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 괴테 -
희미한 햇빛, 바다에서 비쳐올 때
나 그대 생각하노라.
달빛 휘영찬 샘물에 번질 떄
나 그대 생각하노라.
길 저 멀리 뽀얀 먼지일 떄
나 그대 모습 보노라.
이슥한 밤 오솔길에 나그네 몸 떨 떄
나 그대 모습 보노라.
물결 높아 파도 소리 무딜 떄
나 그대 소리 듣노라.
자주 고요한 숲속 침묵의 경계를 거닐며
나 귀 기울이노라.
나 그대 곁에 있노라.
멀리 떨어져 있지만
그대 내 가까이 있으니.
해 저물면 별아,
날 위해 곡 반짝여라.
오, 그대 여기 있다면.
괴테
출생 | 프랑크푸르트암마인, 1749. 8. 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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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832. 3. 22, 작센바이마르 바이마르 |
국적 | 독일 |
요약 : 세계 문학사의 거인으로 널리 인정되는 독일 문호로 르네상스 거장다운 다재다능함과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과학에 관한 저서만도 14권에 이를 정도로 그가 쓴 방대한 량의 저술과 그 다양성은 놀랄 만하다.
서정성 짙은 작품들에서는 다양한 주제와 문체를 능숙하게 구사했고 허구에서는 정신분석학자들의 기초자료로 사용된 동화로부터 시적으로 정제된 단편 및 중편소설(novella)들, 〈빌헬름 마이스터 Wilhelm Meister〉의 '개방된' 상징형식에 이르기까지 폭넓음을 보여준다.
희곡에서도 산문체의 역사극·정치극·심리극으로부터 무운시 형식을 취한 근대문학의 걸작 중 하나인 〈파우스트 Faust〉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82년간의 생애를 통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신적 경지의 예지를 터득했으면서도 사랑이나 슬픔에 기꺼이 그의 존재를 내맡기곤 했다. 내적 혼돈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일상적인 생활 규율을 엄수하면서도 삶·사랑·사색의 신비가 투명할 정도로 정제되어 있는 마술적 서정시들을 창조하는 힘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그에게 원하는 대로 창조력을 샘솟게 하는, 자신조차도 신비스럽게 여긴 재능이 생겨나 60년 가까이 노력해온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죽기 불과 몇 달 전에 완성한 〈파우스트〉 전편은 괴테의 반어적인 체념이 덧붙여져 후세 비평가들에게 전해졌는데 이 작품의 마지막 2행연구(二行聯句 couplet) "영원히 여성적인 것은 우리를 끌어올린다"는 말은 인간 존재의 양극성(兩極性)에 대한 괴테 자신의 감성을 요약한다. 여성은 그에게 남성의 영원한 인도자요 창조적 삶의 원천인 동시에, 정신과 영혼의 가장 숭고한 노력의 구심점이었다.
괴테에게는 상호 배타적인 삶의 양극을 오가는 자연스러운 능력과 변화 및 생성에 대한 천부적 자질이 있었다. 삶이란 그에게 상반된 경향들을 자연스럽게 조화시키는 가운데 타고난 재능을 실현해가는 성숙의 과정이었다.
질풍노도기의 작품
라이프치히에서 괴테는 중병을 얻어 학업도 끝마치지 못한 1768년 가을에 귀향하게 되었다.
긴 회복기 동안 자아성찰과 종교적 신비주의에 몰두했고, 연금술·점성술·신비철학에 도취했는데, 이 모든 것은 〈파우스트〉에 그 자취를 남기게 된다. 건강이 회복되자 스트라스부르에서 법학 공부를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그후에는 파리에 가서 세계일주(실현되지는 못했지만)를 할 예정이었다. 스트라스부르 체류는 그의 삶과 작품에 있어 일대 전환점이 되었다. 프랑스 지방의 독일 중심지이던 이곳에서 괴테는 라이프치히의 세계주의적 분위기에 대한 반동을 경험했으며, 대성당의 영향으로 고딕풍의 독일적 이상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고딕 건축).
이때 그곳에서 눈을 치료하기 위해 1770~71년의 겨울을 보내고 있던 J.G. 헤르더는 괴테에게 매우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를 통해 괴테는 정신을 고양시키는 데 있어 촉각의 역할, 감정을 표현하는 형식을 창출하는 창조자로서의 새로운 예술가상, 인간의 가장 독창적이고 생명력있는 언어로서의 새 시론(詩論), 새로운 문체 및 성서나 호메로스의 서사시, 3세기 켈트 족이 쓴 〈오시안〉 등에 간직되어온 '원시'종족들의 시와 민요(Volkslied)가 지닌 가치를 터득하게 되었다(→ 민속문학).
이러한 그의 변모는 초기 연인 중의 하나인 프리데리케 브리온(제젠하임의 목사 딸)에게 바친 〈제젠하임 시가집 Sesenheimer Lieder〉(1770~71)에 잘 나타난다.
이 시집의 시들은 독일 서정시의 새로운 장을 여는 것이었다. 〈5월의 노래 Mailied〉와 〈환영과 이별 Willkommen und Abschied〉 등은 그의 〈시가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가장 인기있는 작품들이다. 특히 1790년에 개작된 〈환영과 이별〉은 괴테 자신이 프리데리케를 버린 후 느꼈던 죄의식을 감동적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시와 진실〉에서 다시 회고되는 이 사랑이야기는 인간성숙의 잠재적인 요소로 바라본 삶과 문학의 합일을 보여준다.
만일 헤르더의 말대로 시가 생명력의 표현이고 연극이 정열의 표현이라면 〈철수(鐵手) 고트프리트 폰 베를리힝겐의 역사극 Geschichte Gottfriedens von Berlichingen mit der eisernen Hand dramatisiert〉(1771)의 거창한 인물은 정열 그 자체의 표현일 것이다.
이 작품에서 괴테는 의식적으로 셰익스피어와 겨루고 있다. 셰익스피어 탄생 2년 전에 죽은 실존인물 괴츠는 괴테 시대의 엄격한 허식과는 현격하게 대조되는 떠들썩한 16세기의 원시적 생명력을 표현하는 데 시기적으로 근접해 있었기 때문이다.
1773년 〈괴츠 폰 베를리힝겐 Götz von Berlichingen〉의 개작출판과 더불어 셰익스피어 숭배가 시작되었으며, 괴테의 이 작품은 질풍노도운동의 첫 봉화라 할 수 있다.
괴테의 열정적인 〈셰익스피어의 날에 붙여 Rede zum Shakespeares Tag〉에서 예고된 이 운동의 선언문은 그가 1771년 8월 프랑크푸르트에 귀향한 후에 발표되었다.
또 이른바 〈독일 예술과 미술에 관하여 Von deutscher Art und Kunst〉에는 역사가 J.M. 뫼저의 독일민족 옹호의 글과 〈오시안〉과 셰익스피어를 찬양한 헤르더의 논설 2편, 그리고 괴테 자신이 쓴 고딕 건축양식에 대한 랩소디가 실렸다.
표면적으로는 변호사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지만, 젊은 시인 괴테는 〈프랑크푸르트 학자보 Frankfurter Gelehrte Anzeigen〉의 편집을 도와주면서 문학과 사회의 의무감 사이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1772년 왕국의 고등법원이 있는 베츨러로 떠났으나 거기서도 법률보다는 문학에 대한 욕구가 솟구쳤다.
자유시행으로 쓴 자조적 송시(頌詩) 〈방랑자의 폭풍의 노래 Wandrers Sturmlied〉는 고대 그리스의 위대한 서정시인 핀다로스에 대한 새로운 찬미와 뒷날 그 자신도 위대한 시인이 되리라는 불투명한 자신감을 동시에 보여준다.
베츨러에서도 새로운 사랑을 체험하였는데, 상대는 이미 약혼자가 있는 샤를로테 부프라는 처녀로서, 이 연애사건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s〉으로 주목을 끌게 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베츨러에서의 체험 외에도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다.
괴테가 절제력이 부족한 것에 대한 헤르더의 날카로운 비판의 말, 예술창작에 관한 신플라톤주의적 학설에 대한 G. E. 레싱의 고발서, 독일 소설가 조피 폰 라 로슈의 딸 막시밀리아네에 대한 일시적인 연정(작품의 여주인공이 검은 눈의 소유자로 묘사된 것은 그녀 때문임) 등이 그것이다. 특히 베츨러에서 들려온, 실연으로 자살한 친구의 소식은 이 작품의 구성을 결정적으로 급변시켰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면, 이것은 토머스 칼라일의 지적대로 '동시대인들이 겪었던 이름 붙일 수 없는 불안과 동경에 찬 불만'을 표출해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첫 소설작품은 결코 감상적인 소설이 아니며 실연이 본래의 주제도 아니다. 오히려 그 주제는 18세기가 '열정'이라고 부르던 것으로서 이것은 그 당시 사랑·예술·사회·사고의 모든 영역에까지 널리 퍼져 있던, 절대적인 것을 추구하다 맞이하게 되는 치명적인 결과다.
1771~75년에는 이밖에도 핀다로스나 셰익스피어로부터 영향을 받아 서정적이거나 극적인 훌륭한 찬가들이 쏟아져 나왔다.
〈카이사르 Cäsar〉·〈마호메트 찬가 Mahomets Gesang〉·〈영원한 유대인 Der Ewige Jud〉·〈프로메테우스 Prometheus〉·〈소크라테스 Sokrates〉·〈사티로스 Satyros〉·〈나그네 Der Wandrer〉 등이 그것이다. 〈에그몬트 Egmont〉와 〈초고 파우스트 Urfaust〉(이 작품은 1887년 우연히 발견되었음)도 이 기간에 완성되었다.
또한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셰의 주제에서 착안한 좀더 일반적인 형식의 희곡〈클라비고 Clavigo〉와 3인의 결혼이라는 중재형식의 결말로 끝나는 비극 〈슈텔라 Stella〉(1775)도 완성했다.
오페레타 〈에르빈과 엘미레 Erwin und Elmire〉와 〈클라우디네 폰 빌라 벨라 Claudine von Villa Bella〉에는 부유한 은행가의 딸 릴리 쇠네만과의 약혼으로 고취된 전아(典雅)한 로코코풍이 다시 드러나고 있다.
릴리는 상류사교계와 어울렸는데, 그러한 사교계는 당시 이 질풍노도의 젊은 시인에게는 참을 수 없는 구속이 되곤 했다.
이 사랑의 갈등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괴테는 자주 자연에서 도피처를 구했다. 그리하여 취리히 호수에서 쓴 〈호수에서 Auf dem See〉를 비롯하여, 밝고 소박한 언어에 심오한 의미가 담긴 많은 단편 서정시들을 발표했다. 1775년 11월 괴테는 바이마르로 가게 되었고, 약혼은 깨졌다.
유년시절
괴테는 그가 항상 가장 훌륭한 문화의 토양이라고 찬양하던 중산층 출신이었다.
북독일 혈통의 부친 요한 카스파르 괴테는 은퇴한 법률가로서 교양있고 여유있는 생활을 누렸다. 요한은 이탈리아 여행도 다녔고 운치있게 꾸며진 집에는 자료가 풍부한 서재와 화랑을 갖추었다. 프랑크푸르트 시장의 딸이었던 모친 카타리네 엘리자베트 텍스토는 자유도시 프랑크푸르트의 귀족계급과의 귀한 교분을 아들에게 터주었다. 즉 괴테는 자신의 혈통에서 이미 북독일의 지적이고 도덕적인 엄격성과 남독일의 자유분방한 예술적 감수성이라는 상반되는 경향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
8명의 형제 가운데서 맏이인 그와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만이 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괴테는 자서전인 〈시와 진실 Dichtung und Wahrheit〉에서 행복했던 어린시절의 기억들을 회상했다. 여기에는 하나뿐인 여동생 코르넬리아와의 사이에 일어났던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들이 날카로운 심리적 통찰력으로 그려져 있으며, 그밖에도 술집처녀 그레트헨과의 열렬한 사랑과 그후의 도피, 7년전쟁(1756~63) 때 프랑스의 점령으로 인한 삶에 대한 시야의 확대, 요제프 2세의 대관식, 경건파의 열렬한 종교적 활동의 체험이 실려 있다.
특히 그는 경건파 신앙의 체험으로 사순절 의식에서 F.G. 클롭슈토크의 〈메시아 Messias〉를 낭송하게 되었으며, 요제프에 관한 서사시적 산문과 그리스도의 지옥강림에 관한 시를 쓰기도 했다.
한편 프랑스군이 본토극단을 데려와 공연을 하자 일찍이 할머니가 선물한 인형극 세트로 인해 관심을 갖기 시작한 연극에 대한 열정이 불붙었고, 프랑스 극작가 라신에 대한 지속적인 열광이 싹텄다. 괴테가 영국풍을 좋아하게 된 것은 리즈 출신의 젊은 의류상인과의 우정에서 시작된 것인데, 그의 누이동생 코르넬리아는 그 상인과 열렬한 사랑에 빠졌다.
이에 대한 괴테의 반응은 4명의 형제가 각기 다른 언어로 주고받는 편지 형식의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괴테 자신은 영국의 영향이 지배적이었던 괴팅겐대학에서 고전을 읽기 원했으나 1765년 10월에 부친의 모교인 라이프치히대학으로 보내져 법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후에 〈파우스트〉에서 '작은 파리'라고 부른 라이프치히의 우아한 사교계에서 시골뜨기 괴테는 물을 떠난 물고기와도 같았다.
당시의 연극계는 평론가 J.C. 고체트의 프랑스풍 영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우화와 송가의 작가 C.F. 겔러트는 에드워드 영, 로렌스 스턴, 새뮤얼 리처드슨 등의 새로운 감각을 소개했다.
괴테는 겔러트의 강의를 '독일 도덕문화의 토대'라고 극찬했고 그에게서 서한문체와 사회규범에 관한 귀중한 지식을 얻었다. 겔러트의 문학적 영향은 C.M. 빌란트의 소설·서사시 등에 나타난 강건한 우아함과 풍자적인 명철함으로 더욱 심화되었다.
괴테에게 빌란트의 작품을 소개한 사람은 유럽의 예술양식에 깊은 영향을 끼친 예술사가 J. J. 빙켈만의 친구이자 스승인 A.F. 외저였다
.
외저를 통해 괴테는 그리스 예술에 대한 애정을 갖게 되었으며 일생 동안 그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2가지, 즉 자신의 눈을 사용하는 것과 자신이 하고자 하는 어떤 일에서건 본질을 터득하는 것을 배웠다. 또한 시인이자 비평가인 J.G. 헤르더가 '북독일의 피렌체'라 칭송했던 드레스덴을 여행한 후 괴테는 고대 조각 및 로코코 건축양식의 장려함에 대한 시야를 넓히게 되었다.
한편 음악에 대한 수업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작곡가 J.A. 힐러의 지휘로 새로운 18세기 협주곡의 훌륭한 공연들이 행해졌는데 이것이 바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게반트하우스 콘서트가 되었다.
라이프치히 시기의 괴테의 문학적 수확은 당시 유행하는 로코코풍의 노래책으로서 여기에는 그리스 시인 아나크레온 시풍(詩風)으로 사랑과 술을 찬미한 노래들이 실려 있다. 〈라이프치히 가곡집 Das Leipziger Liederbuch〉이라는 제목의 이 노래책은 괴테가 점심을 먹던 한 선술집주인의 딸에게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아네테 시집 Das Buch Annette〉(1766~67)과 〈신시집 Neue Lieder〉도 진정한 열정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문학소품들에 관해 괴테는 '위대한 고백의 단편들'이라고 하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이런 시작(詩作)에서와 같은 음조가 알렉산더격(프랑스의 알렉상드랭을 본뜬 12음절 시행)의 시 작품 〈애인의 변덕 Laune des Verliebten〉과 좀더 우울한 소극(笑劇) 〈공범들 Die Mitschuldigen〉에서도 드러난다.
이때부터 로코코풍은 괴테 작품세계의 한 요소가 되어 필요한 경우 언제라도 쓰여졌다.
그것은 〈토르크바토 타소 Torqvato Tasso〉와 〈친화력 Die Wahlverwandtschaften〉의 배경에서도 나타나는데, 괴테는 〈아나크레온의 무덤 Anakreons Grab〉(1806)에서 이 로코코풍의 매력에 대단한 찬사를 보낸 데 이어 〈서동시집 Westöstlicher Divan〉에서는 이 양식을 동방의 요소와 융합시켰다.
바이마르 성숙기
바이마르 여행은 괴테의 삶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그는 바이마르 영주 카를 아우구스트 공(公)의 초청으로 그곳에 가서, 1832년 3월 22일 생을 마칠 때까지 살았다. 이때부터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이 그의 주요 관심사가 되었으며, 이를 위해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 Wilhelm Meisters Lehrjahre〉(1824)에는 오랜 숙련기간이 묘사되어 있다(→ 교양소설). 또한 아우구스트 공의 요청으로 많은 공직을 수행하면서 신임을 얻었고, 마침내 소공국의 없어서는 안될 각료로서 광산 검열, 관개시설 감독, 심지어 군대제복지급안을 계획하는 일까지도 도맡아 했다.
괴테는 또한 궁정 관리의 부인 샤를로테 폰 슈타인을 만나 정열적 헌신을 통해서 성숙해갔다.
그녀는 지적 차원에서 그가 만난 최초의 여성으로 괴테의 삶에 미친 지대한 영향은 그녀에게 보낸 1,500통 이상의 편지에서 파악할 수 있다. 그녀는 괴테의 삶을 인도하는 기둥이 되어 그에게 사회생활의 미덕을 가르쳤고, 세세한 일상생활에까지 자극을 주었으며, 그의 상상력과 소망을 사로잡았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예절과 관습적인 미덕에 의해 지배되는 관계를 견지했다.
그에게 누이 이상은 결코 되지 않으려 했고 그녀가 괴테에게 요구한 승화의 감정은 "왜 당신은 우리에게 그윽한 눈길을 던집니까?"(Warum gabst du uns die tiefen Blicke?)라는 정신분석적인 탐색의 말에서부터 오레스테스의 고통 및 이피게니에에 의한 위안 등의 통찰을 가능하게 했다.
이밖에도 이러한 통찰 속에서 씌어진 작품이 바로 단막극 〈남매 Die Geschwister〉(1776)이다.
〈달에게 An den Mond〉·〈잔 Der Becher〉·〈사냥꾼의 저녁노래 Jägers Abendlied〉·〈바다여행 Seefahrt〉 등 유명하고 사랑받는 서정시들을 비롯해서 2편의 〈나그네의 밤노래 Wandrers Nachtlieder〉와 같은 뛰어난 작품들은 모두 슈타인 부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 시들과 이 시기의 다른 시들 〈인간성의 한계 Grenzen der Menschheit〉·〈물 위의 정령들의 합창 Gesang der Geister über den Wassern〉·〈신적인 것 Das Göttliche〉·〈겨울 하르츠 기행 Harzreise im Winter〉·〈일메나우 Ilmenau〉 등에서 자연은 더이상 인간정신의 단순한 반영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무엇, 인간에게 무관심하며 거의 적대적이기까지 한 한 개념 내지 힘의 응결로 나타난다.
이 새로운 '객관성'에 관한 인식은 괴테로 하여금 더욱 과학에 몰두하게 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워낙 다면적인 그는 원하기만 하면 〈툴레의 왕 Der König in Thule〉(1774)의 기분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고, 무의식적인 힘의 투영으로서의 자연을 그린 〈마왕 Erlkönig〉이나 〈어부 Der Fischer〉 같은 발라드를 쓰고 많은 종류의 징슈필(Singspiele)과 뮤지컬을 만들어서 이것들로 궁정에서 여흥을 베풀기도 했다.
〈감상주의의 승리 Der Triumph der Empfindsamkeit〉라는 논문에서는 바로 자신이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주는 감수성을 풍자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바이마르에서의 공직 참여나 슈타인 부인과의 사랑이 〈에그몬트〉·〈파우스트〉·〈타소〉·〈이피게니에 Iphigenie〉 등의 대작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안정과 휴식에는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1786년 9월 남몰래 쫓기듯 서둘러 오랫동안 미루어온 이탈리아 여행에 나섰다.
이 도피는 죽음인 동시에 재탄생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인간과 예술가로서 새로운 부활을 모색하며 의도적으로 자신의 감성적·문학적·문화적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차단했다(→ 인간주의).
한때 찬사를 보낸 고딕 양식의 우매함을 조소했고, 베로나에서는 줄리엣의 무덤보다는 박물관에 있는 그리스 묘석에 더욱 애착을 보였으며, 베네치아의 산마르코 성당이나 총독의 궁전보다는 팔라디오가 지은 교회들을 찬양했다(→ 고전주의). 아시시에서는 미네르바 신전에 대한 관심으로 중세적 번영을 완전히 무시했으며, 고대세계의 수도 로마에 도착하기를 고대하였으나, 그것조차도 대그리스(Magna Graecia)와 파이스툼의 사원들의 서막으로 간주하였다.
마찬가지로 그는 시칠리아 섬의 고전적 장려함도 호메로스 세계의 서막으로 간주하여, 마침내 이 고대세계를 빼어난 단편극 〈나우시카 Nausikaa〉(1789)에서 그려냈다.
그는 그리스의 고대양식에서 인간의 원형을 모색하고 발견했듯이 이 풍경들 속에서 그러한 개념을 식물에까지 넓게 조명했다. 이러한 추구는 그의 문학작품에서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유형을 드러내는 인물들의 창조와 보편적이고 초시간적이면서도 극히 개별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지는 주제, 엄격히 규제되면서도 개인적 정열의 울림을 싣고 있는 운문들로 이어졌다.
형식에 대한 이 새로운 개념은 이탈리아에서 개작한 4편의 희곡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
1790년에 출판된 〈단편 파우스트 Faust, Ein Fragment〉는 〈초고 파우스트〉의 개별적인 에피소드들을 극적인 단일성을 위해 결합하려는 시도라기보다는 작품이 궁극적으로 취하게 될 거대한 문화적 상징에의 진일보이다. 〈에그몬트〉는 실제로 운문작품은 아니지만, 밀도있는 언어의 짜임새 때문에 시극(詩劇)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마침내 그것이 음악으로 작곡되는 것은 점진적인 수렴과 주제들의 집약이 가져온 불가피한 결과라 하겠다.
이 작품에서는 개인적·정치적 문제들이 서로 혼합되어 있다. 괴테가 창조한 가장 사랑스러운 인물들인 에그몬트와 애인 클레르헨은 네덜란드 사람들의 순박한 독립심이 고양된 형태인 내적 자유를 구현한 인물들이다. 그리하여 마성적인 한 인간의 극적 묘사로 시작한 이 작품은 자유라는 이념 자체의 비극, 즉 타산이나 간계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물과 사건들의 예기치 못한 연계에 의해 다스려지는 자유의 숙명에 관한 비극이 된다.
〈토르크바토 타소〉에서는 운문에서나 가능할 정도로 밀도있는 언어들이 계속 이어진다.
괴테 자신도 이 작품에 지나칠 정도로 신경을 썼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시인, 즉 인간들의 평범한 의사소통수단을 매체로 하는 예술가에 관한 희곡으로는 걸맞는 양식이다. 여기서는 비극적 갈등 자체가 다양한 언어 양태에 대한 오해로부터 비롯되며, 여기서 벌어지는 감정적 충돌도 그러한 언어의 갈등에 의한 부수적인 것으로서 제시된다.
이 작품에서 외적 행동의 빈약함은 비판을 받았지만, 이는 "사소한 고민거리도 5분이 지나면 소포클레스에 필적할 만한 주제로 만들어버린다"는 '시적 특성'을 고려할 때 정당화될 수 있다.
타소를 무관심하거나 적대적이기보다는 그와 그의 작품을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사회에 둠으로써, 괴테는 시인과 세계 사이의 치유할 수 없는 '간극'을 한층 날카롭게 부각시켰다. 극도의 고통마저 불멸의 시로 바꿀 수 있다는 시인 타소의 새로운 인식조차도 그러한 균열을 메꾸지는 못했다.
그리스 로마의 고대세계에 접하면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은 〈타우리스의 이피게네이아 Iphigenie auf Tauris〉(1787)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놀라울 정도로 근대적이고 비(非)그리스적'이라는 실러의 평은 옳았다. 〈토르크바토 타소〉와 마찬가지로 작품도 의사소통의 문제, 즉 발설한 말의 예기치 못한 위력, 나타내는 것 만큼 감추는 언어의 이중적 양태, 진실의 반대가 명백한 거짓이라기보다는 자기 은닉이 되는 점 등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또한 이 작품은 자기 자신에 대한 신화를 자신의 무의식의 반영으로 인식함으로써 그 신화로부터 벗어나려는 인간의 노력을 다루며, 시야를 새로이 조정함으로써 현재의 인간을 구속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건들의 연쇄를 파기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본래 그리스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아테네 여신을 갑자기 출현시켜 작품의 결말을 이끌지만 괴테는 새로운 시각으로 화해로운 결론을 맺고 있다. 즉 그는 신탁의 말을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이 희곡은 그리스적 가치관과 그리스도교적 가치관을 종합한 것으로서 이피게니에와 디아나 여신을 동일시하여 육체적인 것을 정신적인 것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에서 18세기 인문주의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이탈리아 기행을 통한 서정시의 가장 큰 수확은 〈로마의 비가 Römische Elegíen〉(1788~89)이다.
조형적 아름다움과 대담한 관능을 표현하고 문화 유산에 대한 고양된 의식과 애욕적인 부드러움을 결합해 낸 점에서 이 이교도적이고 고도로 세련된 시들은 어떤 현대언어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이다. 만일 이 시들이 바이런의 〈돈 주안 Don Juan〉의 운율로 씌어졌더라면, 아주 저속한 것들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전적 이행연구는 이 시에 감추는 듯하면서도 드러내는 심미적 거리의 베일을 씌운다.
이 비가를 탄생시킨 장본인은 하급 공무원의 딸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이다. 괴테는 그녀에게 매혹되어, 결국 1788년 4월 바이마르로 돌아온 뒤 곧 동거하게 되었고 아이까지 몇 명 낳았다. 그러나 비순응주의자인 그가 사회관습인 결혼에 순응하게 된 것은 프랑스군의 침입으로 생명과 재산이 위협받던 1806년에 이르러서였다. 결혼식은 전쟁이 끝난 지 4년 뒤 바이마르 궁정에서 거행되었다.
첫번째 이탈리아 여행의 결과 괴테는 관심과 재능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화가는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절실하게 느꼈다.
로마의 화가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연습했으나, 그림을 통해서는 자신의 심오한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경지에 이를 수 없었고, 드문 경우를 빼고 많은 소묘들은 감수성있는 아마추어가 줄 수 있는 매력 이상의 것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시각예술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는 과학저서뿐만 아니라 문학작품에도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고, 많은 미학에 관한 글과 평론을 더욱 정확하게 만들었다. 그가 마침내 모든 공직을 포기하고 자신의 재능을 문학과 과학에 바치기로 결심한 것도 이 여행에서였다.
그러나 1790년의 2번째 이탈리아 방문은 실망만을 안겨주었고, 외부세계의 혁명적 사건들로 인한 불안감은 계속 깊어졌다.
〈베네치아의 경구 Epigramme Venedig〉(1790)는 이러한 불만을 반영하고 있다. 1792년 괴테는 아우구스트 공의 불운한 프랑스 원정 때 그를 수행했는데, 이때의 체험을 〈프랑스 종군기 Campagne in Frankreich〉(1792)와 〈마인츠 공방전 Belagerung von Mainz〉으로 남겼다.
그의 자유주의적 보수주의의 입장은 저지(低地) 독일어로 쓴 풍자시를 개작한 〈여우 라이네케 Reinecke Fuchs〉와 〈독일 피난민들의 대화 Unterhaltungen deutscher Ausgewanderten〉 및 희곡작품 〈대(大) 코프타 Der Gross-Cophta〉·〈흥분한 사람들 Die Aufgeregten〉·〈시민장군 Der Bürgergeneral〉에 나타난다.
이 3편의 희곡들은 예술적 가치보다는 독일 시인이 거의 쓰지 않는 정치문학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그러나 괴테가 프랑스 혁명이라는 엄청난 현실을 불멸의 시로 변화시킬 수 있었던 것은 혁명이 퇴조할 무렵에 이르러서였다.
프랑스 혁명은 피난민 문제를 호메로스풍으로 다룬 〈헤르만과 도로테아 Hermann und Dorothea〉의 배경이 되며, 〈서출(庶出)의 딸 Die Natürliche Tochter〉(1804)의 전체 구성을 지배한다.
3부작으로 계획되었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한 〈서출의 딸〉은 당대 최대 사건인 프랑스 혁명에 대한 괴테의 마지막 결산이었다. 그 형식적 완전함의 저변에는 혁명적 현상을 비롯해 자연적인 삶뿐 아니라 사회적·문화적 삶을 영속하는 데 있어 죽음과 파괴의 부정적 역할에 대한 깊은 우려가 깔려 있다.
괴테에 대한 평가
칼라일은 R.W. 에머슨에게 보낸 편지에서, "명랑하게 보이는 고상한 괴테가 자신의 내부에는 단테처럼 예언자적인 깊은 슬픔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괴테의 이미지를 평온한 낙천주의자에서 고통에 찬 회의주의자로 바꾸려는 많은 시도들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 쪽도 괴테를 정당하게 평가하기에는 부적절하며, 괴테는 시인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현인이라고 한 T.S. 엘리엇의 결론도 그리 적절하지 않다.
이처럼 괴테를 한마디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은, 그가 언어구사에 통달했기에 산문에서조차도 범인이 쉽게 통찰할 수 없는 이념을 표현하여 그의 글을 번역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의 베르테르조차도 삶의 현실은 양자택일로는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를 회의주의자라고 본다 하더라도 낙관적인 회의주의자였다. 한없이 깊은 심연을 응시하면서도 생명과 빛을 의식적으로 강조했다. 그는 모든 면에서 최대한의 삶을 살면서도 교양있는 미덕을 손상시키지는 않았다. 무의식적인 정신의 풍부함을 만끽하면서도 그 자발성을 파괴하지 않고 거기에 성찰의 빛을 부여하였다. 계몽주의의 아들답게 과학의 모험에 투신하면서도, 우주의 신비 앞에서는 언제나 경외심과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괴테는 어디에서도 자신의 사고체계를 형식화하지 않았다.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음을 인정하였으나, 형이상학의 과도함과 논리학적 장광설의 무익함에 대해서는 거부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또한 그는 획일적인 입장을 취하지는 않았다. 괴테는 진실은 타협이 아니라 상대적인 것을 포용하는 데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대화 Gespräche〉와 더불어 그의 지혜의 총결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경구 Maximen〉의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그 가운데에는 항상 반대되는 것을 보완할 수 있는 '짝'이 들어 있다.
그것들은 속담의 평범성과도 비슷한 무엇을 지니고 있으나, 그의 생각이 실제로 살면서 느낀 것이라는 점에서 그 평범성이란 앙드레 지드의 말대로 '비범한 평범성'이다. 그리고 실제로 괴테의 삶에는, 그의 모든 특별한 재능들에도 불구하고 비범한 평범성이 들어 있었다. 그 자신이 그 점을 '상징적'이라고 느끼고 일련의 자서전적 저서들을 통해 말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오만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누구보다도 범인이며 따라서 자신에게서 범인들이 그들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괴테는 금욕주의자도 신비주의자도 아니고, 성인이나 은자도 아니며, 돈 후안과 같은 호색한도 아니고 시인 중의 시인도 아니다. 다만 그는 '절제된 감성적 인간'의 지고한 단계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분투했던 것이다. 그것이 아마도 나폴레옹이 에르푸르트에서 그를 만난 뒤 "여기 인간다운 인간이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며 느낀 감정일 것이다.
괴테와 실러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뒤에 느낀 인간적·정신적 고독감은 뜻밖에도 실러를 만나면서 완화되었다.
괴테가 새로운 잡지 〈호렌 Die Horen〉(1795~97)에 기고를 요청하는 공식 청탁을 받아들인 데에 답하여, 실러는 오늘날 유명해진 1794년 8월 23일자 편지에서 놀라운 통찰력으로 괴테의 삶 전체를 요약하고 있다. 실러가 보기에 괴테는 순박한 시인의 화신이었으나 그 순박함이란 의식적인 것이었다. 감정이 성찰로 이행되고 그 성찰이 다시 감정으로 환원되는, 즉 정신의 개념이 다시금 오관의 지각으로 바꾸어지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대한 의식적 동조는 실러의 보다 추상적인 성찰방법과는 다른 것으로, 그러한 차이야말로 그들의 풍부하고 생산적인 교류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특히 서로 끊임없이 주고받은 편지들은 독일문학의 가장 위대한 시기의 이상과 업적에 관한 귀중한 논평일 뿐 아니라 예술적 창조의 과정에 대한 놀랄 만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이후 몇 년 동안 괴테가 쓴 작품들은 그들의 고전적 이상을 구체화하고 있다.
가장 애호되는 작품들 가운데 하나인 〈헤르만과 도로테아〉는 '내면에서부터 그리스인을 창작하려는' 그의 시도이며, 여기에서 그는 불순물이 제거된 순수한 인간성을 창조했다고 주장하였다. 등장인물들은 남녀 주인공들을 제외하고는(그들의 이름조차도 상징적이다) 자신의 고유한 이름이 없는 유형적 인물들로서, 평화와 가정과 가정적 미덕들을 수호한다.
그러나 괴테의 작품들에서 항상 그러하듯, 그들은 항상 확고한 존재들이 아니라 인간적·인도적 노력을 통해 끊임없이 발전할 필요가 있는 자들로 묘사된다.
파우스트와 트로이의 헬레나의 결합을 이교도와 그리스도교, 그리스와 독일의 융합으로 부각시킨 〈파우스트 2부 Faust Der Tragödie Zweiter Teil〉의 헬레나 막(幕)에서 괴테는 그리스 정신을 너무나도 성공적으로 그려낸 나머지, 비평가들은 만일 고전 그리스어로 번역된다면 그것은 아테네 희곡의 잃어버렸던 한 단편이라 해도 좋을 정도라고 했다.
미완성 서사시 〈아킬레스 Achilleis〉는 '자기 식으로 그리스인이 되려는' 그의 마지막 시도이다.
이 시기의 다른 작품들은, 점차 자연주의적이고 경향적인 것을 요구하는 세계에서, 문학의 유일한 희망은 상징적인 방책들의 도입으로 시적 세계를 밀봉하는 데 있다는 실러의 확신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1910년에 초판본이 발견된 〈빌헬름 마이스터의 연극적 사명 Wilhelm Meisters Theatralische Sendung〉(이 작품의 사본은 1910년에야 발견되었음)은 그 주제가 삶에 대한 소명으로까지 확대된다.
예술이 진실이나 도덕성의 시녀는 아닐지라도 더 나은 인간과 더 나은 시민으로 개선시키는 데에 특별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허구적인 사실주의는 이제 추상과 융합되어, 등장인물들의 성격묘사는 심리적으로 날카롭지만 전체적인 시적 의미에 종속되어 있다. 당대 사회를 그린 소설 속에 하프 연주자나 미뇽 같은 신비롭고 매혹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 것은 자신의 소설이 '철저히 상징적'이라고 한 괴테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듯하다.
한편 실러는 괴테가 〈파우스트〉를 계속 집필하도록 권유하였으며, 이 '이방인적 작품'을 고전주의 이상과 조화시키는 데 있어서의 난점, 즉 '이념'의 중요성을 미래 예술의 선행요건인 '극'의 요소와 결합시키는 데서 생기는 어려움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러한 문제점을 강조함으로써 실러는 〈파우스트〉에서 '천상의 서곡'의 철학적인 구조뿐만 아니라 '무대 전곡(前曲)'의 허구적 구조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한 의도를 나타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파우스트 제1부 Faust, Erster Teil〉(1808)를 연애소설로 보고 그 작가를 낭만주의자로 단정하는 것은, 그 단계에서는 아직 그레트헨 비극에 나타나는 참을 수 없는 비감이 서구인의 보다 광범한 비극 속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괴테와 실러는 그들의 예술과 문학의 이상을 전달하려고 한 잡지들(괴테의 〈프로필렌 Propyläen〉지는 실러의 〈호렌〉지를 본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의 실패를 교양없는 대중들의 무관심 탓으로 돌리고는, 로마 시인 마르티알리스풍(風)으로 쓴 400여 행의 신랄한 2행연구로 된 시 〈크세니엔 Xenien〉에서 실망을 나타냈다.
그들은 비방자에 대한 보다 더 적극적인 대응으로서 뛰어난 담시들을 썼다. 이렇게 쓴 〈보물파는 자 Der Schatzgräber〉·〈코린트의 신부(新婦) Die Braut von Korinth〉·〈마법사의 제자 Der Zauberlehrling〉는 자연이 아닌 인간이 부각되었다는 점에서 초기 시들과 다르다.
또한 성찰을 위한 '해롭지 않은' 마술이 의식적·역설적으로까지 도입되었다. 괴테는 서정적·서사적·극적 요소들이 혼합된 담시에서 그가 식물세계에서 발견한 식물의 원형(Urpflanze)과 유사한 시의 원형질(Urei)을 인식하게 되었다.
괴테와 낭만파와의 관계
1805년 실러가 죽자 괴테는 '자신의 존재의 반'을 잃었다고 슬퍼했으며 이 위대한 친구를 위해 〈실러의 조종(弔鐘)에 대한 발문 Epilog zu Schillers Glocke〉이라는 조사(弔詞)를 썼다.
당시의 정신적 고독감은 예나에서 번영한 낭만파와의 접촉으로 어느 정도 완화되었다(→ 예나 낭만파). 사실 이들 사이에는 공통점이 꽤 있었다. 그리스 문화를 찬양하는 책을 씀으로써 문필생활을 시작한 프리드리히 폰 슐레겔은 나아가 동양을 낭만주의 사상과 문학의 극치로 찬미했다.
한편 그의 형 빌헬름 슐레겔의 형식과 운율에 대한 깊은 관심도 괴테의 마음을 끌었다. 그러므로 괴테는, 〈빌헬름 마이스터〉에 대한 그들의 열광적인 찬사나 자신을 '이 세상 시의 부집정관'이라고 평한 노발리스의 극찬에 대해 무관심할 수 없었다.
또한 괴테는 옛 애인 막시밀리아네의 딸 베티나 브렌타노에게서도 자신의 천재성과 인본주의에 관해 좋은 반응을 얻었다.
그래서 베티나의 〈괴테와 한 소녀의 서한집 Briefwechsel Goethes mit einem Kinde〉(1835)은 그 진실성에 대한 의문은 차치하고라도, 독일문학의 애독서로 남아 있다. 괴테는 낭만파들을 형식의 미덕을 망각한 '억지 재간꾼'으로 비난했으며, 그들의 가톨릭적 경향, 맹목적인 중세찬미, 문학 장르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고 예술과 삶의 경계를 혼동하려는 시도를 개탄했으나, 그는 그들이 열광한 것들을 많이 받아들였고 심지어 고딕 건축양식에 대해서도 새로운 관심을 보였다.
그리하여 〈친화력〉에서는 '자연의 어두운 측면', 즉 화학적 세계에서 원소들이 서로 이끌려 화합물이 되듯 인간을 서로에게로 끌어당기게 하는 동물적·자기적(磁氣的) 친화력에 대한 그들의 몰두를 주제로 이용하고 있다.
그러나 이 소설은 자연적·초자연적 힘에 대한 미신적인 맹종이나, 도덕적 책임감에 대한 비인간적 포기를 변호하지는 않는다.
징후와 예감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 후에는 가차없는 파멸이 오며, 여주인공은 성인(聖人)에 가까운 체념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냉혹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결혼을 '불가능성의 결합'으로 그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문화의 시초이자 종말'로 존재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낭만파들은 사회적 행위와 예술형식에 대한 교훈을 얻었다. 서술자는 침착한 객관성으로 작품을 이끌어 나가고 있으며, 조형미·절제·균형 등의 고전적 가치들이 터무니없을 만큼 파격적인 주제를 뒷받침해 준다.
"낭만주의는 번역이다"라는 클레멘스 브렌타노의 선언대로, 낭만파들은 세계의 훌륭한 문학적 작품들을 번역·소개하기 시작했고, 세계문학(Weltliteratur)이란 괴테가 가장 중시하는 개념 중의 하나가 되었다.
괴테의 말을 빌자면 이 세계문학의 목표는 상호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문화를 진보시키는 것으로서, 이는 번역이나 비평(괴테가 세르비아 시를 독일인들에게 이해시키고자 한 것은 이 후자의 탁월한 예이다) 또는 상이한 문학적 전통들의 융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뛰어난 2편의 담시 〈신(神)과 인도의 무희 Der Gott und die Bajadere〉·〈천민 Paria〉과 2편의 절묘한 연작시집 〈서동시집〉(1819)·〈중국·독일의 계절과 시간 Chinesisch Deutsche Jahres und Tageszeiten〉(1830) 등은 동서양을 결합시키려는 탁월한 시도이다.
특히 〈서동시집〉은 부드럽고 유희적·관능적·냉소적이며, 지혜롭고 변덕스러운 사랑의 모든 측면을 다루고 있는데, 그 모든 것은 그가 페르시아 시의 '지배적 정열'이라고 일컬었던 지성·영혼·위트 등 정신적 자질에 의해 빛난다. 이 당시 그의 영감의 원천이 된 여성은 친구 폰 빌레머의 부인 마리안네로서, 아마도 그가 사랑했던 모든 여성들 중 가장 만족감을 주었던 그녀는 그와 정신적으로 깊이 공감한 나머지 〈서동시집〉의 시들 중 몇 편을 직접 창작하기도 했다.
마지막 10년
노시인의 세계에 관한 통찰력은 과거에 대한 조용한 성찰로만 나타나지는 않았다.
만년에 그는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 그가 살던 작은 도시 바이마르는 신·구 대륙으로부터의 순례자들의 끊임없는 행렬이 쇄도하는 성지가 되었다. 당시 방문객들은 그에게서 완고함이나 절제심보다는 오히려 부드러움, 이해심, 외부세계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 현재와 미래에 대한 개방된 마음가짐을 많이 엿볼 수 있었다. 이것은 〈빌헬름 마이스터의 편력시대 Wilhelm Meisters Wanderjahre〉(1821~29)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타난다.
이 소설에서는 사회적·기술적 진보에 관한 관심과, 옛 인문주의적 교양보다는 전문화된 현대에 좀더 부합되는 교육형태 및 이제는 더이상 유럽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세계에 대한 관심이 드러나 있다. 따라서 이 작품의 구성에 나타난 복잡한 주제는 미래의 나라인 아메리카로 이주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식민지 계획이다("아메리카여! 그대는 더욱 풍요롭구나!"). 빌헬름 마이스터는 삶에 대한 완전한 이해가 '수업시대'를 거친 후에 주어지지 않고 목표가 과정이 되고 과정이 목표가 되는 끊임없는 편력 끝에 온다는 진리를 강조하고 있다.
얼핏 보면 부제 〈체념의 사람들 Die Entsagenden〉은 기이하게도 그러한 의도적 편력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하다.
그러나 괴테에게 있어 체념은 단순히 현상에 대한 수동적 단념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삶 자체에 의해 부과된 한계, 즉 시간과 공간의 본질 및 이해관계와 잠재성의 갈등으로부터 오는 한계를 점차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 겉으로 드러나는 무정형성(無定形性)은 소설 제목의 2중성을 반영하고 있다. 이 작품은 두서없이 전개되며 이야기 사이사이에 끼어 있는 설화·일화·삽화·경구 등은 줄거리와는 거의 무관하나, 형식적인 시적 의미와 연관을 맺고 있다.
갈수록 상징화되어 가는 등장인물들처럼 이러한 잡다한 요소의 삽입은 인간의 체념상태의 모든 형태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는 각각의 개인이 아니라 수많은 등장인물의 집단이 이 '총체적 인간'을 나타내며, 따라서 작품의 원칙은 시간적으로 이어지는 것이라기보다 공간적으로 배열되는 것이다.
〈파우스트〉도 비정형적이라는 비판을 받긴 하나 오늘날의 비평 경향은 주로 작품의 '법칙성'의 발견에 집중되고 있다.
이 작품에는 서정적·서사적·극적·오페라적·발레적 요소들이 들어 있고, 테르차 리마(terza rima 三韻句法)를 거쳐 6음보3보격(六音步三步格) 시행에 이르기까지 알려진 거의 모든 율격들이 사용되며, 그리스 비극에서부터 중세의 신비극, 바로크적 알레고리극, 르네상스의 가면극, 코메디아 델라르테(Commedia dell'arte)와 '영국 무대의 무모함'을 거쳐 현대적 레뷰(revue:시사풍자극)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문체들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은 괴테가 일관된 형식을 창조하는 데 실패해서가 아니라 이 여러 형식들을 문화적 논평의 전달수단으로 만들기 위해 사려깊게 시도했다는 점을 암시하며 그가 이러한 형식에 부여한 내용도 그 점을 입증하고 있다.
〈파우스트〉의 1부는 사실적이고, 2부(1832년 괴테 사후에 처음 출판)는 상징적인데 모두 매우 다양한 문화요소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고전적·낭만적 몽환경'(이 장면의 1827년 초판본에서 인용한 듯)에서 헬레나에 대한 파우스트의 구혼이 그녀에게 압운시(押韻詩)의 생소한 매력을 가르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가 그레트헨을 유혹하는 것은 솔로몬의 노래로까지 거슬러올라가는 에로틱한 신비주의의 옛 전통에 바탕을 둔 것이다.
여기에서 파우스트 신화는 역사적인 가장행렬이 아니라 문화적 유산에 대한 진지하나 매우 역설적인 논평을 전달하는 매체이다. 16~18세기에서 시작되어 중세, 고대 그리스·로마를 거쳐 생명의 기원과 또 그 너머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의 영원한 원천인 '모체'(母體)에 이르기까지 파우스트의 '진행과정'은 역사적 시대의 순서를 무화시키면서, 서구문명에 공존하는 다양한 잠재적 가능성을 보여주는 드라마로써 제시된다.
파우스트는 괴테와는 달리 서로 상충되는 두 영혼과 끊임없이 탐구하는 정신을 지닌 서구인의 전형이다.
19세기에 파우스트의 끈질긴 분투는 그 자체로서도 훌륭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진보와 행동의 가치에 문득 회의하기 시작한 세대에게는 '온 인류의 행복과 재난'을 경험하려는 그의 노력에 따른 불운한 결과들이 어떤 대사의 인용할 만한 '메시지'보다도 더 크게 부각되며, 따라서 그의 궁극적인 '구원'은 의심스러워지게 된다. 그의 시선을 '더 높은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사랑조차도 그의 유한한 인간으로서의 지고의 노력이 맞이하는 역설적인 패배를 완화시키지는 못하는 것이다.
파우스트를 유혹하려는 메피스토의 갖은 노력을 물리친 그의 영혼을 높이 산다 하더라도 그가 빠져들었던 악은 용서될 수 없다. 이 '동요하는' 영혼의 방황에 동정적인 판결이 내려지기에 앞서 인간의 지혜와 고통, 인간의 순수와 경험이 결합된 중재가 필요하다. 사실 〈이피게니에〉를 빼고는 괴테의 거의 모든 작품들에서 화해로운 결말은 비극의 고통을 완전히 해소하고 있지 못하다.
비평가들은 괴테 자신의 '화해적 성격'을 언급함으로써 이러한 성격의 결말들을 변론하거나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리스 3부작 및 4부작 형식에 대한 괴테의 애착을 비롯하여 극 자체의 구조 속에 '화해'에 상응하는 요소가 존재한다 하더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 카타르시스는 관객에게만 유발되는 효과라고 하는 그의 비정통적 해석 역시 그러한 결말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음악의 카타르시스적 효과에 대한 괴테의 관심도 과소평가할 수 없다.
음악은 '우주의 열쇠'라고 한 낭만파 시인 노발리스와는 달리, 괴테는 음악의 이원적인 성격을 인식하였고 그 방탕한 힘에 대해서는 플라톤 만큼이나 회의적이었다. 그는 모든 예술에서 디오니소스적인 것을 아폴로적인 것으로 순화시키려고 했다. 1828년의 〈노벨레 Novelle〉에서 아이의 피리소리로 사자를 길들이는 것은(이 주제는 이미 1797년에 실러와 함께 의논한 것이었다) 이러한 노력을 가장 감동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괴테는 자신의 고통을 완화하기 위해 점차 더 음악에 몰두했다.
〈열정의 3부작 Trilogie der Leidenschaft〉(1823~27)은 18세 소녀에 대한 노인의 고통에 찬 사랑을 표현한 서정적 산물인 동시에 위안을 주고 삶을 부활시키는 '천상의 예술'인 음악의 카타르시스적 효과에 대한 찬사이기도 하다.
〈마술 피리 2부 Zauberflöte, Zweiter Teil〉는 모차르트의 〈마술 피리 Die Zauberflote〉를 찬양한 작품이다. 괴테는 모차르트가 〈파우스트〉의 이상적인 작곡가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의 만년에 얻은 위안 중 하나는 작곡가 K.F. 첼터와의 깊은 우정이었으며, 첼터의 수제자 청년 멘델스존은 괴테에게 음악에 대한 즐거움과 이해를 고취시켰다.
한때 괴테는 자신의 모든 문학작품보다 과학에 관한 저술을 더 높이 평가하기도 했다.
〈색채론 Farbenlehre〉(1805~10)에 대한 그의 애착은 부모가 문제아 자녀를 사랑하는 것과도 같은 데가 있었다. 뉴턴이 틀렸음을 입증하려는 그의 체계적인 시도에서 흠을 찾거나, 자신이 수학적으로 역부족이라고 믿는 고집이라든지, 빛은 하나이고 불가분이며 어떤 입자이론으로도 설명될 수 없다고 하는 주장에 신경질적으로 집착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반면, 심리학적 생리학 부문의 유용성은 연구서 〈안구에 맺힌 상(像) Entoptische Farben〉과 더불어 일반적으로 인정받았으며, 역사부문은 과학사 저술에서 선구적인 작업이었다.
식물학과 생물학에 관한 그의 연구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지 않다. 〈식물변태론 Metamorphose der Pflanzen〉(1790)은 모범적인 저술로, 거기 들어 있는 삽화들은 매우 훌륭하다.
식물의 모든 부분이 원형잎이 변형되어 형성된 것이라는 그의 주요명제는, 뿌리를 그의 범주 속에 넣지 않았기 때문에 연계가능영역을 비과학적으로 무시한 것으로 간주되고는 있으나, 어느 정도 인정을 받아 왔다. 반면 원형식물에 대한 그의 가설은 오늘날 정통 식물학자들 사이에서 더이상 주목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괴테가 처음은 아니라 해도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영장류에 있는 간악골을 발견(1784)한 것은 자연의 통일성과 연속성에 대해 끊임없이 탐구한 성과이며, 이로 인해 후에 다윈은 그를 선구자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과학 연구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뒷받침한 것은 발견 자체가 아니라 그 발견에 이르는 방법에 대한 통찰이었다.
괴테는 자연현상의 연구에 있어서의 정신적 과정을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단순한 관찰에서 이론의 형성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에서 과학자가 처하게 되는 위태로운 요소들에 그처럼 생생하게 대처하거나, 가장 간단한 지각행위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비의도적인 이론형성에도 그처럼 자기 인식이 가능한 사람은 드물었다. 그리고 그는 관찰현상에 대한 관찰자의 이러한 불가피한 개입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자아인식'을 계발하는 데에 있다는 사실을 설득력있게 말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정신작용에 대한 이처럼 철저한 인식은 그가 직접 기초를 세우고 이름붙인 학문인 형태학(形態學)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는 형태학을 암석·구름·색채·동물·식물 내지는 인간사회의 문화적 현상에 있어서의 형성과 변형에 대한 체계적 연구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학 연구가 결코 일반적으로 형태를 분석한 다음 수학적 용어로 전환시킴으로써 예측과 제어에 대한 측정치를 얻는 물량적 과학을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견해와는 반대로 괴테는 분석에 반대하지 않았으며, 그가 좋아하는 격언의 하나는 분석과 종합은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듯이 자연스럽게 교체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물리학에 대해 반대한 전적인 이유는 이 학문이 과학에서 절대적인 주도권을 독점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그가 지향하는 목표는 자연의 모든 질적 현상을 정립하는 데 있어 자연을 이해하고 인간적으로 보완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모든 학문의 화합을, 모든 유형의 방법과 정신을 조화시키는 것을 진정으로 원했다.
전문화의 불가피한 결과인 학문의 배타적 경향에 대해 미적인 동시에 과학적인 타개책을 찾으려는 이러한 노력은 식물과 동물의 변태에 관한 2편의 비가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여기에서 괴테는 정신이 인식한 것을 상상력과 감정에 도입하려 했다. 이 비가들은 결국 철학적 연작시 〈신과 세계 Gott und Welt〉로 연결되었다. 괴테는 정통 그리스도교도는 아니었지만, 19세기 비평가들의 생각처럼 완전한 이교도도 아니었다. 세계를 창조한 후 신은 더이상 세계운행에 관여하지 않는다는 이신론적(理神論的) 개념을 거부하였고, 오히려 스피노자의 범신론(汎神論)에 공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의 언어가 부단히 나타내고 있듯이 그는 성서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교 전통의 계승자로 남았다. 이러한 그리스도교적 중심으로부터 그는 모든 타종교들에 대해 공감어린 이해를 가지고 그것들의 개별적인 우수성을 인정하면서도 그 공통된 근본이념을 추구했으며, 그것들을 원형종교의 다양한 표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본질적으로 형태론적인 그의 정신적 기질을 나타내고 있다.
만유재신설(萬有在神說 Panentheism)은 내재적인 동시에 초월적인 신성(神性)에 대한 괴테의 믿음을 나타내는 정확한 용어일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어느 한 가지 사고방식에 가두기를 거부하여, 시인으로서는 다신론자이고 과학자로서는 범신론자라고 말했고, 도덕적 존재로서의 자신이 개인적인 신을 필요로 할 때는 "그 점도 역시 고려되었다"라고 하였다.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라는 성서 구절을 그는 그렇게 해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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