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항골목 / 안현미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는 사내를 지나 방금 도착한 여자의 어깨에선 사막을 건너온 바람의 냄새가 났고 이 도시의 가장 후미진 모퉁이에선 부레처럼 골목이 부풀어 올라 고장난 가로등처럼 서 있던 사내의 구두가 담기고 있다 첨벙, 여자는 의족(義足)을 벗고 부풀어 오른 골목으로 물소리를 내며 다이빙 한다 꼬리지느러미를 활발히 흔들며 언어 이전으로 헤엄쳐 간다 주름잡는다 여자의 주름에선 언어 이전에 있는 어떤 어항에서 꺼낸 것 같은 언어가 버블버블 푱푱 투명한 골목을 유영한다 인간의 남자를 사랑하여 아낌없이 버렸던 모든 것들이 버블버블 다시 태어난다 그 사이 젖은 구두를 벗은 사내도 산소통을 부레처럼 달고 언어를 떠나온다 어항골목 고장난 가로등엔 물고기 달이 켜진다 푱푱 골목 밖으로 여자의 의족이 폭죽처럼 떠오른다
Post 아현동 / 안현미
오늘은 아현동 산동네에 갔다
오래전 월세 글어 살던 방, 더듬이가 긴 곤충들이 출몰하던 방, 연탄불을 놓던 방, 이 도시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울먹이던 방, 외롭던 방, 고맙던 방, 아주 아주 춥던 방,
그시절 내마음에 전세 들어 살던 첫 애인을 생각하는 밤, 나의 아름다운 남동생의 흐려진 얼굴빛을 걱
정하는 밤, 고단한 토끼에게 아무 약효도 없는 안약을 건네던 밤, 가난한 추억과 합체하던 밤,
아현동 산동네를 내려와 찾아간 [BAR 다] 어눕고 낡은 나무 계단 끝에서 화장실이 어딘지 모르고 서
있는 머리 긴 외국 남자에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why?" 라고 물으며 괜시리 친절하고 싶던 밤, 함께
여기를 뜨자고 말하면 주저없이 따라가고 싶던 밤, 국적도 모국어도 잃어버리고 싶던 밤, 나 스스로에
게 "너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라고 자꾸 되묻던 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개를 기르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열정을 따라가는 사람들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 서 있니? 왜?
와유(臥遊) / 안현미
내가 만약 옛사람 되어 한지에 시를 적는다면 오늘 밤 내리는 가을비를 정갈히 받아 두었다가 이
듬해 황홀하게 국화가 피어나는 밤 해묵힌 가을비로 오래오래 먹먹토록 먹을 갈아 훗날의 그대에
게 연서를 쓰리
'국화는 가을비를 이해하고 가을비는 지난해 다녀갔다'
허면, 훗날의 그대는 가을비 내리는 밤 국화 옆에서 옛날을 들여다 보며 홀로 국화술에 취하리
해바라기 축제 / 안현미
망루에 올라 해바라기 꽃밭을 본다 그 수많은 꽃들이 바라보는
태양처럼 사내는 눈부시다 해시계를 삼킨 황금 물고기 귀걸이
를 찰랑대며 여자는 묻는다 누구에게나 일생을 걸고 해바라기
꽃을 꺾듯 꺾어야 하는 게 있다면 몽롱한 눈빛의 유디트가 헬
멧처럼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목 같은 게 아니겠냐고 망루
아래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뱀은 서둘러 허물을 벗어 던지고
해바라기 밭을 떠난다 어느덧 태양은 엑셀파일의 함수마법사
중 시간의 함수로 구해놓은 듯 망루 꼭대기 위로 정각에 도착
한다 목이 마른 사내는 피크닉 바구니에서 꺼낸 술병의 목을
부여잡고 기어히 목을 칠 테냐고 묻는다 여자는 축제는 축제니
까, 라고 해바라기 씨를 깨물 듯 또박또박 대답한다 망루 꼭대
기에서 여자의 말을 엿듣던 태양은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여자는 최면을 건다 레드 썬 탁! 그러자 뱀이 벗어 던지고 달
아난 허물 속에선 화가의 잘린 귀와 귀를 자른 칼이 튀어 나온
다 여자는 잘린 귀를 확성기처럼 들고 쉭- 태양의 목을 친다
순간 꽃밭에선 해바라기꽃들의 노랑 비! 명들이 폭죽처럼 튀어
오르고 달아난 뱀은 깜짝 놀라 다시 허물 속 으로 달아난다 피
크닉 바구니를 헬멧처럼 들고 여자는 망루를 내려간다 피크닉
바구니에선 덜그럭 덜그럭 누군가의 목이 굴러다니는 소리가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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