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세계지도, 그 속에 담긴 세계인식
★ 세계지도는 전통 세계로 통하는 또 하나의 터널이다 「해동지도」의 천하도, 규장각 소장품
조선시대에는 여러 가지 형태의 세계 지도가 제작되었다. 중국의 본토 지역은 자세히 다루면서 한반도와 일본 등 주변 지역은 아주 간략하게 보여 주는 정도에 불과한 것에서, 오대주와 오대양을 포함하는 근대적인 세계 지도에 이르기까지 정말 다양하다. 포함된 내용이 실재하지 않는 신비로운 상상의 지역들이 대부분인 〈원형 천하도〉라는 세계 지도도 있다. 오히려 현존하는 지도의 수로 보면 이 상상의 세계 지도가 제일 많다.
물론 얼마나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자세하게, 그리고 넓은 세계를 담고 있는가를 기준으로 보면 조선 후기에 중국을 통해 한반도에 유입된 서양식 세계 지도가 가장 과학적이며, 다른 세계 지도들은 비과학적일 수도 있다. 그러나 특정한 시대, 특정한 문화권에 살던 사람들의 세계 인식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객관적으로 얼마나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고 있는가만을 기준으로 세계 지도의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다. 현대인이 보기에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다양한 전통 세계 지도는 조선시대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이 어떠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었는지 보여 주는 귀중한 역사 자료다. 세계 지도라는 터널을 통해 전통 사회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 직방 세계, 그려 넣을 가치가 있는 문명 세계
전통 시대 사람들은 세계 지리를 어떤 식으로 인식했을까. 동아시아 사회에서는 세계라 하면 으레 ‘직방 세계(職方世界)’를 의미했다. 이른바 오랑캐가 아닌 문명인들이 사는 세계, 그래서 지도에 그려 넣을 가치가 있는 세계를 일컬어 ‘직방 세계’라 불렀다.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인식되던 주(周)나라에서 지도 제작을 맡아 하면서 주변국들에게 조공을 받는 업무를 담당하던 관원이 직방씨였는데, 직방 세계란 바로 이 관원이 담당했던 영역을 말한다. 이러한 직방 세계는 다름 아닌 성인의 문명권에 들어오는 ‘중화(中華)’의 세계로서 중국 황제의 영향권 아래 문명의 혜택을 받는 지역을 말하기도 했다. 따라서 직방 세계, 곧 중화 세계는 지도에 그려 넣을 만큼 의미 있는 세계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아주 자세하게 세계의 한가운데에 위치하도록 그려졌다.
중화 세계의 바깥 지역은 이민족의 거주지로서 ‘사해(四海)’라 불리기도 했는데, 세계 지도에서 생략하거나 포함시키더라도 아주 소략하게 그려 넣었을 뿐이다. 나아가 사해 바깥의 세계는 ‘사황(四荒)’ 또는 ‘대황’이라 불리는 미지의 세계였다. 이 미지의 사황 세계는 전통적인 유가(儒家)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세계로서 불가지론적으로 ‘놔두고 논의하지 않는’ 세계였다. 그래서 세계 지도에 포함시키지 않았으며, 함부로 논의하는 것조차 이단시할 정도였다.
이렇게 동아시아인들이 지니고 있던 전통적인 세계 인식은 문명화된 세계인 중화가 세계의 중심에 그리고 야만에 불과한 이민족들의 오랑캐 세계가 주변에 배치되는 공간적 구도로 세계 지도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그 대표적인 지도가 중국 송나라 때 제작된 〈화이도〉(1136년)이다. 이 세계 지도를 보면 철저하게 중국의 지역만을 자세하게 그려 넣었음을 알 수 있다. 한반도 부분을 주목해 보아도 얼마나 소략하게 그렸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왼쪽 절반만 그려져 있으며, 그것도 서해안의 윤곽이 사실과 많이 다르게 개략적으로만 나타나 있어 도대체 반도인지 아닌지조차 분간하기 힘들다. 그런데 동아시아의 전통 사회에서는 19세기 말까지도 이러한 형태의 직방 세계 중심의 세계 지도가 대표적인 세계 지도로 계승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만을 크게 그려 넣은 송나라 때의 <화이도> ★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조선 건국 직후에 세계의 지도학계가 주목할 만한 훌륭한 세계 지도가 제작되었다. 바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그 모사본이 보관되어 있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이다. 이 지도는 원래 좌의정 김사형과 우의정 이무가 발의하고, 의정부의 검상(정5품직) 이회가 제작해서 1402년 8월 태종 임금에게 바쳤던 세계 지도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 원본은 남아 있지 않으며, 후대에 제작된 네 개의 모사본이 전부 일본에 남아 있다. 현재 규장각에 소장된 것은 모사본 중 원본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받는 일본 류코쿠대학교 소장본을 최근에 이찬 교수가 사람을 시켜 모사해 기증한 것이다. 이 류코쿠대학교 본은 1480년에서 1543년 사이에 조선에서 종이에 채색으로 모사되었던 것인데,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넘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지도 하단에는 권근의 발문이 적혀 있어 제작 과정에 대한 대강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도설을 썼던 권근이 이 지도의 발문을 썼음이 매우 흥미롭다. 이 발문에 따르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중국 원나라의 세계 지도를 참고했으나, 한반도와 일본 부분이 너무 소략해 한반도 지도와 일본 지도를 첨가해 새로운 지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때 참고한 지도들은 무엇이었을까.
먼저 원대의 세계 지도를 살펴보자. 앞서 〈화이도〉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중국의 전통적인 세계 지도는 중국과 그 주변국만을 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원나라가 거대한 세계 제국을 건설하면서 아라비아나 유럽 그리고 아프리카와 같은 머나먼 세계에 대한 지리 정보를 획득하면서 원나라에서 제작한 세계 지도에 처음으로 아라비아, 유럽, 아프리카 등이 등장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주사본의 〈여지도〉, 이택민의 〈성교광피도〉, 그리고 청준의 〈혼일강리도〉를 들 수 있다(이것들은 모두 현존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원대의 세계 지도들은 명대에 제작된 〈대명혼일도〉(1389)에서 더 한층 종합, 발전되었다.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바로 이러한 원대의 세계 지도와 그것을 계승 발전한 명대의 〈대명혼일도〉를 충분히 참고해서 제작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실제로 현존하는 〈대명혼일도〉와 조선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비교해 보면 요동 땅 동쪽인 한반도 부분과 일본 부분을 제외한 중국 본토와 아랍, 아프리카, 유럽 부분은 거의 동일한 내용임을 알 수 있다.
한편 권근의 발문에 적힌 대로 원대의 세계 지도가 한반도와 일본 부분이 매우 소략했다는 사실은 〈대명혼일도〉를 보아도 금방 알 수 있다. 한반도 부분은 거의 삼각형에 가까울 정도이며, 특히 〈화이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서쪽 반절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불충분한 부분에 대해서는 최신의 조선 지도와 일본 지도로 첨가해 넣었을 것이다.
한반도 부분은 제작자 이회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기 앞서 3개월 전에 〈팔도지도〉라는 한반도 지도를 제작해서 바치고 있는데, 이 〈팔도지도〉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한반도 부분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일본 부분은 1397년(태조 6년)에 검교참찬 벼슬의 박돈지가 일본에 통신관으로 갔다가 1399년에 돌아오면서 일본 지도를 바쳤는데, 이 지도일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이때의 일본 지도와 동일한 것으로 추정되는 〈행기도〉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일본 부분을 비교해 보면 거의 동일함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최초의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규장각 소장품. ★ 1400년경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세계 지도
결국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원나라 때 세계 지도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킨 지도로서 직방 세계 중심의 좁은 세계 인식에서 벗어나 아프리카와 유럽을 포함하는 확대된 세계 인식을 반영하는 지도였다고 할 수 있다. 또 14세기 당시까지 가장 우수한 세계 지도였던 〈대명혼일도〉의 지리 정보를 전폭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대명혼일도〉에서 심하게 왜곡되었던 한반도와 일본 부분을 비교적 정확하게 교정함으로써 그것을 능가하는 객관적 지리 정보를 담았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제작되던 시대에는 서양에서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같은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담은 훌륭한 세계 지도를 찾아볼 수 없다. 1402년경 유럽은 대항해와 탐험을 통해 객관적인 지리 정보를 획득하기 이전이었다. 또한 고대 그리스의 세계 지도 전통을 답습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지도가 부활하기 이전이었다. 실제로 당시 유럽의 세계 지도는 종교적 세계관을 표현하는 중세 유럽의 세계 지도와 근세의 해도(Portolano)가 결합된 형식의 지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14, 15세기에 제작된 세계 지도 중에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훌륭한 지도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1992년에 미국에서 개최된 ‘콜럼버스 신대륙 발견 500주년 기념 지도 전시회’에 출품되어 세계 지도학회로부터 큰 찬사를 받았다. ★ 확대된 세계의 외연과 조선의 자존심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가 1400년경 당시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세계 지도였다고 하지만 역사적 시대성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전통적으로 〈화이도〉가 다루었던 직방 세계의 영역을 벗어나 유럽의 100여 개 지명과 아프리카의 35개 지명을 다루었지만 궁극적으로 직방 세계를 벗어나지는 않았다. 이것은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들여다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여전히 지도의 중심부 대부분을 중국 본토가 차지하고 있으며, 유럽과 아프리카는 좌측 주변부에 밀려나 있다. 또한 ‘땅은 네모나다’는 전통적인 지리관을 반영해서 사각형으로 전 세계를 묘사하고 있다. 따라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단지 직방 세계의 외연을 조금 더 확대한 세계 지도였을 뿐이다.
그렇지만 원나라 이전의 〈화이도〉에서 볼 수 있었던 중화주의적 세계 인식이 상당 부분 퇴색되어 있음은 분명하다. 원나라의 세계 지도는 몽고족이 세운 원나라가 중국을 지배하던 당시의 시대상을 반영한다. 곧,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세운 원나라가 전통적인 중화주의 세계관을 그대로 따를 수 없었던 것이 고려 말기 동아시아의 시대상이었으며, 이러한 시대상이 세계 지도에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 초의 세계 지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중화주의적 세계 인식이 퇴색했다고 이해하기는 좀 힘들다. 오히려 16세기 이후 성리학의 성장과 정착에 의해 조선의 사상계가 중화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기 이전의 세계상을 반영했다고 이해함이 타당할 듯하다.
한편 한반도 부분을 매우 크게 그린 점도 주목할 만하다. 한반도의 크기는 유럽과 아프리카를 합친 것과 거의 엇비슷하다. 중국 본토와 비교해도 실제의 크기보다 훨씬 크게 그려져 있다. 정치 외교적으로 조선은 건국과 함께 명나라에 사대 외교를 펼쳤지만, 중국에 못지않은 문명국이라는 자존심이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회 한 사람이 사사로이 제작한 지도가 아니다. 좌의정과 우의정이 제안하고 의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추진한 국가적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사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천상열차분야지도〉라는 천문도 제작 사업과 함께 이루어진 조선 초의 국가적인 프로젝트였다. 둘 다 권근이 발문을 적고 있는 데에서 그러한 사정을 능히 엿볼 수 있다. 중국의 것을 능가하는 세계 지도와 천문도를 만들려는 조선 초기 태조와 태종의 염원과 자존심이 낳은 성과였던 것이다.
<화동고지도> 지도학적 측면에서는 발전했지만 직방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 16세기 이후 축소된 시야의 세계 지도들
그러나 조선 초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서 드러났던 직방 세계에서의 일탈과 확대된 세계 인식은 그 이후에 사정이 달라진다. 오히려 세계 지도에서 다루는 영역이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 비해서 축소되어 전통적인 직방 세계 중심의 〈화이도〉 계열로 복귀한다. 그러한 모습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와 〈화동고지도〉에서 살펴볼 수 있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1526년에서 1534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에서 두 번째로 제작된 세계 지도이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 마찬가지로 규장각에 유일하게 소장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고 대부분이 일본에 남아 있는데, 최근에 일본에 있던 것을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에서 사들여 소장함으로써 일반인에게 소개되기도 했다. 현재에도 일본에 세 개가 더 남아 있어, 이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계열의 세계 지도는 모두 다섯 개가 현존하는 셈이다.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의 저본이 된 지도는 명나라의 학자 양자기의 발문이 붙어 있는 〈대명국지도〉로 추정된다. 원래 명나라에서는 유럽과 아프리카의 지리 정보를 담아 낸 원나라 세계 지도의 전통을 계승한 〈대명혼일도〉라는 우수한 지도가 1389년에 제작된 이후 확대된 직방 세계의 전통이 계승되지 못했다. 그러다가 1526년에 이르러 구체적이고 정확한 지리 정보를 담은 차원에서 〈대명혼일도〉를 극복하는 세계 지도가 제작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일명 ‘여지도’라고도 불리는 양자기의 〈대명국지도〉이다.
이 지도는 적어도 담아낸 부분에서는 정보가 풍부하고 윤곽이 정확하며 부호를 써서 지역을 표시하는 등 지도학적인 측면에서 〈대명혼일도〉보다 한 단계 수준 높은 지도였다. 그러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물론이고, 서역과 인도 지역도 지도에서 제외시키는 등 원나라의 세계 지도에서 담아 냈던 확대된 세계 인식은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중국 이외의 지역은 단순하게 부호로만 처리하는 등 과감하게 선택적으로 생략했다. 따라서 적어도 세계 인식의 차원에서 〈대명국지도〉는 원나라 이전의 전통적인 직방 세계 중심의 세계 지도로 복귀한 셈이었다. 유럽과 아프리카가 전혀 나타나지 않은 <대명국지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이와 같은 〈대명국지도〉를 저본으로 조선에서 제작되었다. 두 지도를 비교해 보면 한반도 부분만 완전히 다를 뿐 나머지 지역은 거의 동일하다. 곧,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와는 달리 중국과 한반도 이외의 지역은 거의 다루지 않은 중화주의적으로 축소된 세계 인식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대명국지도〉에서는 일본 유구 등과 함께 오랑캐에 불과한 조선을 단순한 삼각형 모양으로 처리해 버리는 정도였는데,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이를 따르지 않고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한반도 부분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결국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는 중국과 조선만을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그리고 최신의 지리 정보를 담아낸 세계 지도임을 알 수 있다. 16세기 말에 제작되었다고 추정되는 규장각 소장의 〈화동고지도〉도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와 거의 동일한 내용을 담은 것으로,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 이후에도 조선에서 〈대명국지도〉의 영향을 받은 세계 지도들이 다수 제작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와 같은 〈혼일역대국도강리지도〉와 〈화동고지도〉는 명대 양자기의 〈대명국지도〉가 그렇듯이 지도학적 차원에서 분명 발전된 측면이 있다. 그러나 원나라 때의 직방 세계를 벗어나는 일탈의 세계 인식을 거부하고, 명나라 때의 중화주의적인 세계 인식을 수용했다는 점에서는 조선 초기의 개방적인 시야가 좁아졌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 같이 16세기에 나타난 세계에 대한 시야의 변화는 성리학이라는 학문의 정착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16세기 이후 조선의 학계는 성리학이라는 고급 학문의 성장으로 중화주의적 세계관으로 무장하게 된다. 그렇다고 조선을 오랑캐의 나라로 여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조선은 중국의 중화 문명을 완숙하게 수용한 소중화(小中華)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결국 원대의 세계 인식을 거부하고 직방 세계 중심의 축소된 시야의 세계 지도를 그대로 수용하면서도, 한반도 부분만은 조선 초의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한반도 지도로 보충해 넣은 배경이라고 할 수 있다.
★ 조선 후기 직방 세계 중심의 전통적인 세계 지도들 <천하여지도> 조선 후기에 이르면 서양식 세계 지도의 유입과 함께 전통적인 지리적 세계관에서도 큰 변화가 일어난다. 이로써 새로운 형태의 세계 지도들이 제작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기존의 직방 세계 중심의 전통적인 세계 지도들도 조금씩 변형된 형태로 계속 제작되었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직방 세계 중심의 전통적인 세계 지도에서 볼 수 있는 특성 중 하나는 조선중화주의라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는 점이다. 조선중화주의란 중화 문명의 도통을 계승한 명나라가 오랑캐에 불과한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의해서 1644년에 멸망하자, 이제 세계에서 유일한 중화 국가는 오직 조선뿐이라는 인식이 생겨나면서 형성된 사상을 말한다. 동아시아 사회에서 세계 지도는 지도에 그려 넣을 가치가 있는 문명 세계를 중심으로 포함되는 것이 전통적인 관념이었다. 그렇다면 오랑캐에 불과한 청나라를 세계 지도에 담을 수는 없지 않은가.
결국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조선중화주의를 반영하는 세계 지도에서는 현재 청나라의 지리 정보를 담기보다는 과거 명나라의 지리 정보를 담은 세계 지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숭실대학교 소장의 필사본 〈천하여지도〉(1747)가 그러한 대표적인 예이다. 이 지도는 청나라가 세워진 뒤 1세기나 지난 1747년에 제작되었다. 그런데 지도 상단에 적혀 있는 행정 구역의 표시뿐 아니라 지도 안에 묘사된 행정 구역과 지명의 명칭이 모두 명나라의 것이었다.
김수홍의 〈천하고금대총편람도〉(1666)는 하나의 지도 안에 과거의 지명과 현재의 지명이 섞여 있고, 역사적 사건을 그 발생지에 기록함으로써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관련 지역과 연결해서 표현해 놓은 매우 독특한 지도이다. 특히 명나라의 13성과 북경과 남경을 28수의 별자리와 연결지어 기록한 점도 매우 흥미롭다. 피상적으로 지도에 그려진 지역의 윤곽이나 담고 있는 지리 정보의 차원에서 보면 상당히 퇴보된 세계 지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를 하나의 지도 위에 담았다는 점에서 역사 지도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 주었다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중국 대륙 내부에 과거의 역사적 사건을 기록했다면, 중국 대륙을 벗어나는 일부 지역에는 상상의 지역들이 묘사되기도 했다. 바로 여인국, 소인국, 대인국 등 가상의 섬들이다. 이 지명들은 유가(儒家) 학자들에게는 이단의 서적으로 이해되던, 신뢰할 수 없는 지리 정보를 담고 있는 『회남자(淮南子)』라는 문헌에 나오는 전설적인 지명들이었다. 심지어 중국 대륙의 서북쪽 내몽고에 해당하는 지역에는 ‘구라파국 이마두(利瑪竇)’라는 기록이 적혀 있다. 이마두는 17세기 초에 북경에 들어와 선교 활동을 하면서 서양 과학을 전해 준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중국 이름이었다. 아마도 김수홍에게는 『회남자』에 나오는 전설적인 지명들과 구라파국 이마두가 마찬가지로 믿기 어려운 신비의 세계였을지 모른다.
전형적인 중화적 세계관에 입각한 세계 지도에 그것과는 양립할 수 없는 지역의 기록이 등장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바로 조선 후기 서양식 세계 지도가 유입됨과 동시에 한편으로는 중화적 세계관이 강화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단적 세계관이 그 안에서 배태되고 있던 복잡했던 당시의 세계상을 보여 주는 한 예가 아닐까. ―「문중양 교수의 우리역사 과학기행」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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