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기도
- 마더 테레사 -
사랑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칭찬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명예로워지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칭찬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신뢰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인기를 누리고자 하는 욕구에서 나를 구하소서.
굴욕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멸시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비난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중상모략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잊혀지는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오해받는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조롱당하는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배신당하는 두려움에서 나를 구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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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사 수녀
콜카타의 성녀 테레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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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 | |
출생 | 1910년 8월 26일 오스만 제국령 마케도니아 스코페 |
선종 | 1997년 9월 5일 (87세) 인도 서벵골 주 콜카타 |
교파 | 로마 가톨릭교회 |
시복 |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
시성 | 2016년 9월 4일 교황 프란치스코 |
축일 | 9월 5일 |
상징 | 수도복, 묵주 |
수호 | 세계 청년 대회, 사랑의 선교회 |
테레사 수녀(영어: Mother Teresa, 1910년 8월 26일 ~ 1997년 9월 5일)는 인도의 로마 가톨릭교회 수녀로, 1950년에 인도의 콜카타에서 사랑의 선교회라는 기독교 계통 비정부기구를 설립하였다. 이후 45년간 사랑의 선교회를 통해 빈민과 병자, 고아, 그리고 죽어가는 이들을 위해 인도와 다른 나라들에서 헌신하였다. 본명은 아녜저 곤제 보야지우(알바니아어: Anjezë Gonxhe Bojaxhiu)이다. 2016년 9월 4일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1970년대를 통해 세계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대변하는 인도주의자로 널리 알려졌다. 1979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고 1980년 인도의 가장 높은 시민 훈장인 바라트 라트나(Bharat Ratna)를 받았다.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 선교회는 계속 확장하여 그녀가 사망할 무렵에는 나병과 결핵, 에이즈 환자를 위한 요양원과 거처, 무료 급식소, 상담소, 고아원, 학교 등을 포함해 123개 국가에 610개의 선교 단체가 있었다.
그녀는 사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되어 "캘커타의 복녀 테레사"라는 호칭을 받았다.[1][2]
목차
생애[편집]
1910년에 오스만 제국령 마케도니아의 스코페에서 알바니아계 로마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니콜 보야지우는 1919년 시 의원 자격으로 정치 행사에 참가했다가 의문사하였다.[3] 1928년에 아일랜드의 라스판햄으로 이주하여, 로레토 수녀회에 입회하였다. 이때 로마 가톨릭교회의 수녀가 되었고, 테레사로 개명하였다. 그 이후 인도로 선교 활동과 빈민 구제를 목적으로 당시 영국의 식민지이던 인도로 이주하였다. 1947년, 인도 자치령이 독립하고 1950년에 인도 공화국으로 국호를 결정하자, 인도에 귀화하였고, 로마 가톨릭 계열의 선교 단체를 사랑의 선교회를 설립하였다. 1952년에 8월 22일 "죽어가는 사람들의 집"(Home for Sick and Dying Destitutes) 또는 "순결한 마음의 장소"(Place of Pure Heart, 벵골어: Nirmal Hriday의 번역)로 불리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을 개설하였고, 이때 테레사 수녀는 당시 콜카타 시청 측에서 제공한 건물을 사용하였다. 그 건물은 칼리 신전 뒤에 있는 건물이었으며 순례자들의 숙소로 쓰였다. 건물이 사용하기 편리했으므로[4] 기꺼이 사용을 마음먹었다. 당시 힌두교도들은 로마 가톨릭 교도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건물을 이용할 것이라고 의심하여 시위를 벌였으나, 사랑의 선교회 수녀들이 종교에 구애없이 복지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고 그들을 받아들였다.[5] 1955년에는 9월 23일 "때의 집"(시슈 브하반)이란 이름의 어린이 보호시설을 개설하였고, 1958년에는 이 시설에 90명의 어린이들이 살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경찰과 공무원들은 고아와 버려진 어린이들을 보냈으며, 어린이들의 집에서는 이들을 먹이고 병도 고쳐주었다. 어린이들은 교육도 받았으며, 해외로 입양되었다. 갓난 아기는 로마 가톨릭 교도인 것을 알 수 있을 때만 세례를 주었다.[6] 1968년에는 한센병 환자들의 커뮤니티인 평화의 마을(Shanti Nagar)을 개설하고, 1975년에는 회복 가능성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 "사랑의 선물"(Prem Dan)이란 이름의 장기 요양소를 개설하였다. 이런 일련의 사회봉사활동에 대한 결과로 1979년에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 캘커타에서 87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
“ | 저는 우리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청빈을 선택합니다. 그러나 배고프고 벌거벗고 집이 없으며 신체에 장애가 있고 눈이 멀고 병에 걸려서, 사회로부터 돌봄을 받지 못하고 거부당하며 사랑 받지 못하며 사회에 짐이 되고 모든 이들이 외면하는, 사람들의 이름으로 이 상을 기쁘게 받습니다. | ” |
- 1980년 바라트 라트나(BR) 수훈.
- 1983년 영국 명예 메리트 훈장(honorary OM) 수훈.
- 1997년 9월 5일 캘커타에서 사망. 9월 13일 인도 국장으로 장례.
- 2003년 10월 19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녀 반열에 오름.
- 2016년 9월 4일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성녀 반열에 오름.
혹평[편집]
- 테레사 수녀는 부자들의 성녀라는 비평을 받았다. 《마더 테레사, 부자들의 성녀》라는 책에서는 테레사 수녀는 사회적 모순과 불의가 원인인, 사회문제로 보아야 할 가난을 하늘의 뜻이라며 왜곡하여 캘커타 민중들의 계급투쟁 전통을 방해했으며, 해방신학,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로마 가톨릭의 신학적인 변화 같은 진보적인 신학들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그래서 부자들에게는 인도주의자, 박애주의자라는 찬양을, 민중들에게는 부자들의 성녀라는 냉소를 받았다고 비판한 바 있다.[7] 여기에 대해서는 그녀의 행적보다는 로마 가톨릭 자체의 보수성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온 바 있다. 그리고 테레사 수녀는 이런 비판과는 별개로 빈민 구제 활동에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다.
- 크리스토퍼 에릭 히친스(Christopher Eric Hitchens)는 그의 저서 《자비를 팔다》에서 테레사 수녀의 비리를 폭로했다. 히친스는 이 책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선교정치와 성녀 만들기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마더 테레사 현상의 정치적인 면모를 파헤치며, 마더 테레사는 정치화한 교황 체제가 파견한 종교사업가라고 주장한다. 히친스는 테레사 수녀의 '사랑의선교회'가 보여준 가난에 대한 방관적 태도, 기부금에 대한 불투명한 출처와 사용에 대한 무책임한 행동, 그리고 테레사 수녀가 결코 성녀가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정치적 선전을 주도하는 인물이었다고 비판한다.[8] 다만 이에 대해서는 크리스토퍼 히친스가 매우 강경한 반종교주의자라는 점에서 그의 주장을 걸러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반박하는 의견도 많이 나왔다. 테레사 수녀는 정치에 상당히 무지하였기 때문에 아이티의 독재자인 프랑수아 뒤발리에와 그의 아들인 장클로드 뒤발리에와 함께 사진을 찍기도 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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