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로써 시를 쓰자
문 덕 수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여러분들 안녕하십니까?
오늘 나는 평소에 생각하고 말해 온 시에 관한 나의 소신의 한 토막을 존경하는 여러분들에게 말씀드릴까 하여, 이러한 기회를 나에게까지 주신 신규호 학장에게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저는 그 동안 시인 여러분들께서도 어느 정도 짐작하셨겠지만 시에 관한 나의 소신과 직․간접으로 관계되지 않은 말을 한 적이 거의 없고, 대부분 나의 소신에서 나온 말들이었음을 솔직히 말씀드립니다.
나는 그 동안 기회 있을 때 반 관념주의(“탈관념”이라고도 할 수 있고, 얼마 전에 작고한 오진현 시인이 ‘탈관념’이라는 말을 써왔습니다.), 사물시, 형식주의, 사물, 기호시, 하이퍼시, 의식적 방법 등 여러 가지 개념을 써 왔습니다. 이러한 개념들은 모두 나의 시론과 관련이 있는 말입니다만, 이러한 다양한 말들 때문에 도리어 혼란을 일으켰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나는 가장 쉬운 말로 나의 시쓰기의 원점이라 할까, 출발점이랄까, 즉 스타트 라인을 말하고 싶습니다. 몇 년 전 돌아가신 우리 나라의 고승이신 성철 스님께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성철 스님은 불교와 관련해서 한 말씀이지만 이 말씀을 우리 시의 원점으로 삼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1.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성철스님의 이 말씀은 그대로 ‘현대시의 원점’으로 삼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말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너무도 당연한 말씀 같아서 더 이상 중언부언할 필요가 없을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 “돌은 돌이요, 나무는 나무다”, “꽃은 꽃이요, 흙은 흙이다”― 이렇게 바꾸어 말을 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산을 보고 산으로 보지 않고 시를 쓰고, 꽃을 보고 꽃으로 시를 쓰지 않은 시인이 있을까요. 의외에도 많습니다. 놀라운 일이지만 의외에도 많습니다. 나도 초기에는 그런 시인이었습니다. 나는 「생각하는 나무」라는 시를 썼는데 처음 3행은 다음과 같습니다.
2. 나무는 어딘지 먼 길을 가고 있다
3. 가다가 가만히 머뭇거리며 고독을 느낀다
4. 가지를 흔든다 무엇인가 골돌히 사유한다
5. -문덕수, 「생각하는 나무」에서
나무가 먼길을 간다든지, 가다가 머뭇거리며 고독을 느낀다고 표현한 것은, 나무를 의인화하고, 나무를 멀리 여행하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표현한 것이 분명합니다. 나무를 나무로 보고, 산을 산으로 보고, 물을 물로 보고 표현한 시가 아님이 분명합니다. 김소월(1902~1934)의 「萬里城」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6. 밤마다 밤마다
7. 온 하룻밤!
8. 쌓았다 헐었다
9. 긴 萬里城
10. -김소월, 「萬里城」 전문
이 시는 ‘만리성’을 읊은 것이 아니라 그리움으로 잠들지 못하고,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不眠)상태를 읊은 것입니다. 만리성이라고 하는 사물의 모습은 조금도 표현되지 않았습니다. 만리성이라는 객관적 사물을 객관적으로 표현해도 될 텐데, 그리워서 잠을 이루지 못하고, 말하자면 ‘불면(不眠)의 그리움’이라는 자기의 정서를 읊은 것입니다. 김소월의 유명한 시에 「진달래꽃」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너무나 잘 아는 시입니다.
11. 나 보기가 역겨워
12. 가실 때에는
13. 말 없이 고이 보내드리우리다
14.
15. 寧邊에 藥山
16. 진달래꽃
17.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우리다
18. -김소월, 「진달래꽃」에서
이 시도 제목은 「진달래꽃」이지만 ‘진달래꽃’을 노래한 시가 아니라 ‘이별의 정서’를 노래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萬里城」이건 「진달래꽃」이건 모두 인간사나 인간의 정서를 읊은 사실을 알게 되고, 이러한 시를 ‘인생주의’시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형의 시는 시에서 인생이나 인간을 뺄 수 없습니다. 인생주의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진리이고 진실한 삶인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인생주의 시의 목표는 인생의 진리나 진실이 무엇이냐고 생각하게 되고, 따라서 인생주의 시는 시와 진리의 일치를 가장 높은 목표로 삼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시인은 모두 인생주의 시인입니다.
인생주의의 영향이 얼마나 크고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쳤는가는 김소월 다음 세대의 시인들의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최고의 시인으로서 서정주(1915~2000)를 들 수 있습니다.
19. 내 너를 찾아왔다 수나
20. 너 참 내 앞에 많이 있구나
21. 내가 혼자서 종로를 걸어가면
22. 사방에서 네가 웃고 오는구나!
23. -서정주, 「부활」에서
이 시에서도 ‘수나’라고 하는 연인인 인간이 등장합니다. 이 시가 표현한 ‘그리움’이라는 정서도 인간의 정서입니다. 즉 인생주의 시입니다. 김소월이 “그립다⁄말을 할까⁄하니 그리워”(「가는 길」)의 그 ‘그리움’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서시」)의 ‘부끄럼’이라는 윤동주의 정서도 김소월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또 서정주의 「문둥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보리밭에 달 뜨면⁄애기 하나 먹고⁄꽃처럼 붉은 울음을⁄밤새 울었다”(「문둥이」)입니다. 이 시는 ‘문둥이’를 읊은 시이지만, 문둥이로 태어난 천형의 운명적 슬픔보다는 문둥이를 빌어 그 ‘울음’을 더 중시한 시로 보입니다. 즉 “꽃처럼 붉은 울음”을 노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시에서 기쁨이나 슬픔과 눈물은 중요한 소재이긴 하나, 그러나 우리는 그 동안의 역사에서 너무 많이 울었고, 눈물도 많이 흘렸습니다. 앞으로의 시에서는 이러한 인생적 눈물은 좀 참고 바위나 쇠덩어리처럼 견디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돌과 6.25
언젠가 북한산성에서 산행한 일행 앞에서, 내가 돌멩이 한 개를 주워들고, “이 돌멩이에 무슨 사회주의가 있고, 자본주의가 있고, 민족주의와 계급주의가 있느냐”, “무슨 슬픔이 있고 눈물이 있느냐, 단단한 이 돌멩이는 단지 돌멩이일 따름”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성철 스님이 말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말과 상통하는 말입니다.
이 “돌멩이”에 관한 시인의 상반된 태도를 우리는 김윤성과 전봉건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봉건의 「돌 50」이라는 시는 다음과 같습니다.
24. 돌은
25. 얼굴이 없다
26. 그래서 돌은 먹빛이다
27. 모래밭에 엎드려 묻힌 어둠의 먹빛이다
28. 아무튼 그 돌을 파내어 뒤집어라
29. 그러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30. 만에 하나도 있을까 말까 한 일이지만
31. 얼굴 없는 돌의 얼굴과 문득
32. 꿈처럼 그렇게 마주칠 때가 있다
33. -전봉건, 「돌 50」에서
이 시에서 전봉건은 분명히 돌은 “어둠의 먹빛”이라 하면서 그 얼굴을 좀처럼 보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돌의 얼굴이라고 한 말은 “돌 그 자체”, “돌이라고 하는 사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물의 본질은 좀처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전봉건은 “먹빛”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독일의 위대한 철학자 칸트(1724~1804)도 사물 자체(Ding an sich, thing in itself)는 알 수 없고, 우리는 다만 사물 자체의 겉(현상)만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물의 현상도 잘 못 보고 있습니다. 햇빛, 어둠, 거리, 기분 등에 따라 사물이 달리 보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하나의 건물인데, 아주 멀리서 보면 거의 안 보이거나 조그마한 하나의 ‘점’으로 보입니다. 가까이 갈수록 그 건물의 형태가 좀 뚜렷이 드러나지만, 그것도 보이는 쪽인 앞면만 보이고, 뒷면은 어떻게 생겼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흐리거나 밤이면 더 안 보입니다. 이와같이 사물의 현상 그 자체도 잘 볼 수 없습니다. 이러니 더구나 사물의 참된 모습 그 사물의 진정한 모양과 본질을 알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시인은 그 사물 자체의 참된 모습 찾기를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사물의 참된 모습을 찾는 일은 진리나 진실이나 정의를 찾는 일이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전봉건은 「돌1」에서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34. 나는 봄눈 녹는
35. 나루터 찬물 속에서
36. 삭은 뼈처럼 하얀
37. 돌 하나를 건져냈다
38. 날개 뼈 같은 그런 모양이었다
39. -전봉건, 「돌1」
나루터의 찬물 속에서 전봉건이 건져올린 ‘돌’은 날아가는 새가 떨어져 죽은 그 날개 뼈로 보이다가, 나중에는 6.25 때 전사한 K라는 친구의 촉루, 또는 심지어 ‘석정’(石鼎)이라는 스님의 얼굴도 발견합니다. 여기서 전봉건 같은 모더니스트도 돌에서 돌을 보지 않고 그가 경험한 어떤 사건을 발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아마 전봉건에게는 이것이 돌의 참된 모습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돌에서 스님을 보고, 6.25 때 전사한 전사자를 보는 것은, 돌에서 돌을 본 것이 아니라 돌에서 그것이 환기하는 역사나 종교나 정치 같은 다른 ‘관념’을 본 것입니다. 돌은 역사도 아니고 종교도 아니며 기타 다른 관념도 아닌, 그저 돌일 뿐인데, 돌을 돌로서 안 본다는 것은 마치 예수님을 예수로 안 보고, 부처님을 부처로 안 보는 것과 다름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음엔 김윤성(1925~ )의 경우를 봅시다. 산에서 돌 한 개를 주워 집에 갖다 놓았는데 아들, 손녀 등의 반응이 각기 다릅니다.
40. 산에 있는 돌 하나를 내 집으로 옮겨놓았다……
41.
42. “이게 뭐야?”
43. 딸애는 의아한 뜻으로 묻고
44. 아들은 다짜고짜 주먹으로 딱! 쳐보고는 손이 아파 상을 찌푸리고
45. 아내는 무해무득한 것을 대할 때 늘 하는 식으로 아무 말 없이 밖으로 나가버린다
46. -김윤성, 「돌Ⅳ」에서
‘아내’의 태도가 제일 안 좋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그를 나무랄 수 없습니다. ‘돌’을 보고 ‘이게 뭐냐’고 묻는 태도는 시인, 철학자 모두에게 공통된 생각입니다. 김윤성의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라는 작품에서, ‘돌’을 두고 손녀와 둘이서 대화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손녀가 작자에게 묻습니다.
47. “왜 이래, 이 돌”
48. “뭐가”
49. “이 돌 말이야”
50. “그 돌이 어때서”
51. “아이, 아니 이 돌”
52. 어린 손녀는 마침내 짜증을 낸다
53. -김윤성, 「나는 대답할 수가 없다」에서
매우 재미 있는 장면입니다. 손녀의 ‘짜증’은 돌이 무엇인가를 볼 수 없는 문제에 직면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들은 사나이답게 주먹을 쥐고 돌을 다짜고짜로 딱 쳐보고 손이 아파 상을 찌푸립니다. 손녀의 ‘짜증’이나 아들이 손이 아파 ‘찌푸리는 상’은 돌의 본질을 모르는 데서 오는 공통적인 반응입니다. 그러나 손녀의 경우는 돌과의 일정한 거리를 둔 상태에서 ‘짜증’을 냈지만, 아들은 돌과의 감각적 접촉 뒤에 ‘상을 찌푸린 것’이라는 차이는 있지만, 여기서 공통적인 태도 이상의 중요한 태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 돌을 어디까지나 ‘타자’(他者)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 둘째 객관적 태도로 돌을 보거나 돌과 접촉하고 있다는 점, 즉 객관주의입니다. 사물을 나와 같은 생각, 같은 느낌, 같은 감정을 지닌, 동화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이러한 ‘객관주의’는, 우리 시인이 지녀야 할 앞으로의 태도임을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앞에서 언급한 전봉건보다 더 철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은 돌을 주먹으로 쳐보고는, 돌이 단단하고 뭔가 저항하는 힘이 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이 저항력은 돌이 다른 존재가 침입하는 것을 막는 힘입니다. 영국에 존 로크(1632~1704)라는 철학자가 있는데, 그는 사물의 고성(固性, solidity)을 말한 바 있습니다. 즉 사물에는 다른 사물의 침입을 막는 성질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자의 ‘고’(固)라는 글자는 바깥 둘레(口)를 싸 막아서 엄중하게 이를 고수(固守)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견고(堅固)해야만 구안(久安)이 있고 고유, 고정이 가능합니다. 아들이 돌을 치자 아파서 상을 찌푸린 것도 바로 돌이 가진 저항력의 반응입니다.(불교에서 “색․성․향․미․촉․법”이라고 한 것은 사물의 2차 성질로 봅니다.) 문제는 이러한 고성을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시’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3. 즉물이시(卽物而詩)
앞에서 나는 (1)인생주의 태도에서 벗어난 (2)객관주의 태도(혹은 주관주의와 객관주의를 다 초월하여)로, (3)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고, (4)사물에다 먼저(어디까지나 ‘먼저’입니다) 역사나 종교나 국가나 도덕이나 그러한 관념과 관련시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사물을 보는 일에서 인생주의나 여러 가지 관념에서 벗어나면 사물을 사물 그 자체로 보게 됩니다. 그러한 경지가 있을까 하고 의문으로 여기는 분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물을 사물로서 보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어려운 문제를 나딴에는 쉽게 말씀드린다고 애를 썼습니다만, 이해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지금까지의 한국시는 사물에서 사물을 안 보고, 그 사물이 환기하는 다른 관념(역사, 종교, 국가, 도덕 등등)을 보고, 그 관념을 그 사물이라고 여겨왔습니다. 십자가를 십자가로 보고, 산사(山寺)의 종소리의 참뜻을 듣지 못하고 그 겉만 보거나 그 겉소리만 듣고 그것이 그 사물의 안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지금부터는 “사물을 사물로 보자”는 것이 제 주장입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여러분들도 나와 뜻을 같이 하면 좋겠습니다만, 각자 생각이 있으니까 그 생각에 따라가도 상관 없습니다.
사물을 사물로 보자는 것은 사물(사물은 인간과 관념을 초월한 그 자체의 독자적 세계입니다.)로 시를 쓰자는 주장입니다. ‘관념’으로 시를 쓰지 말고 사물로써 시를 쓰자는 것입니다. 나는 문덕수시전집(2006) 권두에서 “시에서의 모든 관념은 어떤 형태든 물리적 존재에 실려 운반되어야 한다”(7쪽)는, 이른바 ‘수반(隨伴)의 원리’를 말씀한 바 있습니다. 신, 정의, 양심, 사회주의, 자본주의, 문화, 도덕, 불안, 고독, 슬픔, 그리움 등의 높고 막연한 관념으로 시를 쓰지 말고, 이러한 관념을 시에 넣어야 할 때에는 그러한 관념을 물리적 존재 즉 사물에 실어서 표현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쓰는 것은 단순히 글자로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쓰는 방법’에 따라 쓰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쓰는 방법 즉 쓰기의 기법을 중시합니다. 이것이 ‘아트’(Art)의 한 가지 뜻이고, 또 이것이 ‘의식적 방법’입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의식적 방법입니다.
사물을 사물로 보는 것은 탈 인생주의, 객관주의 태도를 지녀야 하나, 결국은 “사물을 보는 경지”에 이른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 이상의 노력이 요구됩니다. 젊은 시인 중에 장동석(장무령)이라는 시인이 있습니다. 그 시인은 자기의 문학박사학위논문(한국 현대시의 경물 연구)에서 “이물관물”(以物觀物)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물관물이란 “사물로써 사물을 본다”는 뜻입니다. 다음에 장동석 시인의 말을 인용하겠습니다.
54. 한국 현대시에서 이물관물의 태도로 제시된 경물과 시적 자아의 관계는 상호적이며 민주적이다. 즉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이라는 일방적 위계적 관계에서 벗어나 물(物)의 입장에서 물(物)을 서로 보는 관계이다. 그러므로 경물들의 풍경에는 중심역할을 하는 대상이 부재한다. 경물들은 서로 병치 열거되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불연속적으로 연속된다. 불연속적 연속은 경물의 의미를 인과적, 관습적인 의미에서 이탈하게 한다.
55. -장동석, 한국 현대시의 경물 연구에서
사물로써 사물을 보는 관계는 위계적(位階的) 관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는 관계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인생주의에서도 벗어나고, 주관주의와 객관주의에서도 벗어나, 그런 것을 다 뛰어넘은 태도로 보입니다. 경물(景物)의 풍경에는 중심역할을 하는 대상이 부재한다든지, 경물들의 병치 열거로 인한 불연속적 연속이라는 대목에서 현대시의 하이퍼성( hyper性)과도 연관되는 부분이 발견되어 주목됩니다. 사물로써 사물을 본다는 것을 사물의 현상이 사물의 겉인 현상만을 본다는 뜻을 넘어서, 즉 사물의 형상(形象)을 넘어선 사물이 지닌 도(道)나 알맹이라고 할까, 진여(眞如)라고 할까. 그러한 참된 모습, 참된 의미를 본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서 또 관념의 세계로 진입할 우려가 있습니다.
다시 “사물로써 사물을 본다”는 뜻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다만 나는 사물로써 사물을 보는 이 궁극의 경지를, 다른 말로 즉 “사물이 곧 시다”(즉물이시 卽物而詩)라는 말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우리 모두 관념으로 시를 쓰지 말고 사물로써 시를 씁시다. 참고로 사물시를 들어 보겠습니다.
56. 넓은 벌 동쪽 끝으로
57. 옛 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58. 얼룩백이 황소가
59.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60. -정지용, 「향수」에서
정지용(1902~1950)은 사물로써 시를 쓴 한국 현대시의 조상입니다. 예시는 누구나 다 아는 시입니다만, 「향수」라는 제목을 없애고, 그리고 향수를 읊은 시라는 선입관을 버리고 읽어보면 ‘사물로써 쓴 시’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정지용의 시에 “빗방울 나리다 유리알로 구을러⁄한밤중 잉크빛 바다를 건너다”(「겨울」)가 있습니다. 2행의 짧은 이 시도 사물시입니다. 그리고 사물시를 쓰는 것이 하이퍼시를 쓰는 기초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61. 伐木丁丁이랬거니 아람도리 큰 솔이 베혀짐즉도 하이 골이 울어 메아리소리 찌르렁 돌아옴직도 하이 다람쥐도 좇지 않고 묏새로 울지 않아 깊은 산 고요가 차라리 뼈를 저리우는데 눈과 밤이 조히보담 희고녀! 달도 보름을 기다려 흰 뜻은 한밤이 골을 걸음이란다?
62. -정지용, 「장수산(長壽山) Ⅰ」
장수산은 어디에 있는 산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이 「장수산」에 대하여 30년 전에 다음과 같이 해설한 바 있습니다. “①행은 “伐木丁丁”은 나무를 베느라고 잇달아 도끼로 찍는 소리인데, 그 전거는 시경에 있다. 伐木丁丁이라고 했거니 왼 산골에 들어찬 아람도리 큰 소나무들이 그와 같이 베어짐직도 하건만 베는 이가 없다. ②행은 ①행에 이어진다. 伐木丁丁하면, 그 소리 고요한 산골을 울리고, 그 메아리가 맑게 찌르렁 울어 되돌아옴직도 하건만 그런 메아리 소리도 없다. 伐木丁丁, 찌르릉 등의 청각심상을 살려 도리어 산골의 정적감을 더 깊숙이 드러낸다. 이 정적감은 ③행에서 더욱 심화된다. 다람쥐와 묏새가 살고 있으련만, 다람쥐도 쫓지 않고 묏새도 울지 않는 깊은 산골은 너무 고요해서, 그 정적이 뼈골에 스며들어 저리히는 것 같고, 덮인 백설과 밤이 빛나서 백지보다 희구나”(문덕수, 한국모더니즘시연구에서). 「장수산」은 사물시의 한 모델 같은 느낌이 듭니다. 다음은 우리 곁에 있는 젊은 시인의 작품에서 예를 더 들겠습니다.
63. 신갈나무 마른 잎은 그대로이다. 잎은 길게 말려서 대롱거리며 단단히 매달려 있다. 굵게 힘줄 같은 잎맥을 손끝으로 긁으면 까실까실한 마른 기침소리를 낸다. 기침은 이내 전염되어 마른 잎 모두가 마른 소리로 흔들려, 옷자락을 빠져 나가는 바람 소리 같은, 버선발로 낙엽을 밟는 마른 소리로 메달려 있다.
64. -이솔, 「신갈氏는 느린 동작으로 외투를 벗어낸다」에서
제2문은 “잎이 길게 말려서 대롱거리며 단단히 매달려 있다”로 되어 있습니다. 잎이 말려서 대롱거리며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다는 해석 외에 달리 해석할 수가 없습니다. 무슨 죄를 지어서 벌을 받고 있다든지, 몸이 약해져서 운동을 하고 있다든지… 기타 이런 해석을 한다면(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다고 하더라도) 표현된 의미를 넘어선 해석이 될 것입니다. 김기덕의 시에서는 “사마천이 사기를 쓰고⁄내시들은 궁형을 마다하지 않지만⁄베어도 베어지지 않는 잡초들이 고개를 내밀었다”(「세에 대하여」)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사마천(司馬遷 BC 145~86)은 다 아시는 바와 같이 전한(前漢) 때의 역사가로서 사기 130권을 쓴 사람입니다. 제1문은 제2문에 걸려 다른 역사적 관념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제2문은 제3문에 걸리고, 제3문은 역으로 제2문의 영향을 받아 “고개를 내미는 잡초”의 의미에 새로운 관념이 발생합니다. 이러한 시도 사물시의 범주에 속합니다만, 엄격하게 따지면 사물로써 시를 쓰는 단계를 마스터한 발전된 다음 단계의 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잡초”는 사물이면서 어떤 관념을 상징하게 됩니다. “빨랫줄에 걸린 흰 옷이 펄럭인다”(김선호의 「어머니는 수의를 거풍시킨다」) 자체는 사물의 묘사이지만, 그 다음 행인 “어머니는 일년에 하면서…”와 관련을 시키면 “흰옷”은 어떤 관념을 내표한 상징이 됩니다. 이것도 발전된 다음 단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위상진의 시 「여름감기」에는 “의사가 목 안으로 스텐 막대를⁄밀어 넣었을 때, 비는 내리고⁄푸른 곰팡이는 벽으로 번지고”라는 대목이 보입니다. 1행과 2행의 사물의 묘사입니다. “스텐 막대”가 어떤 관념을 상징하지 않습니다. 3행도 사물 묘사이기는 하나, “벽으로 번지고 있는 푸른 곰팡이”는 목 안의 감기와 관계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의사가 감기 진찰을 하기 위해 목 안으로 스텐 막대를 목 안으로 밀어넣을 때 밖에서는 비가 내리고 푸른 곰팡이가 벽으로 번지고 있다는 이미지는 전혀 관계없는(또는 관계 있는) 두 개의 안과 바깥의 이미지가 연결되어 시의 하이퍼적 성질을 만들게 됩니다.
여기서 송시월, 위상진, 이선의 작품을 만나게 됩니다. 세 분의 작품은 ‘하이퍼’를 말할 때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송시월은 「그는 태풍주의보를 배양중이다」, 위상진의 「여름감기」, 이선의 「페르세우스 流星雨」 등은 분명히 하이퍼적이고, 뭔가 재미 있는 시쓰기의 비밀의 방법을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상으로 나의 강연을 끝맺을까 합니다만, 위상진․송시월․이선 등 기타 몇몇 분의 방법은 한국시단의 ‘레어 어스’(rare earth, 회토류)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시의 언어에 대한 형식주의와 실체주의, 기호와 사물의 관계, 기호시와 하이퍼시 등에 대하여는 말씀 드리지 못했습니다. 다음에 기회 있으면 그때 그때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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