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7일
우리들은 지나간 일을 생각하고는 괴로워한다. 그리고 장차 닥쳐올 일을 생각하고는 제 자신을 상하게 한다.
그것은 다만 우리들이 현제를 경시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과거도 미래도 다 하나의 꿈이다. 현제만이 실제인 것이다.
1
현제에 대해서 주의 깊게 하라. 현제의 모든 상태 모든 시간은 무한히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 자체에 있어서 영원성을 갖고 있는 것이다.
2
가장 일반적인 착오는, 현제는 비평적이며 그리고 결정적인 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그날그날이 일평생을 통해서 가장 좋은 날이라 는 것을 마음속 깊이 새겨 두라. <에머슨>
3
우리들이 현제 하고 있는 일 이외의 것은 모두가 중요한 것이 못되는 것이다.
4
자기와 동시대의 사람을 모두 가 존경하라. 그리고 『옛날의 조상이 한층 더 위대하였다는 말을 하지 말라. <타르무우트>
5
오늘 자기의 육체를 이용하라. 내일이 오면 없어져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에 <타르무우트>
6
그대가 할 일을 하고 있는가 어떤가 하는 그것이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대의 생활의 유일한 의의란, 그대가 주어진 이 짧은 생화 속에 있어서 그대를 이 세상에 보내어 준 신의 원하는 바를 행하고 있는가 아닌가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과거의 기억 때문에 마음 아파하며, 또 미래에 일어날 일을 생각하고 괴로워 할 때, 생활이란 오직 현제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대가 현제 생활에 전력을 기울일 때 과거의 괴로움도 미래의 불안도 다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리고 그대는 자유를 맛보며 기쁨을 느낄 것이다.
◆ 사랑의 요구
이러한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남자라도 좋고 여자라도 좋으며, 혹은 남편이라도 좋고 아내라도 좋으며, 현제 자매, 부자, 모녀라도 좋다.
이러한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즉 자기네들이 부자유계급에 속해 있고, 매일매일 근로로 쇠잔한 사람들 틈에서, 사치스럽고 게으른 생활을 보낸다는 것이 죄악이라고 똑똑히 인식하고 도회지를 떠나서 필요외의 모든 여분의 것을 다른 사라들에게 나누어 주고, 근소한 생활비만 남겨두고, 무슨 기술적인 일에 종사하는 사람들, 예를 들자면 도깨비 그릇의 밑바탕에 그림을 그린다든가, 좋은 책을 번역한다든가 하면서 러시아적인 벽촌에 들어가서 자기 손으로 오막살이를 짓고 과수원을 만들고 꿀벌을 기르며 그와 동시에 자기가 알고 있는 한계내의 위생 생활을 시골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며, 어린 아이들을 교육하고, 편지도 써주고 청원서도 써주는 사람들을 상상해 보라.
이러한 생활 보다 더 좋은 생활이 어디 잇는가. 그러나 이 사람들이 도회나 금전이 부여해 준, 모든 장식적인 생활이나 이득을 물리쳤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이, 모든 인간ㅇ은 하느님의 이름 앞에는 동포요 형제이며 평등하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그의 재산, 신분에 있어서 불평등 하여서는 안되며, 생활에 대한 권리 그리고 말하자면 생활이 부여해 줄 수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평등하다는 것을 의식한데 지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우리들이 각기 다른 과거를 가지고 성장한 사람들을 봄으로써, 그 평등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긴다면 어린이들을 보라. 그 의심은 소멸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왜 어린이들이 어느 아니는, 여러 모로 시중들어 주는 사람을 가겼으며, 또 육체적 정신적인 발달을 얻기 위해서 여러 가지 지식의 힘을 힘입을 수 있는데 다른 똑 같이 귀여운 어린이들은 다 같은 보장 밑에서 태어나면서도 꼽추가 되고, 병신이 되고 젖이 모자라서 영양 부족이 되고, 그리고 미개한 미신을 믿고, 다만 마소와 같은 노동력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일까.
그러나 만일 앞서 말한 사람들이 도회지를 떠나서 시골에 잇는 사람들과 같은 생활을 시골에서 보낸다면, 이 사람들은 모든 인간이 현제라는 것을 언어상으로가 아니라 행위로써 믿고 져 하였던 것이다. 인류의 평등이 아직 실현되지 못하였다면 그것을 자기네의 생활 안에서나마 실현 시켜보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키고 져 하는 시도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그 시도가 참된 것이라면, 아마 무서운 그리고 빠져 날 수 없는 상태에 도입되고 말 것이 분명하다.
그 사람들은 어릴 적부터 질서 정연하고, 아늑하고 깨끗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면 시골에 자시 손으로 오막살이를 짓고 살게 되더라도, 아마 사는 집에서 벌레들을 없애고, 벽을 도배하고 사치는 아니라도 필요한 정도의 세간의 나머지를 가져 와서 쓸 것이다. 예를 들자면 쇠로된 침대 책상, 옷장 같은 것들을.
처음 시골 사람들은 그 사람들과 가까이 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람들이 보통 이른바 부자라는 사람들처럼, 재산의 힘으로 울타리를 가난한 사람들과의 구을 만들어 놓고 있으리라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부탁한 일이나 요구할 일들을 가져 오지 않으며, 친해져 보려고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새로운 거주자들의 기분을 조금씩 이해하게 되자. 마을 사람들 중의 가장 용감하고 사교성이 많은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일을 알아보고 시험해 보아서, 이 새로운 거주자들이 자기네와 똑 같은 생활을 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을뿐더러, 도리어 그러한 생화를 하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하게 되자 여러 가지 청을 해오기 시작한다. 그리고 차츰 그 수는 늘어간다.
그것은 단순한 구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자기네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을 나누어 달라는 요구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한 요구는 아니다. 시골에 살기 시작한 사람들 자신이, 촌사람들과 일상 교제하는 동안에, 주위에는 심한 결핍이 존재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자기네들의 아직 여분의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물품을 전부 나누어 주는 것은 불가피한 일이라고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서 그치지는 않는다. 모든 사람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이 자기네들에게는 아직 여분의 것으로 남아 있는 동안은 그것을 나누어 주어야 한다고 그럴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될 것에는, 한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주위에 항상 심한 결핍만이 있으니까 말이다.
그리해서 이 새로운 거주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네의 손에 있는 것, 새로 입수 되는 것, 그 전부를 나누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자기네의 집에도, 우유를 받아둘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마르레노의 집에서는 어린아이가 둘 있으며, 하나는 아직 젖먹이 인데도 애어머니는 젖이 안 나온다 하자. 또한 아이는 아직 두 살밖에 안되었으며 심한 영양부족이다.
그리고 또 매일 매일의 노동에 피곤한 몸을 쉬기 위해서 베개나 이불이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집에서는 환자가 이가 들 끊는 저고리를 입고 홑이불만 덥고, 밤새 추위에 얼어 떨고 잇다.
자기들도 상다한 양의 음식물이 필요하다. 그러나 쇠약하고 늙은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 될 수 있는 한, 집안을 청결하게 해 두고 싶다. 그러나 이런 거지가 와서 재워 주면 이가 이불에 옮는다.
이리하여 그칠 수 없는 것이다. 대체 어디가지가면 그칠 수가 잇는가.
그 사람이 그것을 느끼고 시골에 옮아 살게 된바 동포에의 의식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허위와 진실과의 구별을 인정하지 못하는 듯이 예사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만이, 그 칠 수 있는 한계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에는 한계는 있을 수가 없는 것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이러한 일을 하게 만드는 감정에는, 한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에 거기 그칠 수 있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면 그 감정은 허위였던 것이다.
자, 다시 그 사람들의 일을 생각해 보기로 하자. 그 사람들은 하루 종일 일을 하고 피곤한 몸으로 집에 와보면 이불도 없고 베게도 없다. 그래서 짚을 펴고 그 속에서 잔다. 빵을 먹고 잔다.
가을에는 진눈깨비가 퍼붓는다. 누가 문을 두들긴다. 열지 않고 있을 수가 있겠느냐, 흠뻑 젖은 사람이 몸을 좀 녹이게 해 달라고 들어선다. 그러면 어찌 하겠느냐. 마른 짚속에 제워 주어야 한다. 그러나 마른 짚은 없는 것이다. 자기가 자는 것 외에는.
그러면 이 사람을 내 쫒는가, 혹은 젖은 채로 마룻바닥에 재우는가, 그렇지 않으면 자기 잠자리에 누이고 자기도 자야할 터이니 이 사람과 함께 자든가, 이 세 가지 중 어느 것을 택해야 한다.
그러나 아직 이런 것은 문제도 아니다. 가령 주정뱅이며 건달로 유명한 사나이가, 이때 턱을 떨면서 들어온다. 이 사나이는 두서번번 도움 받은 적이 있었으니 그럴 적마다 받은 돈으로 술을 다 마셔버렸다.
그런데 또 삼루불만 도와달라고 말한다. 그 돈을 어디서 훔쳐서, 그 돈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징역살이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돈은 삼루불 밖에 없으며 그것도 내일 아침거리를 사야할 돈이다. 그러면 그 사나이는 말할 것이다.
『그렇습니까. 그것은 재판관의 판결과 한가지군요. 당신은 다른 놈들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 인간이로군. 말로는 동포니 형제니 하면서 사람하난 죽어 가는 걸 태연히 내버려 두지 않소. 다 같은 사람이니 평등하니 하고 큰 소리는 치고 있으면서』
이런 경우는 어떻게 해야 옳을 것인가. 참으로 어찌하면 좋은가. 열병환자를 마룻바닥에 채우고, 자기는 마른 짚자리 속에서 잔다는 것은 안 될 말이다. 그렇게 하면 마음 놓고 잘 수가 없다. 그러나 그 환자를 자기 자리에 들어오게 하여 함께 잔다면, 이가 옮고, 또 열병도 옮을 것이다.
또 그 주정뱅이에게 잇는 돈을 털어서 삼루 불을 주고 나면, 내일은 빵을 살 수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렇다고 주지 않는다는 것은, 그 사나의 말대로 자기가 그것에 의해서 생존하고 있는바 신조를 버리고 마는 것을 의미한다.
이 한계에서 그치는 것이라면, 왜 그 이전의 한계에서 그치지 않았던가. 어찌 사람들을 돕고 져 여태껏 애써 왔는가. 어찌해서 지난날의 환경을 버리고, 도회지에서 빠져나왔는가. 어데 한계가 잇는 것이야.
당신네들이 하고 있는 일에 한계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체의 의의를 상실하는 것이다.
영혼은 다만 무서운 기만이라는 한 가지 의의만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면 어찌되는 것이야. 어떻게 할 것이냐. 여기서 그치지 않는 것은ㅡ자신의 생활을 망치고 굶주리고 열병에 걸려서 뜻 없이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여기서 그쳐버린다는 것은, 여태껏 선한 일을 한다는 의식으로 해오던 신조에서 이탈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신조에서 이탈할 수는 없다. 그 이유는 우리들은 모두 동포심이며, 서로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요. 일단 이 가르침이 사람의 가슴 속에 박힌 이상은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찌할 것인가. 무슨 빠져날 도리는 없는가.
그리고 또 다음과 같은 경우를 생가해 보라. 그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해서 자기가 죽는 것조차 피하지 못할 상태가 이른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러나 이러한 상태에 도달한 것은 자기가 사람들을 원조하기 위해서 준비해 둔 돈이 너무나도 적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해 보자.
그리고 그 사람들은 더 많은 돈을 준비해 두었더라면 이런 일도 없이 더 많은 사람들을 도와 줄 수 있었으리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그 때문에 많은 예비금을 준비하고 막대한 돈을 끌어 모아서 다시 사람들을 돕기 시작했다고 생각해 보라. 그리고 불과 일주일도 안되어 같은 결과가 생겼다고 생각해 보라.
아무리 거액의 돈이라도 빈곤이란 것의 밑창 없는 깊이에 대해서는 곧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전과 같은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과 같은 빠져날 방도를 생각해 낼지도 모른다. 다만 사람들의 교육 사업만 발달하면 이러한 불평들은 제거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은 분명히 허위이다. 시시각각으로 굶주림 때문에 죽어가는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 교육 할 수 있는가. 이러한 방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님이 분명하다.
설사 과학에서 말하는 바와 같은 방법으로, 평등을 실현시키고자 하는 사람도 말로만 떠들고 자기의 생활만은 전혀 별도로 취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 다음과 같은 빠져나갈 길이 있다.
그것은 불평등을 초래하게 되는 원인을 없이 하기 위해서는 외부에 있는 폭압을 제거하는 그 방법이다.
그러나 이 방법도 자기 자신의 생활에 있어서 동포에의 의식을 실현시키고자 하던 것이며, 진실한 사람들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방법도 못된다. 이와 같은 방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만일 우리들이 이 시골 사람들 틈에서 생활할 수 없으며 굶주리고 열병에 전염되고 해서 차츰 죽어가야 한다면 혹은 우리들의 단 하나의 도덕적 기초인 신조로부터 떠나야 한다면ㅡ그것은 어떤 사람은 부유하게 지내고 있는데, 어떤 이는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 원인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불평등도 이 폭압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 모든 근원은 이 폭압에 있는 것이므로 우선 이 폭압과 싸울 필요가 있다고.
그러나 그 폭압의 그것에 의해서 생겨나는 예속을 없이 하기에는 자신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정도의 남을 위한 봉사가 있어야만 그것은 가능한 것이다.
어떠한 방법으로 이 폭압을 없이 하는가, 폭압은 어디나 존재해 있다.
어떻게 해서 그 폭압과 싸울 것인가.
어디서 그리고 무엇으로?
그리고 그 폭압 속에 생존하면서 폭압에 대항함에 폭압으로서 하는 사람들ㅇ은 어떻게 싸우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진실한 사람에게는,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폭압에 대항해서 폭압으로써 한다는 것은 낡은 터전에 새로운 폭압을 수립함을 원하는데 지나지 않는다. 또 폭압에 기초를 둔 교육에 의해서 폭압을 제거해 간다는 것도 같은 의미 밖에 되지 않는다.
폭압에 의해서 긁어모은 돈으로, 폭압 밑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호하는데 쓴다는 것도 폭압에 의해서 생긴 상처로 폭압으로 치료하려는 것을 의미함에 불과하다.
만일 폭압으로써 하는 것이 아니라, 무저항의 가르침으로써 그 폭압에 대한 폭로로써 싸우고 특히 주로 무저항과 희생의 모범을 보임으로서 싸우는 것이라면 폭압 속에서 생활하면서도 그리스도교적 정신에 의한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는 희생 이외의 방도는 없는 것이다. 종국까지의 희생ㅡ이 이외의 방법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심연 속에 있으면서도 그래도 싸워보겠다는 투지를 자신에게서 발견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자신에게서 의식된 하나님의 법칙을 성취하는 것을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사람은 자기가해야 할 의무에 대해서는 모른 체하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의 요구에 어디까지나 응해 나가려고 원하면서도 이러한 희생을 하지 못하는 사람 자기의 전 생명을 내어 던져 주지도 못하며, 그러면서도 자신을 기만하지도 않고 있을 수 있는 사람ㅡ 이와 같은 사람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고, 깊이 생각해서 입을 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종국적 희생이란 얼마나 무서운 것으로 보이는 것이야. 그러나 결핍의 밑바닥이라는 것은, 우리들에게 결실만 있으면 결코 견디기에 그토록 깊은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따금ㅡ 자기가 빠진 우물이 깊은 것이라고 상상하고 무서움에서 밤새도록 두 손으로 매여 달려서 바닥까지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는 어린애의 꿈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 아이이의 발밑에 불과 한자도 안 떨어진 곳에 우물 바닥이 그것도 물도 없는 마른 바닥이 잇을 뿐이었음을 몰랐던 것이다. <레프 톨스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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