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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편의 詩

연인에게로 가는 길 / 헤르만 헤세

by 바닷가소나무 2018. 1. 17.


여인에게로 가는


                          -  헤르만 헤세 -

 

아침은 신선한 눈을 뜨고

세상은 이슬에 취하여 반짝인다.

금빛으로 그를 감싸고

생생한 빛을 향하여.

 

나는 숲속을 거닐며

재빠른 아침과 발을 맞추어

열심히 걸음을 재촉한다.

아침이 나를 아우처럼 동행시킨다.

 

누런 보리밭에

뜨겁게 드리운 대낮이

쉼 없이 길을 재촉하는

나를 바랍보고 있다.

 

조용한 저녁이 오면

나는 목적지에 닿으리라.

대낮이 그렇듯이

귀여운 이여,

너의 가슴에 타 버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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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출생:1877년 07월 02일


사망:1962년 08월 09일


국적: 독일.스위스


대표작 : 수레바퀴아래서, 데미안, 유리알 유희



성장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인간의 내면에 공존하는 양면성을 다룬 작품을 선보였으며, 동양의 철학 사상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곧 세계이다. 태어나려고 하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데미안》의 한 구절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소설 구절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데미안》의 작가 헤르만 헤세는 '성장에 대한 대담하고 관통하는 듯한 묘사, 휴머니즘적 이상과 고도의 스타일에 대한 전범이 되는,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글쓰기'라는 한림원의 노벨 문학상 수여 사유처럼, 청춘의 고뇌와 휴머니즘을 표현한 대표적인 작가이다.

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는 1877년 7월 2일 남부 독일 뷔르템베르크 칼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요하네스 헤세는 개신교 목사였고, 어머니 마리 군데르트는 슈투트가르트의 유서 깊은 신학자 집안 출신이었다. 마리 군데르트는 두 번째 결혼이었는데, 인도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교육을 받고, 영국인 선교사와 결혼해 인도에서 생활하다 남편이 죽은 후 칼프로 돌아왔다. 그 후 의학 공부를 하고, 칼프의 실업고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등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어머니 마리는 헤르만에게 평생의 여성상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헤세가 4세 때 아버지가 바젤로 발령받으면서 가족과 함께 이주해 약 5년간 그곳에서 살았다. 기운이 넘치는 악동이었던 그는 7세 때 바젤의 선교사들이 운영하는 기숙사제 초등학교에 들어갔으나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부모는 그의 기질을 억누르는 학교에 만족해했다고 한다. 9세 때 외할머니를 잃고 쓸쓸해하던 외할아버지의 요청으로 가족은 다시 칼프로 이주했다. 헤르만은 조용한 작은 시골 마을 칼프에서 뛰놀고, 신학자로서 거대한 서가를 가지고 있던 외할아버지의 집을 드나들며 자랐다. 외할아버지와 서가는 헤르만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고, 후일의 작품에도 이따금 자전적 요소로 등장하곤 한다.


13세 때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들어갔는데, 역시 속박이 심한 기숙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이때 어린 나이였음에도 "시인 말고는 그 어떤 것도 되고 싶지 않다."라고 결심했다고 한다. 신학교 생활을 하면서 헤세는 방황을 거듭했다. 탈출 소동을 벌이고, 신경쇠약에 걸리고, 자살 시도까지 한 것이다.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다가 다시 고등학교에 들어갔으나 1년도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공장 견습공, 서점 직원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서점에서 일하면서 그는 책의 세계에 빠져들었고, 특히 낭만주의 문학에 심취했다. 여가 시간에 시와 글을 썼으며, 1899년 22세 때 첫 시집 《낭만적인 노래》를 자비 출판했다. 또한 같은 해에 헤세와 서신을 나누던 헬레네 보이크트의 남편 오이겐 디더리히스라는 출판업자에 의해 산문집 《자정 이후의 한 시간》이 출판되었고, 릴케의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 권의 책은 거의 판매가 되지 않았다. 이후 헤세는 바젤로 옮겨가 고서점에서 일하면서 시를 발표했다. 1904년에는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가 출간되면서 작가로서 성공을 거둔다. 이 작품은 문학적 재능을 갖춘 청년 페터가 도회지의 대학으로 진학했다가 도시 문명의 허위를 깨닫고 자연의 삶을 찾아 다시 돌아온다는 성장소설이다. 젊은 시절 헤세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으며, 그의 많은 작품에서 나타나는 개인의 개성과 현실과의 균형 찾기, 자연에 대한 동경, 젊은 예술가의 고뇌 등이 그려져 있다.


1904년, 헤세는 9세 연상의 피아니스트 마리아 베르누이와 결혼했고, 스위스 접경 지역의 가이엔호펜이라는 작은 마을에 정착했다. 이곳에서 헤세는 장편소설 《수레바퀴 아래서》, 《게르트루트》를 비롯해 단편소설, 시, 에세이 등을 쓰며 활발히 작품 활동을 했다. 《수레바퀴 아래서》에서는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한 고독한 소년의, 《게르트루트》에서는 예술가의 내면을 탐구하는 등 초기 작품에서는 역시 자전적인 요소가 강하게 드러난다.


헤르만 헤세가 사용하던 타자기

                       

가이엔호펜에서 헤세는 마리아와의 사이에서 아들 셋을 낳고 안락하고 평화로운 나날을 보낸다. 그러나 헤세는 그 안락한 생활에 권태를 느끼고 만족하지 못해 방황을 거듭했다. 헤세는 책임감 있는 가장과 괴팍한 작가로서의 삶 양쪽을 오갔고, 남편의 계속 바뀌는 태도에 지친 마리아와의 사이도 점점 벌어졌다. 1911년, 헤세는 친구인 화가 슈투르체네거와 함께 인도와 스리랑카 등지를 여행했고, 여행에서 돌아온 후 셋째 아들이 태어났음에도 다시 유럽 여행을 떠났다. 결혼 생활은 완전히 파탄이 났고, 그는 이런 상황을 《로스할데》라는 작품에 그렸다. 그는 예술가에게 과연 결혼 생활을 할 자질이 있는가라는 문제의식에서 이 글을 썼다고 밝혔다. 또한 인도 여행은 《싯다르타》에 반영되었다.


1914년 8월, 독일이 러시아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전 세계가 전쟁의 포화에 휩싸였으며, 민족주의, 군국주의가 독일을 휩쓸었다. 인도주의자, 평화주의자였던 헤세로서는 이런 식의 극단적인 애국주의에 동조할 수 없었고, 독일 국민에게 평화를 호소하는 글을 스위스 〈신취리히 신문〉에 발표했다. 그러나 이 평화주의적 반전론(反戰論)을 받아들이지 못한 독일인들에게 매국노, 반역자라는 비난을 받았다. 전쟁 기간에는 독일에서 헤세의 글을 발표할 통로가 일체 막혔고, 그는 스위스로 건너가 전쟁포로 구호소에서 일을 도왔다. 이 시기에 아버지의 죽음과 아들의 투병, 아내의 정신병 등 고난이 이어졌고, 헤세는 신경쇠약에 걸려 카를 융의 제자 J. B. 랑 박사에게 정신분석을 받았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작풍에도 많은 변화를 주었고, 그 변화는 1919년 대표작 《데미안》으로 나타난다. 소년의 고뇌와 자기 인식을 탐구하는 과정을 그린 이 성장소설은 제1차 세계대전 후 혼란과 우울에 빠진 독일 국민에게 큰 영향을 끼치며 유럽 전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독일에서 글을 발표할 수 없었던 헤세는 당초 이 작품을 '에밀 싱클레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다가 이 작품이 신인 작가에게 수여하는 폰타네상을 수상하게 되자 진짜 작가가 자신임을 밝히고 상을 반환했다.

1919년 독일에서 발행된 《데미안》 초판 표지

헤세는 전쟁이 끝난 후 가족을 떠나 스위스 남부 루가노 호반의 작은 마을 몬타뇰라에서 지냈다. 이곳에서 〈클라인과 바그너〉,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싯다르타》 등을 썼다. 《싯다르타》는 한 청년이 자기실현을 하는 철학적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동서양의 철학이 결합되어 있다.

몬타뇰라에 있는 헤르만 헤세 박물관

수채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1920년에 첫 개인 전시회를 연 이후 파리, 마드리드, 뉴욕, 도쿄, 몬트리올, 함부르크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제2차 세계대전으로 생활에 위협을 받던 시기에는 그림을 팔아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1923년, 아내 마리아와 이혼하고 루트 벵어와 두 번째 결혼을 했으나 이 결혼 생활도 4년 만에 끝이 났다. 1931년에 니논 돌빈과 세 번째 결혼을 한 후 헤세는 비로소 안정적인 결혼 생활을 영위하게 된다.


종전 이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헤세는 물질 과잉의 현대 문명사회에 대한 비판적 견지를 담은 초현실주의 작품 《황야의 늑대》, 두 인물의 교류를 통해 지성과 감정, 종교와 예술 등의 대립을 다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지와 사랑》)를 썼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히틀러의 광란이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을 잠식하자 헤세는 인간의 정신적 산물을 적극적으로 보존하는 유토피아를 그린 장편소설 《유리알 유희》를 쓰면서 견뎠다. 이 작품은 1943년 스위스에서 출간되었고, 독일에서는 전쟁이 끝나고 나서야 출간되었다. 철학, 역사, 수학, 음악, 문학, 논리학 등 광범위한 지적 유희를 토대로 한 이 작품은 유럽 지식인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헤세의 노벨 문학상 수상에 기여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헤세는 전후 독일, 냉전 체제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 정부에 대한 비판을 계속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로부터 수많은 협박 편지를 받았다. 그러나 헤세는 어떤 정치적 입장도 표방하지 않았고, 몬타뇰라의 집에서 칩거 생활을 했다. 새로운 작품은 더 이상 쓰지 않았지만 지난 50년간 발표했던 시들을 모아 시 전집을 냈으며, 서평 등을 통해 새로운 젊은 작가들을 발굴했다.


1962년 8월 9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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