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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 인생독본

톨스토이 - 인생독본 3월10일

by 바닷가소나무 2015. 4. 26.

310

 

 

 

우리에게 인생의 가치를 부여해 주는 것은, 동질적일 뿐만 아니라 모든 것에 대해서 오직 하나이다.

 

1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고뇌에 떨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법이다. 그대 자신도 살아 있는 것 중의 하나임을 알라. 그러므로 살생을 삼가라. 죽음의 원인을 만들지 말라. 살아 있는 모든 것은 고뇌를 꺼린다. 스스로의 생명을 큰 가치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법이다. 그대 자신도 살아있는 모든 것의 하나임을 알라 그러므로 살생을 삼가라. 죽음의 원인되는 것을 피하라. < 불 타 >

 

2

그대 눈에 비치는 모든 인간 속에는 신적인 사람과 인적인 사람이 있다. 이것은 모든 인간에 있어서 마찬가지다.

우리들은 하나의 위대한 신의 일부분이다. 자연은 우리들을 혈연적 관계 속에다 창조한 것이다. 자연은 우리를 동일한 재료로서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이 세계에 태어나게 한 것이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상호 애를 불어 넣은 것이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협화적인 성질을 부여한 것이다.

자연은 우리들에게 정의와 근원적인 감정을 확립해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자연에 의하여 수립된 이와 같은 사정 때문에 스스로를 파멸 시키느니보다 남을 파멸 시키는 것이 죄악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의 명령에 의하여 우리들의 손은 항상 하인을 돕기 위하여 준비 되어 있지 않으면 아니 된다. 그렇다, 우리들은 서로 돕기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우리들의 결합은 석조의 둥근 기둥과도 같은 것이다. 만약에 서로 받치지 않는다면 천장은 대번에 무너지고 말 것이다 < 세네카 >

 

3

사람은 오로지 이웃에 대한 봉사 속에서만 행복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서의 생활의 기초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4

사람들과 나와 하나라는 것을 나는 똑똑히 의식하며 느낀다. 그리고 이와 마찬가지 감정을(약간 약한 정도이기는 하지만) 동물과 나와의 사이에도 느낀다. 좀 더 약한 정도에서 이기는 하지만 그와 마찬가지 감정을 벌레나 식물과의 사이에도 느낀다.

 

5

인생의 길은 하나이다. 그리고 인류의 영원한 희망은 우리들의 전부가 조만간에는 이 길 위에서 하나로 되는 것이다. 우리들은 모두가 하나로 되는 이 길을 우리들 인생의 기초에 너무나 뚜렷이 깔리어 있다. 인생의 길은 넓다. 그러나 대게는 이 길에 눈이 미치지 못하고 죽음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 고오고리 >

 

*

모든 생명 있는 것들과 그대가 결합되고 있음을 느낀다는 것, 그 느낌을 방해하는 모든 악한 힘을 그대 자신 속에서 몰아내라.

 

결 합

1

모든 개성이란 그 밖의 온갖 것에 대하여 전연 다른 것이다. 진정한 자기의 존재는 다만 자기 자신 속에 있다. 그 밖의 것은 모두 다 자기가 아니다. 즉 남인 것이다.

이러한 사상은 모든 이기주의의 기초에 가로놓여 있는 것이며 또한 이러한 사상의 본질이 사랑이 없고 부정하고 혹은 악덕의 모든 원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자기의 참다운 내면적 존재는 모든 생명이 있는 것 속에도 깃들어 잇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인식 속에 있어서, 자기 자신 앞에 열려오듯이 다른 생명 속에도 직접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은 산스크릿트에 의하여 표현 되어 있는 영원불변의 법칙이다. 이러한 사상은 동정의 형식 취한다. 그리고 그 위에 모든 진실한 것 즉 몰 아적(沒我的)인 덕성의 기초가 된다.

이러한 사상의 본질이 모든 착한 행위의 원인이 되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위에 친절, 인류애, 자선으로 향하는 동기가 있다.

왜냐하면 무릇 이를 행위로 향하게 하는 동기는 우리들이 모두 하나의 존재라는 점을 이해하는 그것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기주의 질투, 증오, 폭압, 완고, 복수, 원한, 잔학은 전자의 사상 속에 기초를 잡으며, 또한 전자의 사상을 지지하고 있다. 우리들이 착한 행위를 듣고 또 그 이상으로 그것을 보아 다시 그 이상으로 그를 행하여 느낀바 흥분과 환희는, 그 가장 뿌리 깊은 기초를 이러한데 두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착한 행위는 많은 경우, 또한 여러 가지 개성 밑에서는 근원적인 동일성이 싹트고 있는 것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동일성은 우리게 있어서 참으로 실재적이며, 도달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 착한 행위 속에 나타나기 때문에.

이상 말해온바 두 가지 사상의 어느 편인가 모든 행위를 해석하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의 정신적인 의식과 상태의 모든 성징을 해석하여 준다. 이리하여 착한 성질을 가진 인간에게는, 못된 성질을 가진 인간과는 전연 별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못된 성질을 가진 인간은 가는 곳마다 자기와 자기이외의 모든 것 사이에 완고한 장벽을 느끼는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 세계는, 절대적으로 자기 이외인 것이다. 최초부터 적대하고 있는 자기와 자기 이외의 것과의 관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기본적 기질로서 항상 증오가 있고 질투가 있고 원한이 있다.

그러나 착한 성질을 가진 사람은 그 자신 속에서만 사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기와 마찬가지로 본질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외부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타인은 그에게 있어서 자기 이외의 것은 아니며모든 것은 자기이며, 자기는 또한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모든 사람에게 대한 관계는 항상 친화적이다. 그는 자기를 모든 타인과의 내면적인 동일물인 것을 알고, 그 사람의 행복과 불평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여, 그 사람들 속에 진심으로 울어나는 공감을 바친다. 그리하여 그 내부에는 평화와 신뢰할만한 조용하고 자족적 인정 신상대가 싹튼다. 그리고 이 때문에 사람들은 그에게 진심으로 친근해질 수 있는 것이다. <쇼오펜하우엘>

 

2

만일 우리들이 기독교의 근본적인 가르침,

즉 신 앞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결합되고 있다는 사실의 깊은 의외에 침투한다면 그리스도는 단순한 사랑의 외면적인 결과로서의 결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 자기 자신 속에 사랑으로써 깨닫는 감정의 원천으로서 봉사 하는 것, 즉 인간의 신적인 본질에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결합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임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들이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이란 감정은 진실로 비밀한 힘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근원적인 즉 이 세계의 정신적인 본질 신께 있어서 의결을 부활시키는 힘이다.

우리들은 자기 부정에로 인도하는 사랑이란 감정도, 가렬 그 기초에 사람과 사람과의 근원적인 연결이 없다고 한다면, 무의미한 것이며 또한 보람 없는 것이다. 그 연결 속에 있어서는 모든 개성적인 한계는 부인되는 것이며, 깨드려지고 마는 것이다.

사랑이란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들은 모든 사람의 내부에 있어서 느낄 수 있는 우주적인 본질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라고, 사랑에는 어떠한 한계도 다양성도 없다. 왜냐하면사랑은 최초부터 유일한 것이며 보편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모든 딴 존재로부터 전연 독립한 존재라고 생각함은, 마치 인간의 신체의 모든 부분이 제각각 스스로의 감각을 가졌다 하여 각각 독립한 존재를 이루었다고 생각함과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일이다. 인간이, 훨씬 전에 절단된 발의 아픔을 아직도 느낄 수 있음은, 인체의 각 부분이 각각 다 감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따로 인간의 감각의 집중점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전연 별개의 사라의 괴로움이나 기쁨을 공감할 수 있음은 사람과 사람과의 정신상의 연결을 증거 세우는 것이다. 가령, 아무리 사람들이 다만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고 인정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하드라도, 가령 정단된 후 2년이 지나고 지금은 땅 속에 묻힌 발을 절단되기 전과 전연 다름없이 느낀다면, 그 사람이 감각할 수 있는 조건은 그저 발이 외면적으로 그 사람에게 달려 있다는 사실만은 아닌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연결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는 가져야할 것이 아닐까? 같은 종족의 육체적인 연계가 아닌 개인적인 또한 사회적인혹은 국제적인 이익의 공통도 아닌, 사람들의 신 앞에서의 일치(一致), 이것만이 오로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그 기초에 놓이지 않으며 아니 될 요건이다. < 표돌 스타라호프 >

 

항 해

 

나는 함부르크에서 런던으로 항해하고 있었다.

선객은 두 사람이었다. 나와 그리고 작은 원숭이이었다. 난지 얼마 안 되는 암놈의 보드라운 털을 갖진 원숭이였다. 어떤 함부르크의 상인이 영국 친구에게 선물로 보내기 위하여 이 배에 태운 것이다.

원숭이는 가판위에 가는 철사로 매어 있었다. 그리하여 철사가 미치는 한 날치면서 슬픈 소리로 깩깩 울고 있었다. 내가 그 옆을 지날 때마다 검고 차가운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우울한 인간과 다름없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손을 잡아 주었다. 하니까 원숭이는 날치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조용한 항해였다. 바다는 납빛 테이블 크로스처럼 둥글게 펼쳐져 움직이지 않았다. 이따금 바닷개(海狗)가 헤엄쳐 왔다. 그리고 몸을 뒤집어 물속 깊이 잠기었다. 해면은 그 때문에 어지러웠다.

선장은 말이 적은 사나이였다. 볕에 탄 어두운 표정을 하면서, 짧은파이프로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성나듯이 응결한 해변에 침을 뱉었다.

내가 여러 가지로 말을 물으면 선장은 더듬더듬 대답하였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단 하나의 동반자 원숭이에게 돌아가는 것이었다.

나는 원숭이 곁에 않았다. 원숭이는 울음을 그치고 나한테 손을 내민다.

안개가 자욱이 끼어 움직이지 안항. 그 습한 공기가 우리들 둘을 졸음에 이끌었다. 우리는 친 동기간처럼 않았다.

 

나는 이윽고 유쾌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들 누구나 단 한사람 어머니의 자식인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가없는 짐승이 순하게 되어 마치 집안사람에게 대하듯 나에게 의지하고 있는 것이 몹시 즐거운 것으로 생가 되는 것이었다. < 쓰르게네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