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와 나쁜 시 / 박 태 일(시인, 경남대 국문과 교수)
1
시는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끊임없이 이어진 시공간적 단위의 구성원이 서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인 것으로 믿어온 담론 구성물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 둘레 주류 시론에서 말하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은 부분 개념이거나 역사적 정의에 머문다. 처음부터 시의 본질이니 순수한 시정신이니 호들갑을 떠는 일은 수사적 부풀림이거나, 특정 시관(詩觀)에 대한 배타적 우월성을 굳히기 위한 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한 자각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특정 시관을 금과옥조로 일반화시키는 잘못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시와 비시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너무 느슨해서 오히려 경계의 나눔이 불필요해 보일 정도다. 어떤 작품이 시냐 시가 아니냐는 물음이 어리석은 까닭이다. 그보다는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하는, 특정한 시적 취향과 그 관점을 밝히고 그에 대한 정당성을 토구(討究)하기 위해 나아가는 일이 생산적이다.
㈀
콩나물죽
후룩후룩 먹으며
아버지 생각하였다
우리 아버지 돌아오시면
죽 안 먹으려니 하고
㈁
새벽빛을 보고 싶어
불을 켜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새벽빛에 젖고 싶어
한없이 젖어들고 싶어......
푸르른 몸이여
여명의 마음이여.
㈀과 ㈁은 둘 다 시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먼저 이 둘은 줄글 꼴로 쓰여진 예사로운 산문과는 다르다. 겉꼴에서부터 들쭉날쭉 글줄이 들고 난 가락글이다. 오늘날 가장 흔한, 그리고 가장 낯익은 시꼴이다. 그리고 둘 다 시집이라는 형태공간에 실려 있다. 그러하니 이 둘을 두고 시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남은 문제는 있다. 이 둘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나쁜가라는, 작품에 대한 호오•취향에 대한 물음이다. 이 둘이 시인가 시가 아닌가라는 물음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먼저 ㈀을 좋은 시로 여기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시 속에 담겨 있는 현실감각을 눈여겨본 사람일 성싶다. 짐짓 배고픈 아이의 생각과 몸짓을 이음매로 내세운 가난이라는 현실이 짧은 시줄 속에 잘 옹글었다. 거기다 이 시는 나라 잃은 시기 1930년대 이른바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일간지 지면에 실리지 못했던 작품 가운데 하나다. 조선의 빈궁 현실을 다루어 민족의식을 북돋울 수 있는 위험이 큰 작품으로 보였던 까닭이다. 이런 설명까지 덧붙인다면 ㈀에 대한 독자의 호감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명시인의 습작기 투고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을 나쁜 시로 꼽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만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은 구체적인 삶과 겉돌아 추상적이다. 작품 내용도 어름하다. 반복법에 이끌린 영탄조마저 없었다면 이 시를 객쩍은 벌소리로 볼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작품은 그렇게 낮추어 보기 힘든 시다. 명망가 시인인 정현종의 것인 데다, 그에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상금이 많은 시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인 까닭이다. 이런 무거운 사실을 일깨워준 뒤 다시 독자에게 ㈁에 대한 호오를 물어보라. 이 작품을 벌소리에 가까운 것이라 여겼던 이도 마냥 생각을 지켜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지녔던 눈길을 그대로 밀고 나가려면 유명 문학상과 그 심사위원회의 식견, 그리고 시상 주체의 사회적•제도적 명성과 권위체계를 딛고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이 떠맡기 힘든 일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결정짓는 취향의 요건 또한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시 자체에서 오는 것 못지않게 시 바깥에도 있다. 어쩌면 시 바깥 요인이 더 결정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 작품은 문학사회의 거시제도 안에서 마련한 미시전략의 결과다. 각급학교 문학교육, 등단방법, 문학상과 같은 다양한 인정기제나 제도적 틀, 대중매체나 저널 문화면의 명성 생산과 재생산, 또는 인맥•학맥•지맥과 같은 문화자본, 서점 유통 단위에서 나타나는 판매지수나 기호도 순위와 같은 중계회로의 소비전략이 그 내면화의 세부를 이룬다. 이른바 시의 역장(力場)이다.
흔히 문학사회 안에서 시의 자리는 세 가지 역장을 보여준다. 고급시와 대중시 그리고 교양시가 그것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시적 취향과 목표를 겨냥한다. 그러면서 서로 긴장, 대립, 보족(補足) 관계를 거듭한다. 오늘날 우리시는 이러한 세 역장을 껴안고 있는 제도의 결과물이다.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하는 잣대와 조건은 이 역장 안에서 다시 나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여러 길항관계를 받아들일 때라야만 비로소 시에 대한 열린 개념 정의와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서 좋은 시의 요건을 몇 가지로 들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나쁜 시의 모습 또한 자명해질 것이다.
2
첫째, 좋은 시는 무엇보다 좋은 시인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좋은 시의 첫째 요건이 이것이다. 시인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크게 둘이 있다. 심리적 시인관과 사회적 시인관이다. 심리적 시인관이란 시인 안쪽에 시인이 됨직한 특질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보통 사람과 나뉘는 특별한 이로 여겨진다. 사회적 시인관은 이와 달리 시인은 사회 안쪽의 인정기제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다. 다만 시 창작 수련과 발표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이를 뜻한다. 그가 시인일 수 있는 터무니는 등단 제도나 방식을 거쳤는가 아닌가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 근대시사에서 좋은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그 삶에서 흔히 특별한 면모를 지닌다. 때로 안타까운 요절이나 열정적 연애와 같은 비장함, 언어 바깥의 선정성으로 겉칠된 삶이 그것이다. 곧 특별한 삶에서 좋은 시가 나올 것이라는 소박한 인과론, 개성론의 틀은 시인 됨됨이에 타고난 각별함을 요구한다. 심리적 시인관을 밀 수 밖에 없다. 시작에 대한 즉흥성과 시인에 대한 예외성을 버릇처럼 요구하는 태도가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러나 좋은 시인은 세상의 그러한 조급한 기대와는 달리 끊임없이 시와, 언어와 다투는 이다. 그의 작품이 좋은 시 자리에 오를 개연성은 그만큼 크다.
둘째, 언어를 중심으로 좋은 시의 요건을 따져 봄직하다. 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숱한 언어 관습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서 언어의 특이성과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갈래다. 드높은 언어 관습이자 진지한 말놀이인 셈이다. 이 점을 형식주의자의 생각에 따라 일탈이라 부르든 비틀기라 부르든 시가 언어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는 달라지기 힘든 자질이다. 따라서 좋은 시는 언어의 진폭이 넓고, 다채롭게 그 활용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무엇보다 언어는 자민족(自民族) 중심적이다. 언어 활용의 가능성이란 바로 민족어의 가능성과 다르지 않다. 100년 남짓한 근대 시기 동안 우리시는 노래로 불러졌다던 노래시가 아니라 눈으로 읽는 문자시로서 한글의 용례를 키우고 그 쓰임새를 세련시킨 공이 크다. 이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근대시의 전통이다. 좋은 시는 이러한 전통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더욱 변화, 발전시킨 경우다. 따라서 우리 근대의 제국언어였던 일본식 한자 투에 갇혀 있는 시는 좋은 시가 되기 힘들다. 영어 공용어론이 솔솔 피어나고 오늘날 눈길에서 볼 때도 이 점은 달라짐이 없다.
글말이란 입말과 달리 본디부터 지식계층, 엘리트 문화물이다. 따라서 민족 구성원과 더불어 함께 하고자 하는 언어로 나아가지 못하는 시는 특권 문화로 떨어질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근대 민족국가의 민족다움을 재는 주요 상수 가운데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의 동질성이다. 그러나 오해 없길 바란다. 이 말의 요체는 추상적인 정치 이념의 동질성이나, 섣부른 민족혼과 같은 명분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민족 구성원이면 누구나 손쉽게 다가서서 생각과 느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는 뜻이다. 담긴 뜻의 깊고 얕음이나, 언어기법의 각별함과는 관계 없는 일이다.
셋째, 표현에서 본 좋은 시의 요건이다. 시는 무엇보다 언어의 긴밀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수필이나 소설과 달리 압축과 생략을 바탕으로 삼는다. 시는 줄여 써서 많이 말하는 길을 따르고, 소설은 늘여 써서 적게 말하는 길을 따른다. 이 둘의 차이를 힘껏 맞세운 자리에 시와 소설의 관습적 정당성이 있다. 시가 소설에 가까워져 번잡하고 느슨해지면 더는 오롯한 시의 자리를 내세우기 힘들다. 거꾸로 소설이 시처럼 줄이고 다듬어 말과 말 사이의 긴장을 애써 키우고, 생각을 건너뛴다면 더는 소설 자리를 고집하기 힘들다.
그런데 압축과 생략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시적 요건이 뜻하는 궁극적인 자리는 어딘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반복불가능성, 곧 다르게 씌어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른 표현이 그것이다. 이 점이 진지한 말놀이로서 시 창작의 즐거움이고, 시가 다른 갈래와 맞서 끊임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터무니다. 좋은 시란 바로 기지의 표현과 다른 반복불가능성을 실천하고자 한 작품이다. 다르게 씌어질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 말에 힘이 실리고, 그 뜻에 환한 자장이 피어나고, 그 주체인 시인에 대한 외경이 솟아난다.
그렇다면 이 점은 어떻게 확인하는가. 간단한 길이 있다. 해당 시의 특정 부분을 다르게 고쳐보면 될 일이다. 이 경우 고쳐진 상태가 본디 시보다 더 좋아진다면 그 본디 시는 서툴고 나쁜 시다. 거꾸로 다른 이가 손을 대었을 때, 오히려 고쳐진 시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본디 시는 다르게 고쳐 쓰기 힘든 상태, 곧 반복불가능성에 가까이 다가선 경우겠다. 이른바 좋은 시인 셈이다. 아무리 명망을 얻고 있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 그것이 일깨워주는 표현 가치를 포기한다면 하루아침에 범상한 시인으로 떨어지고 만다.
넷째, 작품 내용에서 볼 때 좋은 시의 자질에 대해서는 이미 낯설게하기라는 널리 알려진 개념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 일탈에 붙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개방, 곧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제기나 대거리라는 적극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손쉽게 이를 수 있는 생각이나 느낌, 이미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기지의 세계를 겨냥한 시는 좋은 작품이 되기 힘들다. 널리 승인된 작품 내용이나 문화관습에 가까이 빌붙으려는 유행시, 특정한 내용만을 부풀리는 키치시와 같은 것들이다.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의 의미를 지니리라.
바람조차 내 삶의 큰 모습으로 와 닿고
내가 아는
정원의 꽃은 언제나
눈물빛 하늘이지만,
어디에서든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잊혀질 수 있다
사랑으로 죽어간 목숨조차
용서할 수 있으리라
시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어떤 이의 작품 가운데 한 부분이다. “사랑을 하면 산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냈다. 겉만 번지르하고 막연한 생각에 머물고 있다. 키치시라 일컬을 만큼 감상성도 두드러진다. 이런 작품의 가벼움과 얄팍함 속에는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한 범상한 감각만이 담겨 있을 따름이다. 좋은 시란 적어도 손쉬운 고정관념으로부터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서려는 작품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다섯째, 독자 쪽에서 좋은 시의 요건을 살필 수 있다. 압축과 생략, 곧 줄여서 말하는 방식인 시는 독자 쪽에서 볼 때 늘여서 읽는 일을 근본 방식으로 한다. 늘여서 읽기 어려운 시, 뻔하고 빤하지 않아 한 번에 쉽게 뜻이 잡히지 않은 시, 그것이 무엇인가를 거듭 고심하게 만드는 힘이 큰 작품이 좋은 시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거니와 적게 말하면서 많은 생각과 느낌을 일깨우고자 하는 역설적 갈래가 시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의 거듭 읽기와 독서시간의 지연, 곧 소급적 독서는 필연적이다. 좋은 시란 바로 이렇듯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작품 안에 묶어두는 힘이 강한 작품인 셈이다.
그리고 그 힘은 여러 방향에서 작용한다. 작품 안일 수도 있고, 작품 바깥일 수도 있다. 문학교육이나 저널의 관심, 문학상과 같은 문학사회의 제도적 장치는 바깥요인이다. 대중시에 가까울수록 독자들은 작품 바깥에 의한 규정력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시읽기는 문화 훈련이다. 일상언어 활동과는 길이 다르다. 세련된 언어관습으로서 읽기 훈련과 그로 말미암은 내면화는 필수적이다. 독자에게 손쉽게 읽히지 않는 시란 그 훈련에 거듭 이끌어들이는 힘이 강한 시다. 그들이야말로 특정 세대독자나 당대 현실독자가 아니더라도 마침내 문학사나 문화 자체가 독자가 되는 시, 오래도록 독자사회로 열려 있을 좋은 시로 거듭난다.
3
좋은 시란 시인된 됨됨이에서부터 언어를 거쳐 표현 방법과 인식 내용, 그리고 독자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위에서 나는 좋은 시를 좋은 시인이, 민족어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자리 위에서, 어쩌면 될성부르지 않은 반복불가능한 표현을 겨냥하며, 세계를 개방해주는 쪽으로, 멀리 독자를 묶어두는 힘이 강한 작품으로 규정했다. 여러 편차와 다채로운 맥락이 그 안에서 새로 마련되겠다. 그럼에도 좋은 시는 이러한 요건의 그물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뜻하는 궁극은 마침내 하나다. 뜻있는 말놀이, 문화관습으로서 이르기 힘듦이 그것이다. 그 방위가 어디든 더욱 이르기 힘든 상태를 보여준 작품, 그것이 좋은 시다. 오늘날 문학사회의 환경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대중매체가 시의 취향을 이끈다. 디지털 기술에 따라 향유 방식도 바뀌고 있다. 시를 향한 취향의 높낮이나 경계, 기대지평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대중시의 자리가 시단을 이끌고 있다. 문학의 인정기제 또한 그에 맞물려 움직인다. 세련된 독서로서 시 비평과 연구의 경우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 속에서도 시의 가능성, 곧 언어를 통한 창조적 가능성의 확대라는 쓰임새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좋은 시, 또는 시적인 것을 향한 헌신은 문학사회 안팎으로 지난날과는 견줄 수 없을 강도와 방향에서 요구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당대시의 전통과 관습의 담장을 흔드는 좋은 시가 나올 개연성은 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독자사회가 시인들에게 시를 향한 다함없을 헌신을 한결같이 기대하는 시대 분위기, 좋은 시가 나올 수 있는 처음이자 끝자리다. (『파라Para 21』(2004/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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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제도와 관습의 산물이다. 끊임없이 이어진 시공간적 단위의 구성원이 서로 받아들이거나 받아들인 것으로 믿어온 담론 구성물일 따름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우리 둘레 주류 시론에서 말하고 있는 시에 대한 생각은 부분 개념이거나 역사적 정의에 머문다. 처음부터 시의 본질이니 순수한 시정신이니 호들갑을 떠는 일은 수사적 부풀림이거나, 특정 시관(詩觀)에 대한 배타적 우월성을 굳히기 위한 꾀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한 자각을 분명히 하지 않는다면 특정 시관을 금과옥조로 일반화시키는 잘못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따라서 시와 비시의 경계는 유동적이다. 너무 느슨해서 오히려 경계의 나눔이 불필요해 보일 정도다. 어떤 작품이 시냐 시가 아니냐는 물음이 어리석은 까닭이다. 그보다는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하는, 특정한 시적 취향과 그 관점을 밝히고 그에 대한 정당성을 토구(討究)하기 위해 나아가는 일이 생산적이다.
㈀
콩나물죽
후룩후룩 먹으며
아버지 생각하였다
우리 아버지 돌아오시면
죽 안 먹으려니 하고
㈁
새벽빛을 보고 싶어
불을 켜지 않고
지켜보고 있다
새벽빛에 젖고 싶어
한없이 젖어들고 싶어......
푸르른 몸이여
여명의 마음이여.
㈀과 ㈁은 둘 다 시임에 틀림없다. 무엇보다 먼저 이 둘은 줄글 꼴로 쓰여진 예사로운 산문과는 다르다. 겉꼴에서부터 들쭉날쭉 글줄이 들고 난 가락글이다. 오늘날 가장 흔한, 그리고 가장 낯익은 시꼴이다. 그리고 둘 다 시집이라는 형태공간에 실려 있다. 그러하니 이 둘을 두고 시가 아니라고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다만 남은 문제는 있다. 이 둘 가운데서 어느 쪽이 더 좋은가 나쁜가라는, 작품에 대한 호오•취향에 대한 물음이다. 이 둘이 시인가 시가 아닌가라는 물음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먼저 ㈀을 좋은 시로 여기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시 속에 담겨 있는 현실감각을 눈여겨본 사람일 성싶다. 짐짓 배고픈 아이의 생각과 몸짓을 이음매로 내세운 가난이라는 현실이 짧은 시줄 속에 잘 옹글었다. 거기다 이 시는 나라 잃은 시기 1930년대 이른바 조선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일간지 지면에 실리지 못했던 작품 가운데 하나다. 조선의 빈궁 현실을 다루어 민족의식을 북돋울 수 있는 위험이 큰 작품으로 보였던 까닭이다. 이런 설명까지 덧붙인다면 ㈀에 대한 독자의 호감은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은 무명시인의 습작기 투고 작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달리 ㈁을 나쁜 시로 꼽는 이가 있을 수 있다. 이 작품만을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은 구체적인 삶과 겉돌아 추상적이다. 작품 내용도 어름하다. 반복법에 이끌린 영탄조마저 없었다면 이 시를 객쩍은 벌소리로 볼 독자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실상 이 작품은 그렇게 낮추어 보기 힘든 시다. 명망가 시인인 정현종의 것인 데다, 그에게 오늘날 우리나라에서 가장 상금이 많은 시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작품인 까닭이다. 이런 무거운 사실을 일깨워준 뒤 다시 독자에게 ㈁에 대한 호오를 물어보라. 이 작품을 벌소리에 가까운 것이라 여겼던 이도 마냥 생각을 지켜나가기 어려울 것이다. 왜냐하면 처음에 지녔던 눈길을 그대로 밀고 나가려면 유명 문학상과 그 심사위원회의 식견, 그리고 시상 주체의 사회적•제도적 명성과 권위체계를 딛고 넘어서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개인이 떠맡기 힘든 일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좋은 시와 나쁜 시를 결정짓는 취향의 요건 또한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시 자체에서 오는 것 못지않게 시 바깥에도 있다. 어쩌면 시 바깥 요인이 더 결정적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 작품은 문학사회의 거시제도 안에서 마련한 미시전략의 결과다. 각급학교 문학교육, 등단방법, 문학상과 같은 다양한 인정기제나 제도적 틀, 대중매체나 저널 문화면의 명성 생산과 재생산, 또는 인맥•학맥•지맥과 같은 문화자본, 서점 유통 단위에서 나타나는 판매지수나 기호도 순위와 같은 중계회로의 소비전략이 그 내면화의 세부를 이룬다. 이른바 시의 역장(力場)이다.
흔히 문학사회 안에서 시의 자리는 세 가지 역장을 보여준다. 고급시와 대중시 그리고 교양시가 그것이다. 이 셋은 서로 다른 시적 취향과 목표를 겨냥한다. 그러면서 서로 긴장, 대립, 보족(補足) 관계를 거듭한다. 오늘날 우리시는 이러한 세 역장을 껴안고 있는 제도의 결과물이다. 좋은 시인가 나쁜 시인가 하는 잣대와 조건은 이 역장 안에서 다시 나뉠 수밖에 없다. 그러한 여러 길항관계를 받아들일 때라야만 비로소 시에 대한 열린 개념 정의와 이해가 가능하다. 이러한 전제를 깔고서 좋은 시의 요건을 몇 가지로 들어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나쁜 시의 모습 또한 자명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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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좋은 시는 무엇보다 좋은 시인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좋은 시의 첫째 요건이 이것이다. 시인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크게 둘이 있다. 심리적 시인관과 사회적 시인관이다. 심리적 시인관이란 시인 안쪽에 시인이 됨직한 특질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보통 사람과 나뉘는 특별한 이로 여겨진다. 사회적 시인관은 이와 달리 시인은 사회 안쪽의 인정기제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다. 다만 시 창작 수련과 발표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이를 뜻한다. 그가 시인일 수 있는 터무니는 등단 제도나 방식을 거쳤는가 아닌가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 근대시사에서 좋은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그 삶에서 흔히 특별한 면모를 지닌다. 때로 안타까운 요절이나 열정적 연애와 같은 비장함, 언어 바깥의 선정성으로 겉칠된 삶이 그것이다. 곧 특별한 삶에서 좋은 시가 나올 것이라는 소박한 인과론, 개성론의 틀은 시인 됨됨이에 타고난 각별함을 요구한다. 심리적 시인관을 밀 수 밖에 없다. 시작에 대한 즉흥성과 시인에 대한 예외성을 버릇처럼 요구하는 태도가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러나 좋은 시인은 세상의 그러한 조급한 기대와는 달리 끊임없이 시와, 언어와 다투는 이다. 그의 작품이 좋은 시 자리에 오를 개연성은 그만큼 크다.
둘째, 언어를 중심으로 좋은 시의 요건을 따져 봄직하다. 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숱한 언어 관습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서 언어의 특이성과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갈래다. 드높은 언어 관습이자 진지한 말놀이인 셈이다. 이 점을 형식주의자의 생각에 따라 일탈이라 부르든 비틀기라 부르든 시가 언어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는 달라지기 힘든 자질이다. 따라서 좋은 시는 언어의 진폭이 넓고, 다채롭게 그 활용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무엇보다 언어는 자민족(自民族) 중심적이다. 언어 활용의 가능성이란 바로 민족어의 가능성과 다르지 않다. 100년 남짓한 근대 시기 동안 우리시는 노래로 불러졌다던 노래시가 아니라 눈으로 읽는 문자시로서 한글의 용례를 키우고 그 쓰임새를 세련시킨 공이 크다. 이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근대시의 전통이다. 좋은 시는 이러한 전통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더욱 변화, 발전시킨 경우다. 따라서 우리 근대의 제국언어였던 일본식 한자 투에 갇혀 있는 시는 좋은 시가 되기 힘들다. 영어 공용어론이 솔솔 피어나고 오늘날 눈길에서 볼 때도 이 점은 달라짐이 없다.
글말이란 입말과 달리 본디부터 지식계층, 엘리트 문화물이다. 따라서 민족 구성원과 더불어 함께 하고자 하는 언어로 나아가지 못하는 시는 특권 문화로 떨어질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근대 민족국가의 민족다움을 재는 주요 상수 가운데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언어의 동질성이다. 그러나 오해 없길 바란다. 이 말의 요체는 추상적인 정치 이념의 동질성이나, 섣부른 민족혼과 같은 명분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민족 구성원이면 누구나 손쉽게 다가서서 생각과 느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는 뜻이다. 담긴 뜻의 깊고 얕음이나, 언어기법의 각별함과는 관계 없는 일이다.
셋째, 표현에서 본 좋은 시의 요건이다. 시는 무엇보다 언어의 긴밀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수필이나 소설과 달리 압축과 생략을 바탕으로 삼는다. 시는 줄여 써서 많이 말하는 길을 따르고, 소설은 늘여 써서 적게 말하는 길을 따른다. 이 둘의 차이를 힘껏 맞세운 자리에 시와 소설의 관습적 정당성이 있다. 시가 소설에 가까워져 번잡하고 느슨해지면 더는 오롯한 시의 자리를 내세우기 힘들다. 거꾸로 소설이 시처럼 줄이고 다듬어 말과 말 사이의 긴장을 애써 키우고, 생각을 건너뛴다면 더는 소설 자리를 고집하기 힘들다.
그런데 압축과 생략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시적 요건이 뜻하는 궁극적인 자리는 어딘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반복불가능성, 곧 다르게 씌어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른 표현이 그것이다. 이 점이 진지한 말놀이로서 시 창작의 즐거움이고, 시가 다른 갈래와 맞서 끊임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터무니다. 좋은 시란 바로 기지의 표현과 다른 반복불가능성을 실천하고자 한 작품이다. 다르게 씌어질 수 없는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 말에 힘이 실리고, 그 뜻에 환한 자장이 피어나고, 그 주체인 시인에 대한 외경이 솟아난다.
그렇다면 이 점은 어떻게 확인하는가. 간단한 길이 있다. 해당 시의 특정 부분을 다르게 고쳐보면 될 일이다. 이 경우 고쳐진 상태가 본디 시보다 더 좋아진다면 그 본디 시는 서툴고 나쁜 시다. 거꾸로 다른 이가 손을 대었을 때, 오히려 고쳐진 시의 상태가 더 나빠지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 본디 시는 다르게 고쳐 쓰기 힘든 상태, 곧 반복불가능성에 가까이 다가선 경우겠다. 이른바 좋은 시인 셈이다. 아무리 명망을 얻고 있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다르게 쓰여질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 그것이 일깨워주는 표현 가치를 포기한다면 하루아침에 범상한 시인으로 떨어지고 만다.
넷째, 작품 내용에서 볼 때 좋은 시의 자질에 대해서는 이미 낯설게하기라는 널리 알려진 개념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적 일탈에 붙인 이름이 아니다. 그것은 세계 개방, 곧 주류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제기나 대거리라는 적극적인 뜻을 지니고 있다. 손쉽게 이를 수 있는 생각이나 느낌, 이미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기지의 세계를 겨냥한 시는 좋은 작품이 되기 힘들다. 널리 승인된 작품 내용이나 문화관습에 가까이 빌붙으려는 유행시, 특정한 내용만을 부풀리는 키치시와 같은 것들이다.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의 의미를 지니리라.
바람조차 내 삶의 큰 모습으로 와 닿고
내가 아는
정원의 꽃은 언제나
눈물빛 하늘이지만,
어디에서든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잊혀질 수 있다
사랑으로 죽어간 목숨조차
용서할 수 있으리라
시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어떤 이의 작품 가운데 한 부분이다. “사랑을 하면 산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냈다. 겉만 번지르하고 막연한 생각에 머물고 있다. 키치시라 일컬을 만큼 감상성도 두드러진다. 이런 작품의 가벼움과 얄팍함 속에는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한 범상한 감각만이 담겨 있을 따름이다. 좋은 시란 적어도 손쉬운 고정관념으로부터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서려는 작품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다섯째, 독자 쪽에서 좋은 시의 요건을 살필 수 있다. 압축과 생략, 곧 줄여서 말하는 방식인 시는 독자 쪽에서 볼 때 늘여서 읽는 일을 근본 방식으로 한다. 늘여서 읽기 어려운 시, 뻔하고 빤하지 않아 한 번에 쉽게 뜻이 잡히지 않은 시, 그것이 무엇인가를 거듭 고심하게 만드는 힘이 큰 작품이 좋은 시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거니와 적게 말하면서 많은 생각과 느낌을 일깨우고자 하는 역설적 갈래가 시다. 그런 까닭에 독자들의 거듭 읽기와 독서시간의 지연, 곧 소급적 독서는 필연적이다. 좋은 시란 바로 이렇듯 독자들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작품 안에 묶어두는 힘이 강한 작품인 셈이다.
그리고 그 힘은 여러 방향에서 작용한다. 작품 안일 수도 있고, 작품 바깥일 수도 있다. 문학교육이나 저널의 관심, 문학상과 같은 문학사회의 제도적 장치는 바깥요인이다. 대중시에 가까울수록 독자들은 작품 바깥에 의한 규정력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시읽기는 문화 훈련이다. 일상언어 활동과는 길이 다르다. 세련된 언어관습으로서 읽기 훈련과 그로 말미암은 내면화는 필수적이다. 독자에게 손쉽게 읽히지 않는 시란 그 훈련에 거듭 이끌어들이는 힘이 강한 시다. 그들이야말로 특정 세대독자나 당대 현실독자가 아니더라도 마침내 문학사나 문화 자체가 독자가 되는 시, 오래도록 독자사회로 열려 있을 좋은 시로 거듭난다.
3
좋은 시란 시인된 됨됨이에서부터 언어를 거쳐 표현 방법과 인식 내용, 그리고 독자사회에 이르기까지 여러 자리에서 살필 수 있다. 위에서 나는 좋은 시를 좋은 시인이, 민족어의 가능성을 극대화시키는 자리 위에서, 어쩌면 될성부르지 않은 반복불가능한 표현을 겨냥하며, 세계를 개방해주는 쪽으로, 멀리 독자를 묶어두는 힘이 강한 작품으로 규정했다. 여러 편차와 다채로운 맥락이 그 안에서 새로 마련되겠다. 그럼에도 좋은 시는 이러한 요건의 그물 안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이 뜻하는 궁극은 마침내 하나다. 뜻있는 말놀이, 문화관습으로서 이르기 힘듦이 그것이다. 그 방위가 어디든 더욱 이르기 힘든 상태를 보여준 작품, 그것이 좋은 시다. 오늘날 문학사회의 환경은 많이 달라지고 있다. 대중매체가 시의 취향을 이끈다. 디지털 기술에 따라 향유 방식도 바뀌고 있다. 시를 향한 취향의 높낮이나 경계, 기대지평이 달라지고 있다는 뜻이다. 대중시의 자리가 시단을 이끌고 있다. 문학의 인정기제 또한 그에 맞물려 움직인다. 세련된 독서로서 시 비평과 연구의 경우 또한 다르지 않다.
그런 속에서도 시의 가능성, 곧 언어를 통한 창조적 가능성의 확대라는 쓰임새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오히려 좋은 시, 또는 시적인 것을 향한 헌신은 문학사회 안팎으로 지난날과는 견줄 수 없을 강도와 방향에서 요구되고 있다. 이 가운데서 당대시의 전통과 관습의 담장을 흔드는 좋은 시가 나올 개연성은 크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익명의 독자사회가 시인들에게 시를 향한 다함없을 헌신을 한결같이 기대하는 시대 분위기, 좋은 시가 나올 수 있는 처음이자 끝자리다. (『파라Para 21』(2004/가을호)
출처 : 매혹된 영혼
글쓴이 : 지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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