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 / 오철수
Ⅰ. 있었던 일을 시로 쓰는 과정
1-1.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란?
나에게 있었던 일이란 말 그대로 내가 겪은 일(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진탕
먹고 정신을 잃었던 경험이나, 차를 타고 졸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갔다거나,
지하철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내려서 그것을 찾으러 종점까지 갔다거나, 별 이유 없이
두통이 하도 심해 병원에 갔던 일과 같이 시간적으로 펼쳐졌던 일이나 사건입니다.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그런 일이나 사건이 뭔가 의미 있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다가올 때 그런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시 쓰기입니다.
다음 예문을 보겠습니다.
집이 가까워 오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깨어 보면 늘 종점이었다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 속을 내딛듯 골목으로 사라져 가고
한 정거장을 되짚어 돌아오던 밤길,
거기 내 어리석은 발길은 뿌리를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늘 막다른 어둠에 이르러야 했던,
그제서야 터벅터벅 되돌아오던,
그 길의 보도 블록들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그래서 길은 기우뚱거렸다
잘못 길들여진 말처럼
집을 향한 우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종점 다방의 불빛과
셔터를 내린 세탁소, 쌀집, 기름집의
작은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낮은 지붕들을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지붕들 사이로 숨은 나의 집이 보였다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 나희덕「종점 하나 전」전문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늘 타는 버스인데도 묘하게 집에 가까이 올수록 졸음이 쏟아져 깜박 내려야 할 정류장
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렸던, 그래서 한 정거장을 되짚어 왔던 경험.
그래서 사실 쉽게 흘려 버릴 수도 있는 그런 경험인데, 시인은 그 일로부터 뭔가 의미
심장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예 타자마자 잠이 들어 종점까지 왔
다면 피곤해서 그랬거니 하고 말 텐데, 꼭 집에 가까이 올수록 졸음이 쏟아지고 내려
야 할 곳에서 깜박 졸다가 한 정거장 더 간 종점에서 깨인다는 것이, 또 그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 묘하지 않습니까? 뭔가 내 마음을 찌릿찌릿하게 합니다. 특히 막차를
탔을 경우에는 다시 나가는 버스도 없고 해서 길을 되짚어 걸어올 때! 그 되짚어 오는
밤길의 면면이 생의 조건에 대한 어떤 암시처럼 느껴지며 서정의 파고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체험을 나눠 보면,
1) 습관처럼 집을 지나치는 졸음
① 이상하게도
② 늘
③ 어리석은 발길
2) 되짚어 오는 밤길의 면면
④ 보도 블록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기우뚱거렸다
⑤ 우회
⑥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3) 우리의 생의 조건이 마치 그처럼 ‘이상하게도’, ‘어리석게’, ‘기우뚱거리는’,
‘우회’를 조건으로 하는 길 같아만 보인다는 사상 감정.
⑦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1) 있었던 일
2) 있었던 일이 왠지 찌릿찌릿한 느낌을 주다가
3) 생의 한 국면에 해당하는 의미 감정을 불러일으켜
4) 의미가 드러나게, 의미를 중심으로, 있었던 일(사건)이라는 객관적 재료를 활용하여
사상 감정을 표현하기입니다.
실재로 여러분들이 위 시를 봐도, 있었던 일이 생의 한 국면에 대한 이해를 촉발시키지
못했다면 이와 같은 시가 쓰여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있었던 일의
면면에 근거하지 않고는 그런 생각을 표현할 길도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처럼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란 있었던 일이 불러일으킨 사상 감정을 있었던 일에
근거하여 표현하는 쓰기입니다.
1-2. 시 쓰기의 재료
나에게 있었던 일을 대상으로 하는 시 쓰기입니다.
있었던 일이 나에게 어떤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런 생각과 느낌을 있
었던 일에 근거하여 표현하는 시 쓰기입니다.
그래서 시 쓰기의 재료는,
▷ 있었던 일의 어떤 면
― 경과 과정의 어떤 면들(이야기)
▷ 있었던 일들이 불러일으킨 생각과 느낌이 됩니다.
실제로 나희덕의 '종점 하나 전'도 있었던 일의 면면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생각과 느낌을
더해 나가는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만약 있었던 일의 면면이 생에 대한 이해를
환기하는 바가 부족했다면 이와 같은 시 쓰기는 불가능합니다.
1-3. 있었던 일이 환기하는 바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합니다
있었던 일은 곧 이야기입니다.
시간적으로 펼쳐진 체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나희덕의 '종점 하나 전'도 시간적으로
펼쳐진 체험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적으로 펼쳐진 체험이 어떤 의미 있는 감흥을 주어서,
그 감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냐 하면, 있었던 일이라는 그 과정의 면면에
근거하여 표현합니다. 때문에 시인의 시선은 항상 ‘있었던 일이라는 과정(이야기)’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물상이나 풍경을 대상으로 할 때는 대상의 장면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있었던 일은 ‘일’이라는 사건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사건 이야기 다시 말해서, 사건의 시간적 전개 과정이 중요합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큰형님이 호도 캐러 가자한다
‘하하, 형님도
호도가 고구맙니까’
염색한 머리 밑에서 허옇게 돋아오는 머리칼 쓸어 올리며 구부정하니 여윈 큰형님이
그냥 빙긋이 웃으며 망태기 하나 괭이 하나 들고 앞장을 선다
추석에 성묘 왔던 사람들이 사과 과수원 울타리로 넉넉히 둘러둔 밤나무 호도나무 섞어
둔 숲에 숨어들어 알밤 너덧 말 실히 털어 가는데도 ‘넵 둬라. 다 여기 연고 있는 사람
들 아니겠냐.’ 하더니 다람쥐란 놈들 실히 한 가마니는 물어 갔으니 반은 찾아와야겠단다
산비탈 몇 곳 괭이로 헐어 내어 두어 말
망태기에 담으며 나는 신이 났다
이곳저곳 더 욕심냈더니
그만 가잔다
‘반만 건지면 됐다’
다람쥐란 놈 욕심은 많고 머리는 나빠 제 먹을 것보다 몇 곱절 물어 간다고 한다 그래
놓고는 어디에 다 묻어 두었는지 몰라 겨울에 굶어 죽기도 한다는데 하하, 그런 어리석음
덕분에 다람쥐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나 그렇게 땅 속에 물어다 묻어 논 것들이 싹을
틔워서 도토리 숲이 퍼져 갔다나
구부정하니 앞서 내려가는 형님
머리 위로 흰 구름 한 자락 여유롭다
― 문학철「호도캐기」전문
있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있었던 일 그 자체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그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있었던 일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있었던 일이 삶에 대한 의미
있는 깨달음의 감흥, ‘호도를 따야 한다’는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던 삶을 반성하게
하는 사상 감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깨달음의 감흥 때문에, 그 깨달음의
감흥을, 그 체험 이야기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있었던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위의 체험이 어떤 시적 체험을 주었기에 이와 같은 시를 쓰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여지껏 ‘호도를 따야 한다’는 세계 속에 살았습니다.
나는 여지껏 ‘떨어진 호도는 주워야 한다’는 세계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형님이 말합니다.
“호도 캐러 가자.”
그래서 나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하하, 형님도/ 호도가 고구맙니까”.
그러나 큰 형님은 “그냥 빙긋이 웃으며 망태기 하나 괭이 하나 들고 앞장을” 섭니다.
호도를 캐러 갑니다. 그리고 진짜 다람쥐란 놈들이 물어다가 쌓아 둔 “산비탈 몇 곳
괭이로 헐어 내어 두어 말” 캐냅니다. 따지도 않고, 줍지도 않고 캐냅니다. 내가 여지껏
가지고 있었던 ‘호도를 딴다’는 이미지가 와장창 무너집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호도를 ‘딴다’와 ‘캐낸다’의 경험 이미지를 구성하는 세계관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시
나는 나의 경험적 이미지를 객관으로 절대화시켜 살지 않았는가? 그 결과 더 넓은 세계
이해로부터 멀어지지는 않았는가?
이처럼 ‘호도를 딴다’는 이미지가 나의 객관성이고 과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객관성과
과학, 그 이미지에 위배되면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미지가 어쩌면 내가 선
택한 주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말입니다.
퍼뜩, 오래 전에 읽었던 베이트슨의 생각이 떠올라 그 책을 찾아봅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객관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다.
‘지각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뇌가 만들어 낸 이미지이다. 모든 지각은 이미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발을 밟혔을 때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에 의해 내 발이 밟힌 사실이
아니라, 밟히고 나서 얼마 후에 뇌에 전달된 신경 보고와 함께 재구성된, 그에게 발을 밟힌
것에 대한 나의 ‘이미지’인 것이다. 외계의 경험은 항상 어떤 특정의 감각 기관과 신경 통로
에 의해 전달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에 대한 나의 경험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일 수 없다.
우리의 문명은 객관성의 환상 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 베이트슨『정신과 자연』(까치)
44/5쪽 요약.>
참으로 기막힌 말입니다.
이처럼 경험의 주관적인 이미지에 대한 반성 없이 그것을 객관이라 믿고, “풍경이 풍경을 반
성하지 않는 것처럼”(김수영 「절망」중에서) 나는 나를 내세웁니다. 나의 객관이라는 그 믿음
으로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닫아 버립니다. 그리고는 하나의 이미지만을 큰문,
바른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비난과 야유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게 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수록, 알밤 너덧 말 실히 털어 가는데도 “넵 둬라. 다 여기 연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냐”, “반만 건지면 됐다”라고 말하는 큰 형님의 말씀이 참으로 향기롭습니다.
저만치 “구부정하니 앞서 내려가는 형님”의 모습!
그 향기의 비밀은 “여유”입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가 아니라 ‘얼마쯤’입니다.
‘호도를 딴다’는 이미지는 자기를 반성하지 못하는(반성할 수 없는) 것에서 존재의 절대화를
이룹니다. 그러나 ‘호도를 캔다’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절대’를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 의해 이미지화된 것입니다(“넵 둬라.
다 여기 연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냐.”). ‘내가 심고 길렀으니 내가 거둔다’와 ‘모두가 심고
모두가 길렀으니 나누어 가진다’는 패러다임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 차이로 ‘나’와 큰형님이
있습니다.
큰형님이 속한 패러다임의 우위는 우화 같은 다음 이야기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다람쥐란
놈 욕심은 많고 머리는 나빠 제 먹을 것보다 몇 곱절 물어 간다고 한다 그래 놓고는 어디에 다
묻어 두었는지 몰라 겨울에 굶어 죽기도 한다는데 하하, 그런 어리석음 덕분에 다람쥐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나 그렇게 땅 속에 물어다 묻어 논 것들이 싹을 틔워서 도토리 숲이 퍼져 갔다”.
이 이야기에서 2-1=1이 아닙니다. 2-1=1±α입니다. α의 역동적 창발성이 ‘관계’의 세계를
이룹니다. 형님의 패러다임은 α를 중요시하고, 나의 패러다임은 2-1이라는 실체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여유”의 자리가 사라집니다. “여유”의 자리만큼의 겸손도 사라집니다.
겸손이 사라지는 만큼 따뜻함이 사라집니다(기계적이 됩니다).
하여, “하하, 형님도/ 호도가 고구맙니까”와 “그냥 빙긋이 웃는 형님”의 모습이 대비됩니다.
그리고 빙긋 웃는 형님의 미소가 나를 감쌉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치유입니다. 그런 사상 감정, 깨달음의 감흥이 일어납니다. 내가 체험한
일이 바로 그런 깨달음을 담고 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체험 이야기를 중심으로, 내가 느꼈던 그런 생각들이 더 잘 느껴지도록 들려주는
것입니다.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있었던 일이 나에게 의미 있는 감흥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
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냐 하면, 의미 있는 감흥이 잘 드러나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그렇기 때문에 있었던 일이 선명하게 시의 물질적 재료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제는, 있었던 일이 환기하는 바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1-4. 줄거리와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
― 짧은 이야기를 짓는다고 생각하십시오.
있었던 일은 그것이 ‘일’인 까닭으로 하여 항상 시간적 경과 과정을 갖고 있고, 또 그에 대한
감흥은 그 경과 과정 전체에 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적 체험에 있어서 항상 ‘내가 걸어 간
길―줄거리’와 ‘그 줄거리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문제가 됩니다. 결국 나에게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란 그 줄거리(작은 정황의 연결체)를 줄거리인 채 보여주기만 하든, 작은 정황들에
생각과 느낌을 덧붙여 보여주고 들려주든, 줄거리를 구체적인 정황의 감정으로 녹여내어 들려
주든 ‘줄거리와 그 의미’의 직물입니다. 따라서 있었던 일의 시간적 경과 과정의 짧고 김은
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는 있었던 일의 전체 과정과 그것이 담을 수 있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를 쓰기에 앞서 의미가 살아 있는 줄거리 짜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추석날 고모님댁에 인사를 가는데
버스정류장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호기심으로 다가가니
개 한 마리 건물 구석에 놓여 있었다
에구, 누구 집 개야, 안됐네
한마디씩 남기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
마지막으로 내가 남았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가축 병원이 어디 있나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한참 기다렸지만
역시 헛일이었다 차에 치인 개는 피를 계속 흘리며
그저 숨만 볼록볼록 쉬고 있었다
나는 개를 살리고 싶었지만
싣고 갈 차도 필요한 돈도
할애할 시간도 없어
끝내 개를 남겨놓고 돌아서고 말았다
누가 개를 발견하여
얼른 가축병원으로 옮겨주었으면,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도망을 가고 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맹문제「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전문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줄거리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있었던 일의 줄거리가 ‘그러나 도망을 가고 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자괴(自愧)의 감정을 일으키며 인간사의 어떤 면을 환기합
니다. 어떤 의미 공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액면 이상의 의미가 나의 마음을 잡아당깁니다.
매사에 마음은 아파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행동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던 나의 삶이 떠오릅니다.
‘차에 치인 개는 피를 계속 흘리며/ 그저 숨만 볼록볼록 쉬고 있’음을 보면서도, ‘나는 개를
살리고 싶었지만/ 싣고 갈 차도 필요한 돈도/ 할애할 시간도 없어/ 끝내 개를 남겨 놓고 돌아서’
던, 그러면서도 ‘누가 개를 발견하여/ 얼른 가축병원으로 옮겨 주었으면, 몇 번이나/ 뒤돌아보’
던 그런 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거창하게 불의에 대한 투쟁 같은 것이 아니어도, 결정적인
행동이란 참으로 단순한 것이어서 아파하는 그에게 도움을 주는 쪽으로 한 걸음만 다가서면
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했던 삶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 체험(있었던 일)이 엄청난 상징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이 그 자체로 의미를 담고 있는 시적 공간이 되도록 정돈하고 감정을
보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어떤 주제’를 향해 집중된 짜임새를 가졌다는 점만 빼면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지요.
이처럼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내가 걸어 간 길―줄거리’와 ‘그 줄거리가 담고 있는
의미’가 빚어내는 쓰기 방법입니다. 때문에 시를 씀에 있어서 자기가 한 체험을 가지고 어떤
깨달음을 주는 짧은 이야기를 짓는다고 생각하면 체험을 재구성하는데 훨씬 유리합니다.
1-5. 있었던 일의 순서에 기초하여 시적 정황으로 취한다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있었던 일이 나에게 불러일으킨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있었던 일의 순서에 따라 서정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알기 쉽습니다(앞서 보았던 예문의
시 모두가 그렇습니다).
기본 골격을 도식하면,
<① 정황 설정(도입)→ ② 小정황의 전개→ ③ 국면 종결>이 됩니다.
있었던 일들의 어떤 면들을 쭈욱 연결해 보니, 그 자체로 무엇인가 의미를 품고 있는 이야기
공간이어서, 그런 생각과 느낌이 가장 잘 드러나도록, 있었던 일의 어떤 면을 전개시켜 가는
것이지요: <의미를 중심으로, 의미 정황이 되도록>.
이런 이유로 해서, 있었던 일을 시로 쓸 때는 체험한 일의 어떤 면을 반드시 시적 정황으로
취해야 합니다. 그것이 묘사와 정황 제시에 의한 것이든, 생각과 느낌이 덧붙여진 것으로든,
깨달음의 감흥으로 녹아들어 가든, 체험한 일을 시적 정황으로 취할 때 남들도 그 일을 마음
속에 그려보며 그 생각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체험된 사건은 보여주지 않고
생각만 주절거리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다가 침 뱉는 격”입니다.
반드시, 생각과 느낌이 나왔던 일을 시적 정황으로 취해야 합니다.
그것도 체험의 순서에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 체험 과정을 통해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과정을 보여주어 남들도
그렇게 느끼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식 앞세우고
아버지 제사 보러 가는 길
― 아버지 달이 자꾸 따라와요
― 내버려둬라
달이 심심한 모양이다
우리 부자가 천방둑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솨르르솨르르 몸 씻어내는 소릴
밟으며 쇠똥냄새 구수한 판길이 아저씨네 마당을 지나 옛 이발소집 담을 돌아가는데
아버짓적 그 달이 아직 따라오고 있었다
― 이상국「달이 자꾸 따라와요」전문
있었던 일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옮깁니다. 그런데도 그 장면이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
킵니다. 왜? ‘人은 유한하지만 間은 영원하다’는 생의 법칙을 생각하게 하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과 가야만 하는 아버지 그리고 철모르는 아들이라는 人의 연속성
을 다른 것도 아닌 시간을 낳는 달이 지켜보고 있다는 상황이 그 자체로 ‘시간 속에 놓여진
생’과 ‘간(間)’으로서의 ‘영원’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표현
하려면 그런 생각과 느낌을 낳은 그 체험을 시적 정황으로 취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지요. 또 실제의 체험 순서를 따르지 않고도 불가능하고요.
1-6. 이야기성을 십분 활용하라
― 이러쿵저러쿵 들려준다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보통의 경우, 우리가 일상에서 겪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려고 할 때는 그 일의 시간적인
경과 과정에 따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있었던 일’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있었던 일’의 이야기성입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지난 여름 장에 가서
암수 강아지 한쌍을 사왔다
이놈들이 커서 이젠 제법 개 구실을 한다
어느날 과자 하나씩을 주었더니
제각기 자기 과자 앞에서 과자를 지키며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한다
두 시간이 지나고 오전이 다 가도록 서로
눈치만 보며 먹지를 못한다
등털 곤두세우고 침만 질질 흘리는
이 어이없는 긴장!
나는 늦게사 그걸 알고
가서 과자를 멀리 던져버림으로써
그 팽팽한 긴장을 깨뜨렸다
이놈들은 그제사 고개 들고 하늘도 보고
또 서로 핥아주기도 한다
― 이동순「개 두 마리」전문
시적 화자가 겪었던 일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감동이 흐르며, 그 ‘어이없는 긴장!’이 우리네 삶을 살피게
합니다. 이처럼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쉽게 생각하면, 일상에서 겪었던 일을 조금
긴장된 이야기 형태로 재구성하여 이러쿵저러쿵 들려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긴장은 이야
기를 의미로 집중시키기 위한 긴장이 입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생각과 느
낌이 잘 드러나게 조직된 이야기인 셈입니다.
1-7. 깨달음의 감동이 살아 있는 ‘있었던 일’이어야 합니다
― 감흥 있는 사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줄거리를 다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감동을 중심으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감동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저 수다꺼리에 머물게 됩니다. 시인은 체험이 준 감동을 표현
하는 감동의 예술가입니다. 그것이 물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든, 풍경을 대상으로 한 것이
든, 자기가 겪었던 일을 대상으로 한 것이든, 그것이 나에게 불러일으킨 감동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체험이 ‘생의 한 국면을 환기하는 의미를 불러일으킨다’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냥 ‘슬프다/ 기쁘다/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정도로 시를
쓸 수 없습니다. 그 속에 삶을 깨우치는 감흥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이동순의 '개 두 마리'
를 보십시오. 나희덕의 '종점 하나 전', 문학철의 '호도캐기', 맹문제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국의 '달이 자꾸 따라와요'를 보십시오. 모두가 생의 한 국면을 환기하는
깨달음의 감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무작정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었던 일이라는 ‘이야기성’을 ‘의미를 중심으로’ 다듬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감동이 살아 있는 ‘있었던 일’이어야 합니다. 내가 체험한 그 일이 마치
생의 한 국면을 이르는 상징적인 이야기 공간 같아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심심풀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값어치 없게 하는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감동 있는 일’을 찾아야 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삶에 닻을 내리게 합니다.
방금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망막 한쪽에 환하게 불이 들어오면서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기라
낮이 익은기라
그래서 돌아서 “야!”하고 불렀더니만
스쳐지나간 사람들이 죄 돌아보는기라
거기 이름 모를 것들이 한꺼번에
날 쳐다보는데
뜨악한 얼굴
화난 얼굴
슬픈 얼굴
그냥 무표정한 얼굴―
부끄럽기보담 모처럼
사람 얼굴이 죄 보이는기라
살아 있는 사람 얼굴들이
단순하게 ‘야’하고 이름 붙인 것들이
참말로 세상은 이래서 한 번 환하고
― 박해석 '이름 모를 것들' 전문
“야”하고 불렀는데,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날 쳐다봤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마음에 환한 등을 켭니다. 뿔뿔이 저 갈길을, 제 길만을 보고 가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돌아보
았던 그 체험이 한순간, 참말로 아름다운 세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있었던 일에 자기
소감을 덧붙여 들려주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그냥 쪽팔렸다고만 생각했으면 이와 같은 이야
기는 그저 웃자고 떠드는 수다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 안에는 오늘날처럼 파편화
개별화 고립화되어 가는 세상을 반성케 하는 ‘순간, 생의 화장(和唱)’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있었던 일을 시로 쓸 때는 그 ‘있었던 일’이 생의 한 국면으로서의 깨달음을 갖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감흥있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이상을 통해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의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내가 겪은 어떤 일
2) 그 일이 왠지 찌릿찌릿한 느낌을 주다가 생의 한 국면에 해당하는 의미 감정을 불러일으킨
다. 마치 그 체험이 어떤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3) 감동스러운 감흥이 만들어진다.
4) 감흥의 의미가 드러나게, 의미를 중심으로, 있었던 일(사건)이라는 객관적 재료를 활용하여
사상 감정을 표현한다.
Ⅰ. 있었던 일을 시로 쓰는 과정
1-1.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란?
나에게 있었던 일이란 말 그대로 내가 겪은 일(사건)입니다. 예를 들어 술을 진탕
먹고 정신을 잃었던 경험이나, 차를 타고 졸다가 내려야 할 정류장을 지나쳐 갔다거나,
지하철에 중요한 물건을 두고 내려서 그것을 찾으러 종점까지 갔다거나, 별 이유 없이
두통이 하도 심해 병원에 갔던 일과 같이 시간적으로 펼쳐졌던 일이나 사건입니다.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그런 일이나 사건이 뭔가 의미 있는 생각을 불러일으키며
다가올 때 그런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시 쓰기입니다.
다음 예문을 보겠습니다.
집이 가까워 오면
이상하게도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깨어 보면 늘 종점이었다
몇 남지 않은 사람들이
죽음 속을 내딛듯 골목으로 사라져 가고
한 정거장을 되짚어 돌아오던 밤길,
거기 내 어리석은 발길은 뿌리를 내렸다
내려야 할 정거장을 지나쳐
늘 막다른 어둠에 이르러야 했던,
그제서야 터벅터벅 되돌아오던,
그 길의 보도 블록들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그래서 길은 기우뚱거렸다
잘못 길들여진 말처럼
집을 향한 우회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희미한 종점 다방의 불빛과
셔터를 내린 세탁소, 쌀집, 기름집의
작은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 낮은 지붕들을 지나
마지막 오르막길에 들어서면
지붕들 사이로 숨은 나의 집이 보였다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 나희덕「종점 하나 전」전문
여러분도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늘 타는 버스인데도 묘하게 집에 가까이 올수록 졸음이 쏟아져 깜박 내려야 할 정류장
에서 내리지 못하고 한 정거장 더 가서 내렸던, 그래서 한 정거장을 되짚어 왔던 경험.
그래서 사실 쉽게 흘려 버릴 수도 있는 그런 경험인데, 시인은 그 일로부터 뭔가 의미
심장한 생각을 갖게 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아예 타자마자 잠이 들어 종점까지 왔
다면 피곤해서 그랬거니 하고 말 텐데, 꼭 집에 가까이 올수록 졸음이 쏟아지고 내려
야 할 곳에서 깜박 졸다가 한 정거장 더 간 종점에서 깨인다는 것이, 또 그런 일이
반복된다는 것이 묘하지 않습니까? 뭔가 내 마음을 찌릿찌릿하게 합니다. 특히 막차를
탔을 경우에는 다시 나가는 버스도 없고 해서 길을 되짚어 걸어올 때! 그 되짚어 오는
밤길의 면면이 생의 조건에 대한 어떤 암시처럼 느껴지며 서정의 파고를 불러일으킵니다.
그 체험을 나눠 보면,
1) 습관처럼 집을 지나치는 졸음
① 이상하게도
② 늘
③ 어리석은 발길
2) 되짚어 오는 밤길의 면면
④ 보도 블록은 여기저기 꺼져 있었다. 기우뚱거렸다
⑤ 우회
⑥ 간판들이 바람에 흔들렸다
3) 우리의 생의 조건이 마치 그처럼 ‘이상하게도’, ‘어리석게’, ‘기우뚱거리는’,
‘우회’를 조건으로 하는 길 같아만 보인다는 사상 감정.
⑦ “집은/ 종점보다는 가까운,/ 그러나 여전히 먼 곳에 있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1) 있었던 일
2) 있었던 일이 왠지 찌릿찌릿한 느낌을 주다가
3) 생의 한 국면에 해당하는 의미 감정을 불러일으켜
4) 의미가 드러나게, 의미를 중심으로, 있었던 일(사건)이라는 객관적 재료를 활용하여
사상 감정을 표현하기입니다.
실재로 여러분들이 위 시를 봐도, 있었던 일이 생의 한 국면에 대한 이해를 촉발시키지
못했다면 이와 같은 시가 쓰여질 수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그리고 있었던 일의
면면에 근거하지 않고는 그런 생각을 표현할 길도 없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이처럼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란 있었던 일이 불러일으킨 사상 감정을 있었던 일에
근거하여 표현하는 쓰기입니다.
1-2. 시 쓰기의 재료
나에게 있었던 일을 대상으로 하는 시 쓰기입니다.
있었던 일이 나에게 어떤 생각과 느낌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그런 생각과 느낌을 있
었던 일에 근거하여 표현하는 시 쓰기입니다.
그래서 시 쓰기의 재료는,
▷ 있었던 일의 어떤 면
― 경과 과정의 어떤 면들(이야기)
▷ 있었던 일들이 불러일으킨 생각과 느낌이 됩니다.
실제로 나희덕의 '종점 하나 전'도 있었던 일의 면면과 그것이 불러일으킨 생각과 느낌을
더해 나가는 방식으로 쓰여졌습니다. 그래서 만약 있었던 일의 면면이 생에 대한 이해를
환기하는 바가 부족했다면 이와 같은 시 쓰기는 불가능합니다.
1-3. 있었던 일이 환기하는 바의 생각과 느낌을 표현합니다
있었던 일은 곧 이야기입니다.
시간적으로 펼쳐진 체험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나희덕의 '종점 하나 전'도 시간적으로
펼쳐진 체험 이야기입니다. 그 시간적으로 펼쳐진 체험이 어떤 의미 있는 감흥을 주어서,
그 감흥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냐 하면, 있었던 일이라는 그 과정의 면면에
근거하여 표현합니다. 때문에 시인의 시선은 항상 ‘있었던 일이라는 과정(이야기)’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물상이나 풍경을 대상으로 할 때는 대상의 장면에
관심을 기울인다면, 있었던 일은 ‘일’이라는 사건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사건 이야기 다시 말해서, 사건의 시간적 전개 과정이 중요합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큰형님이 호도 캐러 가자한다
‘하하, 형님도
호도가 고구맙니까’
염색한 머리 밑에서 허옇게 돋아오는 머리칼 쓸어 올리며 구부정하니 여윈 큰형님이
그냥 빙긋이 웃으며 망태기 하나 괭이 하나 들고 앞장을 선다
추석에 성묘 왔던 사람들이 사과 과수원 울타리로 넉넉히 둘러둔 밤나무 호도나무 섞어
둔 숲에 숨어들어 알밤 너덧 말 실히 털어 가는데도 ‘넵 둬라. 다 여기 연고 있는 사람
들 아니겠냐.’ 하더니 다람쥐란 놈들 실히 한 가마니는 물어 갔으니 반은 찾아와야겠단다
산비탈 몇 곳 괭이로 헐어 내어 두어 말
망태기에 담으며 나는 신이 났다
이곳저곳 더 욕심냈더니
그만 가잔다
‘반만 건지면 됐다’
다람쥐란 놈 욕심은 많고 머리는 나빠 제 먹을 것보다 몇 곱절 물어 간다고 한다 그래
놓고는 어디에 다 묻어 두었는지 몰라 겨울에 굶어 죽기도 한다는데 하하, 그런 어리석음
덕분에 다람쥐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나 그렇게 땅 속에 물어다 묻어 논 것들이 싹을
틔워서 도토리 숲이 퍼져 갔다나
구부정하니 앞서 내려가는 형님
머리 위로 흰 구름 한 자락 여유롭다
― 문학철「호도캐기」전문
있었던 일을 들려줍니다.
있었던 일 그 자체를 들려주는 것이 아니라 있었던 일이 가지고 있는 의미를, 그 의미가
잘 드러나도록, 있었던 일로 들려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있었던 일이 삶에 대한 의미
있는 깨달음의 감흥, ‘호도를 따야 한다’는 세계관 속에서 살고 있던 삶을 반성하게
하는 사상 감정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깨달음의 감흥 때문에, 그 깨달음의
감흥을, 그 체험 이야기를 통해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있었던 일’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위의 체험이 어떤 시적 체험을 주었기에 이와 같은 시를 쓰게 되었을까,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여지껏 ‘호도를 따야 한다’는 세계 속에 살았습니다.
나는 여지껏 ‘떨어진 호도는 주워야 한다’는 세계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큰 형님이 말합니다.
“호도 캐러 가자.”
그래서 나는 웃으며 말했습니다.
“하하, 형님도/ 호도가 고구맙니까”.
그러나 큰 형님은 “그냥 빙긋이 웃으며 망태기 하나 괭이 하나 들고 앞장을” 섭니다.
호도를 캐러 갑니다. 그리고 진짜 다람쥐란 놈들이 물어다가 쌓아 둔 “산비탈 몇 곳
괭이로 헐어 내어 두어 말” 캐냅니다. 따지도 않고, 줍지도 않고 캐냅니다. 내가 여지껏
가지고 있었던 ‘호도를 딴다’는 이미지가 와장창 무너집니다.
그래서 생각하게 됩니다.
호도를 ‘딴다’와 ‘캐낸다’의 경험 이미지를 구성하는 세계관의 차이는 무엇인가? 혹시
나는 나의 경험적 이미지를 객관으로 절대화시켜 살지 않았는가? 그 결과 더 넓은 세계
이해로부터 멀어지지는 않았는가?
이처럼 ‘호도를 딴다’는 이미지가 나의 객관성이고 과학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객관성과
과학, 그 이미지에 위배되면 그것을 바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 이미지가 어쩌면 내가 선
택한 주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말입니다.
퍼뜩, 오래 전에 읽었던 베이트슨의 생각이 떠올라 그 책을 찾아봅니다.
거기에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객관적 경험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경험은 주관적이다.
‘지각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뇌가 만들어 낸 이미지이다. 모든 지각은 이미지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누군가에게 발을 밟혔을 때 내가 경험하는 것은 그에 의해 내 발이 밟힌 사실이
아니라, 밟히고 나서 얼마 후에 뇌에 전달된 신경 보고와 함께 재구성된, 그에게 발을 밟힌
것에 대한 나의 ‘이미지’인 것이다. 외계의 경험은 항상 어떤 특정의 감각 기관과 신경 통로
에 의해 전달된다. 그런 의미에서 사물에 대한 나의 경험은 주관적인 것으로서 객관적일 수 없다.
우리의 문명은 객관성의 환상 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다. ― 베이트슨『정신과 자연』(까치)
44/5쪽 요약.>
참으로 기막힌 말입니다.
이처럼 경험의 주관적인 이미지에 대한 반성 없이 그것을 객관이라 믿고, “풍경이 풍경을 반
성하지 않는 것처럼”(김수영 「절망」중에서) 나는 나를 내세웁니다. 나의 객관이라는 그 믿음
으로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닫아 버립니다. 그리고는 하나의 이미지만을 큰문,
바른 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비난과 야유도 서슴지 않습니다.
그게 나였습니다.
이런 생각을 할수록, 알밤 너덧 말 실히 털어 가는데도 “넵 둬라. 다 여기 연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냐”, “반만 건지면 됐다”라고 말하는 큰 형님의 말씀이 참으로 향기롭습니다.
저만치 “구부정하니 앞서 내려가는 형님”의 모습!
그 향기의 비밀은 “여유”입니다. ‘전부 아니면 전무’가 아니라 ‘얼마쯤’입니다.
‘호도를 딴다’는 이미지는 자기를 반성하지 못하는(반성할 수 없는) 것에서 존재의 절대화를
이룹니다. 그러나 ‘호도를 캔다’는 이미지는 그 자체로 관계의 산물이기 때문에 ‘절대’를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에 의해 이미지화된 것입니다(“넵 둬라.
다 여기 연고 있는 사람들 아니겠냐.”). ‘내가 심고 길렀으니 내가 거둔다’와 ‘모두가 심고
모두가 길렀으니 나누어 가진다’는 패러다임은 엄청난 차이입니다. 그 차이로 ‘나’와 큰형님이
있습니다.
큰형님이 속한 패러다임의 우위는 우화 같은 다음 이야기에 그대로 녹아 있습니다. “다람쥐란
놈 욕심은 많고 머리는 나빠 제 먹을 것보다 몇 곱절 물어 간다고 한다 그래 놓고는 어디에 다
묻어 두었는지 몰라 겨울에 굶어 죽기도 한다는데 하하, 그런 어리석음 덕분에 다람쥐가 죽지
않고 살아 남았다나 그렇게 땅 속에 물어다 묻어 논 것들이 싹을 틔워서 도토리 숲이 퍼져 갔다”.
이 이야기에서 2-1=1이 아닙니다. 2-1=1±α입니다. α의 역동적 창발성이 ‘관계’의 세계를
이룹니다. 형님의 패러다임은 α를 중요시하고, 나의 패러다임은 2-1이라는 실체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여유”의 자리가 사라집니다. “여유”의 자리만큼의 겸손도 사라집니다.
겸손이 사라지는 만큼 따뜻함이 사라집니다(기계적이 됩니다).
하여, “하하, 형님도/ 호도가 고구맙니까”와 “그냥 빙긋이 웃는 형님”의 모습이 대비됩니다.
그리고 빙긋 웃는 형님의 미소가 나를 감쌉니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의 치유입니다. 그런 사상 감정, 깨달음의 감흥이 일어납니다. 내가 체험한
일이 바로 그런 깨달음을 담고 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체험 이야기를 중심으로, 내가 느꼈던 그런 생각들이 더 잘 느껴지도록 들려주는
것입니다.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있었던 일이 나에게 의미 있는 감흥을 주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하
는 것입니다. 어떻게 표현하냐 하면, 의미 있는 감흥이 잘 드러나게,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방법으로. 그렇기 때문에 있었던 일이 선명하게 시의 물질적 재료가 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문제는, 있었던 일이 환기하는 바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의미 있는 이야기’가 됩니다.
1-4. 줄거리와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
― 짧은 이야기를 짓는다고 생각하십시오.
있었던 일은 그것이 ‘일’인 까닭으로 하여 항상 시간적 경과 과정을 갖고 있고, 또 그에 대한
감흥은 그 경과 과정 전체에 응하는 것이기 때문에 시적 체험에 있어서 항상 ‘내가 걸어 간
길―줄거리’와 ‘그 줄거리가 담고 있는 의미’가 문제가 됩니다. 결국 나에게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란 그 줄거리(작은 정황의 연결체)를 줄거리인 채 보여주기만 하든, 작은 정황들에
생각과 느낌을 덧붙여 보여주고 들려주든, 줄거리를 구체적인 정황의 감정으로 녹여내어 들려
주든 ‘줄거리와 그 의미’의 직물입니다. 따라서 있었던 일의 시간적 경과 과정의 짧고 김은
문제가 안 됩니다. 문제는 있었던 일의 전체 과정과 그것이 담을 수 있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시를 쓰기에 앞서 의미가 살아 있는 줄거리 짜기에 집중해야 합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추석날 고모님댁에 인사를 가는데
버스정류장 한쪽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호기심으로 다가가니
개 한 마리 건물 구석에 놓여 있었다
에구, 누구 집 개야, 안됐네
한마디씩 남기고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
마지막으로 내가 남았다
나는 어찌해야 좋을지 몰랐다
가축 병원이 어디 있나 둘러보았지만
보이지 않았고
주인이 나타나기를 한참 기다렸지만
역시 헛일이었다 차에 치인 개는 피를 계속 흘리며
그저 숨만 볼록볼록 쉬고 있었다
나는 개를 살리고 싶었지만
싣고 갈 차도 필요한 돈도
할애할 시간도 없어
끝내 개를 남겨놓고 돌아서고 말았다
누가 개를 발견하여
얼른 가축병원으로 옮겨주었으면, 몇 번이나
뒤돌아보았다 그러나 도망을 가고 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 맹문제「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전문
줄거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줄거리가 어떤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있었던 일의 줄거리가 ‘그러나 도망을 가고 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자괴(自愧)의 감정을 일으키며 인간사의 어떤 면을 환기합
니다. 어떤 의미 공간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액면 이상의 의미가 나의 마음을 잡아당깁니다.
매사에 마음은 아파했지만 결정적으로 중요한 행동으로는 나아가지 못했던 나의 삶이 떠오릅니다.
‘차에 치인 개는 피를 계속 흘리며/ 그저 숨만 볼록볼록 쉬고 있’음을 보면서도, ‘나는 개를
살리고 싶었지만/ 싣고 갈 차도 필요한 돈도/ 할애할 시간도 없어/ 끝내 개를 남겨 놓고 돌아서’
던, 그러면서도 ‘누가 개를 발견하여/ 얼른 가축병원으로 옮겨 주었으면, 몇 번이나/ 뒤돌아보’
던 그런 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거창하게 불의에 대한 투쟁 같은 것이 아니어도, 결정적인
행동이란 참으로 단순한 것이어서 아파하는 그에게 도움을 주는 쪽으로 한 걸음만 다가서면
되는 것인데 그렇지 못했던 삶의 모습이 떠오르고 그 체험(있었던 일)이 엄청난 상징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이 그 자체로 의미를 담고 있는 시적 공간이 되도록 정돈하고 감정을
보태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실제로도 ‘어떤 주제’를 향해 집중된 짜임새를 가졌다는 점만 빼면
우리가 일상에서 하는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지요.
이처럼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내가 걸어 간 길―줄거리’와 ‘그 줄거리가 담고 있는
의미’가 빚어내는 쓰기 방법입니다. 때문에 시를 씀에 있어서 자기가 한 체험을 가지고 어떤
깨달음을 주는 짧은 이야기를 짓는다고 생각하면 체험을 재구성하는데 훨씬 유리합니다.
1-5. 있었던 일의 순서에 기초하여 시적 정황으로 취한다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있었던 일이 나에게 불러일으킨 생각과 느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있었던 일의 순서에 따라 서정을 전개하는 것이 가장 알기 쉽습니다(앞서 보았던 예문의
시 모두가 그렇습니다).
기본 골격을 도식하면,
<① 정황 설정(도입)→ ② 小정황의 전개→ ③ 국면 종결>이 됩니다.
있었던 일들의 어떤 면들을 쭈욱 연결해 보니, 그 자체로 무엇인가 의미를 품고 있는 이야기
공간이어서, 그런 생각과 느낌이 가장 잘 드러나도록, 있었던 일의 어떤 면을 전개시켜 가는
것이지요: <의미를 중심으로, 의미 정황이 되도록>.
이런 이유로 해서, 있었던 일을 시로 쓸 때는 체험한 일의 어떤 면을 반드시 시적 정황으로
취해야 합니다. 그것이 묘사와 정황 제시에 의한 것이든, 생각과 느낌이 덧붙여진 것으로든,
깨달음의 감흥으로 녹아들어 가든, 체험한 일을 시적 정황으로 취할 때 남들도 그 일을 마음
속에 그려보며 그 생각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체험된 사건은 보여주지 않고
생각만 주절거리면 “종로에서 뺨 맞고 한강에다가 침 뱉는 격”입니다.
반드시, 생각과 느낌이 나왔던 일을 시적 정황으로 취해야 합니다.
그것도 체험의 순서에 따라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도 그 체험 과정을 통해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그 과정을 보여주어 남들도
그렇게 느끼게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어린 자식 앞세우고
아버지 제사 보러 가는 길
― 아버지 달이 자꾸 따라와요
― 내버려둬라
달이 심심한 모양이다
우리 부자가 천방둑 은사시나무 이파리들이 지나가는 바람에 솨르르솨르르 몸 씻어내는 소릴
밟으며 쇠똥냄새 구수한 판길이 아저씨네 마당을 지나 옛 이발소집 담을 돌아가는데
아버짓적 그 달이 아직 따라오고 있었다
― 이상국「달이 자꾸 따라와요」전문
있었던 일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옮깁니다. 그런데도 그 장면이 어떤 감흥을 불러일으
킵니다. 왜? ‘人은 유한하지만 間은 영원하다’는 생의 법칙을 생각하게 하는 체험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돌아가신 분과 가야만 하는 아버지 그리고 철모르는 아들이라는 人의 연속성
을 다른 것도 아닌 시간을 낳는 달이 지켜보고 있다는 상황이 그 자체로 ‘시간 속에 놓여진
생’과 ‘간(間)’으로서의 ‘영원’을 돌아보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런 생각을 표현
하려면 그런 생각과 느낌을 낳은 그 체험을 시적 정황으로 취하지 않고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것이지요. 또 실제의 체험 순서를 따르지 않고도 불가능하고요.
1-6. 이야기성을 십분 활용하라
― 이러쿵저러쿵 들려준다고 생각하면 좋습니다.
보통의 경우, 우리가 일상에서 겪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말하려고 할 때는 그 일의 시간적인
경과 과정에 따라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는 ‘있었던 일’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있었던 일’의 이야기성입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지난 여름 장에 가서
암수 강아지 한쌍을 사왔다
이놈들이 커서 이젠 제법 개 구실을 한다
어느날 과자 하나씩을 주었더니
제각기 자기 과자 앞에서 과자를 지키며
서로 으르렁거리기만 한다
두 시간이 지나고 오전이 다 가도록 서로
눈치만 보며 먹지를 못한다
등털 곤두세우고 침만 질질 흘리는
이 어이없는 긴장!
나는 늦게사 그걸 알고
가서 과자를 멀리 던져버림으로써
그 팽팽한 긴장을 깨뜨렸다
이놈들은 그제사 고개 들고 하늘도 보고
또 서로 핥아주기도 한다
― 이동순「개 두 마리」전문
시적 화자가 겪었던 일이 그 자체로 하나의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떤 감동이 흐르며, 그 ‘어이없는 긴장!’이 우리네 삶을 살피게
합니다. 이처럼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쉽게 생각하면, 일상에서 겪었던 일을 조금
긴장된 이야기 형태로 재구성하여 이러쿵저러쿵 들려주는 것입니다. 물론 그 긴장은 이야
기를 의미로 집중시키기 위한 긴장이 입니다. 그래서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는 생각과 느
낌이 잘 드러나게 조직된 이야기인 셈입니다.
1-7. 깨달음의 감동이 살아 있는 ‘있었던 일’이어야 합니다
― 감흥 있는 사건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생각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줄거리를 다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감동을 중심으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과정일 뿐입니다. 따라서
감동이 담겨 있지 않으면 그저 수다꺼리에 머물게 됩니다. 시인은 체험이 준 감동을 표현
하는 감동의 예술가입니다. 그것이 물상을 대상으로 한 것이든, 풍경을 대상으로 한 것이
든, 자기가 겪었던 일을 대상으로 한 것이든, 그것이 나에게 불러일으킨 감동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의 체험이 ‘생의 한 국면을 환기하는 의미를 불러일으킨다’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냥 ‘슬프다/ 기쁘다/ 아름답다’고 생각되는 정도로 시를
쓸 수 없습니다. 그 속에 삶을 깨우치는 감흥이 들어 있어야 합니다. 이동순의 '개 두 마리'
를 보십시오. 나희덕의 '종점 하나 전', 문학철의 '호도캐기', 맹문제의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국의 '달이 자꾸 따라와요'를 보십시오. 모두가 생의 한 국면을 환기하는
깨달음의 감흥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니 무작정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있었던 일이라는 ‘이야기성’을 ‘의미를 중심으로’ 다듬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의 감동이 살아 있는 ‘있었던 일’이어야 합니다. 내가 체험한 그 일이 마치
생의 한 국면을 이르는 상징적인 이야기 공간 같아 그것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심심풀이라는 명목으로 스스로를 값어치 없게 하는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감동 있는 일’을 찾아야 하고 표현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삶에 닻을 내리게 합니다.
방금 옷깃을 스치고 지나갔는데
망막 한쪽에 환하게 불이 들어오면서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기라
낮이 익은기라
그래서 돌아서 “야!”하고 불렀더니만
스쳐지나간 사람들이 죄 돌아보는기라
거기 이름 모를 것들이 한꺼번에
날 쳐다보는데
뜨악한 얼굴
화난 얼굴
슬픈 얼굴
그냥 무표정한 얼굴―
부끄럽기보담 모처럼
사람 얼굴이 죄 보이는기라
살아 있는 사람 얼굴들이
단순하게 ‘야’하고 이름 붙인 것들이
참말로 세상은 이래서 한 번 환하고
― 박해석 '이름 모를 것들' 전문
“야”하고 불렀는데,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날 쳐다봤던 일입니다. 그런데 그 일이
마음에 환한 등을 켭니다. 뿔뿔이 저 갈길을, 제 길만을 보고 가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돌아보
았던 그 체험이 한순간, 참말로 아름다운 세상으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있었던 일에 자기
소감을 덧붙여 들려주는 것입니다. 속된 말로 그냥 쪽팔렸다고만 생각했으면 이와 같은 이야
기는 그저 웃자고 떠드는 수다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체험 안에는 오늘날처럼 파편화
개별화 고립화되어 가는 세상을 반성케 하는 ‘순간, 생의 화장(和唱)’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있었던 일을 시로 쓸 때는 그 ‘있었던 일’이 생의 한 국면으로서의 깨달음을 갖고
있는 것이어야 합니다. 한마디로 감흥있는 사건이어야 합니다.
이상을 통해 <있었던 일을 시로 쓰기>의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내가 겪은 어떤 일
2) 그 일이 왠지 찌릿찌릿한 느낌을 주다가 생의 한 국면에 해당하는 의미 감정을 불러일으킨
다. 마치 그 체험이 어떤 말을 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3) 감동스러운 감흥이 만들어진다.
4) 감흥의 의미가 드러나게, 의미를 중심으로, 있었던 일(사건)이라는 객관적 재료를 활용하여
사상 감정을 표현한다.
출처 : 내 안에 숨어든 것을 쓰다
글쓴이 : 은경이 원글보기
메모 :
'시창작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좋은 시란? / 정민 (0) | 2008.10.16 |
---|---|
[스크랩] 좋은 시의 조건 10 가지 / 박남희 (0) | 2008.10.16 |
[스크랩] 시를 더 잘 쓰고 싶어하는(/이승하) (0) | 2007.03.29 |
[스크랩] (시론) 시의 메타포 (0) | 2006.12.04 |
[스크랩] (시론) 좋은시와 나쁜시 (0) | 2006.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