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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법

[스크랩] 시쓰기의 유형(상황시,이야기시)-여성문학 5월 자료

by 바닷가소나무 2013. 6. 14.

시 창작의 이론과 실제

 

 

 

제4장 어떤 유형의 시 쓰기가 있는가

 

4.1 시 쓰기의 유형

 

  

   시상의 전개란 발상에서 얻어진 중심 이미지(혹은 중심 은유)가 상상력의 논리에 따라 다른 이미지들이나 은유 상징들과 체계를 이루어 한 편의 완결된 내용으로 발전해 가는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이미지나 은유 혹은 상징들의 체계로 이루어진 사물의 시에서나 논의될 수 있는 개념이다. 왜냐하면 상황의 시와 이야기체 시는 이미지들이나 은유 혹은 상징들의 상관관계가 아니라 인물들의 행위 발전이나 처해진 상황을 내용으로 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정확히 말하자면 상황의 시나 이야기체 시는 마치 드라마나 소설이 그러한 것과 같이 시상의 전개 대신에 구성(plot)에 의해 씌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이야기체 시의 소재, 즉 내용은 이야기이다. 그것은 또한 모든 소설, 즉 서사문학이 대상으로 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야기체 시는 소설로 써야 할, 어찌 보면 장르적으로는 소설로 쓰는 것이 더 적합할 내용을 시로 쓴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야기체 시는 사실 시의 본질적인 영역이 아니며 한 편의 소설을 극적으로 줄여 압축한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이야기, 즉 내레이티브(narrative)는 한 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사건을 일컫는 말이다. 거기에는 주인공과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 주인공의 행위와 관련된 사건의 시작과 전개 그리고 발전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이야기 전개의 질서를 한마디로 구성이라 하므로 소설이 구성에 따라 이야기를 기술하듯 그 축약이라 할 이야기체 시 역시 -불완전하고 극도로 압축된 것이긴 하지만- '구성'에 따라 이야기를 진술하는 것은 당연하다.

   상황의 시 역시 마찬가지이다. 상황의 시의 소재 즉 내용은 한 인간이 처해진 어떤 특정 한 상황이 다 그것은 또한 모든 드라마가 대상으로 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상황의 시는 드라마로 써야 할, 어찌 보면 장르적으로는 드라마로 쓰는 것이 더 적합한 내용을 시로 쓴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상황의 시는 이야기체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시의 본질적인 영역으로부터 벗어나 있는 유형이며 한 편의 드라마를 시적 진술로 최대한 압축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모든 상황(situation) 역시 한 인물이 주인공이 된 어떤 사건의 한 단면이다 거기에는 주인공과 인물들이 등장하며 그 주인공의 행위와 관련된 사건의발단과 현재의 상황제시와 그 귀결이 있다 이 역시 우리는 그것을 구성이라고 한다. 사실 구성이란 원래 드라마의 작법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이다 따라서 드라마가 구성에 따라 주인공의 행위를 묘사하듯 상황의 시 역시 -불완전하고 극도로 압축된 것이긴 하지만 - 마찬가지이다.

 

   한편, 이야기체 시는 이야기의 시이므로 발상과정에서 하나의 이야기가 선택 혹은 창조된다면 그것이 바로 전체 내용을 구성한다. 그런 까닭에 사물의 시에서처럼 발상에서 얻어진 중심 이미지 혹은 시적 상징이 다른 부차적인 이미지들이나 상징을 만들어 가면서 종국적으로 하나의 완결된 체계를 이루어 나아가는 것과 달리 이야기를 구성하는 사건 혹은 행위의 선택과 배열, 강조와 생략 등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것은 상황의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인식(사물)의 시에서는 발상에서 중심 이미지 그리고 중심 이미지에서 부차적인 이미지, 부차적인 이미지에서 세부적인 이미지로 나아가서 그 마지막 단계에 내용이 완결되는 일련의 시상 전개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야기체 시나 상황의 시는 발상을 일으키는 이야기(사건)나 상황이 선택 혹은 창조되면 그자체로서 내용이 결정되므로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작가는 다만 그 결정된 내용의 순서를 배열하는 작업에 몰두하면 된다. 그러한 관점에서 이야기체 시나 상황의 시에서는 시상의 전개라는 과정이 없으며 그 대신 구성이 있다. 다만 이들이 시의 영역에 포함되어 있어 소설의 용어 '구성'이란 말이 적합하지 않아 만연히 시상 전개라는 말을 관용적으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야기체 시와 상황의 시가 구성으로 씌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이 소설이나 드라마의 구성과 같을 수 없음은 물론이다. 비록 한 인간의 이야기나 혹은 그가 처해진 상황을 기술한다 하더라도 이야기체 시나 상황의 시는 소설 형식을 취하지 않고 시적 형식을 취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체 시와 상황의시의 구성은 소설이나 드라마의 그것과 달리 시적으로 변형되지 않으면 안 된다. 우선 길이나 양적인 면에서 그러하다. 예컨대 200자 원고지 100장 내외가 되는 소설의 이야기를 같은 원고지 3, 4매의 분량밖에 안 되는 이야기체 시로 쓰기 위해서는 극도의 압축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야기체 시의 구성을 여러 다양한 방법으로 생략, 일탈, 축약, 왜곡, 비약, 전도시키는 방법을 취한다.

   이제 시의 시상 전개가 시의 세 가지 유형, 즉 인식의 시와 이야기체 시 그리고 상황의 시에서 본질적으로 어떻게 달리 구현되는지 구체적인 작품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4.2 상황의 시

 

 

   '상황의 시'의 경우 '인식의 시'와 달리 어떤 상황이 일단 시적 묘사의 대상으로 채택되면 그 즉시 시상 전개의 자유는 상대적으로 제한될 수밖에 없다. 상황이란 유기적인 관계의 전체성으로 구성되어 있어 임의적으로 시인이 그것을 쉽게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깨뜨린다 하더라도 깨뜨려져 다시 재구되는 상황은 이미 이전의 상황은 아닌 까닭에 그것은 시상의 전개라는 차원에서보다 새로운 상황의 재선택이라는 차원으로 이해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상황의 시'에서는 시에 묘사할 상황의 선택이야말로 다른 무엇에 앞서서 중요한 문제가 되며 큰 틀에서 보면 -시적 대상으로 선택된 대상(사물)에서 일단 발상을 얻으면 이를 매개로 하여 자유롭게 시상을 발전시킬 수 있는 '인식의 시'와 달리- 그 선택된 상황 속에 이미 시상의 전개가 결정되어 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상황의 시'에서는 시의 내용(대상)이 될 상황의 선택이 절대적이다. 요컨대 '인식의 시'에서 시적 대상(사물)은 발상의 매개물이지만 '상황의 시'에서 시적 대상(상황)은 발상의 매개물이자 동시에 이미 전개되어 있는 시상 그 자체이다. 그러므로 상황의 시를 쓰는 시인은 일단 쓰고자하는 상황을 선정할 경우 발상은 물론 시상의 전개까지 염두에 둘 수밖에 없다. 즉, 그는 상황의 선정과 동시에 발상과 그것을 전개하는 내용까지가 이미 결정된 셈이며 그것을 그 틀에서 벗어나 새롭게 변용시키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상황의 시'에서는 이처럼 상황의 선택 그 자체에 이미 시상의 전개까지도 포함된다. 따라서 어떤 특정한 상황이 어떻게 시적 대상으로 상승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는 일은 곧 그것의 시적 전개, 즉 시상의 전개를 살펴보는 일이 된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우리는

일제히 일어나 애국가를 경청한다.

삼천리 화려강산의

을숙도에서 일정 한 군(君)을 이루며

갈대 숲을 이륙하는 횐 새떼들이

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

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일렬 이열 삼렬 횡대로 자기들의 세상을

이 세상에서 떼어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간다.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한 세상 떼어메고

이 세상 밖 어디론가 날아갔으면

하는데 대한 사람 대한으로

길이 보전하세로

각각 자기 자리에 앉는다.

주저 앉는다.

 

- 황지우. <새들도 세상을 뜨는구나>. 전문

 

   인용한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시의 소재가 된 1980년대 우리 영화관의 풍속도를 알고 있어야 한다. 이 시기 우리 영화관에서는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애국가를 연주하는 의식을 가졌다. 그리고 이 의식이 진행되는 동안 모든 관람자는 일제히 기립, 스크린에 비치는 조국의 발전상을 보면서 경건히 애국가를 경청해야 했다. 이 때 스크린에 비친 그림들 가운데 을숙도의 철새가 화려하게 비상하는 장면이 등장하고 시인은 이 부분을 소재로 하여 당시의 사회를 풍자한 인용시를 쓴 것이다.

   인용시의 내용은 이렇다 영화상영 전의 애국가 의식에 참여한 화자는 기립하여 스크린에 비친 조국의 발전상과 희망찬 미래상을 형상화한 그림들을 바라본다. 그 중에는 을숙도의 철새들이 도시의 화려한 빌딩 숲을 배경으로 군무를 추면서 푸른 하늘로 비상하는 장면도 있다. 그것은 정녕 평화롭게 잘 사는 조국의 현실과 밝은 미래 그리고 새로운 도약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화자에게는 그 철새들의 비상이 희망찬 도약이나 평화롭게 잘 사는 삶의 상징이기는커녕 오히려 이 땅을 혐오해서 멀리 떠나가 버리는 도피행위의 상징으로 느껴진다. 그 순간 화자는 자신도 이주하는 철새들을 따라 멀리 도피하고 싶은 충동에 빠진다. 그가 인식한 조국의 현실은 스크린의 내용과 달리 암담하고 비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화자가 그와 같은 공상에 사로잡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넘나들 때 애국가 연주는 끝나고 화자는 하릴없이 좌석에 주저앉고 만다. 그에겐 용기도 힘도 없었던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내용 속에서 이 시대 민중의 보편적인 삶이 화자의 그것처럼 독재의 억압 아래서 무기력하고 자포자기하고 있다는 것을 고발한다. 이와 같은 내용의 인용시는 '상황의 시'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전체적으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태도와 완결되고 함축된 진술 속에서 제시된 풍자와 역설이 시의 본질적인 요소라는 것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① 인용시의 상황은 나름대로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으며 극적이다. 여기서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다 함은 시에서 제시된 상황이 과정적인 것의 일부가 아니라 다른 상황과의 경계가 분명하다는 뜻이다. 이 시의 소재가 된 애국가 의식은 화자의 일상 활동과는 분명히 다른 차원에 속한다. 그것은 이미 화자가 영화관에 입장하여 좌석에 앉을 때 시작하는 새로운 사건이다. 동시에 애국가 의식은 본영화의 시작과 함께 그 자체로 끝난다. 즉, 시작과 끝이 분명한 하나의 완결된 상황이다. 한편, 인용시의 상황은 화자(비극의 경우엔 주인공)와 상황(비극의 경우엔 운명) 사이에 갈등이 노정되어있다는 점에서 또한 극적이다. 모든 드라마는 갈등을 본질로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인물이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고 밥을 먹었다는 것도 하나의 상황이지만 여기에는 아무런 갈등이 없는 까닭에 극적인 것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만일 그가 먹는 밥에 독이 들어 있다면 그것은 극적이다. 마찬가지로 인용시의 경우도 스크린의 내용은 정의롭고 희망찬 현실을 보여 주지만 화자에게는 오히려 그것이 가식적이고 절망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는 점에서 이 양자 사이엔 갈등의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② 인용시의 상황은 우화적이면서도 풍자적이다. 예컨대 스크린에 비치는 철새들의 비상은 시인의 환상 속에서 자신을 포함한 이 시대 민중과 동일화된다. 측 철새들은 민중이며 그 비상은 삶의 도피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철새들의 비상은 당대 삶을 우화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비유하는 것과 비유되는 것의 이중구조가 성립한다. 한편, 이 시의 내용은 전체적으로 당대 권위주의 정부 아래서의 민중의 삶을 풍자하고 있다. 풍자란 현실의 일상적 의미를 전도시켜 그 내부에 숨은 진실을 모순 어법으로 드러내는 언술이다. 스크린에 비치는 현실은 평화롭고 정의로운 모습이지만 화자는 오히려 그를 통해 내부의 숨겨진 진실, 위선과 불의가 지배하는 민중의 삶을 드러내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용시는 구조적으로 상승의 상상력과 하강의 상상력이 서로 대립함을 보여 준다. 예컨대 철새들의 비상(상승)과 화자의 착석(하강)의 극적 대비가 그것이다. 이를 통해서 시인은 진실과 허위. 정의와 불의, 희망과 절망이라는 이 시의 주제의식을 시적 상상력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③ 인용시에서 제시된 상황은 단순히 관찰자의 흥미나 호기심의 충족으로 끝나는 삶의 한 국면이 아니다. 거기에는 현실과 사회에 대한 비판, 그리고 바람직한 세계관의 정립에 대한 시인의 메시지가 함축되어 있다. 이와 같은 의미의 총체가 반영되어 있지 않은 단순한 하나의 상황, 구경거리로서의 상황이라면 시가 될 수 없음이 당연하다. 이 시의 상황이 반영하고 있는 의미는 정의로운 사회를 실현하고자 하는 열망과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찰이라고 말할 수 있다

 

   ④인용시의 상황 역시 대부분의 진술들이 시각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것은 마치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달리 말한다면 이 시에서 우리는 어느 한 구석에서도 관념적 표현을 찾아볼 수 없다. 모든 것은 이미지화되어 있고, 구체적 사물로 제시되어 있으며, 감각화되어 있다. 시각적인 것이 아니라면 청각적인 것에 호소한다('자기들끼리 끼룩거리면서/자기들끼리 낄낄대면서' '우리도 우리들끼리/ 낄낄대면서/ 깔쭉대면서/ 우리의 대열을 이루며'). 이와 같은 감각적 표현은 시의 본질적 요소인 것이다.

 

 

   지금까지 필자는 이 시의 내용이 되는 한 인간의 상황이 어떻게 시적 대상으로서의 의미를 획득할 수 있는가를 각각 존재론적 상황과 사회적 상황의 예를 통해 밝혔다. 그러나 그것은 동시에 그것이 시에 채택된 뒤 시상의 전개에 이르는 과정까지도 살펴보는 일이 되었다. 왜냐하면 앞서 지적했듯이 상황의 시'에서는 상황의 내용 그 자체에, '인식의 시'에서 말하는바 시상의 전개가 거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채택된 상황에 대해 시인이 전혀 간섭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큰 틀로 보아 시상의 전개가 이미 결정되어있다 하더라도 시인은 내용의 가감, 선택 혹은 변용, 생략, 재배열 등을 통해 그 시적 의미를 극대화시킬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상황 묘사에서 불필요한 부분은 과감히 생략하고 있다. 시의 주제와 관련되지 않는 사건들은 철저히 배제해야 하는데, 그것은 의미의 함축과 시상의 명징화 그리고 주제의식의 집중이라는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둘째, 내용 가운데서 어떤 것은 과장하거나 늘리면서도 어떤 것은 간략하게 처리해 버렸다. 의미의 함축을 염두에 둔 것이다.

   셋째, 시상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소재의 일부를 선택 혹은 변용시킨다. 독자에게 던지는 주제의식에 맞도록 시상을 전개하기 위하여 시인이 의도적으로 내용을 선택 혹은 변용한 것이다.

   넷째, 이 시의 내용, 사건들의 전개는 시인이 의도적으로 소재들을 재배열시킨 것이다. 그것은 시적 의미를 만들어 내기 위한 장치의 하나라 할 수 있다.

 

 

4.3 이야기체 시

 

 

   인식의 시의 경우에는 우선 발상이 있고, 그 다음 여기서 비롯하는 이미지나 은유 흑은 상징의 연쇄 고리가 내용을 이끌어 간다. 그러므로 발상 다음에 시상의 전개라 부를 수 있는 과정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상황' 혹은 '이야기'가 선정되면서 동시에 네용 그 자체도 결정되는 상황의 시나 이야기체의 시의 경우는 이와 다르다. 이야기 자체가 시의 내용이 되므로 특별히 시상의 전개라 부를 만한 과정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 시에서 우리가 '시상의 전개'라고 하는 것은 시의 내용이 되는 상황 혹은 이야기의 편집이나 구성을 편의상 일컫는 용어라 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미지나 은유 그리고 상징들로 씌어지지 않는 상황의 시나 이야기체의 시에서는 '시상의 전개'라는 표현이 성립될 수 없다.

   이야기체 시의 내용 전개(시상 전개를 편의상 이렇게 호칭하겠다)는 대체로 네 가지 단계를 거치게 된다. 발상, 이야기의 선택(혹은 창작), 배열, 변용이 그것이다 먼저 발상과 그것의 이야기화는 두 가지 경로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하나는 시인의 주관적인 사색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요, 다른 하나는 대상에 대한 관찰 혹은 체험으로 얻어진 것이다(이 경우 대상이란 사물이 아니라 이야기가 될 수 있는 어떤 '사건'을 말한다). 사람은 홀로 사색을 통해 무언가를 깨달을 수 있고 그 깨달음의 진실을 타인(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시인 역시 마찬가지일 터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시에서 '발상'이라 할 그 깨달음의 진실을 독자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그 진실을 하나의 이야기로 꾸며 내게 된다. 발상과 이야기의 창작이 순차적으로 이루어지는 전자의 경우이다.

   한편 인간의 삶은 그 자체가 사건의 연속이며 만일 그가 의미를 추구하는 자라면 그 어떤 사건에서라도 진실을 깨우칠 수밖에 없음은 당연할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그것을 시로 쓰고자 한다면 대상이 되는 사건은 이야기 그 자체이고 그로부터 얻어진 깨달음은 시적 발상이 될 터이므로 이 경우 발상과 이야기는 동시적이다. 후자가 이에 속한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전자 역시 실제에 있어서는 발상과 이야기가 동시적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인간의 의식 활동이란 그 어떤 것도 대상 없이 이루어질 수는 없는 법이어서 언뜻 보기에 대상 없는 사색이라는 것도 기실은 대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관을 대상으로 하는 사색을 편의적으로 일컫는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전자의 경우 홀로 사색하여 무언가 깨닫는다는 것은 주관이 상상하는 이야기를 대상으로 하여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야기체의 시에서는 그 어떤 경우라도 발상과 이야기의 창작은 동시적이다.

   그러나 논의 전개의 편의상 발상과 이야기의 창작을 별도로 나누어서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시인은 우선 시적 발상을 얻음으로써 시 쓰기에 들어간다. 이에 대해서는 앞장에서 자세히 다루었음으로 여기서 다시 논의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둘째, 시인은 발상에서 얻어진 진실을 독자들에게 감동적으로 전달하기 위한매체로서 구체적인 이야기를 꾸며 낸다. 우리는 그것을 이야기의 창작 혹은 이야기의 선택(인간의 삶이 사건의 연속이라는 관점에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창작 혹은 선택이 바로 시의 전체 내용을 결정한다는 것은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다.

 

   그러나 다 알다시피 본래 이야기(narrative)란 시가 아니라 소설이나 서사시 (여기서 소설이나 서사시는 본질적으로 같은 개념이다. 왜냐하면 옛날의 서사시가 오늘에 와서 소설로 정착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오늘의 소설은 현대판 서사시이다)로 표현된다. 물론 옛날에는 시(서정시)에도 이야기를 내용으로 담은 것들이 많이 있었다. 서정시의 하위양식에 속하는 예컨대 발라드나 오드와 같은 양식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의 '이야기체 시'라면 발라드나 오드 같은 시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거의 씌어지지 않으므로(우리의 근대시에서는 가령 김동환의 <국경의 밤>이나 김지하의 <오적>등 몇 편이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논하는 '이야기체 시'의 범주에서는 이들을 제외하였다.

   그렇다면 필자가 여기서 '이야기체 시'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발라드나 오드 같은 것들이 아니라 보편적으로 씌어지는 현대시 (보편적으로 씌어지는 현대시란 엄밀히 규정하자면 넓은 의미의 서정시(Iyric)에 포함되는 여러 하위양식들 중 하나로서 좁은 의미의 서정시(Iyric)를 일컫는다. 이 좁은 의미의 서정시는 '고조된 감정을 짧은 진술을 통해 극적으로 표출하는 형식'으로 앞서 예를 든 발라드나 오드 혹은 소네트, 에피그램, 엘레지 등과 더불어 넓은 의미의 서정시-서사시와 등가를 이루는 개념으로서의 서정시-의 하위양식들을 구성한다) 가운데서 비교적 이야기체의 성격이 짙은 시들을 편의적으로 가리키는 용어이다. 즉, 양식상 발라드나 오드와 같은 '진정한 의미의 이야기체 시(narrative poem)'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야기를 변형 시켜 쓴 시 이다.

   이처럼 여기서 논하는 '이야기체 시'가 고대의 서사시도 아니요, 서정시의 하위양식 가운데서 발라드나 오드와 같은 내레이티브 포엠도 아니요, 이야기체의 성격을 지향하는 일종의 변형된 일반 시라면, 그 내용이 되는 '이야기' 역시 일반 시에 알맞도록 고안된 것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체 시의 소재로서 '이야기'가 지닌 독특한 성격이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앞장에서 다음과 같이 한정하여 설명된 바 있다.

 

① 완결된 이야기여야 한다. 시작과 끝이 분명해야 한다.

② 극적 이어야 한다.

③ 반전이 있어야 한다.

④ 행위 중심이라기보다는 사물 중심의 사건이어야 한다. 압축할 경우 사물에 대한 묘사가 보다 감각적으로 제시 될 수 있는 이야기여야 한다.

⑤ 상징적인 이야기여야 한다. 제시된 이야기는 그 표면적인 의미를 넘어서 어떤 내면화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야 한다.

 

   셋째, 이야기는 시인의 의도에 따라 배열되어야 한다. 즉, 하나의 소재로서 이야기(fable. fabula)는 구성(plot. sjufet)으로 재편되어야 한다. 그것은 나름대로 단편소설이나 드라마의 구성과 같은 내용의 전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교과서적인 전개가 도입, 발전, 갈등, 위기, 결말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바와 같다 원칙이 그렇다면 우리는 이야기체 시의 구성에서 있을 수 있는 여러 가능한 기법들을 상상해 볼 수 있다.

 

① 앞에서 지적한 대로 교과서 적 인 전개

② 먼저 결말을 이야기하고 도입부를 중간에서 진술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순서를 뒤바꾸는 전개. 이는 시인이 어떤 의도를 드러내거나, 특별한 에피소드를 강조하거나, 독자들의 심리를 이용하여 시적 효과를 극대화하려할 때 유용한 전략이다.

③ 특정한 에피소드를 되풀이 중첩시키는 전개

④ 두 개의 다른 이야기들을 대비시키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전개

⑤ 액자식 전개, 즉 큰 이야기가 하나 있고 그 틀 안에 다른 이야기가 삽입되는 식의 전개

⑥ 회고적인 방식으로 이야기를 서술하는 전개

⑦ 연상에 의하여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 식의 전개. 이 경우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에는 사건의 필연적 연관성이 없다. 주제, 이미지 등에 의해서 어떤 동질성을 지닐 뿐이다.

 

한편, 이야기체 시는 이야기를 내용으로 담는다는 점에서 또한 시점의 문제가 제기된다. 이 역시 소설처럼 여러 유형이 있을 수 있다.

 

① 일인칭('나') 주인공의 시점. 이 때는 '나(화자)'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전개되는 사건이 시의 내용을 이룬다.

② 일인칭('나') 참여자의 시점. 이 때 '나(화자)'는 이야기 안에 등장하지만 주인공이 아니라 사건에 연루된 인물 중의 하나이다.

③ 삼인칭('그')이 주인공이면서 사건은 오직 그가 볼 수 있는 것만 기술하는 시점. 소위 삼인칭 관찰자적 시점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의 화자는 삼인칭의 관점에서 사건을 서술할 뿐이다.

④ 삼인칭(‘그')이 주인공이지만 화자는 삼인칭의 관점에 국한되지 않고 모든 것을 기술할 수 있다. 소위 삼인칭 전지전능자 시점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때 시의 화자는 마치 하느님과 같은 위치에 있어 삼인칭 주인공이 모르는 것에 대해서도 서술할 수 있다.

⑤ 이인칭('너' 혹은 '당신')이 주인공이 되는 사건을 기술할 경우가 이에 속한다. 화자는 시에서 '당신'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넷째 이야기체 시의 배열은 시적으로 변용되어야 한다. 앞에서 필자는 이야기체 시의 배열에 대해 언급하였으나 실제 이야기체 시의 창작에서 이와 같은 교과서적 구성의 틀이 지켜지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다. 양식 자체가 소설이나 드라마가 아니며 무엇보다도 길이의 제한이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길어야 20~30행 내외가 되는 시에서 단편소설이나 드라마에 맞는 구성은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그리하여 이야기체 시에서의 이야기 구성은 시에 알맞도록 대폭적으로 변형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은 변형에 어떤 원칙이나 규범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다음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① 무엇보다도 극도의 압축이 필요하다. 전체의 내용을 골격만으로 재구성하여 길이를 대폭 줄여야 한다. 압축의 요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이야기전체를 구성하는 단락들 가운데서 일차적으로 주요단락만 남기고 나머지 것들(예컨대 보유단락이나 연락단락. 강조단락이나 수식단락 등)은 과감하게 제거시킨다. 둘째, 남겨 둔 주요단락에서도 주제문(topic sentence) 이외의 것들은 모두 생략해 버린다. 셋째, 그리하여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이 주제문들을 연결하면 압축된 줄거리가 된다.

② 소설이 아닌 한 도입 발전, 갈등, 위기, 결말과 같은 과정을 꼭 지킬 필요는 없다. 즉, 이 중 어떤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여 핵심적이고 극적인 부분을 간결하게 서술하는 요령이 있어야 한다.

③ 인물이나 사건의 기술에서도 불필요한 것은 생략한다. 가령 디테일이나 성격 묘사 같은 것은 그 대표적인 예들 중 하나이다.

④ 묘사는 주관적이어야 하며 정서적 표현에 의존해야 한다. 소설의 경우 객관적이면서 사실적인 묘사가 요구되나 시의 경우는 오히려 그 반대라 할 수 있다. 리얼리즘이란 시와 거리가 먼 것이다.

⑤ 비약과 암시의 기법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사건을 직핍하게 서술하지 않고 독자들이 상상력을 통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좋다.

⑥ 묘사는 기본적으로 이미지나 비유에 의존해야 한다. 인물 묘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가령 좌절감에 빠져 있는 주인공을 그릴 때 폐허에 버려진 동전으로 제시한다든지 주인공 그 자신을 묘사할 경우라도 가령 그의 '눈에 깔리는 어 두운 구름'과 같은 이미지로서의 묘사 등이다.

⑦ 순간적이면서도 직관적으로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상상력의 논리로 이끌어 가야 한다. 사건은 지적인 태도에서가 아니라 상상력에 의해서 이해되어야 한다.

⑧ 비유체계나 다른 시적 장치들, 예컨대 상상력의 이원적 대립이나 등가성의 반복이나 역설이나 아이러니, 풍자 등이 구조적으로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⑨ 진술은 산문의 단락 형태나 일반 시의 행연 구분 형태 그 어느 것으로도 할 수 있지만, 시인 까닭에 가능한 한 언어의 음악적 기능을 살려야 한다. 언어의 음악성 역시 정형률을 따를 수도 있고 자유율을 따를 수도 있겠지만 특별히 내재율을 아름답게 구사할 수 있으면 좋다. 여기에는 여러 형태의 반복이라든가 호흡단위의 조절, 자음과 모음의 교묘한 배합, 소위 음운배열(orchestration)과 같은 기법이 두루 원용될 수 있을 것이다.

 

바닷물이 넘쳐서 개울을 타고 올라와서 삼대 울타리 틈으로 새어 옥수수밭 속을 지나서 마당에 흥건히 고이는 날이 우리 외할머니네 집에는 있었습니다. 이런 날 나는 망둥이 새우새끼를 거기서 찾노라고 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 알발로 낄낄거리며 좇아다녔습니다. 항시 누에가 실을 뽑듯이 나만 보면 옛날 이야기만 무진장 하시던 외할머니는 이 때에는 웬일인지 한 마디도 말을 않고 벌써 많이 많이 늙은 얼굴이 엷은 노을빛처럼 불그레해져 바다 쪽만 멍하니 넘어다 보고 서 있었습니다.

그 때에는 왜 그러시는지 나는 아직 미처 몰랐습니다만, 그분이 돌아가신 인제는 그 이유를 간신히 알긴 알 것 같습니다. 우리 외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먼 바다로 고기잡이 다니시던 어부로, 내가 생겨나기 전 어느 해 겨울의 모진 바람에 어느 바다에선지 휘말려 빠져 버리곤 영영 돌아오지 못한 채로 있는 것이라 하니,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 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지요.

-서정주. (해일). 전문

 

인용시의 시적 대상은 바다의 해일이다. 이를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외할머니집의 마당에까지 차오르는 해일 때의 바닷물과 여기에 얽힌 어떤 이야기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시에는 일반적인 시, 즉 '인식의 시'와 달리 주인공이 등장하며 그 주인공이 중심이 된 하나의 사건이 내용을 이룬다. 이야기체 시의한 전형 인 것이다.

시인은 이와 같이 한 사건을 시적 대상으로 하여 하나의 발상을 얻는다. 그것은 바다의 해일이란 우주적인 리비도(사랑의 욕망)의 표출이라는 생각이다 기본적으로 이 시가 시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이 '해일'의 의미를 지구과학적인 뜻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이를 초월해 이와 같은 총체적인 진실-존재론적 진실-에 도달하였다는 점에 있다. 왜냐하면 '해일'의 지구과학적 의미는 '화산의 폭발 또는 해상의 폭풍으로 인하여 바다의 큰 물결이 갑자기 일어나 육지로 넘치어 오르는 일'인 까닭이다. 이 시에서 시인은 해일에 관해 기술하면서 그 어디에도 지구과학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바다의 큰 물결(지구과학적 의미)'이 '우주적인 리비도의 표출(총체적 진실, 즉 시적 진실)'로 전환될 수 있는 시인의 생각이야말로 시적 발상이었던 것이다.

이 시는 바다를, 거기에 빠져 죽은 외할아버지와 일원화하여 남성적 리비도의 상징으로 등장시킨다. 반면 외할아버지의 죽음으로 홀로되어 수년을 수절하고 있는 외할머니는 물론 리비도의 충족을 갈망하는 여성성의 상징이다. 따라서 해일을 통해 집 마당에 밀려온 바닷물과 홀로된 외할머니(여성성)의 만남은 리비도의 충족행위로 설명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아마 외할머니는 그 남편의 바닷물이 자기 집 마당에 몰려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렇게 말도 못하고 얼굴만 붉어져 있었던 것이지요'라는 진술이 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이 인용시는 해일에 얽힌 이야기에서 시적 발상을 획득하는 순간 그 대상으로서 '해일에 얽힌 이야기' 그 자체는 이미 하나의 시적 내용으로 결정되어 버린다. 문제는 그 이야기를 어떻게 배열하고 그것을 또 어떻게 변용시켜 시적 차원으로 끌어 올리느냐 하는 것이다.

우선 그 배열부터 살펴보면 첫째, 인용시는 그 시점에서 일인칭 참여자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시의 내용은 화자('나')가 그 자신의 관점에서 그가 체험한 한 사건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가 체험한 한 사건이란 물론 그가 어렸을 때 주인공인 외할머니가 겪은 한 사건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의 '나'는 주인공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사건에 참여하고 있는 자이다.

둘째, 이야기의 구성을 보면 두 가지 특징이 드러난다. 하나는 액자형 구성이며 다른 하나는 회고적 구성이라는 점이다. 이 시는 길이가 매우 짧지만 큰 틀의 이야기(액자) 속에 다른 핵심적인 이야기(내용)가 담겨져 있다는 점에서 액자형 구성을 취한다. 큰 틀의 이야기는 화자('나')가 겪은, 어린 시절 외할머니 집의 해일에 관한 것이다 대체로 이 시의 첫 단락을 구성하고 있는 이 부분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어린 시절 해안가에 있는 외할머니 집에는 가끔 큰 해일이 일어 바닷물이 집 마당까지 올라온다는 것 그런 매는 파도에 휩쓸려 올라온 고기들을 줍는 데 정신이 팔린다는 것, 그 때 우연히 본 할머니의 볼이 지는 노을에 반사되어 유난히 붉었는데, 꼭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다는 것 등이다. 그런데 할머니의 볼이 왜 유난히 해일이 있는 날에만 더 붉느냐 하는 의문을 설명하는 부분이 제2단락이자 이 시의 액자형 구성에서 그 안에 담겨지는 핵심 내용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외할아버지의 옛날이야기를 소개한다. 외할아버지는 원래 어부였다는 것,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다가 어느 해의태풍으로 익사했다는 것, 바닷물에는 외할아버지의 육신이 녹아 있다는 것, 따라서 해일에 외가집 마당에 올라온 바닷물은 외할아버지 그 자신이라는 것, 외할머니가 그 해일을 보고 얼굴을 붉히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 등이다.

이처럼 액자형 구성을 갖고 있는 이 시의 내용은 또한 회고적 수법을 원용한다. 그것은 모든 이야기가 현재에서부터 과거로, 과거에서부터 대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하며 그 결론은 다시 현재로 되돌아와 맺어진다는 데에서 그러하다. 이야기는 현재의 화자가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것은 물론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유년시절에 경험했던 외할머니 집의 해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더 진전하면 이야기는 그보다 더 먼 과거 -화자가 세상에 태어나기 이전-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부였던 외할아버지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이렇게 이 시의 이야기는 과거의 과거를 현재의 시점에서 회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결국 현재로 돌아와 끝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외할머니의 볼이 해일이 일 때마다 그렇게 유난히 붉었던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이유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화자의 시점이 바로 현재이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이 시의 이야기 배열은 이제 시적 차원으로 변용되는 마지막 과정을 거친다.

 

① 이야기의 내용은 극도로 압축되어 있다 본문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시의 진술은 한 편의 소설로 쓸 수 있는 내용을 불과 두 개의 단락으로 처리하였다. 그것은 이야기를 구성하는 각개의 에피소드에서 주요한 단락의 토픽 센텐스 다섯 개만을 간추려 정리해 놓는 데서 가능한 것이다. 소설이라면 각개 토픽 센텐스 하나만을 가지고도 작은 이야기(에피소드) 하나를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고 또 그러해야 할 것이다. 이들 토픽 센텐스들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외가집은 해일이 들 때 바닷물이 마당까지 넘친다. 그런 날 나는 파도에 휩쓸려 밀려온 물고기들을 줍기를 좋아했다. 해일이 일 때 할머니의 볼은 유난히 붉어 보였다. 외할아버지는 바다에 고기잡이를 나가 폭풍으로 익사하였다. 해일로 마당에 밀려온 바닷물을 보고 외할머니가 부끄러워하며 볼을 붉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② 소설이 아닌 한 도입, 발전, 갈등, 위기, 결말과 같은 과정을 꼭 지킬 필요는 없다. 앞의 시의 내용에서 발전이나 갈등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이야기들은 과감하게 배제하였다 극적인 부분, 즉 클라이맥스에 해당한 내용만이(외할아버지의 익사와 외할머니의 볼그레한 볼) 강조되고 있다.

③ 인물이나 사건의 기술에서도 불필요한 것은 생략한다. 예컨대 외할아버지나 외할머니에 대한 인물 묘사나 성격을 설명하는 내용이 전혀 없다. 외할아버지가 탄 어선이 어떻게 생겼다든가 그 날의 날씨가 어떠하다든가, 배가 떠날 때의 부두의 정경이나 외할머니의 심정이나 다른 선원들의 모습 등에 대한 기술도 제외되어 있다.

④ 묘사는 주관적이어야 하며 정서적 표현에 의존해야 한다. 예컨대 첫 부분,즉 해일이 일어 바닷물이 집의 마당까지 넘쳐나는 상황을 묘사하는 데 시인은 마치 바다가 생명체처럼 살아 움직이는 존재인 것같이 그리고 있다. 그리고 넘치는 바닷물이 통과해 오는 과정을 개울 삼대 울타리 옥수수밭 등으로 한 것도 시인 자신의 자의적이고 주관적인 선택이다.

⑤ 비약과 암시의 기법을 십분 활용해야 한다. 예컨대 외할아버지의 장례는 어떻게 치렀는지,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외할머니께서는 어떻게 살아오셨는지 등의 이야기는 생략된 채 외할머니의 늙음을 단적으로 이야기한 것은 비약에 속하고 외할아버지에 대한 외할머니의 그리움을 단지 '바다 쪽만 멍하니 바라보는' 행동으로 제시한 것은 암시적 기법이다.

⑥ 묘사는 기본적으로 이미지나 비유에 의존해야 한다. 이 시는 하나의 이야기가 내용으로 되어 있지만 그것의 문학적 형상화는 대부분 이미지나 비유로 처리하고 있다 가령 화자의 유년시절 철없이 놀기 좋아하는 성격을'이빨 속까지 너무나 기쁜 종달새 새끼 소리가 다 되어……로 묘사한다거나 외할머니의 이야기 솜씨를 '누에가 실을 뽑듯이 하는 이야기, 외할머니의 불그레한 볼을 '노을빛처럼' 고운 볼 등으로 묘사한 것 등이다.

⑦ 순간적 이면서도 직관적으로 의미를 파악하고 그것을 상상력의 논리로 이끌어 가야 한다. 이 시의 주제라 할 우주적 리비도의 표출을 바다의 해일에서 이끌어 낸 것은 기본적으로 상상력에 의해서 가능한 것이다. 시인은 바다에서 원형 상상력으로서 여성의 생식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보편적인 리비도의 충동을 발견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 이 시의 형상화에서 핵심이 되는 이미지 즉 바닷물의 넘침과 외할머니의 관계를 사랑하는 남녀의 재회로 해석한 것 역시 상상력의 논리에서 가능한 것이다.

⑧ 비유체계 등 다른 시적 장치들, 예컨대 상상력의 이원적 대립이나 등가성의 반복, 역설이나 아이러니, 풍자 등이 구조적으로 제시되어 있어야 한다. 이 시에서는 크게 바다와 대지, 더욱 구체적으로 바닷물과 집 안마당이라는 두 개의 상상력이 이원적 대립을 구축하고 있다. 바다 혹은 바닷물이 남성을, 대지 혹은 안마당이 여성을 상징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이 대립항들은 바닷물과 안마당이 만남으로써 하나로 일원화된다. 주제적으로 리비도의 충족에 해당하는 기능이다.

⑨ 진술은 산문의 단락 형태나 일반 시의 행연 구분 형태 그 어느 것으로도 할 수 있지만, 시인 까닭에 가능한 한 언어의 음악적 기능을 살려야 한다. 인용시는 이야기체 시이면서 동시에 산문시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모든 시적 진술은 행과 연을 구분하는 방식이 아니라 단락으로 연결되는 방식으로 처리된다. 그렇다고 해서 산문처럼 언어의 리듬감을 무시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비록 외적인 율격은 나타나 있지 않지만 내재적인 리듬감이 살아 있다. 그것은 주로 낭독에 적당한 호흡단위에 맞추어 문장의 길이를 조절하는 구문형식에 의존한다. 그 외에 여기에 낭독에 있어서 쉬는 부분을 배려하고 어법적인 차원에서의 어구를 반복시키는 것 등도 일조하고 있다. 예컨대 첫 문장에서 '넘쳐서', '올라와서', '지나서' 등 ‘……서’를 세 번이나 반복시킨 것은 분명 시행의 음악적 기능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4.4 인식의 시

 

필자는 앞에서 이야기체 시와 상황의 시에 대하여 그 시상 전개(구상)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현되었는지를 살펴보았으므로 이제 사물(인식)의 시에 국한하여 그것을 보다 자세하게 검토해 보기로 한다. 시의 본령은 어디까지나 사물의시에 있기 때문이다.

발상이란 시가 될 수 있는 하나의 생각이다. 그것은 씨앗, 즉 종자가 발아시킨 새싹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나 새싹은 아직 성숙한 나무는 아니다. 새싹이성숙한 한 그루의 나무가 되기 위해서 시간을 기다려 가지를 뻗치고 꽃과 나뭇잎을 피워 올려야 하는 것처럼 시 역시 발상에 따른 많은 생각들과 이미지들 및 정서들을 결합시켜 하나의 유기체를 완성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 필자는 발상이 시가 될 수 있는 하나의 완결된 상상력의 유기체로 나아가는 과정을 시상의 전개라 부르려 한다.

 

나의

손가락 사이로

모든 것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어린 날의

모래톱이며

냇물이며, 앓는 밤의

출렁이는 검은 물결이며

첫사랑이며

쫓다가 놓쳐 버린 사슴.

그것은

나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 흔적으로

달이 있다.

달빛에 비춰 보는 빈손.

그리고

산마루에서 발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사슴이 있다.

좀생이 별 아래서

고개를 돌리고

영원히.

-박목월. <회수(回首)>, 전문

 

인용시는 '손'을 대상으로 하여 쓴 작품이다. 그러므로 그 발상의 대상은 '관념'이 아니라 '사물'이라 할 수 있다 손'이란 '사랑'이나 '죽음' 따위와 같은 관념이 아니라 구체적인 감각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에서 '손'은 시인의 사적 대상이기도 하다. 시인은 '손'에서 그만이 체험한 자신의 이야기를 시로 쓴다. 다른 고전이나 역사, 신화 등 집단이 공유한 어떤 문화유산에서 빌려와 그것을 자신의 이야기로 전용해 쓰지 않았다. 이렇듯 우선 이 작품은 시적대상으로 사적인 사물을 선정하였다. 즉, 시인은 '손'이라는 사물을 사적인 의미로서 접근하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손'이라 하면 그것은 너무 막연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보다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으로 제한되지 않으면 안 된다 앞에서 또한 밝힌 바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대상은 시적 의미를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시인은 이차적으로 '손'에 몇 가지 구체적인 상황을 부여한다. 첫째, 그 손은 '노년(老年)의 손'이다 젊은이의 손이나 소년의 손, 유아의 손이 아니다. 둘째, '빈손'이다. 주먹 쥔 손도, 벌린 손도, 움켜쥔 손도, 애무하는 손도 아니다. 셋째 , 편안한 손이다. 그것은 관능을 자극하는 여인의 손이나 노동자의 거친 손, 걸인의 힘없는 손이 아니다. 이처럼 시인은 '손'이 수반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 가운데서 특별히 '노년의 편안한 빈손'이라는 특수하고도 구체적인 손을 설정하여 시적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 구체적이고도 특수한 것으로서의 시적 대상은 중요하다. 바로 이 대상이 지닌 '구체적이고 특수한 것'의 성격이야말로 특별한 시적 발상과 그 발상에서 비롯하는 시상의 전개를 결정짓기 때문이다. 시인의 개성은 특출한 것이어서 꼭 그러하지는 않겠으나, 만약 젊은 여인의 애무하는 손이라면 시상의 전개는 대체로 사랑과 관능의 이야기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 손이 젊은 노동자의 주먹쥔 손이라면 시상의 전개는 아마도 노동쟁의나 파업 같은 사회문제로 전개되었을 것이고, 유아의 움켜쥔 손이라면 생명의 환희나 가정의 행복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또한 노년의 힘없이 벌린 손은 영락한 삶의 회한으로 전개되었을 것이고, 귀부인의 부드럽고 하이얀 손은 사치와 향락의 즐거움으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노년의 주먹쥔 손이라면 통한(痛恨)의 이야기로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가능성 가운데서 박목월은 굳이 '노년의 편안한 빈손'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했고, 그 결과 그는 '손'을 대상으로 하여 위와 같은 시상을 전개할 수 있었다. 구체적이고도 특수한 것으로서의 시적 대상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 에 있다.

그렇다면 박목월은 '노년의 편안한 빈손'을 통해 어떤 시적 발상을 얻은 것일까. 우선 그는 최소한 대상이 지닌 의미 가운데서 과학적 의미가 아닌 것을 추구했을 것이다. 과학적 의미 혹은 논리적인 의미란 문자 그대로 과학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시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람은 팔목에 다섯 개의 손가락과 손바닥이 있어 그것으로 온갖 일을 잡아 하는데, 지금나이 든 그는 이제 하는 일이 없어 손을 편히 놀리고 있다'와 같은 내용을 글로 쓴다면 그것은 사실적 논리적 과학적 의미가 되는 까닭에 결코 시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시인은 최소한 이러한 과학적 의미가 아닌, 즉 비논리적이면서 존재론적인 어떤 의미를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무엇일까.

시인이 '노년의 편안한 빈손'에서 보았던 것은 '삶의 무상', 즉 덧없음이었다. 그러나 과학적, 혹은 사실적인 차원에서 볼 때 빈손이 삶의 덧없음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 빈손이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쥐지 않은 상태의 손일 뿐이다. 설령 그것을 의미 있게 해석한다 하더라도 사실적 차원에서 그것은 아무것도 갖지 않은 것이나 삶의 여유를 가리키는 것 이상이 될 수는 없다. 예컨대 돈이 많아 이 생의 세속적인 행복을 누리는 자는 일을 하지 않고 빈손으로 빈둥빈둥 놀며, 가난해서 노동하는 자가 오히려 항상 손에 짐을 든다. 그러므로 '빈손'에서 삶의 무상 혹은 덧없음의 의미를 추적해 낸다는 것은 사실적 ·논리적 차원을 넘어선 것임을 알 수 있다. 즉, 존재론적으로 혹은 상징적으로 볼 때 깨우친 의미이다 그렇다면 존재론적인 차원에서 빈손이 어떻게 삶의 무상 혹은 덧없음의 의미가 될 수 있는가.

손이란 무엇인가를 붙잡는 기능에 그 본질이 있기 때문에 붙잡는다는 것은 욕망을, 붙잡힘의 대상은 욕망의 대상을 상징한다. 손은 또한 존재 확인의 상징이기도 하다. 우리는 무언가 미심쩍은 것, 불확실한 존재를 손으로 만져 보고 그 실체를 확인한다. 동시에 손은 소유의 상징이다. 손으로 무엇인가를 쥔다는것, 즉 '손에 쥐었다' 혹은 '손 안에 들었다'는 말은 곧 그것을 자신의 소유물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손은 생산 혹은 창조의 상징이다. 인간은 무엇이든 손으로 만든다. 농경을 통한 식량의 생산이 그렇고, 제품의 제작이 그렇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보편적인 상상력에서 손은 욕망, 존재, 소유, 생산 등을 함축한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손으로 상징된 이와 같은 가치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노년의 어느 날 시인은 우연히 그와 같은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을 때 문득 그 안이 텅 비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손으로 상징되는 '욕망', '존재', '소유', '생산'과 같은 젊은 시절의 가치들이 일조에 덧없이 사라지고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텅 비어 있는 손'의 상징으로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생의 무상', 혹은 '허무'임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일상의 삶에서 지고한 것으로 여기는 욕망의 충족이나 현실에 대한 실체적 믿음, 정신적 물질적 가치의 소유 혹은 그것의 창조가 사실은 하나의 허상이라는 것을 이 '빈손'의 상징이 암시해 주고 있는 까닭이다. 그것은 곧 일상적 삶의 부정을 뜻한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시인의 이러한 깨달음이 노년에 들어서 가능했다는 사실이다. 왜 그런 것일까. 한마디로 젊음이 생성과 충만의 상징임에 비해서 노년이란 사라짐 혹은 소멸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이 시인이 '젊은이의 빈손'을 대상으로 하여 시를 썼다면 이 시처럼 삶의 덧없음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아마도 '삶의 재기' 혹은 '생의 의지'와 같은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노년의 편안한 빈손'이 삶의 무상과 덧없음으로 파악되는 것은 비논리적이면서도 존재론적 차원에서만 가능한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이제 시인은 이처럼 시적 대상인 '손'에서 '삶의 무상' 혹은 '덧없음'이라는 발상을 얻어 최초로 시가 될 수 있는 첫걸음을 떼게 된 것이다 다음 차례는 이와 같은 발상을 어떻게 끌고 나아가 한 편의 완결된 상상력의 체계로 만들 것인가 하는 문제, 즉 시상의 전개이다. 그것은 크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상상력으로 진행되어 간다. 하나는 ‘소멸(消滅)'의 상상력이요 다른 하나는 '불멸(不滅)'의 상상력 이다.

소멸의 상상력은 '손'으로 상징된다. '풀리는 손'과 '틈새가 있는 손'의 상상력에 의해서이다. 손 안에 움켜쥔 내용물이 소멸될 수 있는 것은 손이 풀려 내용물을 놓치든지 벌어진 손가락 틈새로 내용물이 흘러내리든지 두 가지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① 풀리는 손 :움켜쥔 손은 오래 가지 않는다. 언제인가는 풀린다. 손은 유기체인 인간의 한 부분인 까닭이다.

② 틈새가 있는 손 :설령 그 움켜쥠이 아직 풀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 내용물은 사라지게 마련이다. 왜냐하면 손은 손가락으로 움켜쥐는데,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에는 기본적으로 틈새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인이 자신의 손 안에 움켜쥐었다가 놓쳐 버린 내용물은 아마도 그의 생에서 가장 값진 것들이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값진 것을 놓치지 않고서는 삶의 무상과 같은 존재론적 깊이의 깨달음을 체득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 보다 값진 것을 잃을수록 그에 비례해서 생의 무상감은 더 절실해진다. 그러므로 시인은 시에서 자신의 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으로 묘사해야 함은 당연하다. 그렇다면 그 생의 가치 있는 것이란 무엇일까.

시인에게 그것은 첫째 사랑-첫사랑, 둘째 아름다움, 셋째 영원한 삶, 넷째 성스러움, 다섯째 순결함, 여섯째 완전함 등이다 이제 남는 것은 그가 생각했던 이 생의 이와 같은 지고한 가치들을 어떤 상징을 통해 제시하느냐 하는 문제인데, 여기에는 하나의 절대절명의 조건이 붙는다. 그것은 그 상징들이 최소한'손'에 쥐어질 수 있는 것들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것은 이 시의 핵심 이미지, 중심되는 상징이 '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 상징들이 손과 관련이 없는 것들이라면 혹은 손에 쥐어질 수 없는 것들이라면 이 시의 전체적인 체계에 적합한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아무리 이상에서 지적한바 시인의 생의 가치를 이상적으로 함축한 상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시의 완결성과유기성이라는 관점에서 적합하지 않으면 마땅히 배제되어야 할 것임은 당연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부적절한 상징들을 동원하여 시상을 끌어간다면 거기엔 필연적으로 이미지들과 이미지들 사이에, 혹은 상상력과 상상력 사이에 부정적인 의미의 단절과 비약, 어긋남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럴 경우 시는 무책임한 난해성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시인은 그의 생에서 가장 소중하다고 생각했던 이상의 가치들을 어떤 상징으로 형상화시켰는가.

첫째, '사랑'은 특별한 상징으로 제시하지 않고 관념 그 자체로 직접 언급하였다(‘흘러내렸다. /……/……/첫사랑이며……’).

둘째, 아름다움과 영원함과 성스러움은 '사슴'으로 상징하였다. 신화적으로 사슴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름답고 성스럽고 영원한 것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사슴은 우선 보기에 가장 아름다운 동물이다. 또한 사슴은 그 뿔이 매년 겨울에 떨어져 나가지만 봄부터 다시 자라기 시작하여 새로 거듭나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력의 존재로 여겨져 왔다. 일찍이 동양에서 십장생의 하나로 간주했던 것, 도교에서 사슴을 신선의 벗으로 추앙했던 것, 유럽에서는 사슴을 신의 심부름꾼으로 보았던 것도 다 이와 관련이 있다.

셋째, '순결함'의 가치는 유년의 삶으로 상징하였다. "누구도 어린아이와 같지 않고서는 천국에 갈 수 없다"는 성서의 말과 같이 어린아이, 즉 유년이란 때 묻지 않은 순결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은 이 유년의 삶을 가시적이고 구체적이며-더욱이 '손'의 상징과 관련시켜 형상화하기 위하여-보다 극적인 예를 들어 선택한다. 그것은 유년시절 강가의 모래톱에서 물장난을 치던 에피소드이다. 모래성을 쌓을 때 손바닥에 움켜쥔 모래가 땅으로 흘러내리던 경험, 두 손으로 뜨던 냇물이 실없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려 빈손이 되던 경험 등이다. 그리하여 종국적으로 '순결함'의 가치는 유년시절의 물장난으로 환치된다.

넷째, 완전함의 가치는 성숙에 눈을 뜨는 아픔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에 적합한 이미지를 '밤을 지새우는 아픔'으로, 다시 그것의 이차적 전용인 '출렁이는 검은 물결'로 제시한다. 시인에게 있어서 생의 완전함에 이르는 과정이란 존재의 아픔을 통해 생을 성찰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빈손'의 상상력으로부터 전개된 이상의 제 상징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손으로 움켜쥘 수 있는 사물과 손바닥으로 뜰 수 있는 사물들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시인은 손이 풀려 움켜쥔 내용물을 놓치는 것의 상상력으로 '첫사랑'과 '사슴'을, 손가락의 틈새로 흘러 사라져 버린 것의 상상력으로 '모래톱', '냇물', '검은 물결' 등의 이미지들을 선택한다.

 

① 풀리는 손에서 전개된 상상력의 산물 : 첫사랑, 사슴

② 틈새가 있는 손에서 전개된 상상력의 산물 : 모래, 냇물, 검은 물결, 밤

 

그리하여 '빈손'에서 삶의 무상이란 발상을 얻은 시인은 전반부의 다음과 같은 시 행을 얻을 수 있었다.

 

나의

손가락 사이로

모든 것은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어린 날의

모래톱이며

냇물이며, 앓는 밤의

출렁이는 검은 물결이며

첫사랑이며

쫓다가 놓쳐 버린 사슴.

그것은

나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이쯤 되면 생의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덧없이 잃음으로 해서 깨닫게 된 시인의 무상감은 시에서 적절히 표현되었다고 말해야 할 깃이다. 그러나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비록 자신(존재)이 유한하다 하더라도 이 세계까지 유한하다고 생각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자신이 가장 지고하게 여겼던 것이 단순한 소멸 그 자체라면, 그리하여 그것이 무(無)로 끝나는 것이라면 그 생은 무의미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시인 역시 바로 무의미가 본질인 이 생을 한낱 환상의 신기루처럼 좇다가 사라지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인은 그 삶이 비록 무상하고 덧없다 하더라도 이 세계가 무이며, 무의미한 환상이 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시인이 삶을 무상하게 본 것은 세계 그 자체가 무의미해서가 아니라 그 세계 앞에 서 있는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자각에서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록 그가 삶의 무상을 깨달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이 세계는 영원한 것이며 의미 있는 것이고, 완전한 것으로 남아 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 영원하고 의미 있고 완전한 세계의 실체는 절대자 혹은 신일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시에서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 세계의 영원성에 반하는 자신의 유한성이지 세계의 무의미성은 아니다 즉. 그가 이야기하고자 했던 것은 이 세계의 영원성에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유한성과 이에서 비롯하는 좌절감이다 시인은 그것을 체념 혹은 달관으로 달래고자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시의 발상이라 할 삶의 무상'이란 '세계의 영원성에 도달할 수 없는 자신의 유한성을 체념 혹은 달관으로 달래려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우리는 소멸'의 상상력을 통해 시인의 존재론적 유한성을 살펴보았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자신 앞에 버티고 서 있는, 그러나 자신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 세계의 영원성과 그에 대한 자신의 관계에 관해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멸'의 상상력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 시의 후반부가 바로 그것이다 여기서 시인이 제시한 심상들이 '달'과 '별'이다. 달리 말해 시인은 이 세계의 영원성을 상징시키는 심상들로 '달'과 '별' 그리고 '산마루'를 채택한 것이다.

달이나 별은 말할 것도 없이 영원불멸을 상징한다. 달은 기울고 차오르면서 끝없는 우주 순환을 되풀이한다. 별은 영원히 하늘에서 빛난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달은 죽음과 재생의 영원성을, 별은 불변하는 이념을 상징하지 않던가. '산마루' 역시 마찬가지이다. 산, 그 중에서도 산봉우리는 하늘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으므로 대체로 신성시되었다. 그것은 신이 거주하는 공간이요, 신이 거주하는 공간이기에 또한 영원한 세계이기도 하다. 한국인들에게 '산신령'이라는 개념이,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신들의 거주지로 올림포스산의 개념이, 기독교인들에게 에덴동산이라는 개념이, 불교에 수미산이라는 개념이, 인도 신앙에서세계의 중심으로 메루산이라는 개념이 보편화되어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영원성을 상징하는 심상으로 별과 달과 산을 채택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너무 당연한 것이어서 오히려 상투적일 정도이다.

어떻든 시인은 '달'과 '별' 그리고 '산'의 상징을 통해 그가 대면한 세계는 존재가 유한한 것과 달리 영원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충분히 담을 수 있었다. 그것은 존재의 유한성을 상징하는 소멸'의 상상력으로서 '덧없이 흘러가 버리는 냇물'이나 '손바닥에서 흘러내린 모래' 그리고 '달아나 버린 사슴' 등과 적절하게 대조되는 '불멸'의 상상력의 체계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는 문제는 이들을 이시의 핵심 이미지 혹은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손'과 어떻게 관련시키는가 하는 것이다. 이 시의 주제를 이끌어 가는 영원 혹은 '불멸'의 상상력에 아무리 적합한 것이라 해도 그것이 만일 이 시의 핵심 이미지 '손'과 아무 관련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이 시는 전체적인 통일성을 잃고 산만해지거나 난삽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박목월은 대시인답게 그것을 아주 능란하게 처리해 버린다. 빈손을 비춰 보는 달('달빛에 비춰 보는 빈손')과 놓친 사슴을 비치는 별('사슴이 있다. /좀생이 별아래서/고개를 돌리고')로의 이미지 전용이다. 이렇게 되면 달과 별은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손과 관련될 수밖에 없다. 전자의 경우는 달이 손을 비춰 보는 거울이 된다는 점에서 직접적으로 손과 관련이 되며 후자의 경우는 손에서 놓친 사슴을 별이 비춰 보고 있다는 점에서 간접적으로 손과 관련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에서 '달'을 '거울'의 이미지로 상승시킬 수 있었던 것은 박목월의 탁월한 상상력의 결과이다. 그러나 동서양의 고전을 보면 한밤에 휘영청 뜬 달을 거울로 묘사한 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헤어져 멀리 있는 임을 달빛으로 거울을 삼아 바라보는 모티프 등이다.

어떻든 시의 후반부에서 시인은 이 세계가 지닌 영원성, 즉 '불멸'의 상상력을 달과 별과 산으로 제시하고 그것을 손과 관련시켜 '빈손을 비추는 달빛'과 '좀생이 별 아래 산마루에서 고개를 돌리고 있는 사슴'으로 묘사하였다. 그런데 그 불멸의 상상력을 함축한 '별', '달', '산마루'가 관련을 맺고 있는 '빈손' 그리고 '사슴'은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소멸 혹은 덧없음의 상상력을 함축한 것들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시인이 '별', '달', '산마루'를 '손'과 '사슴'에 결합시킨 것은 ① 핵심 이미지와 부차적 이미지의 결합과 ② 이 시의 상반하는 두 상상체계 즉 소멸의 상상력과 불멸의 상상력을 결합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제 ①의 필연성에 대해서는 앞에서 밝힌 바 있으나 ②에서 시인이 보여 주고자 하는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종국적으로 이 시의 주제라 할 유한성과 영원의 거리, 또는 존재와 세계의 단절을 이야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선 달이 이 세계의 영원성을, 빈손이 유한한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라면 이 달빛의 거울에 비친 빈손에서 시인은 분명 이 생의 덧없음과 영원에 도달할 수 없는 허무를 깨우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산마루의 좀생이 별 아래서 놓친 사슴이 뒤를 돌아보는 것으로 묘사된 상황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다음의 시행에 접속되어 있는 '영원히'라는 어휘가 더 분명히 해주는 것이지만 여기서 그 놓친 사슴은 영원히 다시 붙잡을 수 없는 사슴이다. 그러한 사슴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영원'을 상징하는 산마루의 별빛 아래서 무연히 화자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은 이 역시 시인(화자)과 이 세계, 즉 유한한 존재와 세계의 영원성 사이에 오직 단절밖에 없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이 시의 후반부는 전반부에 이어 다음과 같이 전개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흔적으로

달이 있다.

달빛에 비춰 보는 빈손.

그리고

산마루에서 발을 멈추고

뒤돌아보는

사슴이 있다.

좀생이 별 아래서

고개를 돌리고

영원히.

 

이 시의 후반부에서 소멸의 상상력이라 할 '사슴'과 '빈손'을 불멸의 상상력이라 할 '달', '별', '산마루'와 결합시킨 것은 핵심 이미지 '손'과 부차적인 이미지들인 '사슴', '달', '별', '산마루' 등을 유기적으로 관련시키려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지만 그보다 이 시의 주제를 형상화시키기 위함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떻든 이 두 가지 의도를 시적 상상력을 통해 자연스럽게 실현시킬 수 있었던 것은 시인의 탁월한 시적 재능이 아니고서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 작품에서 불필요한 어휘나 소재나 수사법은 단 하나도 없는 셈이 된다.

이상 <회수>의 발상에서 완결된 한 편의 시로 시상이 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도식으로 정 리하면 다음과 같다.

 

[핵심 이미지] 부차적인 이미지 군

┏풀린 손…첫사랑, 사슴

┏ 소멸의 상상력 ┫

┗틈새가 있는 손…냇물, 모래, 검은 물결, 밤

빈손 ┫

┏손과 직접 관련된 것…달

┗ 불멸의 상상력 ┫

┗사슴을 통해 손과 간접 관련된 것…별, 산마루

 

출처 : 부천여성문학회
글쓴이 : 고경숙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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