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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한편의 詩

짐승 / 휘트먼

by 바닷가소나무 2018. 7. 15.

짐승

                                 

                                       - 휘트먼 -


나는 짐슬들과 함게 살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평온하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안다.

그들은 땀흘려 손에 넣으려고 하지 않으며

자신들의 환경을 불평하지 않는다.

그들은 밤늦도록 잠 못 이루지도 않고

죄를 용서해 달라고 빌지도 않는다.

그들은 불만도 없고, 소유욕에 눈이 멀지도 않았다.

다른자에게 무릎 꾾지도 않으며

잘난 체하가나 불행해 하지도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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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트 휘트먼

다른 표기 언어 휘트먼 , Walt Whitman



요약 테이블
출생1819. 5. 31, 미국 뉴욕 롱아일랜드 웨스트힐스
사망1892. 3. 26, 뉴저지 캠던
국적 미국

요약 :  시집 <풀잎>으로 미국 문학에서 혁명적인 인물이 된 시인이자 저널리스트이다. 1835년 뉴욕에서 식자공으로 일하다가 이후 각종 신문 편집 등에 종사했고, 1855년 <풀잎> 초판을 출간했다. 이 시집에 들어 있던 시들은 미국시민들이 넓고 관대한 정신을 가질 것과 정치적 자유를 마음껏 누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

월트 휘트먼

개요

시집 〈풀잎 Leaves of Grass〉(1855 초판)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매우 혁신적이었으며, 이 작품으로 그는 미국 문학에서 혁명적인 인물이 되었다.

예를 들면 〈풀잎〉에 들어 있는 〈나는 몸의 흥분을 노래하네 I Sing the Body Electric〉는 인체의 아름다움과 육체적 건강, 성욕을 강하게 표현했다.

초기생애

휘트먼은 17세기 전반에 미국으로 이주한 가문에서 태어났다.

목수인 아버지는 농사에 실패하자 1823년 가족을 데리고 롱아일랜드에서 브루클린으로 이사했다. 휘트먼은 5년간 1825~30 공립학교를 다닌 뒤 4년 동안 인쇄소 사환으로 일했다. 1835년 뉴욕에서 식자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년 뒤에는 교사로 일하다가 1838년 헌팅턴에서 발행되는 주간지 〈롱아일랜더 Long Islander〉를 편집했지만, 1840년 마틴 밴 뷰런의 대통령 선거운동에 참가했고, 잠시 교직에 있다가 다시 뉴욕으로 돌아가 인쇄일을 했다. 1842~44년에는 일간지 〈오로라 Aurora〉와 〈이브닝 태틀러 Evening Tattler〉지를 편집했다.


1845년 다시 브루클린으로 돌아가 〈롱아일랜드 스타 Long Island Star〉에 기고했으며, 1846~48년에는 〈브루클린 데일리 이글 Brooklyn Daily Eagle〉을 편집했으며 1848~49년에는 〈브루클린 위클리 프리먼 Brooklyn Weekly Freeman〉을 편집했다. 1848년에는 약 4개월 동안 뉴올리언스의 〈크레센트 Crescent〉에서 일하다가 미시시피 강과 오대호를 거쳐 돌아왔다. 1850~54년에는 인쇄소 겸 문방구를 경영하고 주택건축과 부동산투기에도 관여했다.


휘트먼은 뉴욕 시와 롱아일랜드에서 거의 36년을 보내면서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관찰했으며, 자주 극장에 들러 셰익스피어 극을 보았고, 음악 특히 오페라(그는 "오페라가 없었더라면 결코 〈풀잎〉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말했음)에 대한 열정을 키우게 되었다.


그는 톰 페인의 작품을 읽었고, 급진적인 퀘이커교 전도사인 엘리어스 힉스의 영향을 받았으며, 매우 합리적이고 자유주의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또한 호메로스·성서·셰익스피어·콜리지·디킨스 등을 폭넓게 읽었고, 제임스 맥퍼슨이 번역한 게일 시인 오시안의 시에 감동을 받았으며, 특히 월터 스콧 경에게 깊은 흥미를 갖게 되었다.

1855년 출간된 〈풀잎〉의 초판에는 출판사와 작가의 이름도 없이 표지에 휘트먼의 초상이 실려 있었다.


〈풀잎〉에 들어 있는 시들은 미국 시민들에게 보낸 것으로, 그들로 하여금 넓고 관대한 정신을 가질 것과 통일된 영혼과 육체를 지니고 정치적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새로운 민족이 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시인은 고독했지만 주위의 일상생활에 참여했으며, 사람들에게 '세계의 지붕 위에서 원시적으로 외치는 소리'를 들려주었다. 에머슨은 이 시들을 보자 이것이 지금까지 미국에서 나온 것들 중 '재치와 지혜가 넘치는 가장 비범한 작품'이라고 그에게 편지를 썼다.


휘트먼은 개인 노트에서 자신의 고유한 문체를 계속 연습해오다 1856년 여러 차례 고쳐쓴 끝에 〈풀잎〉의 2번째 판을 냈다.


이 시집에는 초판에 실린 시들을 수정한 작품들과 〈일몰 시(詩) Sun-down Poem〉(뒤에 〈브루클린 나루터를 건너며 Crossing Brooklyn Ferry〉로 바뀜)라는 제목의 여러 편의 새로운 시가 들어 있었다. '잎떨어지는 것들'(Leaves-Droppings)이라는 부분에 실린 평론에는 그가 다른 사람들의 작품을 평한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작품에 대한 몇몇 평론도 들어 있었다. 이 익명의 평론들에서 그는 자기 자신을 진정한 "미국 최후의 음유시인"이라고 서술하고, 자신을 "자연 그대로의 인간"으로 선언했으며, 육체와 성(性)은 아름다운 것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자신의 문체가 초월적이고 새롭고 활기에 넘치며, 자신의 시는 미래를 지향하고 있고, "오만한 무명인사"인 자기 자신은 단지 일련의 미국 시인들에게 출발점을 주고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1857~59년 휘트먼은 〈브루클린 타임스 Brooklyn Times〉를 편집했으며, 생활방식은 자유분방해졌다. 〈풀잎〉의 3번째 판이 보스턴의 한 출판사에서 출간된 1860년까지의 이 시기는 "난폭하고 세속적이고 관능적이며, 먹고 마시고 여자들과 놀아난" '나'의 시기였다.


1860년판 시집에는 그의 생애에서 다소 강한 개인적 위기, 즉 명백한 동성애적인 연애사건(그것이 허구인지 사실인지는 알려지지 않음)을 기록한 '창포'(Calamus)라는 시들과, 종종 이 시인의 힘을 고갈시킨 격렬한 감정들을 기록하고 있는 〈예감 Premonition〉(뒤에 〈포마녹에서의 출발 Starting from Paumanok〉로 바뀜)이 들어 있었다. 〈바다에서 나온 말 A Word out of the Sea〉(뒤에 〈끝없이 흔들리는 요람 밖으로 Out of the Cradle Endlessly Rocking〉로 바뀜)은 〈내가 생명의 바다와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As I Ebb'd with the Ocean of Life〉와 마찬가지로 약간 침울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민주주의의 노래 Chants Democratic〉·〈아담의 어린시절 Enfans d'Adam〉·〈전령이 떠나다 Messenger Leaves〉·〈생각들 Thoughts〉은 좀더 이 시인의 초기 기질을 띠었다.

남북전쟁 시기

1861년 남북전쟁이 터진 뒤 40대가 된 휘트먼은 성격이 바뀌어 '선량한 회색빛 시인'이 되었다.


동생이 프레더릭스버그에서 부상을 당하자 휘트먼은 1862년 그곳 야영지에서 한동안 머무른 후 워싱턴의 급료지불계에서 임시직을 얻었다. 여가시간에는 워싱턴의 병원들에 입원해 있는 부상을 입어 죽어가는 군인들을 방문하고, 남부연합을 지지하는 군인들과 연방주의를 지지하는 군인들 모두를 위하여 작은 선물을 사는 데 빠듯한 급료를 썼으며, 세련되지는 못하지만 '즐겁고 매력적인' 위안의 말을 던짐으로써 병실에서 본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우울증을 줄여주려고 노력했다.


1865년 1월 내무부의 직원이 되고 5월에 승진했지만, 6월에 휘트먼이 그무렵 수정하고 있던 〈풀잎〉이 점잖지 못하다는 내무장관의 평가로 말미암아 해고되고 말았다.

그뒤 〈선량한 회색빛 시인 The Good Gray Poet〉(1866 출간)에서 휘트먼을 지지하는 글을 써서 불의의 희생자에 대한 공감을 불러일으킨 친구인 저널리스트 윌리엄 오코너의 노력으로 젊은 법무장관 밑에 자리를 얻었다. 휘트먼은 워싱턴에서 작가 존 버로즈와 젊은 작가이자 철도마차 운전사인 피터 도일 등의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는데, 이 두 사람과는 정서적이고 깊은 애정 관계를 유지했다. 존경하는 어머니와도 계속 가깝게 지냈다.


1865년 5월 출간된 〈북소리 Drum Taps〉는 그가 남북전쟁 초기에 전쟁의 참뜻에 대한 혼란스러운 인식을 가지고 젊은 군인들의 정렬과 무장을 열렬하게 환영했던 것과는 달리 새로운 종류의 시들을 보여주었다. 1865년 가을에 출간된 〈북소리 속편 Sequel to Drum Taps〉에는 링컨에 관한 훌륭한 애가 〈현관 앞마당에 마지막 라일락 꽃이 필 때 When Lilacs Last in the Dooryard Bloom'd〉가 실렸다.1882~83년에 발표되었다가 뒤에 〈Specimen Days 이미지 Collect〉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전쟁에 관한 산문들은 시와 마찬가지로 경험의 타당성이 결여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것들은 직접적이고 감동적인 단순성으로 적지 않은 효과를 거두었다.

성숙기의 작품들

1867년 출간된 〈풀잎〉의 4번째 판은 많은 부분을 수정하고 재배열했다.


남북전쟁에 관한 시들 외에도 이 시집에는 새로운 시가 8편 첨가되고 몇 편의 시는 빠졌다. 휘트먼 시의 특징은 바뀌었는데, 때때로 〈오 대장! 나의 대장! O Captain! My Captain!〉이라는 시처럼 감상적인 분위기를 띠었다. 전쟁은 휘트먼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는데, 〈민주주의 전망 Democratic Vistas〉이라는 산문집에 그중 일부가 실렸다. 이 산문집에 실린 수필 3편 중 〈민주주의 Democracy〉·〈인격주의 Personalism〉 2편이 먼저 나왔다.


그중 첫번째는 민주주의에 대한 칼라일의 어두운 전망에 대한 답변으로 쓴 것이었다. 그러나 이 수필도 미국의 모습(우중충하고 저속하고 물질만능주의적인 사회)에 대해 칼라일과 거의 똑같은 비관적인 견해에 이르렀다. 그는 〈풀잎〉 초판에서 보여준 예언적인 견해로 되돌아갔지만, 이제는 사회를 정화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남성적인 우정, 즉 동료의식이 미국에서 일어나 이것이 반대로 타락한 정부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 전체적으로 침체된 국민의 사기를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정치를 불신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정치에 관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상주의는 다소 누그러졌지만, 그는 여전히 문학과 예술만이 진실로 민주적인 사회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1860년대 후반에 휘트먼의 작품은 더욱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미국 평론가들의 초기 반응은 그의 주제와 문체에 대해 모두 공감하지 않았다. 예외적으로 에머슨, 그리고 그보다는 덜하지만 편집자이자 학자인 찰스 엘리엇 노턴도 열렬한 반응을 보인 것으로 유명한데, 이들은 휘트먼의 작품에서 부족한 점뿐만 아니라 장점도 보았다. 그러나 에머슨도 항상 칭찬만 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는 휘트먼이 '많은 소재를 다루는 것에만 만족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노래들도 만들 것을 기대한다고 썼다. 휘트먼이 물건들의 목록을 만들어 거기에 지명들을 사용한 이러한 습관은 대륙의 광활한 공간에 사람들을 살게 하는 데 성공한 미국의 성취감을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 그가 일반적인 증명을 위하여 자주 특수한 상황을 사용한 것에 대해서는 상당히 동의할 수 있다. 오코너의 〈선량한 회색빛 시인:변호 Good Gray Poet:A Vindication〉(1866)와 존 버로스의 〈시인이자 개인으로서 월트 휘트먼에 관한 해설 Notes on Walt Whitman as Poet and Person〉(1867)에 이어 1868년 영국의 문인 윌리엄 마이클 로제티가 휘트먼의 시를 일부 삭제해 영국판을 만들어냈다.


앨저넌 스윈번이 1868년 그를 칭찬했으며 1870년 시 1편을 써서 보냈다. 아일랜드에서는 화가 존 버틀러 예이츠와 비평가 에드워드 다우든이 휘트먼을 강하게 지지했다.

〈민주주의 전망〉을 끝마친 뒤 휘트먼은 3가지 사건, 즉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고 유타 주에서 유니언 퍼시픽 철도와 센트럴 퍼시픽 철도가 접속되고, 대서양 횡단 해저전신이 부설된 것을 기념하여 〈인도로 가는 길 Passage to India〉을 썼다.


이 시는 미국 밖의 문제들도 다루었으며, 건강뿐만 아니라 죽음과 내세에 관한 문제들도 다루었다. 1872년 휘트먼은 동성애 소문과 관련된 오랫동안의 정신적 긴장으로 병에 걸렸으며, 1873년 1월 발작으로 몸의 일부가 마비되었다. 그해 5월 뉴저지 캠던에 있는 동생 집으로 여행을 할 만큼 충분하게 건강을 회복했을 때는 어머니가 그곳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어머니가 죽자 그는 그것을 자기 생애의 '커다란 암운'으로 여겼다. 그는 동생과 함께 살면서 근근이 생계를 이어나갔다.


1876년 그는 생애의 또다른 전환점을 맞이했다.


병든데다 〈웨스트 저지 프레스 West Jersey Press〉에 실린 기사가 불러일으킨 그의 작품에 대한 젊은 미국 평론가들의 공격에 의기소침해 있던 그는, 특히 영국의 숭배자들이 콜로라도 주에서 출간한 2권짜리 작품집을 높이 평가하자 크게 고무되었다. 1876년 봄 그는 친구인 해리 스태퍼드의 농장에 머물면서 천천히 중풍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시작했다. 그는 점점 운동을 늘려갔으며, 수영과 일광욕을 즐기고 스태퍼드에게서 피터 도일이 떠나면서 남겨 놓은 빈 틈을 메울 수 있었다.


캐나다인으로서 그를 숭배한 R. M. 버크와도 친밀한 우정을 나누었는데, 이 사람은 뒤에 이 시인에 관한 최초의 우수한 전기를 썼다. 1879년경에는 서부지방을 방문할 수 있을 정도로 건강이 충분히 회복되었다. 1881년 제임스 R. 오즈굿이 보스턴에서 〈풀잎〉의 재판을 출간했는데, '악습 폐지 협회'에서 이 작품이 부도덕하다고 주장했다.

오즈굿은 기소 위협을 당하자 휘트먼에게 이 작품의 판을 넘겨주었으며, 그는 직접 이 작품을 출간하다가 필라델피아의 새로운 출판업자 리즈 웰시에게 넘겨주었는데, 그것은 그뒤 곧 데이비드 매케이에게 넘어갔다. 〈풀잎〉은 그뒤 계속 그러한 형태로 출간되었다. 필라델피아판이 잘 팔려 휘트먼은 1884년 캠던에 집 1채를 살 수 있었다.

말년

휘트먼은 그가 좋아하는 강나루터 근처의 캠던에서 생애의 말년을 보냈다.


1885년 일사병에 걸린 뒤 친구들은 그가 몰고 다닐 수 있도록 말 1마리가 끄는 사륜마차를 사주었다. 새로운 친구들을 많이 사귀었는데, 그들 중 특히 호레이스 트로벨은 그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1888년 그가 또다시 중풍을 일으켜 몸이 마비되자 그에게 재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휘트먼은 트로벨을 보스웰 같은 전기작가로 여겨 그의 전기에 관한 트로벨의 작품을 매우 꼼꼼하게 준비했다. 그는 이제 조용하고 안정된 생활을 누렸다.


그는 62편의 새로운 시를 써서 〈11월의 나뭇가지들 November Boughs〉에 실었는데, 이 시집은 〈걸어온 길에 대한 회상 A Backward Glance o'er Travel'd Roads〉이라는 제목의 서문과 함께 1888년에 출간되었다. 바로 그해에 〈시와 산문 전집 Complete Poems and Prose〉과 〈풀잎〉의 8번째 판이 출간되었으며, 곧 이어 휘트먼이 1891년에 작업한 '임종판'이 출간되었다.


그 자신의 말대로 '마지막 순간까지 수다스러웠던' 휘트먼은 집필과 수정을 계속했다. 〈인도로 가는 길〉을 완성한 뒤 좀더 죽음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으며, 끊임없이 경이로운 마음으로 가득 차서 시골의 아름다움과 도시의 복잡성에 대한 예전의 명상을 글로 표현했다. 〈콜럼버스의 기도 Prayer of Columbus〉에서는 죽음에 가까이 가면서 우수에 잠긴 '찌들고 망가진 늙은이'의 심정을 전달했지만, 〈할시온의 날들 Halcyon Days〉이나 〈거만하게 밀려오는 홍수 Proudly the Flood Comes In〉에서는 여전히 쾌활하게 쓸 수 있었다.

평가

그의 명성은 계속 높아졌다.

조지 세인츠베리, 해블록 엘리스, 존 애딩턴 시먼즈 등은 휘트먼에게 찬사를 보냈다. 특히 시먼즈는 〈휘트먼에 관한 연구 Whitman:A Study〉(1893)를 썼는데, 이 책은 미국에서 휘트먼에 대한 찬사 중 비교적 객관적인 글이었다. 19세기 후반에 그의 시들은 특히 영국의 독자들(대부분 영국 사회를 비판했고, 평범한 사람들을 옹호한 휘트먼의 입장이 이상적이고 예언적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들)에게 강한 매력을 주었다.


휘트먼의 목적은 전통적인 서사시를 초월하고 평범한 미적 형태를 피하면서도 미국 사회를 반영함으로써 자신과 그의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들과 미국적인 경험의 본질을 깨닫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에즈라 파운드는 휘트먼의 출발점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목적에 공감했다. 다른 시인들, 즉 하트 크레인, 윌리엄 칼로스 윌리엄스, 월리스 스티븐스, 앨런 긴즈버그도 그의 길을 따랐다. 그들은 대중문화의 압력 속에서 개인의 성실을 지키는 문제에 몰두한 휘트먼에 공감했다. 이 문제는 〈집단 En-Masse〉과 관련된 휘트먼의 〈자아 one's Self〉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우회적이면서도 자연스럽고자 했다.


그는 언어의 원기를 북돋았으며 강렬하면서도 감상적일 수 있었으며, 넓은 시야와 창의성을 가지고 있었다.


독자에게 감동을 주려는 그의 두드러진 목적과 미국의 발전에 대한 상세한 견해가 예이츠와 엘리엇의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주로 '미국의 더없는 발전'이 숭고하고 영웅적인 것이 될 것이라는 설득력 있는 주장을 내놓고 그와 동시에 '문학적이거나 시적인 형태의 표현을 충실하게 나타낼' 수 있었으며 또한 겉으로는 결코 자신의 개성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계속 여러 세대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솔직하고 포용력이 큰 감각과 충분한 보편타당성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위대한 미국 시인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었다.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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