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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편의 詩

그날은 지나갔다 / 존 키츠

by 바닷가소나무 2018. 8. 21.

그날은 지나갔다.


                   - 존 카츠 -


그날은 지나갔다.

달콤함도 함께 사라져버렸다.


감미로운 목소리, 향긋한 입술, 보드라운 손,

그리고 한결 부드러운 가슴.


따사로운 숨결, 상냥한 속삭임,

빛나는 눈, 균형 잡힌 자태, 그리고 곧게 뻗은 허리.


사라졌도다.

꽃과 그 모든 꽃봉오리의 매력들은

사라졌도다.

내 눈으로부터 아름다운 모습이 사라졌도다.


그럼나 내가 오늘 온종일 사랑의 미사 책을 읽었을 때

사랑의 신은 나를 잠들게 하리라.

내가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을 보고서.



키츠

다른 표기 언어 John Keats


요약 테이블
출생1795. 10. 31, 런던
사망1821. 2. 23, 이탈리아 로마
국적 영국

요약 영국의 낭만주의 서정시인.

키츠(John Keats)

ⓒ William Hilton/wikipedia | Public Domain


짧은 생애 동안 생생한 이미저리, 뛰어난 감각적 매력, 고전적 전설을 통한 철학적 표현을 담은 시를 썼다. 가장 잘 알려진 시는 〈엔디미온 Endymion〉·〈잔인한 미녀 La Belle Dame sans Merci〉·〈우울에 대한 송가 Ode on Melan choly〉·〈나이팅게일에게 Ode to a Nightingale〉·〈그리스 항아리에게 부치는 송가 Ode on a Grecian Urn〉·〈성녀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 The Eve of St. Agnes〉·〈히페리온 Hyperion〉 등이다. 25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폐결핵으로 요양중 죽었다.

청년기

마차 대여업자의 아들인 그는 정규교육은 받지 못한 편이었다. 1804년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는 곧바로 재혼했다. 짧은 생애 동안 내내 키츠는 여동생 패니, 두 남동생인 조지·톰과 긴밀한 유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어머니의 재혼이 파경으로 끝난 후 키츠 가족은 미들섹스의 에드먼턴에 있는 홀로 된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그는 존 클라크가 운영하는 2마일 떨어진 엔필드 학교에 다녔는데, 존 클라크의 아들인 코든 클라크가 키츠의 문학적 열의를 상당히 격려해주었다. 학교에서 키츠는 싸우기 좋아하는 아이로 알려져 있어서 절대로 '문학적'이지 못했으나, 1809년부터 그는 많은 책을 읽기 시작했다. 1810년 어머니가 죽자 할머니는 아이들 문제를 리처드 애비라는 후견인에게 맡겼다. 애비의 권유로 키츠는 1811년 에드먼턴에 있는 외과의의 견습생으로 들어갔다.


1814년 그곳을 나와 런던에서 가이 병원과 세인트 토머스 병원에서 수술담당조수나 보조의사로 일했다. 이즈음 문학적 관심이 뚜렷해져 1817년 이후 전적으로 문학에만 몰두했다. 그때부터 요절하기까지 그의 인생 이야기는 주로 그가 쓴 시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초기 작품

코든 클라크는 어린 키츠에게 에드먼드 스펜서와 엘리자베스 시대 작가들의 시를 소개해주었고, 이 작품들이 그의 초기 시의 모델이 되었다. 그의 최초의 원숙한 시는 소네트 〈채프먼의 호메로스를 처음 읽고서 on First Looking Into Chapman's Homer〉(1815)인데, 이 시는 17세기 조지 채프먼의 〈일리아스 Iliad〉·〈오디세이아 Odyssey〉 번역판을 읽고 감격해 쓴 것이다. 클라크는 또한 키츠를 언론가이자 동시대 시인 리 헌트에게 소개해주었다.


키츠는 이를 계기로 젊은 시인 존 해밀턴 레이놀즈, 화가 벤저민 하이든 등 헌트의 사교집단 사람들과 교제를 갖게 되었다. 그의 첫 〈시집 Poems〉은 1817년 3월 출판되었는데 주로 '헌트적' 영향 아래 씌어진 작품들이었다. 편안하고 산만한 정서상태가 드러난다든가 영웅시적 2행연구(二行聯句)와 가벼운 운율을 사용한 것에서 이것을 알 수 있다. 이 시집 중 가장 흥미로운 시는 〈잠과 시 Sleep and Poetry〉인데, 이 시의 중간 부분은 키츠 자신의 시적 발전과정에 대한 예언적 관점을 담고 있다.


그는 자신이 현재 관능적인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겁게 명상하는 일에 빠져 있으나 '인간의 심리적 고통과 투쟁'을 이해하기 위해 이것을 떠나야만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다. 한편 이 시집은 미묘한 자연 관찰과 분명한 스펜서적 영향을 보여준다.


1817년 키츠는 런던을 떠나 잠깐 와이트 섬과 캔터베리로 여행을 떠났고 그의 첫 장시 〈엔디미온〉을 쓰기 시작했다. 런던으로 돌아오자마자 그의 남동생들과 함께 햄스테드에 있는 숙소로 옮겼다. 〈엔디미온〉은 1818년에 출간되었다.

이 작품은 각 1,000행씩 4부로 나누어졌고 느슨한 운율의 2행연구로 씌어졌다.

개인적 위기

1818년 여름 키츠는 친구 찰스 브라운과 함께 레이크 지방과 스코틀랜드로 도보여행에 나섰는데, 지나친 여행으로 결국 죽음의 원인이 된 결핵의 초기증상을 보이게 되었다. 런던에 돌아오자 그의 시에 대한 가혹한 비평이 〈블랙우즈 매거진 Blackwood's Magazine〉에 실렸고, 뒤이어 〈쿼털리 리뷰 Quarterly Review〉에 〈엔디미온〉에 대한 비슷한 공격이 게재되었다.


키츠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조용한 확신으로 이러한 서평에 대처했으며 계속 시를 썼다. 그러나 가정에 문제가 생겼다. 동생 톰이 한동안 결핵을 앓고 있었고, 1818년 가을 키츠는 톰의 마지막 가는 길을 보살펴주었다. 그즈음 햄스테드의 이웃인 패니 브론을 만나 속절없고 비극적인 사랑에 빠졌다. 패니와의 관계는 키츠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별로 남다른 점이 없는, 단호하면서도 관대한 성품을 지닌 젊은 여성으로 키츠에게 상냥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의 지나치게 많은 편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듯이, 그는 그 이상의 것을 기대했던 듯하다. 그의 불확실한 경제 사정이나 점차 나빠지는 건강으로 인해 그들의 관계는 결코 정상적인 과정을 밟을 수 없었다. 조지는 이미 미국으로 가버렸고, 톰이 죽은 후 키츠는 브라운과 함께 웬트워스로 이사했다. 1819년 4월 패니 브론과 그녀의 어머니가 키츠의 이웃이 되었다. 1819년 10월경 키츠는 패니와 약혼했다.

1819년

키츠는 〈엔디미온〉을 끝낸 직후 1817~18에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Decameron〉 중 〈Pot of Basil〉 이야기를 번안한 〈이사벨라 Isabella〉를 썼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다음해인 1819년에는 〈라미아 Lamia〉·〈성녀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와 〈나태에 대하여 on Indolence〉·〈그리스 항아리에게 부치는 송가〉·〈우울에 대한 송가〉·〈가을에게 Ode to Autumn〉 등의 뛰어난 송가, 〈히페리온〉의 2가지 판본 등 최고작이라고 평가되는 시들을 썼다.


병으로 고통받고 패니 브론에 대한 사랑이 점점 깊어가는 가운데 씌어진 이 명시들은 기술적·감정적·지적으로 조심스럽고 용의주도한 발전을 보이고 있다. 키츠 자신이 '약점있는 시'라고 불렀던 〈이사벨라〉는 〈엔디미온〉의 감정적인 취약성을 담고 있다. 그러나 〈성녀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는 키츠 초기시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다. 패니 브론과의 만남이 가져다준 최초의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때 쓴 이 시는 젊은 연인들의 사랑의 도피를 묘사하는 데 있어 정열적이며 흥분된 분위기를 전달한다.


스펜서식 시연으로 씌어진 이 시는 절묘한 울림 속에서 그 주제를 드러내지만 키츠의 이전 작품들에 비해 뚜렷한 지적 발전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라미아〉 는 또다른 이야기체 시로, 훨씬 더 긴밀하고 좀더 규제된 2행연구와 좀더 견고한 분위기, 더 자제된 상황묘사를 잘 이용하고 있다.


송가는 키츠의 가장 뛰어난 시 작품들이다.


그 작품들은 시인으로 하여금 그의 내적 존재의 상충하는 충동들과 대면하고 자신의 갈망과 그 주위의 더 넓은 세계와의 관계를 숙고하도록 만드는 어떤 대상이나 성질에 대한 명상으로, 본질적으로 서정적인 작품들이다. 모든 송가는 9월에 쓴 〈가을에게〉를 제외하면 1819년 3~6월에 씌어졌다. 송가들의 내부적인 갈등은 영원한 이원성, 즉 초절적인 이상과 물질세계의 일시성·변화 등에 중심을 두고 있다. 동생의 고통스런 죽음과 자신의 악화되는 건강으로 키츠는 이 주제를 다루게 되었고, 송가들은 상상력이 지닌 자유로운 능력을 통해 자기확신과 확실성을 구축하려는 그 자신의 노력을 부각시키고 있다.


〈나이팅게일에게〉에서 나이팅게일과 그 노래에 합일하는 데서 오는 환상적인 행복감은 인간의 슬픔과 질병의 무거운 무게, 그무렵 동생의 죽음으로 키츠에게 강하게 남아 있던 청춘과 아름다움의 일시성과 대조되어 있다. 나이팅게일의 노래는 유한한 인생을 능가하는 무한한 예술의 상징으로 보여진다. 이 주제는 〈그리스 항아리에게 부치는 송가〉에서 좀더 뚜렷해진다. 〈우울에 대한 송가〉는 슬픔이 인간의 정열과 행복에는 어쩔 수 없이 개입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또 환희와 욕망의 일시성은 자연과정의 필연적인 양상이다. 그러나 이 작품과 다른 송가들속에서 들려오는 풍부하고도 완벽한 운율적 움직임은 환희와 욕망의 향수(享受)를 강렬하고도 깊이 있는 경험으로 변환시켜 향수의 순간이 영원한 것이 되게 하고 있다. 〈가을에게〉는 근본적으로 그러한 경험의 기록이다.


가을은 쇠망의 시간이 아니라 완벽한 성숙과 성취의 계절로 여겨지며 모든 것이 완벽에 도달하는 기간으로 이 계절이 덧없이 스러져버리고 말리라는 문제는 거의 제기되지 않는다. 이 시들은 풍부하고 절묘하게 감각적인 세부묘사, 명상적인 깊이로 낭만주의 시의 가장 위대한 업적에 속한다. 이들과 함께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잔인한 미녀〉도 언급할 만한 것으로 이 작품은 〈성녀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에서 보여지는 전원적인 사랑의 왜곡되고 파괴적인 일면을 드러내고 있다.


키츠의 미완성 서사시 〈히페리온〉은 2가지 판본이 있는데, 2번째 것은 새로운 형식으로 씌어진 긴 서문을 첨부한 개정본이어서 내용이 다른 시라고 할 수 있다. 〈히페리온〉은 1818년 가을에 시작되어 첫판에 있는 것은 모두 1819년 4월에 끝났다.


9월에 키츠는 레이놀즈에게 〈히페리온〉을 그만두겠다고 했으나, 1819년 가을 내내 〈히페리온의 타락 The Fall of Hyperion〉이라는 개정판에 몰두했던 것으로 보인다. 〈히페리온〉의 2가지 판본의 제작시기는 시적으로나 개인적으로 키츠의 가장 강렬한 체험시기에 해당한다. 그 시는 악화되는 질병과 좌절된 사랑에 직면해서, 초기 시에서 다른 형태로 나타났던 절대적 가치와 인간 운명의 일회성간의 갈등을 타협시키려는 마지막 시도였다. 서사시의 주제는 앞선 그리스의 신들인 타이탄족들이 나중의 올림피아의 신들에 의해 축출되는 것이다.


분명히 키츠는 〈엔디미온〉의 과잉되게 산만한 것과는 다른 글을 쓰고자 했으며, 의식적으로 밀턴의 〈실락원 Paradise Lost〉과 경쟁하려고 했다. 〈엔디미온〉이 이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사람의 운명을 비유한 것이라면, 〈히페리온〉은 창조자로서의 시인을 비유한 것으로 보인다. 확실히 이 주제가 제2판의 새 서문에서 뚜렷하게 다시 나타난다.


〈히페리온〉의 제2판은 키츠 작품 중 가장 뛰어난 것 가운데 하나이다.


무운시 형태의 이 작품은 새로운 활력과 활기를 가지고 있으며, 시적 비전이 점차 확대되어 여신 모네타의 현현에서 절정을 이룬다. 여신은 시인이 단순한 몽상가가 아니며 마땅히 인류의 고통을 분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그의 가장 초기 시에도 나타나고 있으므로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는 훨씬 더 강렬하게 실현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키츠는 이 시의 제작을 더이상 마음먹은 대로 밀고나가지 못했고 그결과 이 시는 미완성으로 끝났다.

말년

〈이사벨라〉·〈라미아〉·〈성녀 아그네스 축제 전야제〉·〈히페리온〉 등의 시와 송가들은 모두 유명한 1820년 판에 실렸고, 이 시집이 그의 능력에 대한 진지한 척도를 제공해주고 있다. 시집은 7월에 나왔으며 이때쯤 키츠는 병세가 악화되어 있었다. 1819년 내내 병이 점차 깊어져 1820년초 결핵의 증후가 뚜렷이 나타났다.


자신의 병이 회복될 가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고, 그때부터는 어떠한 지속적 작품도 쓸 수 없었다. 그의 친구들인 브라운, 헌트 가족, 패니 브론과 그녀의 어머니가 그해 내내 열심히 그를 간호했다. 퍼시 비시 셸리는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한 소식을 듣고 피사에 와서 묵으라고 호의를 베풀었으나, 키츠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겨울 동안 따뜻한 남쪽지방에 가 있으라는 권고를 듣고 조지프 세번과 함께 로마로 갔다. 그들은 1820년 9월에 배를 타고 떠나 나폴리를 경유해 로마로 갔고, 그곳에서 12월초 키츠의 병은 다시 악화되었다. 마지막까지 세번의 정성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25세의 나이로 로마에서 죽었다.

편지

키츠의 사생활과 시적 발달에 대한 가장 권위있는 전기는 그의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동생, 여동생 패니, 절친한 친구들, 패니 브론과의 서신들을 통해 키츠의 개인 성품의 뛰어난 고결성을 가장 친밀하게 그려볼 수 있으며, 독자는 시에 대한 그의 생각, 그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각의 발전과정을 꼼꼼히 살펴볼 수 있다. 그의 편지는 활기차고 예민하며 잘난 척하지 않는 비평적 안목과 진지한 심사숙고를 보여주고 있다.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고, 비형식적이고, 진지하게 생각하고 느낀 이 편지들은 영국 서간문 가운데 최고에 속한다. 그의 작품에 대한 논평으로서 관심을 끈다는 것 외에도, 이 서간문들은 마땅히 그 나름의 독립된 문학적 가치를 가질 만한 것이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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