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탈해 신화(昔脫解神話)
신라 남해왕 때 가락국 앞바다에 배 한 척이 와 닿았다. 수로왕(首露王)이 신하와 백성들을 이끌고 북을 치며 맞이하려 하였더니, 배는 곧 달아나 버렸다. 그리고 배는 신라 동쪽 아진포 앞바다에 닿았다.
아진포 갯가에 사는 한 노파가 바닷가에 있는 어떤 배 위에 난데없는 까치들이 모여 지저귀는 소리를 듣고 그 곳으로 가 보니, 배 안에 궤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파가 궤를 열어 보니, 단정하게 생긴 한 남자아이가 노비들과 함께 들어 있었다. 노파는 그들을 데리고 집으로 왔다.
남자아이는 자신이 용성국(龍城國) 왕자로서 커다란 알로 태어났기 때문에 버려져 이 곳에 이르렀다는 말을 하였다. 이 아이가 곧 탈해(脫解)인데 알을 벗어나고(脫) 궤에서 풀려(解) 나왔기에 그렇게 이름하였다.
탈해는 토함산에 올라 서라벌 도성의 명당 터를 발견하였는데 그 곳에는 이미 호공(瓠公)이란 사람이 살고 있었다. 탈해는 그 집을 기어이 차지하기 위하여 꾀를 내었다. 즉, 그는 호공의 집 곁에다 몰래 숫돌과 숯부스러기를 묻어 두고 호공을 찾아가 이 집은 자기 조상이 살던 집이라며 비켜 달라고 하였다.
호공과 탈해는 서로 자기 집이라 주장하여 관가에다 판결을 부탁하였다. 관가에서 탈해는
“우리 집은 원래 대장장이었는데, 얼마 동안 이웃 마을에 나가 있다 돌아와 보니 저 사람이 차지해 살고 있는 겁니다. 그 집 둘레의 땅을 파헤쳐 보면 아실 거여요.”
관원은 탈해의 말에 따라 호공의 집 둘레를 파헤쳐 보았다. 과연 숫돌과 숯부스러기가 나와 그 곳이 지난날 대장간 터로 보였다. 마침내 탈해는 호공의 집을 차지하고 살게 되었다.
남해왕은 탈해가 지략가(智略家)임을 알고서 맏공주를 시집 보내어 그를 사위로 맞았다. 뒷날 그는 신라의 왕위에까지 올랐다.
그리고 ‘옛적 우리 집이었다.’란 트집으로 남의 집을 차지하였다고 해서 성을 석(昔, 옛 석)이라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전하는 말은 까치(鵲)로 말미암아 궤를 열게 되었다고 해서 ‘鵲’ 자에서 ‘鳥’ 자를 떼어 버리고 남은 ‘昔’으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