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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편의 詩

사랑 / 장 콕도

by 바닷가소나무 2018. 7. 23.

사랑


                   - 장 콕도 -


사랑한다는 것.

그것은 바로 사랑받는 다는 것이니

한 존재로 불안에 떨게 하는 것.

언젠가는 상대방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우리의 고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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콕토

다른 표기 언어 Jean Cocteau



요약 테이블
출생1889. 7. 5, 프랑스 파리 근처 메종라피트
사망1963. 10. 11, 파리 근처 밀리라포레
국적 프랑스


요약   :  콕토는 시인, 소설가, 영화감독, 극작가 등 예술 전반에 걸쳐 다양한 작품을 선보인 대표적인 프랑스 예술가 중의 하나이다.
파리에서 성장한 그는 교양이 넘치고, 부유하고, 음악과 미술, 문학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무대 예술에 실질적인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러시아 발레단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 들은 발레단 감독의 "나를 한번 놀라게 해보라"라는 말이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이후 발레극 뿐만 아니라 다른 극작품도 썼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나중에 시인이자 소설가가 된 천재 소년 레몽 라디게를 알게 되었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26년에 초연된 <오르페우스>는 당대의 연극에서 비극을 부활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고, 대표적 희곡으로 알려진 <지옥의 기계>는 자신의 개인적 체험이기도 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제로 다루었다. 또한 활동 영역을 넑혀 시나리오 작가 및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했다.

장 콕토 (Jean Cocteau)

프랑스의 극작가, 시인

개요

대표작으로는 시집 〈천사 외르트비스 L'Ange Heurtebise〉(1925), 희곡 〈오르페우스 Orphée〉(1926)·〈지옥의 기계 La Machine infernale〉(1934), 소설 〈무서운 아이들 Les Enfants terribles〉(1929), 초현실주의 영화 〈시인의 피 Le Sang d'un poète〉(1930)와 〈미녀와 야수 La Belle et la bête〉(1946) 등이 있다.

유산과 젊은시절

콕토는 파리에서 성장했으며, 말투·교육·사고방식·습관 등에서 언제나 자신을 진정한 파리 사람으로 여겼다


그의 집안은 명실상부한 파리의 부르주아 계층에 속해 있었고, 그런 집안답게 교양이 넘치고, 부유하고, 음악·미술·문학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다. 그의 어린시절 기억은 극장과 관련을 맺고 있다. 이 기억은 서커스나 고급 유흥장에서 펼쳐지는 흥행물 형태로 남아 있기도 하고, 코메디 프랑세즈에서 공연되는 진지한 비극의 형태로 남아 있기도 했다. 19세에 그는 첫 시집 〈알라딘의 램프 La Lampe d'Aladin〉를 출판했다.


콕토는 제1차 세계대전 직전의 몇 해 동안 말하자면 정치적 혼란이 전혀 없이 세련된 예술적 취향이 장려되던 시절의 산물이었다.


그가 무대 예술에 실질적인 첫발을 들여놓은 것은 러시아 발레단 공연을 관람하고 나서였다. 콕토가 발레극을 쓰고 싶다고 의견을 밝히자, 당시 러시아 발레단 감독을 맡고 있던 세르게이 디아길레프는 "나를 한번 놀라게 해보라"(Étonne-moi)라고 응수했다. 이 한 마디는 결국 젊은 시인으로 하여금 〈파라드 Parade〉(1917, 에리크 사티가 곡을 붙임)·〈지붕 위의 황소 Le Boeuf sur le toit〉(1920, 다리위스 미요가 곡을 붙임) 같은 발레극뿐만 아니라 다른 극작품도 쓰게 만든 자극제가 되었다.


그리고 이 유명한 한 마디는 그의 연극과 영화에도 종종 인용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콕토는 벨기에 전선에서 구급차 운전병으로 복무했다. 이때 관찰한 풍경은 나중에 그의 소설 〈협잡꾼 토마 Thomas l'imposteur〉(1923)의 배경이 되었다. 그는 조종사 롤랑 가로를 만나 친구가 되었고, 공중 비행에서 영감을 얻은 초기 시집 〈희망봉 Le Cap de Bonne-Espérance〉(1919)을 그에게 헌정했다.


1916~17년에 그는 당시 파리의 몽파르나스 구역을 중심으로 싹트기 시작한 현대 예술계에 이따금 출입하면서, 파블로 피카소와 아마데오 모딜리아니 같은 화가와 막스 자코브, 기욤 아폴리네르 같은 문인들을 사귀었다.

라디게의 영향

전쟁이 끝난 직후 콕토는 나중에 시인이자 소설가가 된 레몽 라디게를 막스 자코브의 소개로 만났다.


천재로 소문나 있던 16세의 소년 라디게는 단순성과 고전적 명증성의 미학을 옹호했는데, 이때 라디게가 주장한 미학은 뒤에 콕토 자신의 작품의 특성이 될 만큼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라디게가 21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을 때, 34세의 장년인 콕토는 사상과 용기와 열정을 끊임없이 공급해주던 우정을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연인이 죽고 나자 슬픔을 견디지 못한 콕토는 아편에 빠져들었고, 이때문에 그는 일정 기간 요양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종교 철학자인 자크 마리탱이 요양소로 그를 찾아왔다. 이 신학자를 통해 콕토는 짧은 기간이나마 그리스도교로 귀의했다. 이 복합적인 체험은 그의 삶에 새로운 시대를 열어주었고, 그 기간 콕토는 그의 가장 중요한 몇 작품을 썼다. 장시 〈천사 외르트비스〉에서 시인은 한 천사와 격렬한 다툼을 시작하는데, 이 천사는 뒤에도 그의 여러 작품에 등장하여 콕토와 싸움을 계속한다.


1926년에 처음 무대에 올려진 〈오르페우스〉는 당대의 연극에서 비극을 부활시키는 데 한몫 거들었다. 이 작품에서 콕토는 시인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그 나름의 해석을 심화했다. 1929년 3월의 3주일 동안에 완성한 소설 〈무서운 아이들〉은 폴과 엘리자베스라는 두 남매를 통해 사춘기의 거칠 것 없는 특성을 파고들어 연구한 작품이다.


1950년에 그는 이 작품을 영화화할 수 있도록 시나리오로 각색했고, 거기에 따른 해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는 영화 〈시인의 피〉를 제작함으로써 활동 영역을 넓혔다. 영화로는 첫번째인 이 작품은 그 자신의 정신적 체험을 다룬 것으로, 주제는 그당시만 해도 무슨 뜻인지 모를 만큼 낯설고 충격적인 것이었으나, 그후 다른 작품들을 통해 종종 표현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덜 사적이고 보다 보편적인 주제로 느껴진다.


1930년대초에도 그는 흔히 그의 대표적 희곡으로 평가되는 〈지옥의 기계〉에서 그의 개인적 체험이기도 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주제로 다룬 바 있다. 이 두 작품에서 그는 인간성의 위대한 주제에 보다 가깝게 다가갔다.

1940년대의 영화 제작

1940년대에 콕토는 영화 쪽으로 다시 돌아와 처음에는 시나리오 작가로 활동했고, 다음에는 영화감독으로 뛰어들어, 동화를 각색한 〈미녀와 야수〉와 그 자신이 희곡에서 다룬 바 있는 시와 죽음이라는 주제를 재창조한 〈오르페우스〉(1950)를 제작했다.


당대의 중요한 시각 예술가로서 콕토는 1950년에 생장카프페라에 있는 '빌라 산토 소스피르'의 실내 장식을 맡았고, 일련의 중요한 그림 제작에도 착수하여 망통에 있는 시청사, 빌프랑슈쉬르메르에 있는 생피에르 예배당, 밀리라포레에 있는 생블레즈데생플 성당의 벽화를 그렸다. 프레쥐에 있는 한 성당의 실내 장식은 그가 74세에 죽는 바람에 미완성으로 끝나 양자인 에두아르 데르미(화가로 나중에는 영화계에서도 활동함)가 맡아서 작업을 계속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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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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