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네요, 아련한 피리 소리
- 빅토르 위고 -
오네요, 아련한 피리 소리.
과수원에서 들려와요.
한없이 고요한 노래,
목동의 노래.
바람이 지나가요, 떡갈나무 그늘.
연못 어두운 거울에
한없이 즐거운 노래,
새들의 노래
괴로워 말아요, 어떤 근심에도
우리 사랑할지니.
가장 매혹적인 노래,
사랑의 노래
빅토르 위고
다른 표기 언어 위고 , Victor(-Marie) Hugo
출생 | 1802. 2. 26, 프랑스 브장송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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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85. 5. 22,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 프랑스 낭만파 작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로 만년에는 저명한 정치가이자 정치적 저술가로 활동한 인물이다. 가장 유명한 장편소설은 <노트르담의 꼽추>, <레 미제라블>이다.
프랑스 낭만파 작가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만년에는 저명한 정치가이자 정치적 저술가로 활동하여 보나파르트주의와 권위주의를 비난했다. 가장 유명한 장편소설은 〈노트르담의 꼽추 Notre Dame de Paris〉(1831)·〈레 미제라블 Les Misérables〉(1862)이다.
위고가 쓴 엄청난 양의 작품은 프랑스 문학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는 아침마다 시 100행이나 산문 200장을 썼다고 한다.
1830년에는 '낭만파 운동의 가장 강력한 정신'이라는 평가를 받았고, 1845년에는 프랑스의 계관시인이며 귀족원 의원으로, 그후에는 사회에서 추방당한 현인의 역할을 떠맡았다. 그는 권위에 대한 자각을 갖고 자신의 통찰과 예언적 견해를 산문 및 운문으로 기록하여, 마침내 프랑스 모든 도시에 그의 이름을 딴 거리가 생겨날 만큼 사랑받는 국민시인이자 온화한 할아버지 같은 모습의 인기작가가 되었다. 위고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그를 위대한 시인으로 인정했지만, 그후 얼마 동안은 그를 비판적으로 무시했다. 그러나 그의 시 가운데 몇 편은 소수 사람들의 기억에 남아 있었고, 〈레 미제라블〉도 여전히 널리 읽혔다. 소수의 사람들은 그의 시 예술을 칭찬했으며, 그의 너그러운 사상과 따뜻한 표현은 여전히 대중을 감동시켰다. 소설가 프랑수아 모리아크가 '진부함의 영웅주의'라고 불렀던 대로 그는 보통 사람들의 시인이었다. 그는 평범한 기쁨과 슬픔을 단순하고 힘차게 쓰는 법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이 민중시인에게는 폴 클로델이 우주에 대한 '지나친 공포를 자아내는 명상'이라고 불렀던 또다른 측면이 있었는데, 즉 〈악마의 최후〉·〈신〉이라는 우울한 2편의 시를 관통하고 있는 불가사의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말했듯이 위고는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또한 프랑스 운문의 풍부한 자산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과 운율 및 압운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그의 기교는 프랑스 시를 18세기의 빈곤함에서 구해주었다.
앙드레 지드는 누구를 가장 위대한 프랑스 시인으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고, "유감스럽지만 빅토르 위고"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이 비록 유감스러울지라도 사실은 어디까지나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이 모호한 판결에 이어 또다른 시인 레옹 폴 파르그는 "빅토르 위고는 미래의 시인"이라고 했는데 이 말은 '시간이 갈수록 빛을 내는 시인'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현실의 시인이자 초현실의 시인인 빅토르 위고는 일부가 아니라 전체로 받아들여야 한다.
위고의 초기생애
빅토르 위고는 육군 소령이자 나중에 나폴레옹 군대의 장군이 된 조제프 레오폴드 시지스베르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집안은 농부와 장인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외가 사람들은 선원과 법률가들이었다. 빅토르는 자신이 "브르타뉴 지방과 로렌 지방의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했지만, 2세 때 어머니와 함께 이사한 파리를 자기 영혼이 태어난 곳이라고 불렀다.
위고의 어린시절은 제국 군대를 따라 임지를 떠돌아다니는 아버지의 끊임없는 여행과 그것으로 인한 부모의 불화로 얼룩졌고, 그의 부모는 결국 헤어졌다. 어머니는 왕당파(이런 경향은 아마 결혼한 뒤에 생긴 듯함)였던 반면 아버지는 프랑스에 잇따라 세워진 정부(프랑스 혁명 뒤의 국민의회, 나폴레옹 제국, 왕위를 되찾은 부르봉 왕조)에 충성을 바쳤다는 사실에서도 부부 사이의 깊은 간격을 엿볼 수 있다.
이 시기는 어린 빅토르에게는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그는 자주 파리 생활을 정리하고 엘바 섬이나 나폴리, 마드리드로 떠나기도 했지만 항상 파리로 되돌아왔고, 돌아올 때는 대개 어머니와 단둘이었다. 이런 생활은 그에게 안정된 가정교육을 제공해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당시의 역사는 가르쳐주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도 그의 지적 교육은 확고한 기초가 잡혔으며, 특히 라틴 문학에서 그러했다. 적어도 1816년부터 그는 학교에서 배우고 있던 법률이 아닌 다른 야망을 품었고, 나중에 그 스스로 "내가 태어나기 전에 저지른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부른 운문으로 공책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이때 그가 쓴 작품은 번역물(특히 베르길리우스의 작품)과 2편의 비극, 1편의 희곡, 그리고 비가 등이었다.
그는 어머니의 격려를 받고, 작가이자 외교관이며 정치가인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의 눈부신 활약에 자극을 받아 〈콩세르바퇴르 리테레르 Conservateur Littéraire〉(1819~21)라는 평론지를 창간했다. 이 잡지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시인인 알퐁스 드 라마르틴과 앙드레 드 셰니에에 대해 쓴 논문이다.
1821년에 어머니가 죽었고, 1년 뒤에 빅토르는 아름다운 연애편지를 보내 구혼한 어릴 적 친구 아델 푸셰와 결혼했다. 같은 해에 그는 첫번째 시집인 〈송가 및 기타 시 Odes et poéries diverses〉를 출판하여 루이 18세로부터 연금을 받게 되었고, 1년 뒤에는 첫번째 장편소설인 〈아이슬란드의 한스 Han d'Islande〉를 발표했다. 이 소설은 1825년에 영어로 번역되어 나왔고, 이 책의 삽화는 영국의 풍자만화가인 조지 크룩섕크가 맡았다. 언론인이자 공상소설작가인 노디에는 이 작품에 매혹되어 위고를 친구들의 모임에 끌어들였다.
낭만주의의 신봉자였던 이 친구들은 노디에가 관장으로 있던 아르스날 도서관에서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졌는데, 위고는 '세나클'이라는 이 문학동인이 토론하는 이론에 무관심한 태도를 보일 때도 있었지만, 모임에는 계속 참석했다. 그러나 위고가 진정한 낭만파 작가로 등장한 것은 1827년에 운문 희곡인 〈크롬웰 Cromwell〉을 유명한 〈서문〉과 함께 발표했을 때였다. 이 작품은 너무 길어서 무대에 올리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지만, 힘차고 독창적인 운문으로 씌어졌다.
위고의 중기생애
위고는 송가인 〈신문의 난에 부쳐 À la Colonne〉와 〈그 Lui〉 같은 시에서 이상화한 나폴레옹 숭배와 자유를 옹호하여 〈글로브 Le Globe〉라는 신문을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 작가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샤를 10세가 언론의 자유를 제한하는 가운데, 사랑으로 순결해지는 고급 창녀의 이야기인 희곡 〈마리옹 드 로름 Marion de Lorme〉(1829)이 검열에 걸려 무대공연이 금지되자, 위고는 자유주의 쪽으로 더욱 기울어졌다. 그는 당장 〈에르나니 Hernani〉로 응수했는데, 1830년 2월 25일에 초연된 이 희곡으로 젊은 낭만파 작가들은 문학논쟁에서 전통적인 고전주의자들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 희곡의 실제적인 충격은 줄거리보다는 오히려 운문의 힘찬 울림과 박자에 있는 것으로, 그 발음과 박자는 에르나니와 도냐 솔이 읊조리는 애조 띤 구절에서만 부드러워졌다. 〈에르나니〉는 한 젊은이가 젊은이들에게 경의를 바치는 작품이었던만큼 그 성공도 학생관중들 덕분이었다.
위고는 처음에는 희곡으로 명성을 얻었으나, 1831년에는 루이 11세 치하의 중세 생활을 연상시키는 역사소설 〈노트르담의 꼽추〉로 더욱 유명해졌다.
이 소설은 대성당 부제 프롤로와 군인 푀뷔스라는 인물을 통해 꼽추 콰지모도와 집시 소녀 에스메랄다에게 불행을 안겨주는 사회를 고발한 작품으로, 이러한 주제는 위고가 일찍이 사형제도에 대한 인도주의적 항의를 제거하기 위해 썼던 〈어느 사형수의 마지막 날 Le Dernier Jour d'un condamné〉(1829)보다 훨씬 더 깊이 대중의 의식을 건드렸다.
나중에 그는 〈클로드 괴 Claude Gueux〉(1834)에서 이 주제를 다시 다루었다. 〈노트르담의 꼽추〉를 쓰고 있는 동안, 입헌군주인 루이 필리프가 7월혁명이 일어난 지 3일 만에 학생과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 덕분에 권력을 잡았다. 위고는 그들을 기념하여 〈1830년 7월 이후 Dicté après juillet 1830〉라는 시를 썼는데, 이 시는 훗날의 많은 정치시의 선구였다. 위고는 7월 왕정시대에 4권의 시집을 냈다. 친근하고 개인적인 문제에서 영감을 얻은 〈가을의 나뭇잎 Les Feuilles d'automne〉(1831), 정치적 경향을 숨김없이 드러낸 〈황혼의 노래 Les Chants du crépuscule〉(1835), 개인적인 동시에 철학적인 〈내면의 목소리 Les Voix intérieures〉(1837), 그리고 〈빛과 그림자 Les Rayons et les ombres〉(1840) 등이 그것인데, 이 마지막 시집에서 시인은 이전의 여러 가지 주제들을 되살리면서 색채와 사실적인 세부묘사에 대한 재능을 마음껏 발휘했다.
이 시기에는 위고의 창작활동이 매우 왕성하여, 〈마리옹 드 로름〉이 1831년에 마침내 무대에 오른 뒤 잇따라 여러 편의 희곡이 쏟아져나왔다.
여기에는 2가지 동기가 있었다. 우선 그는 자신의 정치·사회 사상을 발표할 수 있는 무대가 필요했고, 둘째로는 1833년부터 은밀한 관계를 맺기 시작한 아름다운 여배우 쥘리에트 드루에에게 배역을 주기 위해 희곡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재능을 인정받지 못한 쥘리에트는 위고에게 헌신하기 위해 무대에서 은퇴한 뒤, 1883년에 죽을 때까지 그의 사려 깊고 충실한 반려자가 되었다.
위고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려고 3번이나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그후 1841년에 마침내 회원으로 뽑혔고, 1845년에는 귀족원 의원에 임명되어, 문학적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때부터 그는 거의 작품을 발표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회·정치 활동으로 바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딸을 잃은 슬픔 때문이기도 했다. 갓 결혼한 그의 딸 레오폴딘은 1843년 9월 남편과 함께 사고로 익사했다. 이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는 쥘리에트 드루에와 여행중에 있었기 때문에 신문을 보고 그 소식을 알았다. 그는 나중에 〈명상시집 Les Contemplations〉(1856)에 실리게 될 시들을 쓰면서 격렬한 슬픔을 달랬다.
이 시집은 '옛날'과 '오늘날'의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딸이 죽은 순간이 그것의 경계선을 이루고 있다. 위고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소설을 쓰는 데서 위안을 찾았다. 특히 한동안 덮어두었던 것을 재집필해 1862년 〈레 미제라블〉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그밖에 화가의 아내인 레오니 비아르라는 작가와 밀애를 나눈 것이나, 루이 필리프 및 그의 며느리 오를레앙 공작부인과 맺고 있던 우정 덕분에 궁정연회에 부지런히 참석한 것도 기분전환에 도움이 되었다.
그는 개인적 슬픔과 사회불안이라는 골칫거리를 잊고 싶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가 이 시기에 쓴 운문과 산문은 그의 심란한 마음을 여실히 보여주며, 사실상 그의 천재성은 슬픔 속에서 성숙했다.
위고의 후기생애
1851년 12월에 쿠데타가 일어나 결국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제2제정이 수립되자 위고는 저항을 시도하다가 브뤼셀로 도망쳤다.
그의 망명생활은 1870년 9월에 프랑스가 자유를 되찾고 다시 공화국이 세워질 때까지 지속되었다. 처음에는 강요된 명령이었지만 나중에는 자발적인 행동이 되었고, 1859년에 사면을 받은 뒤에는 자존심을 세우는 행위가 되었다. 그는 1년 동안 브뤼셀에 머물다가, 그곳에서도 추방당할 것을 예견하고 영국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1852~55년 저지 섬에 정착하여 살았던 그는 이 섬에서 추방되자 옆에 있는 건지 섬으로 갔다.
거의 20년에 이르는 이 망명생활 동안, 위고는 그의 모든 글 가운데 가장 광범위하고 독창적인 부분을 썼다. 이 집필작업은 사실상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이루어졌다. 가족과 쥘리에트를 제외하면, 그의 벗은 끝없이 파도치는 바다뿐이었다. 〈징벌 시집 Les Châtiments〉은 프랑스어로 쓴 풍자시 가운데 가장 힘찬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후 위고가 쓴 시는 모두가 이 작품에서 풀어놓은 상상력의 도움을 얻었다. 이 시집의 목소리는 때로는 서정적이고 때로는 서사적이며 때로는 감동적이지만, 주조(主調)를 이루는 것은 적의이다.
나라와 개인의 좌절이라는 바탕과 더불어 〈징벌 시집〉 뒤에 숨어 있는 영감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바로 그러한 감정으로, 이 감정은 그것이 수반하기 마련인 반복과 결점으로 인해 흠이 가기는 했지만 그후 그가 쓴 모든 작품에서 유지되고 발전했다.
위고는 정치적 시에서 얻은 만족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에 싫증을 느끼고 1840~50년의 미발표시들로 돌아가, '순수시' 모음인 〈명상시집〉을 다듬기 시작했다. 현실에 대한 묵시적 접근방식이 시인의 영감을 지배했으며, 그것은 현대 독자들에게 갈수록 찬사를 받고 있는 〈악마의 최후 La Fin de Satan〉·〈신 Dieu〉처럼 서사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시들의 근원이었다.
방대한 길이를 가진 이 두 작품은 악이라는 문제와 대결한 작품으로, 첫번째 작품은 화려한 환상을 모자이크처럼 짜맞춘 것이고, 2번째 작품은 박진감이 넘치는 토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들은 1854~60년에 씌어졌지만, 출판업자가 역사와 전설에 바탕을 둔 〈여러 세기의 전설 La Légende des siècles〉(1859)의 '짧은 서사시'들을 선호했기 때문에, 〈악마의 최후〉·〈신〉은 그가 죽은 뒤에 출판되었다.
위고 자신이 형이상학적인 짧은 서사시들로 이루어진 1편의 장시로 생각했던 〈여러 세기의 전설〉은 그의 예술의 정점으로, 줄거리를 이끌어나가는 그의 풍부한 능력을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그의 모든 정신적 능력을 충분히 보여준다. 모든 전설 뒤에는 선과 악 사이에서 싸우는 인간의 투쟁에 대한 위고 자신의 개인적 신화가 놓여 있다.
〈여자의 성스러움 Le Sacre de la Femme〉은 이브의 모성을 찬양하고 있으며, 〈사티로스 Le Satyre〉는 신의 진리를 알기 위해 모든 종교에서 자신을 해방시키는 인류를 주제로 삼고 있다. 그리고 〈하늘 가득히 Plein Ciel〉는 인간이 하늘을 정복하리라는 유토피아적 예언을 통해 인류가 도덕적 인식과 과학의 궁극적인 통합을 향하여 끝없이 나아가리라는 시인의 확신을 선언하고 있다.
위고는 종교적 불신 속으로 침몰해가던 시대에 나타난 근대세계의 예언자였다. 그러나 그는 신중했기 때문에 독자들의 이해력에 지나친 부담을 주지는 않았다. 그는 3권의 긴 시집을 출판한 뒤 산문으로 돌아가서, 쓰다 만 장편소설 〈레 미제라블〉을 계속 쓰기 시작했다.
이 소설은 1862년에 출판되어 모든 유형의 독자층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곧 수많은 언어로 번역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조국에서 당장 인기를 얻었을 뿐 아니라, 외국에서도 명성을 얻었다.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파리 지하세계를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은 탐정소설의 줄거리를 갖고 있지만, 파리 사람들의 서사시이기도 하다.
위고의 말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가 지고 제3공화정이 선포되자 위고는 자신의 맹세를 충실히 지켜 파리로 돌아왔다. 그는 국민의회 의원(1871)으로 국사에 참여하기로 동의했지만, 1개월 만에 사임했다. 그는 아직도 옛날의 이상을 위해 싸웠지만, 옛날과 같은 정력은 더이상 갖고 있지 않았다.
망명생활은 그의 노쇠를 재촉했고, 시련은 계속되었다. 1863년에 애인을 찾아 노바스코샤(지금의 캐나다)로 갔던 딸이 그로부터 버림을 받아 9년 뒤에 정신병자가 되어 프랑스로 돌아왔다. 1868년에는 아내 아델이 죽어 그를 깊은 슬픔에 빠지게 했다. 또 1871년에 한 아들이 죽었고, 1873년에는 또다른 아들이 죽었다. 주위 환경에 더욱 초연해진 시인은 '무서운 해'였던 1870년의 파리 포위를 서술한 〈공포의 해 L'Annéeterrible〉를 써서 국가적인 영웅이 되었다. 그는 다가오는 지평선을 응시하며 일을 계속했다.
1871년 3월 파리 포위가 끝난 뒤 맺어진 평화조약에 분노한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켜 파리에서 권력을 잡고 코뮌이라는 혁명정부를 수립했으나, 이 반란은 5월말에 진압되었다. 위고는 이 혁명정부에 반대하여 다시 브뤼셀로 망명했고, 패배한 반란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한다는 이유로 다시 추방되었다. 그는 뤽상부르에 잠시 피신해 있다가 파리로 돌아와 귀족원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872~73년에 위고는 〈93년 Quatrevingttreize〉을 쓰고 나머지 작품들의 출판준비를 하기 위해 건지 섬에서 지냈다. 1878년에 그는 뇌출혈을 일으켰지만, 파리의 엘로가(街)에서 몇 년 동안 더 살았다. 이 거리는 그의 80세 생일에 빅토르위고가로 이름이 바뀌었다.
충실한 반려자 쥘리에트가 죽은 지 2년 뒤에 위고도 눈을 감았다. 프랑스는 국장을 치르고, 개선문 밑에 유해를 안치해 두었다가 팡테옹에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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