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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편의 詩

여자 친구에게 보내는 엽서 / 하인리히 하이네

by 바닷가소나무 2018. 9. 26.

여자 친구에게 보내는 엽서


                              - 하인리히 하이네 -


오늘은 서늘한 바람이 불어

틈새마다 흐느낍니다.

조금 전만 해도 꿀이 었던

초원은 서리에 흠뻑 젖었습니다.


창가에 마른 잎 하나가 스쳐 갑니다.

나는 눈을 감고

안개에 쌓인 먼 도시를 거니는

당신의 모습을 떠올립니다.

나의 사랑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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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문예 정신을 대표하는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

Heinrich Heine           


요약 테이블
출생1797년 12월 13일
사망1856년 02월 17일
국적 독일
대표작

《노래의 책》, 《로만체로》 등

         

19세기 문예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통렬한 비판의식과 서정성을 모두 갖춘 작가이다.


하이네는 독일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이자 정치 저널리스트로, 통렬한 기지와 비할 데 없는 서정성을 갖춘 시인, 독일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시인으로 여겨진다. 독일의 사상가 마르크스와 엥겔스, 대표적인 민족주의 정치가 비스마르크는 하이네를 괴테 이후 최고의 독일 시인으로 추앙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19세기 문예 정신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며, 19세기 문학, 특히 시와 산문, 문예운동에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하인리히 하이네는 1797년 12월 13일 독일 라인 강변의 뒤셀도르프에서 포목점을 하는 유대인 상인 잠존 하이네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크리스티안 요한 하인리히 하이네이고, 어린 시절 유대식으로 하리 하이네라고 불렸다. 유대계 사립학교를 거쳐 뒤셀도르프 인문계 고등학교인 뤼체움에 다녔으며, 아버지의 뒤를 잇고자 17세 때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장사 일을 배웠다. 19세 때는 함부르크로 가서 숙부가 운영하는 헤크셔 은행에서 일을 배웠다. 21세 때 숙부가 직물 도매상을 차려 주었는데, 6개월 만에 파산해 문을 닫고 뒤셀도르프로 돌아갔다. 이곳에서 본 대학에 들어가 2학기를 지낸 후 괴팅겐 대학으로 옮겼으나 결투 사건을 일으켜 다시 베를린 대학으로 갔다. 베를린에서는 법학을 전공했지만, 철학과 문학 강의만 듣고 시를 썼다. 그가 시를 쓰게 된 것은 두 번의 실연 때문이었다. 숙부 댁에 기거하던 시절 하이네는 사촌 여동생 아말리에를 사랑하게 되는데, 아말리에로부터 경멸만 받고 도망치다시피 집으로 돌아간 경험이 있었다. 하이네는 이때 실연의 고통을 시로 쓰기 시작했고, 대학에 들어간 이후 본격적으로 습작을 시작한 것이다.


하인리히 하이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1820년, 첫 평론 《낭만주의》를 발표했으며, 1821년 낭만적인 색채가 강한 첫 시집 《시집》을 펴냈다. 1823년에는 비극 〈라트크리프〉, 〈알만조르〉와 시집 《서정삽곡》을, 1824년에는 《서른세 편의 시》를 펴내면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다.


그러나 하이네는 당초 시인이 아니라 변호사가 되려고 했다. 1825년 법학박사 학위를 받기 전 그는 기독교로 개종하고 세례를 받았다. 당시 독일에서는 유대인이 변호사 자격을 얻으려면 루터교로 개종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 일을 두고 그는 '유럽에의 입장권'이라고 냉소적으로 비꼬았다. 이후부터 어린 시절의 이름인 '하리' 대신 '하인리히'를 사용했다.


1827년 독일에서 출간된 《노래의 책》 속표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노래의 책》 삽화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 하이네는 하르츠 지방을 여행하면서 쓴 〈하르츠 기행〉을 〈반려(Der Gesellchafter)〉 지에 게재했다. 이 시기에 그는 아말리에의 여동생 테레제를 사랑하게 되었지만, 이번에도 실연의 아픔만 겪었다. 이듬해에는 《여행 화첩》을 출간했는데, 자연에 대한 감정 이입, 몽상적이고 환상적인 이미지 표현, 순수하고 주관적인 감정 표현, 날카롭지만 위트 있는 조소 등 새로운 형식의 기행 문학이라는 평을 받으며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끌고 작가로의 길을 걷게 된다.


1827년, 하이네는 시집 《노래의 책》을 출판했다. 〈로렐라이〉, 〈벨자차르〉, 〈케블라르의 순례〉 같은 작품들이 담겨 있는데, 두 번의 실패한 사랑에 대한 경험을 비롯해 하르츠 여행 경험 등이 서정적이고 동화적인 필치로 그려져 있다. 이 작품집에 실린 아름다운 연애 시들은 시인으로서 하이네를 유명하게 만들어 주었다. 특히 〈로렐라이〉는 오늘날까지 발표된 독일어 작품 중 독일어를 가장 아름답게 표현한 시로도 꼽힌다.

1830년, 파리에서 7월 혁명이 발발하자 하이네는 프랑스의 혁명 이념에 공감하고 독일의 봉건적인 현실에 절망했다. 그리고 언론법에 의한 언론 탄압이 심해짐에 따라 이듬해 파리로 떠나 1856년 숨을 거둘 때까지 파리에서 살았다.


파리에서 하이네는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는 〈아우크스부르거 알게마이네 자이퉁〉 지의 파리 정치 특파원으로 활동하는 한편, 프랑스에서 《독일 근대 문학의 역사에 대하여》(후일 《낭만파》로 개칭하여 출간), 《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 등을 집필했다. 그는 혁명, 민주주의, 통일 유럽에 대한 포부를 설파하며 독일 청년 지식인들에게 사상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에 따라 독일 당국은 1835년 하이네의 모든 저술을 금지시킨다. 또한 독일 내에서 언론법이 강화되어 하인리히 라우베, 카를 구츠코프, 테오도어 문트, 루돌프 빈바르크 등 청년독일파 작가에게까지 검열이 확대되면서 하이네의 저작들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서 전면 출간 금지 조치를 받았다. 이때부터 하이네의 파리 생활은 정치적 망명의 형태가 되었다.


독일 당국과의 관계는 험악했으나 문학가로서도, 개인적으로서도 파리 생활은 하이네에게 행복했다. 하이네는 문학 살롱을 드나들면서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발자크, 뮈세 등과 친분을 나누면서 영향을 주고받았다. 그는 파리의 화려한 사교계 생활과 방종하고 자유로운 도시의 분위기, 여인들에 취했다. 이런 생활은 파리와 파리 여인에 대한 경쾌한 시로 탄생했다. 때때로 하이네는 독일의 현실에 대한 실망과 향수에 시달리며 그것을 시로 쓰기도 했다. 1841년에는 상점 여점원 크레센스 유제니 미라와 수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했다.


1840년, 하이네는 급진적 자유주의 사상가이자 청년독일파의 대표적 평론가였던 고(故) 루트비히 뵈르네에 대한 짧은 책을 썼다. 파리에서 지내면서 하이네는 대도시가 내포하고 있는 많은 문제들을 목격했으며, 혁명 이후 혁명 정신이 어떻게 변질되어 가는지에 대해 점차 회의하게 되었다. 《루트비히 뵈르네-회고록》이라는 책에서 하이네는 이런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뵈르네가 찬양한 파리의 현실은 뵈르네의 머릿속에서 이상화된 부분이 없지 않다고 하면서 급진적 혁명, 자유주의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를 경계했다. 이로써 그는 수많은 지지자들을 잃었으며, 많은 비난에 직면했다.


1842년에는 마르크스와 자주 교류하면서 《독일-프랑스 연감》을 펴냈으며, 시집 《아타 트롤》을 펴냈다. 《아타 트롤》의 부제는 '낭만파 최후의 자유로운 삼림의 노래'인데, 동화적 마술성, 서정성과 낭만성, 환상성이 극대화되어 표현되어 있다. 문학이 정치적 도구로 전락되어 가는, 즉 당대의 경향 문학, 당파 문학에 대한 현실을 애통해하며 그 경향에 반기를 든 작품이다.

그해 극작가 프리드리히 헵벨의 권유로 하이네는 아내와 함께 함부르크의 출판업자를 찾아가면서 파리로 간 뒤 처음으로 독일을 여행했다. 1844년에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독일을 방문했는데, 숙부 잘로몬이 죽으면서 그를 유산 상속에서 제외시키자 가족들과 함께 유산 투쟁을 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이네는 결국 숙부의 가족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검열할 수 있는 권리를 주고 약간의 유산을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이후 하이네의 작품 중 많은 수가 유실되었으며, 《회고록》의 많은 부분도 사라졌다.


1844년경부터 시각 장애가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듬해 한쪽 눈을 실명했다. 성병으로 인한 신경계 손상이라는 설도 있다. 그사이 그가 작품을 발표하던 혁명적 성향의 잡지 〈전진〉이 발행 금지 처분을 받았고, 마르크스가 추방당했다. 하이네는 병이 악화되자 유언장을 작성하고, 《회고록》 집필을 시작했다. 1847년에는 파리에서 증권 위기가 일어나 재산 대부분을 잃었고, 이듬해에는 척추 경련으로 사지가 마비되면서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가난 속에서 병마와 싸우면서 하이네는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다. 병증과 사지를 쓰지 못하는 고통, 죽음에 대한 공포, 가난 등으로 괴로워하면서 그는 인간 조건에 대한 회의와 비탄감에 시달렸다. 그리하여 최후의 걸작 《로만체로》가 탄생했다.


'로만체'란 기사의 영웅담과 로맨스에 대해 쓴 민요조의 설화시를 일컫는 말이다. 《로만체로》는 인류 역사와 종교사에 대한 고찰, 탐미주의자이자 혁명가였던 시인이 꿈꾸었던 미래에 대해 쓴 다양한 시들을 로만체풍으로 쓴 작품이다. 여기에서 하이네는 삶의 기쁨 및 쾌락과 관련된 유희적인 시각을 버리고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낙관적 입장을 유보한다. 인생과 인간, 선, 신앙에 대한 회의와 동경이라는 양가적인 감정이 혼재된 심정을 드러낸 한편, 인격신의 존재를 인정하고, 신으로의 회귀에 대한 견해를 표명하고 있기도 하다. 마지막 시집 《1853년과 1854년의 시》에도 유사한 시각이 드러난다. 또한 〈비미니〉, 〈사바트 공주〉와 같은 한층 더 몽상적이고 환상적인 우화들도 썼다. 1852년에는 파리에서 하이네 전집이 출간되었다.


1856년 2월 17일, 하이네는 병마와 싸우며 침상 생활을 한 지 8년 만에 숨을 거두었다. 유해는 유언에 따라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장되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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