재'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심리적인 정황들을 '주체적 소재'로 구분한 바 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이미지를 찾았던 것은 객체적 소재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오늘은 다른 한 편인 주체적 소재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외부의 세상 못지 않게 복잡다단합니다. 얼마나 많은 욕망과 감정이 뒤얽혀 있습니까?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의 소위 7정이라는 것이 끊임없이 부침하면서 우리의 감정을 지배합니다. 이러한 감정과 욕망들이 또한 시의 중요한 소재입니다. 아니, 어쩌면 객체적 소재들 못지 않게 이러한 주체적 소재들― 곧 감정 때문에 시를 쓰게 된 경우가 더 많을 지도 모릅니다. 시의 주류가 서정시인 것만 보아도 짐작이 가는 일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감정들을 어떻게 표현해 낼 것인가? 구체적인 예를 통해서 이해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무척 화가 난 상태라고 가정합시다. 분기충천(憤氣衝天)이란 말이 있는데 분한 기분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쳐 오르는 그런 상태 말입니다. 그런 감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독자들에게 효율적으로 전달할 수 있을까요? 다음의 두 가지 표현을 비교해 봅시다.
가) "나는 지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무척 무척 분하다!" 나) "나의 가슴은 분노의 용암이 넘쳐흐르고 있다!"
어느 표현이 더 절실하게 느껴집니까? 물론 가)보다는 나)이겠지요. 가)는 관념적인 설명이지만, 나)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담고 있습니다. '분노'라는 손에 잡히지 않은 추상적인 정황을 화산이 폭발할 때 흐르는 '용암'이라는 구체적인 이미지를 끌어다 표현했습니다. 관념보다는 이미지가 우리의 가슴에 설득력 있게 다가옵니다. 시론에서 자주 거론되고 있는 '관념의 사물화(事物化)'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미지 찾기 연습을 다시 시작해 봅시다. 우선 <기쁨[喜]>의 감정을 적절히 표출해 낼 수 있는 이미지를 찾아봅시다. 기쁨의 유형과 정도에 따라 다양한 이미지를 떠올릴 수 있겠지요.
'이제 막 벙그는 백합' '환하게 비치는 아침 햇살' '그리운 이가 보내온 편지' '…………'
당신이 과거에 체험했던 것 가운데서 기쁨의 감정을 유발했던 사물들을 하나씩 붙잡아내 보십시오. 당신의 체험 가운데서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 이제는 당신의 상상력을 동원하여 '기쁨의 사물'들을 만들어 보십시오. 머리를 짜고 짜서 당신의 상상력으로 100개를 채우는 데 도전하기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희(喜) 노(怒) 애(哀) 락(樂) 애(愛) 오(惡) 욕(慾)의 어떠한 감정도 당신의 상상력에 의해 효율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될 수 있을 것입니다.
J. C. Ransom이라고 하는 문학이론가는 시의 유형을 3가지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가) 관념시(platonic poetry) 나) 사물시(physical poetry) 다) 형이상의 시(meta-physical poetry)
가)는 시인의 주관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읊은 시입니다. 주체적 소재가 중심이 된 것입니다. 나)는 대상을 객관적으로 노래한 작품입니다. 객체적 소재가 대상이 됩니다. Ransom은 주관에 기우는 가)나, 객관에 치우치는 나)의 시를 별로 달갑게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를 이상적인 시로 설정했습니다. 다)는 가)와 나)의 통합입니다. 즉 관념의 사물화가 구현된 작품을 이상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시인의 생각이나 감정을 그대로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물(이미지)을 빌어서 비유의 구조로 표현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관념시라고 다 부정만 할 것은 아닙니다. 교훈적인 시들 가운데는 관념시가 적지 않습니다.
어버이 살아신 제 섬기기란 다 하여라 떠나간 후면 애닲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 일 이뿐인가 하노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옛 시조들은 대개 관념시들이지만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는 작품들을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습니다.
사물시 가운데서도 황홀한 이미지들이 표상된 수작들이 얼마나 많던가요?
오리 모가지는 호수를 감는다 오리 모가지는 자꼬 간지러워
정지용「호수 2」라는 작품입니다. 호수에서 헤엄치고 있는 오리의 동작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리가 목이 간지러워 호수를 목에 감고 마치 훌라후프처럼 돌리고 있다는 기발한 이미지입니다. 전에 보내드린 바 있는 「능소화」라는 내 졸시도 <화냥년>이라는 단순한 하나의 이미지만으로 형상화한 작품입니다.
랜섬의 말처럼 모든 시가 관념의 사물화를 지향해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주제나 소재의 성격에 따라 관념시가 효율적인 경우도 있고 또한 사물시가 더 적절할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다음에는 잡아낸 이미지를 어떻게 시로 전개해 갈 것인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물 속에서 경이로운 이미지들을 열심히 찾아내시기 바랍니다.
「안면도 바다」에 관하여
하나의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와 연관된 또 다른 이미지들이 발생하여 이미저리로 발전해 간다는 얘기를 전에 했던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내 경험을 통해서 하나의 이미지가 어떻게 발전해 가는가를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우선 작품을 먼저 읽어본 다음 얘기를 시작할까요?
四月 봄 바다가 몸살하는 걸 잠든 섬 갯가에서 처음 보았지
갯마루 언덕마다 타는 진달래 진달래 불꽃에 눈이 멀어 쓰러져 혀로 걷는 바달 보았지
봄마다 몸살하는 매운 꽃바람 그 바람이 어디서 이는지를
잠든 섬 갯가에서 보고 왔었지. ―「안면도(安眠島) 바다」전문
어떤 정황인지 상상이 되십니까? 별로 어려운 내용은 아닙니다만 이해가 쉽지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
안면도(安眠島)라는 평화로운 이름을 가진 섬이 있지 않습니까? 서산 앞 서해안에 자리한 길다란 섬인데 지금은 연육교가 놓이고 개발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관광지로 이름을 얻었지요. 그러나 15, 6년 전만 해도 아주 한적한 섬이었습니다.
나는 그 '안면도(安眠島:편안하게 잠자는 섬)'라는 섬의 이름에 끌려 지도를 펴놓고 자주 들여다보다가 드디어 그 섬을 찾아 차를 몰았습니다.
송림이 우거진 어느 한 해변에 닿았는데, 4월이었으니까 바다를 찾는 사람들도 없었고 모래사장에 부드럽고 잔잔한 파도가 밀려들고 있었습니다. 동해와는 달리 서해의 바다 물결은 얼마나 부드럽습니까? 그 부드러운 물결의 이미지가 마치 '혀'처럼 느껴졌습니다. 부드러운 모래사장을 혀로 계속 핥고 있는 바다, 물결이 혀라는 느낌이 들자 바다가 엎드려 있다는 연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쓰러진 바다'라는 두 번째 이미지로 발전합니다. 그런데 왜 바다가 쓰러졌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때 갯가의 언덕에는 진달래꽃이 불붙듯이 환하게 타고 있었습니다. 옳지, 저 꽃을 향해 달려가다가 그 꽃이 너무 눈부셔 그만 쓰려졌구나!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내 상상력이 그럴 듯합니까? 그런데 쓰러진 바다가 멈추지 않고 계속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혀로 걷는 바다'라는 세 번째 이미지로 발전합니다. 그리고 한 발견에 도달합니다. 진달래꽃 해안과 움직이는 바다 사이에 바람이 일어난다고 그 바람이 바로 '꽃샘바람'이라고―. 해마다 이른봄 꽃필 무렵 불어오는 차가운 꽃샘바람이 어디서 오는 지를 몰랐는데 바로 여기서 일어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내 얘기를 들으니 충분히 이해가 가지요? 바다 물결의 리듬을 생각하면서 7·5조의 율격에 담았습니다. 그러나 각 연의 분량은 자유스럽게 배치했습니다. 제1연은 두 개의 7·5 제2연은 세 개의 7·5 제3연은 다시 두 개의 7·5 마지막 제4연은 한 개의 7·5입니다.
각 연의 행의 배열도 7·5의 율격과는 상관없이 자유스럽게 했습니다. 그러나 작은 물결들에 어울리게 비교적 짧게 배열했습니다. 마지막 연은 분량이 적으니까 행의 길이들이 더욱 짧게 되었습니다. 작품 전제의 구성은 기승전결의 4단 구성입니다.
지난 몇 차례에 걸쳐 작품의 전개 유형들에 관해 말씀 드렸습니다만 내가 제시한 것들은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것들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러한 도식적인 전개 구조에 지나치게 얽매일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지의 발전을 좇아 자연스럽게 펼쳐나가십시오. 그러면서 어떤 형태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가장 적절한가를 모색하여 결정하면 됩니다. 이것이 정형시와는 다른 자유시의 특권입니다.
정형시는 지켜야 할 이미 정해진 틀이 있지만 자유시는 내 마음대로 작품의 형태를 결정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무렇게나 만들어내도 괜찮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 내용에 가장 합당한 형식을 찾아내야 하는 책임이 따르니까요. 그래서 자유시는 작품마다 새로운 형식을 창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자유시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자유시가 정형시보다 쉽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큰 오산입니다. 또 부담스러운 얘기를 했나요? 그렇다면 이것도 쉽게 생각하십시오. 생각을 따라 그냥 자연스럽게 전개해 가면 된다고―. 그렇게 많이 쓰다보면 언젠가는 자연히 최선의 방법이 터득될 것입니다. 건필을 기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