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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시

낭만적 노동자 / 손순미

by 바닷가소나무 2014. 11. 29.

 

 

  

낭만적 노동자 / 손순미

 

나는 매우 바쁘다 공원 귀퉁이에서 바람을 감상하는 일을 주로 맡고 있다 대낮에 밴치를 다 차지하기에 좀 미안한 일지지만 뭐 그쯤은 이해받고 싶다. 구름이 몰려오는 것 꽃과 풀이 자라는 것 새와 나비가 날아오는 것을 구경한다. 이건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나의 일과는 매우 바쁘다 노을이 지는 것과 자전거를 타는 아이들과 쌈박질을 하는 자들과 주린 배를 움켜쥐는 사람들을 지켜봐야 한다  나는 이 공원에서의 일을 자주 체크한다 이만한 노동이 또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이 공원의 전문가다 내가 빈둥거린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너무 바쁘고 나도 너무 바쁘다

 

찔레꽃은 피고 / 신경림

 

이웃 가게들이 다 불을 끄고 문을 닫고 난 뒤까지도 그애

는 책을 읽거나 수를 놓으면서 점방에 앉아 있었다. 내가

멀리서 바라보며 서 있는 학교 마당가에는 하얀 찔레꽃이

피어 있었다. 찔레꽃 향기는 그애한테서 바람을 타고 길을

건넜다.

 

꽃이 지고 찔레가 여물고 빨간 열매가 맺히기 전에 전쟁

이 나고 그애네 가게는 문이 닫혔다. 그애가 간 곳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오랫동안 그애를 찾아 헤매었나보다. 그리고 언제부턴가

그애가 보이기 시작했다. 강나루 분교에서, 아이들 앞에서

날렵하게 몸을 날리는 그애가 보였다. 산골읍 우체국에서,

두꺼운 봉투에 우표를 붙이는 그애가 보였다. 활석 강산 뙤

약볕 아래서, 힘겹게 돌을 깨는 그애가 보였다. 서울의 뒷골

목에서, 항구의 술집에서, 읍내의 건어물점에서, 그애를 거

듭 보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엄마가 되어 있는,

머니가 되어 있는,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있는 그애를 보

면서 세월은 가고, 나는 늙었다

하얀 찔레꽃은 피고,

또 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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