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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 인생독본

톨스토이-인생독본 / 8월18일

by 바닷가소나무 2015. 8. 18.

818

 

기독교는 어찌하여 진리가 되는가?

그것은 가장 추상적인 문제에 해답을 주며, 그 해답에 의하여 인생의 가장 실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정신 속에 신의 나라를 세운다. 그리고 사람들의 사회생화 속에 신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다.

 

1

그리스도는 자신의 사명에 대하여 전연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불쌍한 사람들에게 좋은 통지를 주기 위하여, 그 삶들을 멸시 된 상태에서 해방시키기 위하여, 무법적(無法的) 폭력이 그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선물을 도로 찾아주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온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명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고뇌나 폭압에 의하여 시들어 버린 사람들의 마음을 치료하는 것, 장님이 볼 수가 있고 쇠사슬에 묶인 사람들을 해방 시키는 것, 이 세상의 어는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예속(隸屬)을 자유로 바꾸어 놓는 것, ()의해(), 그리고 보상(報償)의 날즉 정의를 수립함으로써 이 세상 권력자들에게는 공포의 날이 오며, 약자(弱者)들에게는 커다란 기쁨의 날이 온다는 것을 고()하는 것, 이러한 일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명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엇이 설파(說破) 되고 있는가. 또한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원한바 일이 진정 수행되고 잇는가.

가난한 사람들은 좋은 소식을 귀에 들었는가? 시들어진 사람들의 마음은 치료되었는가? 쇠사슬은 풀러졌는가? 장님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되었는가? 멸시 받은 사람들은 자유로워 졌는가? 모두가? 노오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아직도 십자가위에서, 사도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사도를 오게 하라. 빨리 오게 하라. 타락은 이미 크다. 그리고 신()의 날, 새벽을 기다리면서 동방을 바라보는 눈은 피로하였다. <라무데에>

 

2

스스로 기독교도라고 말하는 사람에게 기독교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아라. 그 사람들은 기독교란 어떤 가르침과 결합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 가르침을 말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미등라고 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그것과 상이한 말을 하고 있다.

그 차이 때문에 비방, 혐오가 생기고, 그 결과로선 유혈극마저 생기는 것이다.

 

3

종교는 사도들에 의해서 설교되었기 때문에 진리인 것은 아니다.

사도는 그 종교가 진리이기 때문에 설교 하는 것이다.

 

*

가장 단순하고 실제적인, 그리고 온갖 사람들의 행복을 실현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마음의 가르침이란 믿지 않으려 해도 믿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밖에 믿어야 할 참된 가르침은 없다. 그리고 이런 것이 그리스도의 가르침인 것이다.

 

 

카톨릭교와 기독교

역사상의 사실로서의 기독교를, 그것이 발생하고 있는 근원과 혼동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리고 오늘날 <카톨릭 교적인 신앙>이 라고 이름 붙인 것을 신성시 하고 있는 것이란 엉뚱한 거짓 믿음인 것이다.

가톨릭교적인 교회이것은 그리스도의 근원적인 가르침에 배반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교회 안에 있어서는 상징의 대신 사물 그리고 인물이 있다. 영원의 사상(事象)대신 사물, 그리고 인물이 있다. 영원의 사상대신 역사가 있다. 인생의 실천 대신 가톨릭교회의 법칙, 제식, 독단이 있다. 그리스도교 정신은 그 본질에 있어 의식이나 승려에 대해선 무관심한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실천은 그 자체 속에 하등의 환등도 갖고 있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오직 행복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것이다.

남의 것과 자기의 것과의 구별을 지우지 말라. 노여워 마라. 어떠한 인간일지라도 천대치 마라. 적선은 눈에 뜨이지 않게 하라. 맹세하지 마라. 공손 하라. 사람을 용서하라. 사람에게 자랑치 말고 기도하라

그리스도는 사물의 본질에다 인간의 마음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나라에 직면 한다는 것인 것이다. 그리하여 그 길은 유태교회의 법칙 속에 있는 외면적인 것으로 의하여 표시된 것도 아니며, 그 외면적인 실제를 그리스도는 인정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외면적인 것에 대해서는 생각지 않는다. 내면적인 것을 생각한다. 내면적인 것에 대해서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리하여 그리스도는 신과의 교섭에 있어서의 온갖 어리석은 양식을 배제 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이 신에 속하는 것으로 느끼고 사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가르친다. 그리스도는 번뇌로서는 그 상태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을 설법한다. 그럼으로 신에 속하기 위하여 중요한 것은 자기 부정인 것이다.

그리스도는 불안과 행복을 가르쳤다. 가톨릭교는 염세주의 출현처럼 생각된다. 특히 약한자, 권력 없는 자, 압박당하는 자, 고뇌하는 자에 대해서는 염세주의를 일으키게 한다.

성서는 시달린 자. 가낳나 자에게도 행복에 이르는 길이 열려지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오직 모든 전통, 상류계급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재능, 재산 신분, 환경 재판, 경찰, 국가, 교회, 교육, 예술, 전쟁이러한 모든 것은 행복을 얻기 위하여서의 방해인 것이다. 과오이며 악마의 시사이며, 성서가 그 위에 무서운 벌이 올 것을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가톨릭교는 기독교의 설법하는 곳에서 성립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국가와 협화(協和)해서 전쟁을 가져오게 하고, 재판하고, 괴롭히고, 저주하고, 혐오하고 있다.

가톨릭교로선 먼저 이 죄악에 대한 이해를 끄집어 낼 필요가 있다. 가톨릭교로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의한 새로운 생활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종의(宗儀) 그리스도의 기적적인 변용(變容) (신앙에 의한 매수(買收)이 필요한 것이다.

가톨릭교는 그리스도의 생활과 죽음 가운데서 제멋대로 선택하여 제 마음 대로 방점(傍點)치고 도처에서 그 중심을 변경하고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본원을 파괴한 것인 것이다.

이교도, 유태 승려나 교회와의 투쟁은 가톨릭교에 의하여 통제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시 새로운 승려, 종의(宗儀), 새로운 지배 계급, 새로운 교회를 만드는 것이었던 것이다.

이 속엔 슬픈 희극이 있다. 가톨릭교는 정신을 파괴하는 모든 것을 일반 속에 소생시킨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 있어서 카토릭교의 교회가 새로이 세워졌을 때 그것은 국가마저 그 지배하에 두고 말았던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죄인, 혹은 도둑이 괴로운 죽음을 참아가면서 그리스도처럼, 불평도 노여움도 없이 선과 순종만으로 괴로워하고 죽는 것이 올바르다고 생각할 때 그는 성서의 말을 확신하고 극락으로 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정신은 모든 순간에 있어서 체현 이룩되는 것인 것이다. 그것은 형이상학(形而上學), 난행고행도 자연과학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생자체인 것이다. 그것은 행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나는 전쟁을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을 재판하지 않는다.

나는 자기의 내면적인 세계를 파괴할만한 일는 무엇 하나 하지 않는다』 『만약 내가 무엇인가 때문에 고뇌를 경험하면 그 고뇌만치 나를 영화롭게 해 주는 것은 달리 없다』━고 말 하는 사람이 참다운 그리스도 교도일 것이다. <니이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