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 보는 꿈
- 베를렌 -
이상하게도 가슴 설레는 이 꿈을 나는 자주 꿉니다.
내가 사랑하고, 그리고 니를 사랑해 주는
그러면서 누군지도 모르는 한 여자입니다.
볼 적마다 항상 다르나 그렇다고 전혀 다른 사람도 아닌
그러면서 나를 사랑하고 나는 이해해 주는 한 여자입니다.
그 여자에게만 내 마음은 환히 드러나 보입니다.
그 여자에게만 내 마음은 알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창백한 내 이마의 진땀을 그 여자만이
그녀의 눈물로 깨끗이 해 줄 수 있습니다.
그 여자의 머리칼 빛깔도
사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여자의 이름조차도 생각해 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다만 한결같은 사랑만 속삭이던 옛 연인들의 이름처럼
그렇게 고운 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는,
그 여자의 눈짓은 조각상의 그것과고 같습니다.
그리고 멀리 끊러질 듯 그러나 엄숙하게 울려오는
지금은 입 다물어 버린 그리운 목소리를 듣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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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844. 3. 30, 프랑스 메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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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96. 1. 8, 파리 |
국적 | 프랑스 |
요약 프랑스의 서정시인.
개요
처음에는 고답파와 관계를 맺었지만 그후 상징파 시인의 지도자로 알려졌다.
그는 스테판 말라르메, 샤를 보들레르와 함께 이른바 데카당(Decadents)을 이루었다(상징주의 운동).
생애
베를렌은 육군 장교의 외아들로 태어나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의 무례한 성품은 분명 응석받이로 자란 환경 탓이었을 것이다. 그는 파리의 보나파르트 고등학교(지금의 콩도르세 고등학교)에서 재능과 게으름을 동시에 보여주었고, 14세 때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작품 중 최초의 시인 〈죽음 La Mort〉을 거장 시인 빅토르 위고에게 보냈다. 1862년에 라틴어 번역에서 탁월한 성적을 받아 대학입학자격인 '바칼로레아'를 딴 그는 보험회사 사무원을 거쳐 파리 시청의 공무원이 되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그는 계속 시를 쓰는 한편, 작가들의 단골 카페와 객실에 자주 드나들면서 고답파의 주요시인들이나 그밖에 재능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는데, 말라르메와 빌리에 드 릴라당 및 아나톨 프랑스도 거기에 끼어 있었다. 이윽고 그의 시가 그들의 평론지에 실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발표된 시는 〈프뤼돔 씨 Monsieur Prudhomme〉(1863)였다.
3년 뒤 동시대 시인들의 작품집인 〈현대의 파르나스 Le Parnasse contemporain〉(고답파 시인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파르나시앵'은 여기서 유래한 명칭임) 제1집에는 베를렌이 기고한 8편의 시가 실려 있었다.
같은 해 그의 첫번째 시집이 나왔다. 이 〈토성시집 Poèmes saturniens〉에는 보들레르와 르콩트 드 릴을 능숙하게 모방한 작품 이외에, 사촌 누이 엘리자에 대한 사랑과 우수가 강렬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엘리자는 다른 사람과 결혼한 뒤 1867년에 죽었다(이 시집의 출판 비용을 대준 사람이 바로 엘리자였음). 〈사랑의 향연 Fêtes galantes〉에서는 이탈리아의 가면희극인 코메디아 델라르테, 바토와 니콜라 랑크레 같은 18세기 화가들의 세련된 전원 풍경, 또는 같은 시대에 활동한 화가 아돌프 몽티셀리의 분위기있는 그림에 나오는 장면과 인물들을 섬세하고 교묘하게 환기시키는 구절로 자신의 개인 감정을 감추고 있다.
1869년 6월 베를렌은 16세 소녀인 마틸드 모테와 사랑에 빠져 1870년 8월에 결혼했다. 약혼 기간에 쓴 달콤한 시들〈좋은 노래 La Bonne Chanson〉에서 그는 마틸드를, 그를 잘못된 길에서 구해줄, 오랫동안 기다려온 구세주로 열렬히 찬미했다. 반란자들이 정권을 잡고 파리 코뮌을 세웠을 때, 베를렌은 혁명위원회 밑에서 홍보 담당자로 일했다.
이때문에 제3공화정에서 보복당하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은 그가 나중에 자유분방한 방랑생활을 하게 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그는 아내와 성격이 맞지 않았고, 1871년 9월 그의 집에 와서 머물던 젊은 시인 아르튀르 랭보에게 열중하면서부터 아내와는 더욱 사이가 나빠졌다.
베를렌은 1872년 7월에 아내와 어린 아들 조르주를 버리고 랭보와 함께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를 방랑하면서 다음 시집인 〈무언가 Romances sans paroles〉를 위한 '인상주의적' 단편들을 썼다.
두 사람은 9월 런던에 도착하여 망명한 코뮌 동지들뿐만 아니라 흥미와 즐거움과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것들도 많이 발견했다. 거기서 베를렌은 〈무언가〉를 완성했는데, 특히 첫 부분은 프랑스 문학에서 보기 드문 순수한 음악성을 획득하고 있으며, 그의 가장 앞선 작시법적(作詩法的) 실험의 일부를 포함하고 있다(운율학). 주제는 대개 풍경이나 후회, 또는 사이가 멀어진 아내에 대한 질책이다. 이 시집은 1874년 그의 친구인 에드몽 르펠티에가 출판했다.
저자 자신은 1873년 7월 10일에 브뤼셀에서 랭보와 심한 언쟁을 벌인 끝에 랭보에게 총상을 입혔기 때문에 2년 금고형을 선고받았고, 이 시집이 나왔을 당시에는 벨기에의 몽스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었다.
뉘우침과 감옥에서의 금욕 및 경건한 독서(그는 셰익스피어와 디킨스를 연구하며 감탄하는 동시에 프랑스어뿐 아니라 영어로 된 종교 서적도 열심히 읽었음) 결과, 아내와 별거한 1874년 여름, 그는 충실한 로마 가톨릭교도로 되돌아간 것으로 보인다. 1875년 1월 감옥에서 나온 그는 트라피스트회 수도원에서 잠시 칩거 생활을 한 다음, 랭보를 만나기 위해 서둘러 슈투트가르트로 갔다.
이때 랭보는 그를 난폭하게 거절했음이 분명하다. 그는 영국에 피난처를 구하여 1년 남짓 링컨셔 주의 스틱니와 보스턴 및 햄프셔 주의 보른머스에서 프랑스어와 그림을 가르치며 품위와 경건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깊은 인상을 주었고, 테니슨과 스윈번 및 영국성공회 찬송가 작가들 같은 영국의 여러 저자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1877년에 그는 프랑스로 돌아왔다.
1880년 10월에 베를렌이(그 이전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자비로 출판한 〈예지 Sagesse〉에 수록된 시들은 대부분 이 시기(1873~78)에 쓴 작품들이다.
여기서는 감정의 오랜 방황만이 아니라 단순한 가톨릭 신앙도 탁월한 시적 표현을 얻고 있다. 그는 비로소 문학적으로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1882년에 발표된 그의 유명한 〈시법 Art poétique〉(이 작품은 8년 전에 감옥에서 썼던 것으로 보임)은 젊은 상징주의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그후 그는 상징주의자들과의 관계를 부인했는데, 그것은 주로 그들이 그보다 훨씬 더 철저하게 전통 형식을 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압운은 그가 생각하기에 프랑스 운문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요소였다. 1880년에 베를렌은 총애하는 제자 뤼시앵 레티누아와 그 소년의 부모와 함께 농사를 지어보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1883년 4월에 뤼시앵이 죽고 베를렌이 몹시 사랑했던 그의 어머니마저 1886년 1월에 세상을 떠났으며, 아내와 화해하려는 모든 노력이 실패로 끝나자 '품위'를 지키려는 의지도 모두 무너져버렸다.
그는 술과 방탕한 생활로 다시 빠져들었다. 이제 유명한 동시에 악명이 높아진 그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여전히 글을 쓰기는 했지만, 옛날과 같은 영감은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옛날과 얼마 전 Jadis et naguère〉은 대부분 여러 해 전에 써두었지만 신중하게 분류한 이전의 시집에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미처 발표하지 않았던 '시법' 같은 작품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평행 Parallèlement〉은 대부분 그의 '고상한' 작품들과 같은 시기에 씌어졌고 기법도 그에 못지 않게 훌륭하지만, 자유분방하고 관능적인 작품들도 있다.
베를렌은 자신의 성격과 시적 영감을 이루는 2가지 본질을 솔직하게 인정했다. 〈사랑 Amour〉에 수록된 새로운 시들은 여전히 예전의 매력을 보여주고 있으나, 뤼시앵 레티누아의 죽음을 애도하는 구절은 테니슨의 〈인 메모리엄 In Memoriam〉을 다소 모방한 것이 분명하며 테니슨의 작품에 비하면 깊이가 부족하다.
산문작품으로는 〈저주받은 시인 Les Poètes maudits〉이 있는데 말라르메와 랭보를 비롯한 6명의 시인의 생애를 다룬 짤막한 전기이다(저주받은 시인). 그당시 작가들의 짧은 전기인 〈오늘의 사람들 Les Hommes d'aujourd' hui〉은 대부분 1886년에 발표되었다.
〈나의 병원생활 Mes Hôpitaux〉은 병원에 입원했던 경험을 이야기한 것이고, 감옥생활을 이야기한 〈나의 감옥생활 Mes Prisons〉에는 1874년 그가 '회심'한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들어 있다. 그리고 〈고백, 자서전적 기록 Confessions, notes autobiographiques〉은 그 자신을 위시하여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동시대 작가들을 다시 보게끔 했다(그는 1886년에 랭보의 〈일뤼미나시옹 Illuminations〉을 출판하여 랭보를 유명하게 만드는 데 이바지했음). 그러나 이밖의 작품들, 즉 그가 굶주림을 면하기 위해 쓴 나머지 운문과 산문은 읽어볼 가치가 거의 없다.
그는 데카당파 시인들 사이에서 유명했던 필로멘 부댕이나 외제니 크란츠 같은 나이든 창녀들과 함께 산 때가 많았는데, 아무리 글을 써도 간신히 입에 풀칠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는 자주 병원에 입원했고, 의사들은 그를 헌신적으로 보살피고 우정을 베풀어주었다. 영국 런던과 옥스퍼드 및 맨체스터에서는 젊은 숭배자들이 그를 환대했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인 비평가 아서 시먼스는 1893년 11월에 그의 영국 강연여행을 주선해주었다. 프랭크 해리스와 크랜머 빙은 베를렌이 〈포트나이틀리 리뷰 The Fortnightly Review〉와 〈세니트 The Senate〉에 발표한 평론과 시를 모아서 출판했다.
숭배자들(1894)과 국가(1895)가 준 생활보조금도 걸핏하면 지급이 늦어지거나 액수가 충분하지 못했지만, 이만한 혜택도 실은 그가 시인으로서 받은 존경을 인정한 결과였다. 그는 1896년 1월에 외제니 크란츠의 셋방에서 죽었다.
평가
프랑스의 시인들 가운데 가장 순수한 서정시인의 한 사람인 베를렌은 근대 언어 음악의 선구자였고, 낭만주의에서 상징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한다.
그의 훌륭한 시들은 대부분의 선배 시인들한테서 볼 수 있는 과장된 수사법을 버리고, 지성을 무장해제함으로써 독자를 사로잡는 암시와 떨리는 듯한 막연함을 통하여 일상적인 상투어를 포함한 프랑스어가 인간 감정의 새로운 이면을 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그는 낱말들이 단순히 그 소리만으로 사용되어 좀더 미묘한 음악, 즉 낱말의 일상적인 의미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법의 주문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의 가장 훌륭한 작품에는 명쾌하고 지적인 또는 철학적인 내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프랑스어의 내밀한 음악성을 발견한 것은 분명 본능적인 것이었지만, 가장 창조적이었던 시기에는 자신의 독특한 재능을 개발하고 프랑스 문학의 시적 표현을 '개혁'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 의식있는 예술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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