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 릴케 -
그리고 사랑은 어떻게 그대를 찾아 왔던가?
빛나는 태양처럼 찾아왔던가, 아니면
우수수 떨어지는 꽃잎처럼 찾아왔던가?
아니면 기도하는 모습처럼 찾아왔던가?
말해다오.
하늘에 빛나던 행복이 내려와
날개를 접고 마냥 흔들며
꽃처럼 피어나는 내 영혼에
커다랗게 걸려 있었습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다른 표기 언어 릴케 , Rainer Maria Rilke
출생 | 1875. 12. 4, 프라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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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926. 12. 29, 스위스 발몽 |
국적 | 독일 |
요약 : <두이노의 비가>,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 같은 작품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그의 시는 시를 그 자체로서 존중하려는 하나의 주장으로서 스스로를 나타내고 있다.
유년기
릴케는 결혼생활이 원만하지 못했던 부모 밑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요제프는 말단 공무원이었던 반면, 중상류층의 상인이자 황제 고문관의 딸이었던 어머니는 꽤 까다로운 여인으로, 늘 자신보다 신분이 낮은 사람과 결혼했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다. 그녀는 귀족과 상류사회에 대해 강한 동경을 품고 있었으며 귀부인같이 차려입기를 좋아했다. 결국 1884년 남편과 헤어져 황제의 궁에 가까이 있으려고 빈으로 떠났다. 따라서 릴케의 교육은 무계획적이고 단편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진로는 장교로 결정되었는데 그것은 아버지에게는 막혀 있던 확실한 사회적 지위를 보장해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다소 입학이 까다로운 프라하의 피아리스트 경 형제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닌 후에, 오스트리아에 있는 장크트푈텐의 육군 소년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4년 후에 보헤미아의 메리슈 바이스키르헨에 있는 육군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이 두 학교는 감수성이 매우 예민했던 소년의 욕구와는 전혀 맞지 않았고 결국 몸이 허약하다는 이유로 중도에서 그만두어야 했다. 말년에 릴케는 이 시절을 가리켜 가혹한 수난의 시기, '공포의 입문기'라고까지 했다.
그후 린츠의 경영학원에서 1년(1891~92)을 헛되이 보낸 후에 숙부 야로슬라프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잘못된 교육의 과정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 그후 1895년 여름 노이슈타트 근교에 있는 프라하 독일 김나지움(대학 진학을 위한 예비 학교)에서 학업을 마쳤다.
학교를 마칠 무렵 이미 시집 〈삶과 노래 Leben und Lieder〉(1894)를 출판했고, 그가 시인의 길을 걷게 되리라는 데 아무런 의심을 품지 않았다.
1895년 프라하의 카렐대학교에 입학하여 독일문학과 미술사 과정에 등록했으며 자신의 선택에 실망한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1학기 동안 법학강의를 듣기도 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학문에 열중할 수 없었기 때문에 1896년 학교를 떠나서 독일의 뮌헨으로 가게 되었고 예술적이고 코스모폴리탄적인 이 도시에 강한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때부터 내면적 욕구에 따라 끊임없이 방랑하면서, 자신의 시각이 정당하다는 것을 남에게 설득시킬 줄 아는 예술가로서의 성숙된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게다가 러시아·프랑스·스페인·오스트리아·스위스·이탈리아 등이 펼쳐져 있는 유럽 대륙 자체의 거대한 공간과 다양성은 충분히 그런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물리적 배경이 되었다.
성숙기
1897년 5월 러시아 장교와 독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상트페테르부르크 출신의 루 안드레아스 잘로메를 만났고 곧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당시 36세였던 그녀는 이미 10년 전에 한 독일인 교수와 결혼했는데 젊었을 때는 철학자 니체로부터 구혼을 받고 거절한 적도 있었다. 루와의 만남은 릴케의 인생에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었다. 루는 릴케에게 연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모성애를 풍기는 여인으로서 그가 플로베르식 '감정교육'을 받는 데 주된 영향을 주었고, 무엇보다도 러시아를 소개해 준 사람이었으며 그들의 관계가 끝난 후에도 루는 절친한 친구로 남아 있게 되었다.
1897년말 릴케는 가능한 한 그녀와 가까이 지내기 위해 그녀를 따라 베를린에 갔다.
러시아는 릴케의 삶에 이정표가 되었다. 그곳은 그가 '선택한 일련의 고국들' 중 그 어느 곳보다도(프랑스의 파리는 예외일 수 있겠지만) 깊은 인상과 결정적인 체험을 얻은 곳이었다. 루와 함께 1899년 봄 처음으로 러시아를 방문했으며 다음해인 1900년 여름 다시 그곳을 여행했다.
여기서 그는 내면적 현실, 즉 그의 감정의 이상적 상징이 외부적 현실로 드러나 있음을 보았다. 러시아는 그에게 뭐라고 딱 잘라 형언할 수는 없으나 원초적이며 거의 종교적인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그것은 조화롭고 강력한 '신'의 세계였고 '인간적 공동체'였고 '자연'이었다. 요컨대 존재의 '우주적' 정신이 정제되어 있는 곳이었다. 러시아는 그에게 강한 시적 반응을 불러일으켰으며, 이것을 그는 나중에 진지한 시작(詩作)의 시초라고 말했다. 그리하여 1899~1903년 3부로 구성된 긴 연작시 〈시도시집 Das Stunden-Buch〉(1905)을 쓰게 되었다.
이 시에서는 시적인 '자아'가 기도하는 사람의 무리와 함께 신(神)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젊은 수도승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신은 '생'의 화신으로서, 그리고 '사물'의 세계에 내재하는 거룩한 초자연적 존재로서 그려진다. 이 작품의 언어와 모티프는 대부분 1890년대 유럽에서 일어나고 있었던 신예술(Art Nouveau)이 헨리크 입센과 모리스 메테를링크의 극 같은 분위기, 존 러스킨과 월터 페이터의 미술에 대한 열광,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체의 철학에 나타난 '생'의 강조 등과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러나 리드미컬하고 암시적인 힘과 넘치는 음악성을 지닌 이 헌신적인 시작(詩作)에 보이는 자축(自祝)의 열정에는 완전히 새로운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고, 여기서 이 놀랄 만한 재능을 지닌 시인은 제 목소리를 찾게 되었다. 2번째 러시아 여행을 마친 후 곧 브레멘 근교의 보르프스베데에 있는 예술가촌에 합류한 릴케는 여기서 취향이 같은 예술가들과 함께 새로운 생의 스타일을 개발하고자 했다(보르프스베데파). 1901년 4월에 오귀스트 로댕에게 사사한 브레멘 출신의 젊은 조각가 클라라 베스토프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베스터베데 근처의 한 농가에서 가정을 꾸미게 되었고 이곳에서 〈시도시집〉 제2부를 집필하였으며 보르프스베데의 미술가촌에 관한 책도 썼다. 1901년 12월 딸 루트가 태어났으나 두 사람은 각자 자유로이 활동하기 위해 헤어지기로 합의했다.
1902년 릴케는 한 독일인 출판업자의 부탁으로 조각가 로댕에 관한 책을 쓰기 위해 파리로 떠났다. 그후 12년 동안 파리는 릴케의 삶에서 지리적인 중심지가 되었다. 물론 다른 도시와 나라를 방문하기 위해 자주 파리를 떠났고, 1903년 봄에는 파리의 무관심한 듯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탈리아의 비아레지오로 가서 〈시도시집〉 제3부를 썼다.
또한 로마(1903~04)·스웨덴(1904)·카프리(1906~08) 등지에서 집필을 계속했다. 남프랑스·스페인·튀니지·이집트 등 거의 유럽 전역을 편력했으며, 종종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파리는 그가 선택한 2번째의 고국이었으며, 이 도시가 지닌 역사적이고 인간적이며 '아름다운 풍경'과 지적인 도전의 분위기로 인해 릴케에게는 러시아 못지않게 중요한 곳으로 인식되었다.
릴케에게 파리는 사치와 에로티시즘에 물든 황금시대(belle époque)의 수도가 아니라 인간성이 상실된 비참한 도시였고, 정체불명의 소외되고 병든 빈사의 도시였으며, 공포와 빈곤, 죽음의 도시였다. 그는 이런 현상들에 몰두하는 동시에 다른 일도 체험했다. 그는 예술과 창작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깨닫게 되는데 이 자각은 로댕과의 친밀한 관계를 통하여 얻어진 것이었다. 로댕과의 우정은 1906년 봄까지 지속되었으며 로댕은 예술적인 영감을 말하는 전통적인 개념과는 예리하게 대립되는 미술 윤리를 가르쳐주었다.
그것은 쉴 새 없이 작업에 몰두하면서 세부묘사와 뉘앙스의 표현에 전념하고, 집중시키고 객관화하는 점에서의 '형식'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방법이었다. 로댕은 릴케에게 루브르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미술품들, 샤르트르 대성당, 그리고 파리의 형상을 새롭게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심어주었던 것이다. 문학자 가운데는 시인 샤를 보들레르가 릴케에게 가장 큰 감명을 주었다(예술철학).
파리에 거주하는 동안(12년간) 서정시의 새로운 양식을 개발했는데, 그것이 바로 이른바 물리적 대상에서 조형적인 본질을 포착하고자 시도한 '사물시'(Ding-Gedicht)였다.
이 사물시들 중에서는 시각예술을 상상력이 풍부한 언어로 옮기는 데 크게 성공한 것들도 있었다. 또한 어떤 시들은 풍경이나 초상화, 성서적이고 신화적인 테마를 화가가 묘사하듯이 다루고 있다. 〈신시집 Neue Gedichte〉(1907~08)으로 출간된 이 새로운 시의 형태는 전통적인 독일 서정시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릴케는 자신의 언어를 극단적으로 순화시키고 정제하여 다른 예술과는 구별되는 예술, 기존 언어와는 구별되는 언어가 될 수 있게 하였다. 그러나 이 시들이 세속적인 우아함을 내보인다 해서 그들 고유의 정서적이며 도덕적인 면을 감추지는 못한다.
1907년 가을에 인상파 화가 폴 세잔에 관한 편지에서 이 화가의 화풍에 대해 "이름없는 노동으로 사랑을 모두 소모하는" 방법이라 말했을 때, 이 표현은 의심할 여지없이 릴케 자신을 겨냥한 말이었다. 1903년 7월 잘로메에게 보낸 한 편지에서는 자신의 방식을 "공포로부터 구체적 대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라는 표현으로 정의하였다.
1904년 로마에서 쓰기 시작한 〈말테 라우리츠 브리게의 수기 Die Aufzeichnungen des Malte Laurids Brigge〉(1910)는 〈신시집〉에 대응되는 산문으로 된 작품이다.
시의 배경, 완숙한 양식 뒤에서 서성이고 있던 그 무엇이 이제 산문 작품의 전면에 등장하여 파리의 한 호텔 방에서 고독하게 지내고 있는 한 남자의 주관적이고도 개인적인 문제, 그리고 '대상'을 창조하는 영감으로 작용하는 '공포'가 형상화된다. 릴케의 시가 상징주의자의 '순수시' 관념에 장엄하게 순응하는 것으로 보인다면 이 〈수기〉는 실존주의자의 뛰어난 초기 모범작으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릴케는 이 작품을 파리로 이주한 덴마크 청년 말테가 쓰는 수기로 가정하면서 묘사·회상·명상 장면들을 예술적으로 교묘하게 결합시키고 있다. 그런데 말테는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전통적인 연대기적인 서술방식을 거부하고, 자신이 다루는 주제를 주위의 모든 '공간적 시간' 배경과는 반대로 '동시에 일어나는' 사건으로서 서술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릴케의 주된 주제인 사랑, 죽음, 어린시절의 공포, 여성 숭배, 그리고 '신'의 문제가 전부 발견된다.
그러나 여기서 신의 문제는 단순히 '마음의 경향'으로 취급된다. 이 작품은 한 영혼의 분열과정을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릴케 자신은 "단지 한 걸음만 내디디면, 나의 가장 깊은 불행은 행복으로 바뀔 수 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 분열이 변증법적인 의중유보(意中留保)를 내포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릴케는 이 걸작을 완성한 대가로 집필장애를 얻게 되었고 절망감이 너무도 심각해서 글을 쓰는 것을 포기할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1913년에 발표한 〈마리의 삶 Das Marienleben〉이라는 단편연작시를 제외하고는 13년 동안 아무 작품도 발표하지 못했다. 물론 일찍이 1912년 릴케는 〈신시집〉을 능가할 만한 비가조의 장시(長詩) 2편을 썼으나 즉시 출판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시도 새로운 연작시의 한 부분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 2편의 시는 트리에스테 근처의 두이노 성(城)에 있을 때 쓴 것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뮌헨에 있던 릴케는 그대로 그곳에 남아 있기로 결정했다. 전쟁기간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내고자 했으나 1915년 12월 오스트리아 군대의 소집으로 빈의 육군 사무국에서 복무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다시 민간인의 생활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시기의 사회적 분위기는 릴케의 삶의 방식과 창작활동에 불리하게 작용했고, 전쟁이 끝나자 그는 무기력한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비교적 창작력이 있던 때는 1915년 가을로서 이때 〈두이노의 제4비가〉를 완성하였다.
노년기
자신이 선택한 마지막 고국인 스위스에서 7년을 보내면서 다시 한번 창조적인 재능을 발휘했다.
1921년 여름 발레리 지방의 론 강가에 위치한 샤토 드 뮈조의 성(城)에 한 스위스인 후원자의 손님으로 묵게 되었다. 1922년 2월 여기서 정열적인 창작욕구를 가지고 몇 년 전부터 쓰기 시작했던 연작 〈두이노의 비가〉를 불과 며칠 만에 거의 힘들이지 않고 완성하였다. 또한 55편의 시로 구성된 훌륭한 연작시집을 완성할 수 있었는데, 이 작품이 바로 분위기와 주제면에서 〈비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였다.
〈두이노의 비가〉는 릴케 시의 정점이다.
〈시도시집〉에서 '생'에 대한 순진하고 불확실한 찬양으로 출발한 릴케의 시 세계는 〈말테의 수기〉에서는 "이처럼 혼돈의 세계 위에 매달린 생은 불가능하다"라는 말로 표현되다가, 〈비가〉에서는 생을 본질로서 찬양하고 정당화하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준다. 1925년 릴케는 "〈비가〉에서는 삶과 죽음에 대한 긍정이 동일한 것으로 입증된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 〈비가〉는 '현대'인의 상황, 즉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정신의 우주론적 관념으로부터 해방된, '상속권이 상실된' 의식의 상태를 반영하는 새로운 신화로 볼 수 있다.
릴케 역시 철학자 니체처럼 그리스도교 정신이 내세우는 내재성과 초월성이라는 이원론에 반대한다. 그 대신에 '우주 내재적 공간'이라는 단호한 일원론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는 생과 죽음, 지상과 공간, 시간의 차원들이 이 모든 것을 포함하는 단일한 통일성으로 응축된 공간이다. 이와 같은 릴케식 신화는 동물에서 '천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존재를 위계적인 질서로 파악하는 중세 우주관과 비슷한 이미지를 지닌 우주론으로 나타나며 이 우주론은 결과적으로 존재와 생의 체계적이고 일관된 '신조'를 낳는다.
여기서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일벌들"이라는 감각적 인식을 통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눈에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변화시키는 사명을 떠맡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의 궁극적인 숙명은 '이야기'나 '노래'나 '칭송' 또는 '찬양' 가운데서 선택한 행위로 구체화된다. 결국 시인은 〈제9비가〉나 〈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에서 명확하게 나타나듯이 (신의 가명인) '천사 앞에서' 인류의 주역 또는 대표자로 등장하게 된다.
말년의 릴케가 주창한 이 메시지는 한편에서는 '생'의 새로운 종교로서 찬양받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방종한 유미주의로서 비판받기도 했으며, 개인적인 재능이 있다 해서 시인편에서 '자기구원'을 시도하려 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22년 2월에 발표된 눈부신 승리의 작품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가 릴케 말년의 주요업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기 시 가운데는 주제와 양식 두 측면에서 〈비가〉·〈소네트〉를 능가할 정도의 작품들이 있었다. 이 시들은 1920년대 시적 언어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보이는 실험적인 형식의 미를 추구하고 있다.
그외에도 거의 노래와 같은 단순한 시, 짧은 연작시, 발레 지방의 풍경에 경의를 표하면서 프랑스어로 쓴 4권의 시집이 있다.
뮈조는 그대로 성에 남았지만 릴케는 스위스 여행을 계속하면서 친구들과 끊임없이 교제하고 수많은 편지를 교환했다. 1925년초에는 자신의 문학적 삶과 밀접한 관계를 맺었던 파리로 건너갔고 이곳에서 앙드레 지드, 폴 발레리와 같은 옛 친구들을 비롯하여 자신의 새로운 숭배자들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이제 릴케는 자신의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유럽의 중심지 파리에서 문학 전성기의 중심부에 있게 된 셈이었다. 그러나 이 파리 방문은 이미 허약해져 있던 그에게 지나친 과로의 원인이 되었다. 같은 해 8월 18일 그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조용히 파리를 떠났다. 이미 1923년부터 릴케는 병을 앓아 쇠약해 있었지만 1926년 12월 죽기 몇 주 전에야 그 원인이 희귀한 불치병인 백혈병 때문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는 제네바 호숫가의 테리테트에 있는 한 요양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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