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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편의 詩

오늘 / 칼라일

by 바닷가소나무 2018. 1. 1.

오늘 

     - 칼라일 -

여기에 또 다른

희망찬 새 날이 밝아온다.

그대는 이 날을

헛되이 흘려보내려 하는가?

 

우리는 시간을 느끼지만

누구도 그 실체를 본 사람은 없다.

시간은 우리가 자칫

딴 짓을 하는 동안

순식간에 저만치 도망쳐 버린다.

 

오늘 또 다른

새 날이 밝아왔다.

 

설마 그대는 이 날을

헛되이 흘려보내려 하는 것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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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일

다른 표기 언어 Thomas Carlyle



출생1795. 12. 4, 스코틀랜드 덤프리스셔 에클페칸
사망1881. 2. 5, 런던
국적 영국

요약: 칼라일은 에든버러대학교에 진학하여 폭넓은 독서로 지식을 쌓았다. 수학에 소질이 있는 그는 수학 교사가 되었으나,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교사직을 포기했다. 그가 가장 좋아한 것은 독일 문학이었다. 특히 괴테를 숭배해 1824년에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를 번역하여 출판했다.
칼라일은 생활고에 시달리면서도 야심적인 역사책 <프랑스 혁명>을 1837년에 발표하여 진지한 찬사와 대중적 성공을 얻었다. 역사를 ‘신의 경전’으로 보는 견해에 충실한 칼라일은 프랑스 혁명을 군주와 귀족계급의 어리석음과 이기주의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으로 간주했다. 1857년에 칼라일은 그의 또 다른 영웅인 프리드리히 대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해 <프리드리히 대왕이라 불리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를 발표했다.

칼라일(Thomas Carlyle)

영국 비평가 겸 역사가. 대자연은 신의 의복이고 모든 상징·형식·제도는 가공의 존재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경험론철학과 공리주의에 도전했다.

개요

주요저서로는 3권으로 이루어진 〈프랑스 혁명 The French Revolution〉(1837)·〈영웅숭배론 on Heroes, Hero-Worship, and the Heroic in History〉(1841), 6권으로 이루어진 〈프리드리히 대왕이라 불리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 The History of Friedrich II of Prussia, Called Frederick the Great〉(1858~65) 등이 있다.

젊은시절

칼라일은 제임스 칼라일의 둘째 아들이자, 그의 2번째 결혼에서 얻은 맏아들으로 태어났다.

제임스 칼라일의 직업은 석공이었지만 나중에 영세농이 되었다. 제임스는 확고한 신념을 지닌 칼뱅교도로서, 그의 성격과 생활방식은 아들에게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주었다. 칼라일은 어머니만이 아니라 8명의 형제 자매한테도 헌신적이었고, 가족에 대한 깊은 애정은 변함이 없었다.

토머스는 에클페칸에서 시골학교에 다닌 뒤 1805년에 애넌 아카데미로 보내졌지만, 이곳에서 급우들에게 심한 시달림을 받은 게 분명하다.

나중에 그는 에든버러대학교에 진학하여(1809) 폭넓은 독서로 지식을 쌓았지만, 엄밀한 계통을 밟아서 학문에 정진하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그를 성직자로 만들 생각이었지만 토머스는 그 직업에 점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수학에 소질이 있는 그는 1814년에 애넌에서 수학 교사 자리를 얻었다. 1816년에는 커콜디에 있는 다른 학교로 옮겼는데, 스코틀랜드의 목사이며 신비론자인 에드워드 어빙이 이 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다.

어빙은 칼라일이 깊은 존경과 애정을 바친 몇 사람 중 한 사람이 되었다. 칼라일은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어빙이 아니었다면, 나는 인간과 인간의 영적 교감이 무엇인지 끝내 알지 못했을 것이다." 두 사람의 우정은 어빙이 1822년에 런던으로 옮겨 설교자로 명성을 얻은 뒤에도 계속되었다.

그후 몇 년 동안은 칼라일에게 힘겨운 시절이었다.

가르치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아 결국 교사직을 포기했다. 1819년 12월에 그는 법률을 공부하러 에든버러대학교로 돌아갔고, 이곳에서 인생의 어떤 의미도 확신하지 못한 채 3년 동안 외롭고 비참한 날들을 보냈다. 결국 그는 성직자가 되겠다는 생각을 포기했다. 그는 가정교사로도 일했고 언론계에도 잠시 종사했지만 여전히 가난하고 외로웠으며 격렬한 정신적 갈등을 겪었다. 1821년쯤에 그는 일종의 개종을 체험했다. 몇 년 뒤 그는 〈의상철학(衣裳哲學) Sartor Resartus〉에서 이 개종을 소설화했다.

이 개종의 특징은 그를 지배한 생각이 부정적(신에 대한 사랑이 아니라 악마에 대한 증오)이었다는 점이다. 그가 모든 것을 정말로 책에 묘사한 대로 체험했는지는 의심스럽지만, 이런 격렬함은 분명 고통받고 반항적인 칼라일 정신의 특징이다. 이 비참한 몇 년 동안 그는 독일을 진지하게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가 가장 감탄하고 좋아한 것은 언제나 독일 문학이었다. 특히 괴테를 가장 숭배했고 1824년에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 시대 Wilhelm Meister? Apprenticeship〉를 번역하여 출판했다.

한편 에든버러와 던켈드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잠깐씩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방랑생활을 했다.

결혼

1826년 10월 17일에 칼라일은 해딩턴에 사는 유복한 의사의 딸로 지적이고 매력적이지만 약간 변덕스러운 제인 웰시와 결혼했다.

웰시는 어빙의 제자였고 칼라일과는 5년 동안 사귄 사이였다. 그들을 괴롭힌 망설임과 경제적 근심은 서로 나눈 편지에 기록되어 있다. 평소에는 그토록 오만한 칼라일이 미래의 아내에게 구혼할 때는 나약하고 간청하는 말투를 자주 쓴 것이 흥미롭다. 연애시절에는 이처럼 조심스러운 애인이었음에도 결혼한 뒤에는 제멋대로이고 까다로우며 화를 잘 내는 남편이 되었다. 그들 부부는 서로에게 강한 애정을 품고 있었으나 결혼생활은 말다툼과 오해로 얼룩져 있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칼라일이 성불구자라고 믿었다.

결혼초에 칼라일 부부는 주로 덤프리스셔 주의 크레이겐퍼툭에서 살았고, 칼라일은 〈에든버러 리뷰 Edinburgh Review〉에 글을 기고하고 〈의상철학〉을 썼다. 처음에는 책을 출판해줄 출판사를 찾기가 무척 어려웠으나 결국 큰 인기를 얻고 대성공을 거두었다. 신랄함과 익살이 뒤섞인 이 책은 자서전과 독일 철학의 환상적인 잡탕이었다.

이 책의 주제는 지금까지 인간의 가장 깊은 확신을 주조한 지적인 틀은 이제 죽었고 시대에 맞는 새로운 틀을 찾아야 하지만, 이 새로운 종교 체계의 지적인 내용은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저자는 "새로운 신화체계, 새로운 표현수단과 옷으로 종교의 '신성한 정신'을 표현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그 새로운 옷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는 명쾌하게 밝히지 않는다.

런던 시절

칼라일(Thomas Carlyle)

1854년 칼라일의 모습

칼라일은 원하는 일자리를 얻지 못하자 1834년에 아내와 함께 런던으로 이사하여 체인로 가에 정착했다.

1년이 넘도록 글을 썼으나 한푼도 벌지 못한 그는 저축해둔 돈이 바닥 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타협을 거부하고 야심적인 역사책 〈프랑스 혁명〉을 쓰기 시작했다. 그가 일부 완성한 원고를 J. S. 에게 빌려주었다가 화재가 나는 바람에 모두 불타버린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 이 사고가 일어난 뒤에 칼라일은 너그럽고 쾌활한 투로 밀에게 편지를 썼는데, 그의 야심, 성공적인 문필생활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었던 그의 형편, 궁핍, 헛수고가 되어버린 몇 개월 동안의 작업, 이제 버릇이 된 우울증, 걸핏하면 화를 내는 성급한 성격 등을 고려하면 이것은 정말 주목할 만한 일이다.

사실 그는 사소한 괴로움보다는 오히려 크고 끔찍한 시련을 더 쉽게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욕구불만에 따른 습관적인 우울증은 그의 불운이 그 자신의 비극적인 인생관에 걸맞을 만큼 심각하지 않다는 사실 때문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인생에 부족한 신의 드라마가 가장 뚜렷이 드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제를 골라 집중적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에서 위안을 찾았다.

프랑스 혁명에 관한 책은 아마 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일 것이다. 원고를 잃은 뒤 그는 맹렬히 그 원고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원고는 1837년초에 완성되었고 발표되자마자 진지한 찬사와 대중적 성공을 얻었으며, 사방에서 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이리하여 경제적 어려움은 해결되었다.

역사를 '신의 경전'으로 보는 견해에 충실한 칼라일은 프랑스 혁명을 군주와 귀족계급의 어리석음과 이기주의에 대한 필연적인 심판으로 간주했다.

이 단순한 견해는 방대한 양의 자세한 증거 자료와 때로는 뛰어난 인물묘사로 뒷받침되었다. 다음의 발췌문은 비틀리고 열렬하며 비관적이고, 때로는 구어적 표현을 사용하고 때로는 익살스럽고 때로는 섬뜩할 만큼 무자비한 그의 산문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이다.

"…… 위엄 있는 의회가 대형 천막을 쳤다.

불화가 천막 주위에 끝없이 크고 검은 장막을 드리운다. 천막은 끝없이 깊은 심연의 흔들리는 바닥 위에 서 있다. 천막 안에서는 계속 왁자지껄한 소동이 벌어진다. 천막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시간과 영원과 무한한 공간이다. 의회는 그것이 할 수 있는 일, 하도록 맡겨진 일을 한다."(제2부 제3권 제3절) 많은 독자들은 이 극적인 서술에 전율했지만, 그들이 칼라일의 예언적인 열변 및 그 열변과 당시 상황의 관련성에 당황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차티스트 운동 Chartism〉(1840)에서 그는 종래의 경제이론에 대한 신랄한 반대자로 등장하지만, 이 책에는 급진적·진보적인 요소와 반동적인 요소가 기묘하게 몽롱해진 상태로 뒤섞여 있었다.

〈영웅숭배론〉(1841)의 출판과 더불어 힘, 특히 종교적 사명에 대한 확신과 결합한 힘을 숭배하는 태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가 이 책에서 논한 영웅들은 신(이교의 신화), 예언자(마호메트), 시인(단테와 셰익스피어), 성직자(루터와 녹스), 문필가(존슨과 번스), 군주(크롬웰과 나폴레옹) 등이다.

칼라일은 시인을 다룰 때가 가장 돋보인다. 그는 심술궂고 고집스러운 사람일지 모르지만 결코 관습에 휘둘리지 않았다. 특히 단테를 다룰 때는 다른 인물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여주었다.

2년 후에 나온 〈과거와 현재 Past and Present〉에서 이런 영웅관은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졌다. 이 책은 "우리의 빈약한 세기를 명확히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약간 먼 과거의 세기로…… 뚫고 들어가려고" 애썼다.

이 책에서 그는 중세 수도원장의 현명하고 강력한 규칙과 부드럽지만 혼란스러운 19세기의 상황을 대조했다. 그 자신은 교조적인 그리스도교 신앙을 거부했고 로마 가톨릭 교회에 특별한 혐오감을 품고 있었지만, 중세의 규칙을 편들었다. 영국인들 가운데 그가 가장 이상적인 인물로 꼽은 사람은 크롬웰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845년에 방대한 〈올리버 크롬웰의 편지와 연설 Oliver Cromwell's Letters and Speeches〉을 썼다.

다음에 쓴 중요한 저서는 〈현대 논설 Latter-Day Pamphlets〉(1850)인데, 이 책에는 그의 본성 가운데 야만적인 측면이 특히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예를 들면 모범 감옥에 관한 논설에서 그는 국민들 가운데 가장 야비하고 쓸모 없는 부류의 인간들이 19세기의 새로운 감옥에서 극진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고 대중을 설득하려 했다. 칼라일은 거짓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관찰자로는 전혀 믿을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보아야 한다고 미리 작정한 것만 보았기 때문이었다.

1857년에 칼라일은 그의 또다른 영웅인 프리드리히 대왕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프리드리히 대왕이라 불리는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2세의 역사〉는 1858~65년에 발표되었다. 이무렵 그의 정치적 입장은 1855년 4월에 망명한 러시아 혁명가 A.I. 헤르첸에게 쓴 편지에서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 편지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은 어느 때보다도 더 '보통 선거'에 기대를 품고 있지 않습니다. 그 제도를 어떤 식으로 수정해도 전혀 기대를 가질 수 없음은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서 그는 "'의회의 잠광설', 자유언론, 그리고 인원수를 세는 일이 초래할 완전한 무정부상태(불행히도 나는 그렇게 판단합니다)"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E. H. 카의 〈낭만적 망명자들 The Romantic Exiles〉에서 인용).

불행히도 칼라일은 보통 사람들을 존중하지 못했다.

그가 신앙에 반대한 이유의 핵심은 아마 복음서의 정확성에 대한 역사적 의심보다도 오히려 여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허약하고 죄 많은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격렬한 정신은 2가지 요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나는 악덕을 공공연히 고발하려는 칼뱅주의자의 진지한 소망이고, 또 하나는 버릇처럼 신경질을 부리는 성급함이었다. 이런 성미 때문에 그는 자주 자신을 질책했지만 끝내 이 약점을 극복하지 못했다.

말년

1865년에 그는 에든버러대학교의 학장 자리를 제의받았다.

1866년 4월에 행한 취임사 자체는 별로 주목할 만한 점이 없었지만 도덕적인 설교조의 말투 덕분에 성공을 거두었다. 이 연설은 1866년에 〈책의 선택에 관하여 on the Choice of Books〉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그가 에든버러에서 성공을 거둔 직후 아내가 런던에서 급사했다. 제인은 해딩턴에 묻혔고 남편이 쓴 묘비명은 교회에 안치되었다. 아내를 잃은 슬픔에서 칼라일은 끝내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아내가 죽은 뒤에도 다시 15년 동안 거의 칩거 상태로 울적하고 따분하게 살았다.

몇 가지 사회적 쟁점이 그의 지지를 얻었다. 그는 1865년에 흑인 봉기를 너무 가혹하게 진압했다는 이유로 해임된 자메이카 총독 E. J. 에어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칼라일은 에어가 "서인도제도를 구하고, 내가 판단할 수 있는 한 당연히 교수대에 올라가야 마땅한 선동적인 흑백 혼혈인 한 사람을 목매달았다"고 칭찬했다.

또한 프랑스-프로이센 전쟁(1870~71)에 흥분하여 "독일은 마땅히 유럽의 대통령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그런 열광적인 순간은 곧 사라졌다. 말년에는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다.

그의 역사책인 〈노르웨이의 초기 왕들 : 존 녹스의 초상화에 관한 평론 The Early Kings of Norway : Also an Essay on the Portraits of John Knox〉은 1875년에 나왔고, 〈회고록 Reminiscences〉은 1881년에 출판되었다. 그후 그는 아내의 편지들을 편집하여 1883년에 〈제인 웰시 칼라일의 편지와 기록 : 토머스 칼라일 엮음 Letters and Memorials of Jane Welsh Carlyle, Prepared for Publication by Thomas Carlyle〉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이 그의 묘지로 제의되었지만 칼라일은 자신의 소원대로 에클페칸 묘지에 누워 있는 부모 곁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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