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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편의 詩

사랑의 노래 / 베를톨트 비레히트

by 바닷가소나무 2018. 2. 6.

사랑의 노래


                 - 베를통트 브레히트 -


당신이 기쁘게 해주실 때면

저는 이따끔 생각해요.

이제 죽어도 좋겠노라고,

이 목숨 끝까지

행복하게 살 거라고요.


먼 훗날 당신이 늙으가면

그리하여 나를 생각하시면

나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갰지요.

아직도 젊은 여인을

당신은 여전히 간직하실 테지요.





집단 창작 방식을 고안하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Bertolt Brecht         


요약 테이블
출생1898년 02월 10일
사망1956년 08월 14일
국적 독일
대표작〈바알〉, 〈밤에 치는 북〉, 〈서푼짜리 오페라〉 등

제작자, 배우, 작가들이 연극 창작의 전 단계에 참여하는 공동 작업 방식을 창안하여 기존 연극의 개념을 해체하고자 노력했다.


브레히트는 독일의 극작가로, 서사극의 창시자이다. 연극이나 영화를 묘사할 때 흔히 '브레히트적'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곤 할 정도로 그는 연극 전반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이겐 베르톨트 프리드리히 브레히트는 1898년 2월 10일 독일 바이에른 아우크스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베르톨트 프리드리히 브레히트는 제지공장 노동자였고, 어머니 소피는 평범한 주부였다. 노동자들이 사는 구역의 작은 셋집에서 동생 발터와 함께 자랐으며, 12세 무렵부터 어머니가 유방암을 앓으면서 부모의 보살핌을 거의 받지 못했다. 6세 때 맨발수도회가 운영하는 학교에 다녔으며, 10세 때 왕립 실업고등학교에 들어가 19세에 졸업했다.


가정 형편상 공부나 독서를 할 여건이 되지 않았던 브레히트는 학교에 들어가고 나서야 문학을 접했다. 15세 무렵에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품은 그는 친구들과 문학 동아리를 만들고 학생 잡지인 〈에른테〉를 창간, 발행했다. 이 활동을 하면서 그는 친구들과 함께 아이디어를 논하고,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나가는 등 협업과 분업 방식으로 글을 쓰는 집단 창작 방식을 고안해 냈다. 이런 방식은 이후 브레히트의 작업 방식 중 하나로 정착한다. 또한 브레히트는 이때 문학 소년들인 친구들과 토론하면서 문학에 내포된 허구성과 문학에 경도된 삶의 허구성에 대해 비판의식을 갖고, 문학 역시 현실에 기반을 둔 실제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한편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 브레히트는 아우크스부르크 지역 신문에 애국적인 글들을 기고하기도 한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친구 대부분이 군에 자원입대했으나 그는 입대를 연기하고 뮌헨 대학교에 들어가 철학부와 의학부에 적을 두었다. 그러나 이 시절에는 학과 수업보다 연극과 수업과 연극 세미나에 주로 들락거렸다. 1918년에는 징집 대신 보충역으로 차출되어 세 달간 아우크스부르크의 병원에서 위생병으로 복무했다.


이 시기에 그는 랭보 등을 모델로 한 아나키스트적 태도의 천재 시인을 다룬 첫 장편희곡 〈바알〉을 썼고, 1918년의 혁명에 등을 돌리는 제대한 귀향병의 이야기 〈밤에 치는 북〉, 크리스토퍼 말로의 작품을 번안한 〈에드워드 2세의 생애〉 등의 희곡도 썼다. 이 작품들에는 반부르주아적, 반전주의적 태도가 강하게 드러난다.

1928년 독일에서 발행된 〈서푼짜리 오페라〉 각본집

또한 이 시기에 그는 세 명의 여인을 만나 세 아들을 두었다. 1916년부터 만난 파울라 반홀처와는 그녀 집안의 반대로 결혼할 수 없었으나,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하나 두었다. 1920년경 알게 된 성악가 마리안네 초프와는 그녀가 임신을 하면서 1923년 결혼해 아들 하나를 두었고, 1927년에 이혼했다. 파울라는 1924년 그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데리고 다른 남자와 결혼했다. 마리안네와 이혼 후 브레히트는 여배우 헬레네 바이겔과의 사이에서 아들 하나를 더 두었으며, 그녀와는 1928년 결혼한다.


1920년대 초 〈바알〉, 〈밤에 치는 북〉 등이 상연되었고, 1922년 〈밤에 치는 북〉이 클라이스트상을 수상하면서 브레히트는 독일 연극계에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 공연을 보고 비평가 헤르베르트 예링은 "스물네 살의 시인 브레히트는 하룻밤 사이에 독일의 문학적 면모를 바꿔 놓았다. 그와 함께 새로운 어조, 새로운 멜로디, 새로운 비전이 나타났다."라고 평했다.


연이어 발표한 〈남자는 남자다〉, 〈도시의 정글〉, 〈가정용 설교집〉 등을 통해 브레히트는 독일 연극계의 총아로 떠올랐다. 그러면서 그는 학창 시절 고안했던 공동 작업 체제를 시도했는데, 대본을 작업하기 전 단계부터 무대 제작자, 배우, 작곡가 등과 함께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다. 그는 협력자들과 대화를 나누면서 극본 작업 및 무대 제반 요소들을 구성했으며, 비서였던 엘리자베스 하우프트만, 마가레테 스테판 등과는 직접적으로 대본 작업을 함께 하기도 했다. 공동 작업 방식은 브레히트 작품에서 매우 중요한 방식이다.


또한 브레히트는 기존 연극의 개념을 해체했다. 관객이 무대 위의 연극에 몰입하고 현실을 도피하는 방식, 즉 일종의 환각법을 배제한 것이다. 그는 관객이 자신들이 보고 있는 것이 연극임을, 허구임을 의식하며 관람할 수 있도록 했다. 무대 장치를 최소화하고, 노래를 활용했으며, 영사기를 사용하는 등 무대 위에서 다양한 도구를 활용하여 의미를 전달했다. 또한 배우가 무대 위에서 관객들과 토론을 벌이거나, 연극 같지 않은 연극을 공연하여 무대와 거리를 두게 하는 방식 등 다양한 방식을 창안했다. 이런 방식을 활용하기 위해서라도 공동 작업 방식은 필요했다.


공동 작업 방식은 연극 기법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으며, 음악극이라는 새로운 장르가 탄생하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그중 대표적인 작품은 1928년에 상연한 음악극 〈서푼짜리 오페라〉이다. 존 게이의 〈거지 오페라〉를 번안한 것으로, 런던 암흑가를 배경으로 노상강도단의 두목 매키 매서가 런던의 구걸 사업을 독점한 '거지들의 친구' 두목 제레미아 피첨의 외동딸을 꾀어내면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줄거리는 비교적 단순한데, 브레히트는 이 작품의 서사를 쿠르트 바일이 작곡한 노래를 중심으로 진행시켰다. 배우가 노래를 하는 동안 다른 사건들은 진행이 멈추고, 때로 사건 진행과 관계없는 노래가 나타나기도 한다. 이는 감정 이입과 동일시에 따른 카타르시스라는 종래 연극의 전통을 깨고, 연극과 관객 사이에 거리 두기를 시도했던 브레히트의 서사극 이론을 무대 위에서 실연하는 방식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새로운 형식의 '음악이 있는 극 작품'은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이후 노래와 음악을 활용한 음악극 장르가 창안되었다.


1920년대 후반 브레히트는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어 교화를 목적으로 한 교육극들, 고리키의 작품을 각색한 〈어머니〉, 〈도살장의 성 요한나〉 등을 썼다. 1930년대 브레히트는 반나치 운동에 적극 가담했으며,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으면서 망명길에 올라 스칸디나비아, 덴마크로 갔다가 할리우드로 건너가서 영화 제작에 참여했다. 독일 당국은 그의 시민권을 취소하고, 그의 책을 불태웠으며, 그의 작품에 대한 상연 금지 조치를 내렸다.


덴마크에 머무는 동안에도 《스벤보르거 시집》으로 출판되는 많은 시를 썼으며, 연극 비평 등을 통해 자신의 서사극 이론을 발전시켜 나갔다. 희곡 작업도 계속했는데, 대표적인 작품이 30년 전쟁을 배경으로 한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갈릴레이의 생애〉, 전쟁 전 중국을 배경으로 한 우화극인 〈사천(四川)의 선인〉, 시카고를 배경으로 히틀러의 권력 장악을 비유적으로 그린 〈저지할 수 없는 아르투로 우이의 득세〉 등을 썼다. 당대 독일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고 나치 정권에 대한 반대가 뚜렷이 드러나는 작품들이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자로서 프롤레타리아를 교화하겠다는 목적으로 쓴 작품들이기도 한데, 이런 방식은 당대에도, 후대에도 비판받고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에서 반미활동위원회의 공산당 처단이 시작되자 1948년 미국을 떠나 스위스로 갔다. 그곳에서 〈안티고네〉, 〈파리 코뮌의 나날〉을 썼으며, 자신의 연극론을 《소사고 원리》라는 책으로 집필했다. 이후 동독의 초청을 받아 동베를린에 자리를 잡고 아내 헬레네 바이겔과 함께 베를리너 앙상블을 결성하여, 망명 중에 쓴 작품들과 고전을 개작한 〈가정교사〉, 〈북과 나팔〉 등을 연출했다.

시프바우어담 극장

브레히트는 베를리너 앙상블 극단을 창설한 후 첫 작품을 이곳에서 올렸다.

그는 반미활동위원회 청문회에서 자신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맞지만, 공산당의 강령에 복종하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에는 비판적이며 공산당에 입당한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서유럽 지역에서 한때 배척받았으며, 국내에서도 그의 작품들은 1988년까지 상연이 금지되었다. 또한 1954년에는 모스크바로부터 국제 스탈린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만년에도 베를리너 앙상블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56년 8월 14일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평소 바람대로 도로데엔 공동묘지의 헤겔 묘 건너편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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