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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 · 인생독본

톨스토의 인생독본 4월 7일

by 바닷가소나무 2015. 5. 30.

47

 

 

악을 대하길 선으로 지불한다는 것은 악을 악으로 보답하는 것보다 진실하며, 용이하며 지혜 높은 일이다.

 

1

처형 장소에 온 사악한 무리들이 그리스도를 좌우 쪽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때 그리스도는 말하기를

아버지시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소서. 저들은 행할 바를 모릅니다.< 성 서 >

 

2

누구나 결코 자기가 모든 행복을 가질 값어치가 있다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큰 행복은 자기의 지혜의 결정에 따라서 행동하는 그것이 아닐까. 그 지혜의 결정은 당신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할 것이다. 남에게 대해서 선을 베풀 것. 그리고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 대한 가장 큰 행복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말라고.

< 오오레리아스 >

 

3

자기 적에게 무엇으로 갚을 것인가? 착한 인간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갚으라.

< 에피쿠테타스 >

 

4

선으로서 악에 보답하라. < 타르무우트 >

 

5

사람들에게 대하여 그 사람에게 알맞은 교재를 하는 것은, 다만 그들은 악화시킬 따름이다. 사람에게 대하여, 그 사람들이 실제로 그러한 이상으로 좋은 교제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이 참으로 향상하도록 도움을 주는 것이다. < 괴에테 >

 

6

친절로써 노여움에 이겨라. 착함으로써 악에, 은혜로써 인색에, 정의로써 허위에 이기도록 하자. < 쟈마파타 >

 

7

선으로써 악에 보답하라. 그때 당신은 약한 사람들이 그 악한 행동으로써 얻으려고 하던 모든 만족을 처부서 버릴 수가 있을 것이다.

 

*

악에 대해서 선으로 보답한 때의 기쁨을 단 한번이라도 경험한 사람은 그 기쁨을 얻을 수 있는 다음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외부적인 자연계에 있어서 즉 식물이나 동물에게는 선도 없으며 악도 없는 것이다. 살아 있을 따름, 사색하는 일이 없는 인간에게도 이 같은 선악은 없는 것이다. 선과 악을 구별하는 한계는 인간의 정신 속에 의식하고 또한 판단하는 능력과 더불어 발생하는 것이다. 인간의 정신 속에 있어서는 어릴적부터 악과의 끊임없는 투쟁이 있다. 그리고 이 진정한 일 자기의 밭을 가는 일이며, 더러운 욕정이 눈뜨지 못하도록 높은 정신력에 굴종 시키는 일이 완성하는 곳, 그곳에 모든 선과 합리적인 사상의 원천이 두어져야 하는 것이다. 이 정신적인 세계에 있어서만 오직 무지, 야만, 착오, 기타의 인간이 악이라 생각하는 일체와 투쟁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 있어서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의 가르침은, 정확하게 그리고 명료하게 악에 대한 투쟁의 장소를 한정하는 것이다. 이 투쟁의 장소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것이다. 모든 지혜 깊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폭압이라, 자기 자신의 육체, 자기 자신의 정욕에 있어서만 제한되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정욕에 대한 정욕의 폭압 속에 정신의 하는 일과 그 함양이 성립하는 것이니까.

자기 이외의 사람들 남의 정욕도, 제가끔 자기 자신의 같은 주인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정욕에 대한 폭압을 옳지 못한 것이다. 필요한 것도 아니다.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의 가르침은 분명히 이러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즉 남에게 대한 폭압의 불필요함을 명시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누가 감히 이러한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즉 인간은 자기의 의지로써 자기 자신 속에 있는 자기 자신을 이끌어 나갈 수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있어서의 생활을 위하여, 자기 자신에게 요구되는 일체의 사실을 이해하고, 또는 할 수 없는 일임을 확신할 수 잇을 것인가?

이러한 사실을 확신하는 것은 신에 의하여 인간에게 주어진바 생활의 자유, 즉 자기 자신을 구원하고 또는 멸할 수 있는 자유를 부정하는 것, 그리고 인간 자시의 합리적인 존재를 부정함을 의미 한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신함은 인간을 부정함을 의미 하는 것이다. 인간의 의지가 그 자신의 한계를 넘어설 수는 있다. 그러나 누가 그것을 필요하다고 확신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이 세상의 생활에 있어서 그것이 인간으로서의, 개인으로서의 간섭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떠한 손해가 있으리라고 확신할 수 잇을 것인가?

이와 같은 사실을 확신함은 신의 의지의 불완전에 대하여 말함을 의미한다. 신의 부정함을 의미한다. 이 세상의 악은 분명히 다음 사실 가운데 성립하고 있다. 즉 사람들이 자기의 의지에 그 존재의 한도를 넘어서게 하고, 그것을 필요한 것으로 만들도록 애쓰는 가운데 성립하고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자기의 의지를 신의 의지의 처소에 두려는데 성립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신성모독을, 악에 대한 무저항주의의 가르침이 폭로 하고 있는 것이다. 성공은 모든 일을 옳은 것으로 돌린다. 이기면 정의인 것이다. 진리는 승리에 속해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은 진리에 대한 동물적이며 육체적인, 입 끝으로 만의 이해에 지나지 암는다. 이러한 이해에 있어서는, 진리란 단어는 다만 공허한 음향을 가질 따름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너희 진리와 더불어 너희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필라트는 말 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진리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전연 반대의 종국에 있어서 진리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즉 이기는 자가 아니라 패배를 당하는 자가 정의로운 것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가령 그대가 타인과의 싸움에 있어서 폭력으로써 이긴다면, 그 경우에는 그대는 반드시 부정할 것이며 진리는 그대의 편도 아니었음을 알라. 진리는 패배를 당하는 자의 속에 있다.

패배 당하는 자는 자기 자신 속에 신의 왕국에 대한 이해를 경험한다. 그것은 지혜 깊은 존재의, 최초의 그리고 기초적인 이해이다.

이 지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사명은 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 제일인상의, 슬퍼할 수밖에 없는 사명에서 생기는 유일한 길은악에 저항하지 말라는 것이다. 타인과 다투지 말라는 것이다. 항상 자기를 패배당한 자로 인정하는 것, 항상 패배 당하는 자, 즉 신의 머슴이라는 것에 있다. 그리고 이 길은 진정한 종교, 인생에 대한 진정한 이해 가운데 밝게 비치며 높여지는 것이다. 모든 투쟁을 꺼리는 무저항주의는 평안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자유로이 얻어지게 하며, 이미 다른 힘, 다른 흥미가 놓여진 스스로의 토지를 그들 이외의 전신적 반작용을 위하여 해방하는 것이다.

이 지상에 있어서의 인간의 의의는 성서 속에도 명시되어 있는 것처럼, 현세에 있어서 인식하고 판단하는 하늘이 베푼 능력을 자유로이 하며 또한 무엇보다도 높이려는 그 속에 성립되고 있는 것이다.

성서란 온갖 인간의 마음속에 신의 의하여 내려진 앎과 판단을 무엇보다도 높이 평가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 부 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