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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 인생독본

톨스토이 - 인생독본 / 10월 13일

by 바닷가소나무 2015. 10. 13.

1013

 

인간사회란 현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다만 폭압에 의해서만 복종을 하게 되는 것인 것보다 이성에 의해서 지도되고 모든 법률이 바르게 인식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훨씬 자연적인 것이다.

 

2

위대한 현인이 힘을 갖고 있는 곳에선 사람들이 그 힘에 복종하면서도 그 현인의 존재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그 다음가는 위대한 현인이 지배하는 곳에선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가장 위대하지 못한 현인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사람들이 그를 경멸한다. <노 자>

 

3

힘은 사랑과는 어긋난다. 약함은 싸움과 연결된다. 사랑 속에 결합으로써 우리는 서고 있는 것이다. 싸움으로 인해서 사산하면, 쓰러지고 만다. <류시마로리>

 

*

폭력을 사용하는 게 불필요한 생활을 하도록 노력하라.

 

신의 법칙과 인간의 법칙

오직 신앙만이 이 세상에 있어서 사람을 착오와 악마의 함정에서 구해 낼 수 있다. 신앙만이 우리들에게 선과 악을 구별할 것을 가르치고 신앙에 의하여서만 우리들은 정신적인 그리고 신에 속하는 것과 교섭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에 있어선 많은 믿지 못할 것이 신앙 되고 있다. 참다운 그리스도격인 신앙이 착오나 사교로 생각되고 생명 없는 관습이 신앙으로 받아 들어지고 있다. 사람들 사이에 이별이 생기고 한쪽이 다른 쪽을 사도라고 비방한다.

그래서 이 때문에 전쟁과 참화와 살인과 화형과 그 외에 많은 죄악이 생겨난다. 이리하여 오늘에 있어서 신앙을 얻기가 매우 곤란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교와 적의 속에 악취를 던지고 있음으로.

허나 이러한 상태에 있어서도 이지 있는 사람들은 사도에 의하여 넓혀지고 일찍이 신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통해 얻어진 참다운 신앙을 찾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오늘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새로운 매혹 되어서도 안된다.

최초의 그리스도교도 사이에는 사도에 의하여 평등이라는 것이 가르쳐졌다. 누구라도 남에게 빌린 게 없고 서로 사랑하고 서로 사랑으로 봉사 해왔다. 머리 위에 그리스도를 받들고 수많은 부분이 결합하여 일체를 이루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는 이교도적인 존재 이유를 가진 사법관도 없었다.

이와 같은 시대가 삼백년 이상이나 계속하였다. 그리고는 콘스탄틴 황제가 나타났다. 그는 처음으로 그리스도 교도사이에 이교도적인 군주나 관리를 혼합시킨 인간이었다. 사도들에 의해서 그리스도 교도들에게 가르쳐진 목적은 이교도적인 권력이 설교보다 훨씬 고귀하고 완성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한 덩어리를 이루고, 종교 및 도덕의 영역에 있어서 오직 하나의 신의 뜻에 의하여 인도 되어 간다는 것이란 여러 가지 필요한 정도에 응하여 이교도들이 지지하고 있는 지상적인 그리고 약점에 가득 찬 법칙을 지키는 것 보다는 훨씬 고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재판관들은 빼앗긴 재산을 모두 찾을 수 있는 도움을 주고 그 밖에 온갖 죄악을 취급한다. 허나 그리스도교는 그 같은 죄악을 범하지 않는 고로 이와 같은 재판관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교도들은 여하한 사람들에게도 기만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에게 대해서 범 해진 죄악에 대하여서는 인내 깊게 참으며, 악을 갚는데 악으로써 하지 않는다.

사도들이 최초의 그리스도 교도들 사이에 이룩한 상호 관계는 그리스도의 규칙 속에 그 기초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먼저 신앙에 배반하는 자 유혹하는 자 이러한 이교도들을 어떻게 취급하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맨 처음 이러한 사람들에게 대하여 한 사람씩 설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래서 안 될 경우에는 증인 앞에서 교회가 설법된다. 그것마저 듣지 않을 경우에는 그러한 사람들을 이교도 혹은 수세리 와 같이 취급해 버리는 것이다.

이리하여, 오직 그리스도의 법칙에 의하여서만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의 사회는 건설되고, 오직 그리스도의 법칙에 의해서만 그 사회는 인도 되었다. 그리고 도덕상의 상호관계도 잘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윽고 그 속에 두 개의 법칙, 즉 개인의 사적인 권리와 법주의 권리가 뒤섞이게 되어 덕성은 땅에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 두개의 법칙에 의하여 정해진 권리가 여하히 신이 신앙과 규칙을 파멸하였는가. 역사가도 썼으며 우리들도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아는 바이다.

그리고 우리들 시대가 되고서는, 모든 것이 이러한 두개의 권리의 그늘에 숨겨지고 신의 규칙, 그리고 신의 통어에 대하여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 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렇듯 두개의 법칙에 의하여 정해진 권리가 우리들의 눈을 현란하게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암중모색으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는가? 즉 후대의 인간에 의하여 부가된 법칙 없이도 그 자신이 지상에 참다운 그리스도교를 뿌리박고 세우기에 족할만한 충분한 힘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 것인가?고 그리고 내 자신 얼마간의 두려움가지면서도 다음과 같이 답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 그만한 충분한 힘을 아직 가지고 있다. 어째서냐면 이전에 있어서 그것은 그리스도 교도의 사회를 세우기에 족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라고. 그리스도의 법칙은 그것에 배반 하는 자가 있더라도 약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고 또 떠나 가는 자가 많아 지더라도 약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 반대로 그것은 점점 힘을 얻게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법칙만이 이 세상에 있어서 커다란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만약 그것이 신앙하지 않는 자를 신앙 깊게 만들기에 족한 충분한 힘을 갖고 있다면 도덕적인 인생을 세우기에 한층 더 용이할 것이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인간의 정신 속에 그 덕성 속에 세워진다. 그리고 인간의 마음에서 일체의 사악을 씻어 버리고 신에 봉사하여 영원의 보답에 가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법칙에 따르는 인간은 육체적인 재물을 빼앗기더라도 전연 다른 태도를 보이다. 빼앗아간 사람들에게 복수를 하지 않는다. 재판에 걸어 만족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오직 인내 깊게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다.

어떠한 인간이 만든 법칙이라도 신의 법칙과 같은 정도로 도덕상 완성에 작용하는 것은 없다. 모세의 율법은 좋은 법칙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모세의 율법에 인도 되지는 못했다. 모세의 율법의 이미 다른 법칙 그리스도의 법칙 속에 옮겨지고,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하여 바꿔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법칙은 모든 신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위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 교회 속에 지상적인 권력자와 정신적인 권력자가 혼합하기 시작한 것은 그 깨끗함과 티 없는 상태를 파괴해 버리고 말았다.

설사 많은 사람들이 이 두개의 권력의 혼합이 신앙에 있어서는 이익을 가져 오는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그것은 항상 독인 것이다.

로마 교회의 말하는 바에 의하면, 지상적인 권력이라는 것은 성서의 다음 구절위에 기초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병졸이 묻었다. 우리들 무엇을 할 것인가 고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들을 위하여 또 모함하지 말라, 내 급료로써 족하게 생각하라

( 루카전, 제 삼장, 십사절 )

이 말은 그 자신 그리스도교도는 인간의 피를 흘리기 위해서 칼을 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허나 로마교회의 대승정은 이 말을 강하게 지지하고 그리고 이 말에다가 그리스도교도 사이에 예리한 칼이 필요하다는 뜻을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교의 말 하는바가 군대를 비방하는 것이라면, 그때 요한을 향하여 질문한 병졸더러는 무기를 놓고, 전쟁을 그만 두라는 충언이 구함을 얻게 하는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허나 만약 요한이 병졸들께 향하여 그 급료로써 족 하느니라 말한 것이라면, 전쟁은 그만 두지 못한 것이 되고, 병졸은 부정 되지 못할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어느 대학교수는 어느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죽음으로써 벌한다는 법칙을 신의 뜻에 배반하지는 않는 것이라고 다음과 같은 말을 들어 증명 했다.

그 하나는 살생하지 말라고 한 가르침을 죄인은 죽음으로써 벌하는 것을 금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재판하지 않고 죽이지 말라고 한 법칙이기 때문에 둘째는 생과 그리고 죽음을 늘게 하는 것은 신인 것이다. 그런고로 신은 살생도할 수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신에 의하여 세워진 군주도 마찬가지로 살생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는 사도 파우로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이와 같이 가치 있는 죽음이 존재한다. 그리고 하늘은 분별없이 칼을 든다.

로마 교회나 그 학자는 살생하지 마라는 가르침을 이와 같이 해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해석에 의하면, 신은 모순을 말하려 하는 것이 되고 만다. , 하나의 입에서는 죽이라하고, 말 하고 있는 것이 된다.

칼에 의한 봉사는 그것이 악을 갚는데 악으로써 하는 점에 있어서 가장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가령 칼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고 신을 위하여 쥔다고 말 한댔자, 신은 그 말에 얼만치의 진실함을 인정 할 것인가. 그리스도는 적을 사라하고 악을 갚는데 선으로 써 하는 것을 가르쳤다.

만약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말을 믿고 그리스도가 가르친 뜻을 쫒는다면 이 지상에 전쟁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투거나, 살인이아, 타인에 대적행위나, 악을 갚는대 악으로써 하는 것은, 오직 내가 사랑하지 않고 그리고 자기께 돌아온 비방을 인내 깊게 참지 못하는데서 이러나는 것이다.

성서 가운데 말한바, 참다운 그리스도 교도의 사회를 건설하는데 대하여 칼이나 거기 따르는 일체의 행위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는 덕성 높은 사람들을 배반하는 일이다.

그리스도 교도는 오직 그리스도의 신앙에 의해서만 결부 된다. 그리고 서로 기도하고, 서로서로의 의무를 수행하고, 사랑과 평화 속에 결부 된다. 싸움을 하고, 남의 유혈을 돕는 그리스도 교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써 이교도에 따르는 것과 다름없다.

싸움으로 서로를 죽이는 그리스도 교도는 그리스도에 의하여 설교된 정신적인 행복 속에 결코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 사람들이 이세상의 일을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으므로 고귀한 정신적인 일을 생각하고 또 그것을 얻을 수도 없다고 해서 자기들의 변명의 말로 삼는다면 그때는 다만 간단히 다음과 같이 대답할 수가 있다.

그러하면 그리스도를 믿어도 소용없다. 기도해도 소용없다. 연옥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사람과 신앙에 의하여 그리스도에 따르지 않는 인간을 그리스도는 영겁의 고뇌에서 해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리스도 교도가 자기를 그리스도의 고뇌를 아는 자로 생각하고 구함을 바라고 허나 동시에 서로 죽이는 것으로써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그리스도를 괴롭힐 적, 그때 그에게는 이교도 이상의 큰 죄, 그리고 큰 저주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교도 사이의 싸움은그리스도의 사라의 법칙에 배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법칙은 실행 혹은 말에 의하여, 이웃 사람의 육체, 전신, 재산, 명예에 대한 적대행위를 버릴 것을 가르친 것이다. <표돌헤르츠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